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다치지 마라2016.06.02.
물에 비친 서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산속을 지나며 여유가 생길 때마다 치밀던 가정과 상상이 다시 떠오른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이 왜…… 그리 되니?”
“저는 그리 들립니다.”
“답해 주지 않아도 된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느냐? 이무기가 거짓말을 하다니 말세로구나.”
“주지 않으시면 직접 내어 가겠다 했잖습니까. 답해 주지 않으셔도 알아서 찾아 듣겠습니다.”
“무슨 그런 궤변이…….”
그가 원래 이리 제멋대로였던가. 기가 차서 돌아보던 서란은 말하다 말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여울이 윗옷을 벗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기울어져 갈색 피부 위로 흘러내렸다. 단단하고 생소한 사내의 몸이 적나라했다.
그녀는 그대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절로 새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뭐, 뭘 하는 게야!”
“붕대를 풀었습니다.”
“…….”
“대강 아물었으니 이제 고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힐끔 다시 보니 아래에 풀어진 붕대 뭉치가 보였다.
뺨에 머물던 붉은 기가 목덜미까지 번졌다.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뜨거워진 뺨과 목에 손등을 대어 식혔다.
사락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들렸다. 다시 옷을 챙겨 입고 붕대를 정리한 여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몇 번 보셔 놓고, 무에 그리 놀라십니까?”
희미한 웃음기가 그 물음에 묻어났다. 서란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너, 원래 이리 말이 많았느냐?”
“……보주 때문입니다.”
바로 등 뒤에서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습니다.”
여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말은 너무 작아 서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응? 뭐라 했느냐?”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행복이 강렬하게 그를 채웠다.
함께 있는 것이, 이리 대화를 나누는 것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달아오른 그녀의 목덜미가 좋았다.
이런 시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바칠 수 있을 것 같다. 별거 아닌 이 찰나가 그녀로 인해 빛 받은 수면처럼 반짝인다.
그래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이마를 맞대고 싶었다. 깜박이는 속눈썹을 만져 보고 싶었다. 눈을 맞추며 웃고 싶었다.
작은 소망들이 매순간 솟는다. 뒤따라 깊은 욕망이 차오른다.
여울은 길게 숨을 들이쉬며 그 모든 것을 속으로 삼켰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목덜미로 향하던 손을 잡아 내렸다.
“슬슬 출발해야겠습니다.”
그의 말에 서란이 겨우 돌아보았다.
마주 본 그의 얼굴은 어느새 단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시선을 피하며 일어났다.
그가 꿇어앉았다. 어물거리고 있는 그녀의 앞에 등을 보였다.
“업히시지요.”
“……정말 다 나은 게지?”
“거의 나았습니다.”
망설이던 그녀가 그의 등에 업히려던 순간이었다.
여울이 갑자기 휙 고개를 들었다. 전조 없는 동작은 맹수처럼 보였다. 부드럽던 얼굴에서 삽시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 서슬에 놀라 멈췄다. 그가 일어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간 하늘에는 뭉실거리는 구름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여울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서란은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 사나운 빛이 감돌았다. 그는 한 손을 검 위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 서란을 제게 당겼다.
얼떨결에 여울에게 안긴 서란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겨우 하늘에서 시선을 뗀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울은 말을 하려 입술을 떼었다가 지그시 깨물었다. 불안이 차올랐다. 서란은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쥐었다.
“결계가…… 쳐졌습니다.”
힘겹게 나온 말은 지극히 불길했다. 그녀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결계’가 여기서 나오는 맥락을 모르겠다. 아니, 듣자마자 상황과 끼워 맞춰 떠오른 가능성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결계라니?”
여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를 쥔 그의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를 다스리듯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 다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여, 여울?”
“잠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가 빠르게 산을 타고 올랐다. 바람 소리가 피리처럼 귓가를 스쳤다. 서란은 그의 품에 매달린 채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조금 전과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울은 꽤 높은 곳에 있는 바위 근처에서 멈췄다. 그러곤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시야가 탁 트였다. 물들어 가는 나무들과 굽이굽이 늘어선 능선이 아래에 펼쳐졌다.
여울의 눈이 주위를 한 바퀴 훑었다. 그는 감각을 곤두세워 기의 흐름을 느꼈다. 착각이길 애타게 바랐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산들 거의 전부를 휘감은 거대한 결계가 그들 위를 덮고 있었다. 주술에 능하지 못해 정확한 범위는 알기 어려웠으나, 대략적인 규모는 짐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가만 있자, 서란이 나직이 물었다.
“설마, 산맥 전체를 감싸는 결계가 쳐졌다는 소리냐?”
여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산맥 전체는 아닙니다. 와호산맥 전체를 감싸는 건 용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 정도는 아니나…….”
여울이 말끝을 흐렸다. 서란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느냐? 어떤 종류의 결계냐?”
“지금 여기서 보이는 범위 이상이며, 청람산의 결계와 비슷한 종류인 것 같습니다. 여의주를 가진 자와 이무기를 구별하는 결계입니다.”
“결계의 강도는?”
내내 허공을 보고 있던 그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울은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 능력으로는 부술 방법이 없습니다.”
서란이 그의 옷깃을 놓았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침묵이 고였다. 화창한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안개 낀 황혼 같았다.
여울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부상이 좀 덧나더라도 속도를 높일 것을.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오래 유지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여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정도 규모에, 이리 촉박한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니 분명 유지할 수 있는 시일이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숨어 버틸 수만 있다면.”
“그걸 저들이 모를 리가 없잖느냐.”
서란은 초조하게 양손을 맞잡았다. 주홍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용을 동원한 건 아닐 게다. 어디까지나 이건 세자와 세자의 마니 간의 일이니까. 주술사들을 이용했겠지. 그럼 네 말대로, 오래 유지되진 않으리라는 건 확실하다. 주술사들의 한계도 한계거니와, 비용이 엄청날 테니.”
“그러니 시간을 끈다면…….”
“당연히, 그런 만큼 단번에 끝낼 작정이겠지. 무언가 시간 내에 찾아낼 대책을 마련했을 게다. 이 정도 규모로 일을 벌였다면 군을 동원했을 수도 있다.”
중얼거리던 그녀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안색이 창백했다.
여울은 보이지 않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 혼자라면 어떻게든 몸을 숨길 수 있겠지만 무공이라곤 알지 못하는 서란과 함께는 무리였다. 결계를 부수거나 빠져나갈 방법도 없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는 서란을 내려다보았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킬 것이었다.
되도록 피하고 싶었던, 교룡들과 충돌하는 방법을 택해서라도.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뭐?”
“제가 모습을 드러내면 교룡들이 몰려오겠지요. 반복하며 시간을 벌겠습니다. 결계가 사라질 때까지.”
“방금 말했잖느냐, 교룡뿐만 아니라 군까지도…….”
“군이 동원되어도, 시선이 제게 쏠린다면 수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보주께선 그동안 안전한 곳에서 숨어 계시면 됩니다.”
서란이 가만히 그를 살폈다. 무표정한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교룡 셋이 넘어가면 네 승산이 5할 이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현재 왕실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교룡은 최대 다섯이다. 세자가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중에서도 넷. 화영옹주는 이미 출가외인이니 그녀의 교룡은 제외되겠지.”
그녀가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하얀 얼굴에 불안이 퍼져 가는 와중에도 그 말들은 정확했다.
“세자 본인의 교룡은 어지간해서는 곁에서 떼 놓지 않으려 할 테니 결국 본격적으로 추격해 올 교룡은 셋, 최악의 경우에 세자의 교룡까지 넷이다. 네가 그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냐?”
여울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차분히 답했다.
“그때에는 보주를 지키는 것을 상정하고 말씀드렸었습니다. 홀로 움직이면 넷이라도 저 한 몸 빠져나가는 데엔 충분합니다.”
그는 진심이었다. 자신의 실력과 교룡들의 실력은 파악하고 있다. 서란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넷이 아니라 다섯이 와도 제 몸은 빼낼 수 있었다.
서란도 그의 말이 오만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계가 언제까지 유지될 줄 알고? 병사들까지 몰려올 텐데. 군이 동원되는 건 거의 확실하지 않느냐. 이 범위를 교룡들만 가지고 수색하기엔 무리니까. 주술사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 너는, 무모한 짓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냐?”
“괜찮습니다.”
“그보다 안전한…… 다른, 방법이.”
말을 하다 말고 서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냉정이 부서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심하구나, 나는. 대결계라니. 세자가 이리 할 줄을 내가, 예상했어야 하는데. 내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세자가 마니 때문에 이 정도 규모로 일을 벌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적어도 두어 달 정도는 내버려 둘 줄 알았다.
그 이후에도 잡히지 않으면 그때서야 적극적으로 나서리라 생각했다. 그 정도 여유라면 바다에 닿고도 남으리라 판단했다.
합리적으로는 그게 옳다. 비용과 효율의 문제라면 그랬을 것이다.
정치는 명분의 싸움이다. 수배령이라는 명분이 있는 이상, 세자는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도 동원할 수 있다. 궐의 주술사를 모조리 투입하여 산맥을 봉쇄한다는 이런 짓까지 가능한 것이다.
짐작도 하지 못했다. 경험이 일천하여 그저 단순하게만 고려했다.
아니, 이 모든 건 변명에 불과하다. 더 생각했어야 했다. 수배령이 내렸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그가 둘 수를 짐작했어야 했다. 더 냉정했어야 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책하는 그녀에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주께선 제게 바다로 데려가 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이루는 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여울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그러니 보주께서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서늘한 체온이었다. 그 체온에 머리가 식었다. 제 손 위를 덮은 그의 손을 보는 그녀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서란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그가 제시한 방법이 가장 낫다. 그녀라는 짐을 떼 놓고 다닌다면 그는 교룡들을 교란하며 시선을 돌릴 수 있다.
결계의 범위는 여울이 대략 짐작한 바로 다섯 개의 산을 포함할 정도로 넓다. 여울이 시선을 끌고 다니고 그녀 혼자 숨는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결계가 사라지고 나서 몰래 빠져나가면 된다. 용이 친 것이 아니라면 결계에는 분명히 제한 시간이 있다. 세자가 왕의 용까지 청한 거라면 애초에 벗어날 방법 자체가 사라지니 고려해 봤자 의미가 없다.
여울의 제안을 따라야 한다.
다만 이 계획은 그의 위험 부담이 크다. 교룡들을 유인해야 하고 싸워야 할 것이다. 도주할 때 흔적을 남겨서도 안 된다.
그가 충분하다 하는 말을 믿는 것과 별개로, 그녀로서는 여울의 무력이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향이 가장 문제였다. 그녀의 향을 지우기 위해 하루 한 번은 반드시 그녀에게로 와야 한다. 지나치게, 어려웠다.
위험은 최소화하는 게 낫다. 향 문제는 아무래도 더 길게 가는 방법을 사용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향을…….”
“피를 내어 두고 가겠습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처럼 그가 답했다.
“제 주술이 서툴러 내어 둔 피가 오래가진 않겠으나 사흘 정도는 유지될 겁니다. 되도록 자주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무리한 짓을 할 필요가…….”
“저는, 필요에 쫓기어 보주를 안을 생각은 없습니다.”
여울의 검은 눈은 밤처럼 깊었다.
쉬운 방법이 있었다. 그가 원해 왔던 일이며, 그녀가 허락한 일이기도 했다. 그 역시 알고 있다. 그래도 그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마음이 와 닿는다. 그 마음의 깊이가, 어느새 이렇게 깊어졌는지. 서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시울이 시큰했다.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온전히 허락하실 때에, 닿고 싶습니다. 이것은 제 욕심입니다.”
와 닿는 목소리가 물거품처럼 스며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놓고 물러섰다. 그녀의 아래에 진을 그리며 말했다.
“서둘러 근처에 은신할 만한 곳을 찾아 오겠습니다. 최대한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준비할 것입니다.”
“이 와중에 편한 게 무슨 상관이냐.”
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들이쉬는 숨이 명치에서 턱 막힌다.
진을 마무리하고 허리를 편 여울이 그녀에게 자신의 비늘을 뽑아 내밀었다. 검은 비늘이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부수십시오.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녀는 비늘을 받아 들었다. 티를 내기 싫었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서란은 잠자코 그것을 내려다보다 불쑥 말했다.
“이번에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가 움찔 고개를 들었다. 그를 보지 않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의 손이 느리게 올라오다가 허공에 멈췄다. 닿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듯 공기를 움켜쥐고 손을 내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녀는 손 안의 비늘을 움켜쥐었다. 차갑던 비늘은 그녀의 체온을 받아 미지근해졌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명령했다.
“다치지 마라.”
“예.”
“……절대, 다치지 마라.”
“예.”
서란은 눈을 감았다. 어둠이 오고 있었다.
*
교룡들은 호류산 초입의 마을에서 세자가 내린 명령을 받았다.
대결계를 칠 터이니 안에 갇힌 화예교룡과 마니를 잡아라. 생포를 우선하되, 반항이 격하면 죽여도 좋다.
산과 약속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지만 교룡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홍평에 들렀던 야로가 돌아왔을 때엔 이미 온과 희나리가 논의를 끝낸 후였다. 그들은 산속에 곧바로 들어가는 대신 잠시 머물며 기다렸다.
건평 21년 10월 1일.
축지로 이동하여 모인 475명의 주술사가 진을 이루어 주술을 발동했다.
남으로는 호류산 초입까지, 북으로는 북재로 내려가는 길인 사등령 너머까지, 동으로는 명악산, 서로는 임천의 뒷산인 웅래산에 이르는 거대한 결계가 펼쳐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으로 이루어진 구가 다섯 산의 봉우리들을 뒤덮었다. 예경의 청람산에 있는 결계처럼 여의주를 가진 자나 이무기를 구별하는 결계였다.
단, 그들의 출입만을 허용하는 청람산의 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출입만을 거부하는 방식이었다.
“으, 이거 은근 기분 나쁘네.”
교룡들은 결계를 치기 전에 미리 호류산 안쪽에 들어와 있었다.
결계가 허공을 덮으며 펼쳐지는 것을 느낀 야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머물던 천막 앞에 모여 있었다.
“여울도 느꼈을 거다.”
“……어떻게 할까?”
“글쎄, 부수려 하려나. 소용없는 짓이지만.”
기백의 주술사가 진을 형성하고 펼친 대결계였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물리적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축지 등의 주술적인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여울이 주술에 능하지 못한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병사들 배치는 끝났겠지? 추적술사는?”
희나리가 말을 꺼냈다.
추적술사는 추적술을 전문으로 익혀 의금부나 군에서 활동하는 주술사였다. 여울의 혈흔을 손에 넣었다는 말에 지원을 오기로 했다.
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올 거다. 이 추적도 며칠 안엔 끝나겠군. 세자가 정말로…….”
“미친 짓을 벌였지.”
희나리는 온의 말을 가로채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야로가 질린 기색으로 재차 하늘을 보았다.
“진짜 무지막지하다.”
“얼마나 유지할 수 있대?”
“이론적으로는 주술사들이 교대로 진에 들어가면 계속 유지가 가능하긴 한데, 비용이나 체력에 한계가 오겠지. 그러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아, 왔다.”
야로가 벌떡 일어났다. 산길을 헉헉거리며 걸어 올라오는 주술사가 보였다. 펄럭이는 도복이 지나치게 커 보이는 비쩍 마른 중년 남자였다.
야로는 그에게 혈흔을 챙겨 둔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주술사가 그것을 뒤져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피의 양이 적어 많이는 못할 것 같사옵니다. 잘해야 네다섯 번 정도, 방향 확인만 가능하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출발하지.”
온의 말에 무거운 공기가 깔렸다.
희나리가 먼저 일어나 제 천막으로 들어갔다. 야로는 낙엽이 깔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술사가 제 몫으로 쳐진 천막에 들어가고 나자 온이 소년을 불렀다.
“야로, 일찍 자는 게 좋을 거다.”
“응.”
야로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온은 그 작은 뒷모습을 보다가 낮게 한숨을 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야로는 하늘이 불길한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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