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28화 (28/70)

28. 야로의 선택2016.06.05.

야로는 이무기가 되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천년호에 있던 시절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소년의 첫 기억은 소룡전의 방 안이었다.

첫 탈피 이전의 이무기는 인간으로 치면 서너 살에 불과한 유아다. 이때에는 딱히 교육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어리기 때문에 다른 이무기들과는 생활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비슷한 동기들과 몰려다니며 뒹굴고 놀았다. 나이가 있는 다른 이무기들이 공부하거나 훈련하는 것을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다 여울을 처음 보았다.

그는 지금의 야로만 한 아이였다. 인간 기준으로는 열두엇 정도 될 소년이 그리는 검의 선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였다.

야로는 그의 단정함이나 서늘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의 검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렇게 몇 번 몰래 훔쳐보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여울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있었다.

그 당시 탈피 이전의 이무기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건 희나리였다. 곧 탈피를 할 예정이었던 그녀가 여울에 대해 알려 주었다.

야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헤, 입을 벌렸다.

야로가 중얼거린 말에 희나리가 조그만 손으로 그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첫 탈피를 하고 다른 이무기들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여울은 여전히 혼자 다녔다. 이무기들은 여울을 따돌리거나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이해하지도 못했다.

소년은 그를 선망했다. 그가 특별해 보였다.

야로는 열심히 여울을 숨어서 따라다녔다. 은근슬쩍 그가 검을 휘두르는 걸 흉내 내기도 했다.

숨는다고 숨었지만 다 보이는 짓이었다. 그래서 첫 탈피를 하자마자 야로가 그에게 달려갔을 때, 여울은 놀라지 않았다.

첫 탈피를 한 야로는 인간 아이로 치환하자면 일곱 살 정도로 보였다. 여울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 제게 엉겨붙는 조그만 야로를 보다가 뒷말을 삼키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야로는 그가 제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좋아서 바보처럼 웃었다.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가 뒷말을 삼킨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야로는 검에 소질이 없었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여울은 야로가 몰래 제 흉내를 내는 모양새를 보고 진작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실망한 것은 잠시였다. 야로는 곧 주술에 흥미를 붙였다.

여울이 주술에 서툴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열심히 주술을 익혔다. 그 앞에서 조잡한 주술을 선보이며 으스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짓이었다. 그가 아무리 주술에 능하지 않아도 그때의 야로보다는 훨씬 잘했다. 그런데도 그는 야로를 비웃은 적이 없었다. 늘 귀찮게 치대곤 했는데 한 번도 야로를 밀쳐 내지 않았다.

야로는 보통 이무기들과 다른 것을 생각하던 그를 동경했다. 그는 특이하면서도 탁월했다. 소년은 그처럼 되고 싶었다.

야로가 두 번째 탈피를 했을 무렵, 여울은 교룡이 되어 떠났다. 그는 떠나고 나서 한 번도 소룡전에 돌아오지 않았다. 섭섭했다.

소년은 그처럼 교룡이 되고 싶었다. 5년 후에 화련공주가 아직 어린 그를 교룡으로 선택했을 때 뛸 듯이 기뻤던 이유 중에는 그런 마음도 있었다.

그가 마니의 교룡인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선택받은 게 아니라 제가 나선 거니까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홀로 다른 것을 꿈꾸던 때처럼, 여울이 마니식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마니가 죽어도 여울은 여전히 교룡이다. 소룡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다른 이무기들과 달리 자유롭다. 주인이 죽고 나서 여울이 궐에 머물 곳이 없으면 제 거처에서 같이 있자고 할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그 여울이 마니를 데리고 도망치리라고는. 야로가 아는 여울은 그런 짓을 할 자가 아니었다.

희나리가 소리쳤던 것이 떠오른다.

온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야로는 품 안에 손을 넣어 검은 비단 머리띠를 꺼냈다. 교룡들이 제 신분을 증명하는 띠였다. 소년은 뒷면에 수놓아진 화련이란 글자를 엄지로 문질렀다.

새침하게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모른 척 간식거리를 내밀던 자신의 보주를 떠올렸다. 화련공주 유리서혜. 처음 봤을 때는 야로보다 작았던 소녀.

화련공주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야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이무기인 자신의 손이 그 체온에 옮아 따뜻해지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에게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그녀는 야로의 주인이자, 야로의 보주였다.

여울은 11년이나 보주 곁을 떠나 있었다. 야로는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화련공주 곁을 떠나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화련공주가 소중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일을 해낸 여울은, 그 마니가 소중하지 않을 것이다.

여울과 그녀 중에서 고르라면 야로는 결국 화련공주를 고를 것이다. 자신의 보주이므로.

그러나 마니를 내버려 뒀던 여울은 다를 터다.

그는 반듯하니까, 주인의 명을 차마 거부할 수 없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닐까.

그가 원해서 이런 일을 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야로는 여울과 싸우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온의 말대로 야로가 무슨 짓을 하든, 화련공주가 안전하다면.

교룡의 띠를 도로 집어넣은 야로는 돌돌 말아 둔 천 뭉치를 꺼냈다. 여울의 혈흔을 챙길 때 발견했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홍평에 들렀을 때 준비를 해 왔다.

되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정 안 될 것 같다면 이것을 쓸 작정이었다. 소년은 우울하게 천에 감싸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반동이 심하겠지……. 그래도.”

마니는 생포를 우선한다. 허나 피치 못할 경우엔 죽여도 된다.

희나리가 전해 주었던 세자의 명령이었다. 야로는 품에 넣어 둔 느루의 비늘을 떠올렸다. 마니가 살아 있으면 여울은 계속 위험한, 그 답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터다.

내가 이걸 쓰면 그가 화를 내겠지. 그래도, 여울은 마니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원래대로라면 여울이 이럴 리가 없는걸. 어쩌면 누군가가 마니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어린 이무기는 그리 생각했다.

*

건평 21년 10월 4일.

“저, 저, 저기에!”

“놓치지 마라!”

“폭죽은?”

“준비되었습니다!”

웅성대던 병사들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폭죽이 쏘아 올려졌다. 작은 폭음과 함께 짧은 빛이 피었다 사라졌다.

“또야?”

먼 곳에서 불빛을 본 희나리가 이를 갈았다.

교룡들이 있는 곳은 결계의 중심부이자 호류산의 주봉인 오계봉이었다. 폭죽이 보인 곳은 서쪽에 있는 봉우리 중턱이었다.

“가?”

“가지 마라. 어차피 가면 또 사라지고 없겠지.”

온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추적술사가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온은 고개를 저었다.

“추적술도 쓰지 마라. 아껴야 한다.”

“예에.”

“계속 이럴 수는 없잖아. 시간만 낭비하는 꼴인데.”

희나리가 폭죽이 쏘아 올린 곳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흘째였다. 결계 내부를 수색하던 병사들이 여울을 발견하고 신호를 보내고, 교룡들이 쫓아가면 여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추적술을 두 번 썼으나 여울이 도무지 한곳에 머무르질 않아서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여울은 다섯 번 발견되었고 쉰아홉 명의 병사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그가 교룡들과 마주친 건 한 번.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검을 몇 차례 맞대기도 전에 사라져 버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작정하고 달아나는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마니를 어디 숨기고 혼자 돌아다니는 거지?”

“이 산중 어딘가에 있는 건 틀림없어. 수색을 계속하면 결국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그 수색이 지지부진하잖아!”

여울이 교룡들을 피해 병사들만 휘젓고 사라지니 수색이 느려졌다.

죽이진 않았으나 불구로 만드는 것은 마다하지 않아 병사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 엉뚱한 그림자를 보고 폭죽을 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골머리를 앓는 동안 야로는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 곁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던 추적술사가 말을 걸었다.

“저, 교룡님들.”

“왜?”

희나리가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찔끔한 추적술사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바쳤다.

“이것 좀 보시옵소서.”

결계 범위 내를 그린 지도였다. 붉은 표가 여섯 개 늘어서 있었다. 하나는 막 표기한 듯 물감이 마르지 않았다.

“뭐야, 여울 나타난 곳을 표시한 거야?”

“잠깐.”

희나리가 들여다보던 지도를 온이 받아 들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표가 된 곳들을 훑었다.

“학운산?”

“응?”

“여울이 워낙 여기저기 나타나긴 했는데, 학운산 쪽은 한 번도 안 나타났다. 그리고 그동안 나타났던 곳들을 이어 보면…….”

“거리는 들쭉날쭉한데, 어?”

희나리가 바싹 붙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붉은 표시는 다각형을 그리며 흩뿌려져 있었지만 멀리 놓고 보니 중심에 학운산의 세 봉우리 중 하나인 망월봉이 눈에 띄었다.

추적술사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래도 망월봉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온지…….”

“당장 병사들을 모아. 학운산부터 샅샅이 수색하자.”

희나리가 창을 집어 들었다. 온 역시 일어나며 야로를 불렀다.

“야로, 가자.”

“어? 응.”

소년의 얼굴이 퀭했다. 희나리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너 어디 아파?”

야로는 손사래를 치며 일어났다.

“아냐. 그냥 좀.”

“너…….”

무어라 지적하려던 희나리는 입을 다물었다. 온이 눈짓했다. 내버려 두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병사들이 모이려면 시간이 좀 걸렸다. 교룡들은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이동했다.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려 학운산 망월봉으로 향했다. 추적술사는 온이 짐짝처럼 옆구리에 낀 채였다.

달리던 와중에 희나리가 돌연 멈췄다. 그녀가 손짓하며 수풀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 봐, 사람이 지나갔어. 며칠 된 거 같아.”

“가지를 일부러 꺾었군. 수풀도 다듬었고.”

“심마니나 사냥꾼이려나.”

“그런 것치곤 일부러 길을 다듬은 것 같지 않나? 걷기 편하도록 말이다.”

“하긴, 원래 산을 돌아다니는 이들이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가 없겠네. 그럼 역시?”

“술사, 추적술을 써 봐라.”

온이 한쪽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추적술사를 돌아보았다. 그의 명령에 추적술사가 엉거주춤 일어나 주머니를 펼쳤다. 왼손 위에 주머니를 올린 추적술사는 오른손으로 수인을 맺더니 주문을 외웠다.

주머니 속에서 흔들림이 일더니 핏방울이 허공에 두엇 떠올랐다. 교룡들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었다.

핏방울들은 무언가에 잡아당겨지듯 한쪽으로 날아가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서 검은 것이 튀어나왔다.

“큭!”

“온!”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검집에서 반쯤 빼낸 검으로 간신히 공격을 막은 온이 형편없이 뒤로 밀려났다.

희나리가 창을 손 안에서 한 바퀴 휙 돌려 고쳐 쥐었다. 기가 실린 창이 엄청난 속도로 내질러졌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 창을 피해 뒤로 물러난 그림자가 햇빛 아래에 얼굴을 드러냈다. 무표정한 여울이, 검을 비스듬히 든 채 서 있었다.

“어제 보고 또 보네, 여울.”

희나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우리, 피차 소모적인 짓은 그만두는 게 어때? 너도 알잖아. 아무리 발악해도 결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너흰 도망 못 가. 이거 다 시간 낭비라고.”

여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사이 몸을 추스른 온은 말없이 여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울은 몸을 트는 것으로 간단히 그 공격을 흘려버렸다.

그를 지나쳐 버린 온은 나무에 충돌할 뻔했다. 그는 기둥을 걷어차며 겨우 부딪치는 것을 면했다. 애꿎은 나무가 검풍에 휘말려 흔들렸다.

죽어 가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물든 단풍이 비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온의 검을 피하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 희나리가 바로 그 자리에 창을 찔렀다. 피하기엔 늦었다. 여울은 그 창날을 검으로 쳐냈다.

정확하게 창날의 끝을 치는 바람에 반동으로 창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그 탓에 창을 놓칠 뻔한 희나리가 인상을 썼다.

그녀는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뛰어올랐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방향을 틀어 아래를 향해 창을 내리찍었다.

자세를 바로잡은 온 또한 한 걸음 내디디며 그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둘의 가볍고 빠른 움직임에 비해 여울은 그다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반 보를 물러선 후 상체를 비틀고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을 뿐이다.

그 결과로 희나리의 창은 여울의 머리카락만을 스치며 온의 검과 부딪치고 말았다. 동시에 여울의 검이 온의 가슴을 베었다.

온은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으나 옷깃이 길게 베이는 것은 막지 못했다.

온의 검과 희나리의 창이 부딪치며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양쪽 모두 무기에 기를 싣는 게 당연한 경지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땅에 서 있던 온과 달리 공중에 떠 있던 희나리가 상대적으로 여파가 심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붕 뜬 그녀의 뒷덜미를 여울이 잡아채어 바닥에 메다꽂았다.

잔뜩 쌓여 있던 낙엽이 그 기세에 휘말려 공중에 흩뿌려졌다. 내팽개쳐진 충격에 희나리는 “컥”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짧은 격돌이었다. 간단하게 두 교룡을 흔든 여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 했다. 시간을 끌고 수색을 방해하는 게 목적인 그는 길게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런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추적술사는 그사이 달아나 뒤쪽에 웅크린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거기 서.”

돌아서는 여울의 앞에 이질적인 기가 모여들었다. 그것을 감지한 여울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펑. 갑작스레 타오른 불이 작은 폭발을 일으키고 사그러들었다.

“또 달아나려고? 시간 끌려는 거 다 알아.”

야로가 손을 뻗고 있었다. 야로와 여울의 눈이 아주 잠시 마주쳤다. 소년은 여울이 처음 보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니, 어디 있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울은 소년을 무시하고 움직였다. 온이 여울을 가로막았다.

그들이 다시 검을 맞대는 사이 야로는 망설였다. 희나리가 창을 휘두르며 끼어들었다.

몇 차례의 파공음이 울렸다. 희나리의 자세가 휘청 무너졌고 온이 비틀거렸다. 여울은 다시 빠져나가려 했다.

야로는 이를 악물고 품에 손을 넣었다. 둘둘 말려 있던 천을 풀어 내던지고 안에 있던 것을 꺼냈다.

소년이 꺼낸 것은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손바닥만 한 인형이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계집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보였다.

제웅이라 불리는 액막이용 짚 인형이었다.

액막이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은 반대로 저주를 보내는 데도 쓰일 수 있다. 낙엽투성이가 되어 몸을 일으킨 희나리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너, 그거!”

“여울. 이걸 봐.”

야로는 희나리를 무시하고 여울을 향해 말했다. 온의 검을 빗겨 쳐낸 여울이 야로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야로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로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저주할 때 쓰는 가장 보편적이고 간단한 주술이 저것이었다.

머리카락 등의 신체 일부나 사주를 적은 종이를 사람 형상의 짚 인형 안에 넣는다. 수탉의 시체 같은 것을 제물로 삼아 그 피를 사용하여 인형을 해침으로써 대상자에게 살을 쏘아 보낸다.

그 결과는 주술사의 능력이나 제물에 따라 사소한 병에서부터 치명적인 상처까지 가능했다. 물론, 상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야로는 제웅이 잘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이 안에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어.”

겉으로 보기에 여울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눈썹 하나도 까닥이지 않았다.

그러나 야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모습은 훅 꺼지듯 사라졌다. 칼날끼리 부딪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급히 달려온 온이 야로의 앞을 막아섰다.

여울은 그 검을 쳐내고 온을 밀치며 야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쫓아온 희나리가 창을 겨누었다. 묵직하고 빠른 공격이었다. 뒤돌아선 여울의 검이 그 창대를 밀어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희나리는 예상했다는 듯 자신을 밀어내는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크게 원을 그리며 창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창대에서 후웅 하는 소리가 났다. 휘말린 낙엽이 비산했다.

온까지 함께 달려들자 여울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야로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손에 제웅을 쥔 채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검을 버려,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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