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26화 (26/70)

26. 검푸른 어둠2016.05.29.

세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산을 훑었다. 산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지만 속내는 초조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길 바랐다.

그보다 한 살 위의 형인 세자는 나쁜 의미로 그의 예상을 벗어날 때가 많았다.

“……화예교룡과 친분이 있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군.”

“뭐, 그렇지.”

“교룡을 얻지 못한 한을 그런 식으로 해소했나?”

시작은 분명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길을 찾은 산은 이제 저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어쩔 거야?”

“네가 내게 거래를 제시할 상황이라고 보느냐? 죄인의 탈주를 도운 주제에?”

“마니는 관심 없어. 화예교룡 때문이지. 나라고 돕고 싶어서 도운 줄 알아?”

“결과는 같았다. 그걸 변명이라고.”

“마니는 납치된 게 아니라 혈육의 심장을 파먹으려는 세자를 피해 탈출한 거다, 라는 벽서가 온 나라에 나붙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아, 형님?”

산이 내뱉은 말에 세자가 입을 다물었다. 흉흉한 눈으로 아우를 보던 그가 으득 이를 갈았다.

“마니식은 유서 깊은 전통이다. 백성들이 그런 유언비어를 믿을 것 같나?”

“하늘이 내린 제물인 마니가 용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고 알려져 있지. 신성한 용이 생사람 심장을 뽑는 야만적인 과정으로 만들어진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산의 얼굴에 자조적인 표정이 찰나 스쳐 갔다. 그가 가볍게 말을 이었다.

“마니를 사람이 아니라 숨 쉬는 제물쯤으로 여기잖아, 다들?”

이무기가 마니를 얻어 용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유혈 낭자한 장면은 떠올리지 않는다. 무언가 주술적인, 혹은 상서로운 구름이 끼는, 그런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로 상상하는 것이다.

마니는 본디 제물로 태어났으리라 여긴다. 하늘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고른 목숨이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런 마니가 살고 싶어서 도망쳤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미친 이무기가 아니라 교룡이 제 주인의 목숨을 지키려 할 뿐인 걸 알게 되면? 무슨 말이 돌지 궁금하지 않아?”

“그런 소문 따위가.”

“형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대로 해 봐. 좋아할 늙은이들이 몇 떠오르는데?”

왕실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공신들은 세를 떨치고 있다.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세자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산이 빙글거렸다.

“아 뭐, 보위야 무사히 잇겠지. 재위 내내 트집 잡힐 거리가 생기겠지만. 이제 용도 안줏거리가 되겠네. 신성은 개뿔이. 잊을 만하면 누이 잡아먹은 오라비 소리 듣는 것도 흥미진진하겠고.”

세자가 짜증스레 미간을 짚었다. 그는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했다. 한갓 상인 나부랭이라면 아무리 큰 상단의 대행수라 해도 압박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처리해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상대는 동복아우였다. 대놓고 의금부에 들어와 제 정체를 밝혀 버렸다. 부왕이 살아 계시니 세자가 마음대로 어찌할 수는 없다.

여의주도 없고 궐을 나가 이름을 버리고 산 지 오래라 왕족의 신성함이 무너져도 영향받지 않는다.

누르려면 얼마든지 누를 수 있으되 누른 제 손에 생채기가 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성가셨다.

세자는 미간을 누르고 있던 손을 뗐다.

“……마니를 빼돌린 죄를 묻지 않으마. 그리고 생포할 경우, 화예교룡의 안위를 보장해 주겠다.”

“생포할 경우에만?”

“전투 중에 사망하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다. 불만이면 나가라. 아바마마 앞에서 시비를 가리도록 하지.”

이 이상은 무리다. 왕은 산을 가엾게 여기긴 해도 왕족의 권위를 깎아내리려 들면 가만둘 수 없을 터다.

어차피 진짜 거래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산은 적당히 물러서며 지나가듯 물었다.

“내 상단은?”

“그런 소꿉놀이 따위는 네 마음대로 해라.”

“좋아.”

산이 끄덕이자 세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마니는 어디 있지?”

“흑룡강으로 가는 척하다가 와호산맥으로 향했어. 지금쯤 호류산 부근이겠지.”

그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세자는 도하에서 달아난 이들이 와호산맥을 넘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빠르게 파악했다.

“창으로 가려는 건가.”

혼잣말을 한 세자가 생각에 잠겼다. 산은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별 거 아니란 듯 말했다.

“마니가 나한테 은밀히 마차를 마련해 달라더군. 북재에다가.”

북재는 와호산맥 너머에 있었다. 와호산맥 이남에서 출발하여 창으로 가려는 이들의 대부분이 북재를 거쳐 갔다.

세자가 돌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마니가 네게 그렇게 요청했다고? 너는 그걸 승낙했나?”

“나도 해 주고 싶어서 한 거 아니라고, 형님. 화예교룡 때문에 들어준 거야.”

“창으로 가려는 게 아니군.”

세자가 단언했다. 산은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했다. 그는 관심 없는 척 물었다.

“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마니를 줄곧 지켜봐 왔다. 마니를 가르친 여사(女師)가 누군지 아느냐?”

“그런 걸 내가 어찌 알아.”

“전 대사간 안승호의 처, 숙부인 최씨다.”

산이 눈을 부릅떴다. 그도 아는 사람이었다.

숙부인 최씨는 공신가인 문산 최씨 문중에서 태어나 같은 공신 가문인 동림 안씨의 안승호와 혼인했다. 그녀의 가르침을 받은 아들 안명은 열여섯에 장원 급제를 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 이후부터 가문의 눈 밖에 날 정도로 강직한 안승호와 어미를 하늘처럼 따르는 안명을 통해 그녀의 존재가 알려졌다.

알음알음 그녀에게 사사 받아 과거에 급제하는 이들이나 그녀와 학문을 논하는 자들이 있었다.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학식으로 유명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혼인한 여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에 따라 본명보다는 당호로 불렸다.

“현음당(峴飮堂)?”

“그래, 그 현음당이다. 자원했다고 하더군. 그리고 쫓겨났다.”

“쫓겨났다고?”

“그 노파가 마니에게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가르쳤거든. 발칙하게도.”

산은 입을 떡 벌렸다.

성학집요는 제왕학이다. 군왕의 학문이므로 세자 외의 왕족에게는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언감생심 보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자 세자의 입술이 절로 비틀렸다.

“현음당이 성학집요를 가르칠 정도의 계집애다. 쓸데없이 영민하고 의심이 많았지. 한 번쯤은 무언가 저지르리라 생각했다.”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런 것이 네게 제 행적을 고스란히 알린다고? 네 무얼 믿고? 천치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그 계집이라면 처음부터 너를 믿지도 않았을 터. 너는 속은 거다.”

“…….”

“아니면, 네가 그들을 편들어 부러 목적지가 창인 양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이거나.”

세자의 눈빛이 섬뜩했다. 산은 간신히 헛웃음을 만들어 냈다.

“내가 뭐 하러?”

“네 말마따나 화예교룡이 네게 그리 중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말이 돼? 마니를 형님한테 가져다 바치고 거래를 하는 간단하고 안전한 방법을 두고, 그런 정신 나간 도박을 할 것 같아?”

세자는 산의 얼굴에서 거짓을 읽어 내기라도 할 것처럼 뜯어보았다. 산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반쯤 진심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형님, 내가 속았을 수도 있어. 그건 인정하지. 근데 지금 내가 얼굴도 몇 번 안 본 그 계집애를 편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좀…….”

“보주.”

문 밖에서 느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자가 고개를 돌렸다.

“방해하지 말라 하지 않았나.”

“송구합니다. 교룡들이 장계를 올렸다 하여.”

그 말에 세자가 일어섰다. 그는 그대로 나가려다 멈칫 서서는 산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밖에 대고 말했다.

“들어오너라.”

느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봉해진 두루마리가 있었다. 느루는 공손히 그것을 바쳤다.

세자가 도로 앉아서 산의 앞에서 장계를 펼쳤다. 산은 그것에 관심이 없는 양 의자에 깊숙이 기대 늘어지더니 다리를 꼬아 건들건들 흔들었다.

그 태도가 심히 무례한지라 느루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반편이 주제에.”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이었다. 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세자는 빠르게 장계를 읽어 내려갔다. 그가 피식 웃었다.

“호류산 쪽이라. 와호산맥을 넘으려는 건 사실인 모양이군.”

세자는 잠시 생각을 했다. 곧 그가 두루마리를 접더니 느루에게 건넸다.

“나가 있어라.”

“예, 보주.”

느루가 물러났다. 산이 투덜거렸다.

“거 봐, 맞잖아.”

“거래 조건을 추가하겠다.”

“뭘?”

“화예교룡을 반드시 생포해 주마. 대신 네가 할 일이 있다. 장사치인 네놈이 내게 도움이 될 몇 안 되는 일이군.”

“뭔데.”

“결계를 칠 줄 아는 주술사를 고용해 와라. 많을수록 좋다. 최대한 긁어모아.”

“웬 주술사?”

“시간은 이틀 주지. 그리고 호류산 근처에 대규모의 인원이 머물 곳과 그 비용도 마련해라.”

“미쳤어? 이틀 만에 그걸 하라고?”

“해내는 게 좋을 것이다. 네가 공연히 집착하는 그 이무기를 살리려면 말이다.”

세자가 비웃음을 띠었다.

“그런다고 그것이 네 교룡이 될 리도 없건만, 태어난 대로 살지 못하고 끝내 욕심을 못 버리는구나. 어리석은 놈.”

산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주종이 아주 똑같아서는 연달아 지랄이지.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물었다.

“주술사들은 뭐에 쓸 작정이지?”

“마니가 와호산맥 내에 있는 건 확실해졌다. 허나 거기에서 어디로 갈 지는 알 수 없지. 네 말만 믿고 창으로 경계를 돌렸다가 놓치면 골치 아파지니까. 나는 이 일을 질질 끌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

세자는 탁자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 산의 눈이 그리로 쏠렸다. 세자는 빈 탁자 위에 원을 그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포위하듯이.

“와호산맥 일부를 감싸는 결계를 친다. 호류산부터, 북재로 가는 길까지 전부 포함하도록.”

스산한 미소가 세자의 입가에 걸렸다. 산이 얼어붙었다.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자가 말을 이었다.

“관상감의 주술사 전원과 소룡전, 의금부, 금군에 소속된 자들, 궐내의 모든 주술사를 동원해 와호산맥에 보낸다. 네가 모아 오는 자들도 호류산으로 보내라. 결계로 틀어막고 내부를 교룡들과 병졸들로 하여금 수색토록 할 것이다.”

“돌았군.”

“천박한 말버릇 하곤.”

세자가 혀를 찼다.

산은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생각했다. 들은 순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머리를 굴려 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궐에 있는 주술사라면 세 자리 수는 거뜬히 넘는다. 그들을 모아 진을 구성하고 힘을 합하면, 와호산맥 전체는 무리더라도 세자가 말한 범위 정도는 결계로 둘러 버릴 수 있다.

내부에 갇힌 교룡과 마니는 결국 붙잡히고 말 것이다. 난폭한 방법인지라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되겠지만 빠른 시간 안에 마니를 잡기 위해서는 확실히 최적이었다.

산이 중얼거렸다.

“아예 부왕께 헤살을 빌려 달라 청하지 그래.”

용 하나면 주술사 기백보다 강력한 결계를 칠 수 있다. 세자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착각하기 쉬운 일이지만 용은 예락의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한 인간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맹약이 그러했다.

따라서 용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예락의 세자로서 예락의 힘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아들이 힘에 부쳐 아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꼴이 된다.

세자로서 충분히 가능한 일인 주술사를 동원하는 것과는 달랐다. 세자는 분노를 눌러 담아 내뱉었다.

“내가 무능하다고 온 사방에 광고하란 말이냐?”

“그래, 잘나신 형님은 그럴 거라 생각했지.”

산도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세자는 날 때부터 적장자였고, 영특하다고 떠받들어졌으며, 제 자신의 우월함을 확신하며 자랐다. 그는 둔재라 평해지며 외척과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아비를 내심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아비에게 손을 벌리는 일 따위를 그 자존심에 어찌 하겠는가.

궐에 살 때는 그 오만에 내도록 상처받았었다. 산은 그의 형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기에 비꼬았을 뿐이다.

세자는 산의 말에 대거리하지 않았다. 그는 모자란 아우를 가르치듯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지지부진하게 추적을 끄느니 이번에 끝을 보는 게 낫다.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화예교룡도 고분고분해지겠지. 생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네가 왜 협조해야 하는지 이제 알겠나?”

여기서 거부할 수는 없다. 이런 압도적인 방식으로 추적하면 탈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둘 다 죽는 꼴을 보느니 ‘여동생’을 포기해야 하나?

산은 그를 똑바로 보던 주홍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눈앞의 세자와 같은 색이지만 다른 빛을 품고 있던.

〈저를 진짜 동생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신에게 저는 친구를 위험하게 만들 적에 가깝겠지요. 치워 버릴 수도 없이 성가신.〉

얄궂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제 혈육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것은 반정이라기보다, 반역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제시했던 의문들과.

〈이미 마니인데, 죽을죄를 좀 지은들 뭐 어떻습니까?〉

〈한 번이라도 궐 밖을 보고 싶었어요. 마지막이니 원하는 것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체념의 깊이와, 예상되는 세 번째 명령.

당황해서야 제 나이답게 보였던 그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졌던 질문.

〈정말 괜찮은가요?〉

산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최선을 다하겠어. 약속은 지키겠지, 형님?”

“그건 네 도움이 얼마나 쓸 만한지에 달렸다.”

세자가 일어났다. 검푸른 용포가 어둠이 드리우듯 펄럭였다.

*

건평 21년 10월 1일.

산속을 지나는 동안 서란은 힘들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여울은 귀신같이 그녀의 상태를 알아챘다. 그는 그녀가 한계다 싶으면 쉴 곳을 찾아내곤 했다.

“이리 쉬어 가도 되는 것이냐?”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온 바람에서 사늘한 숲 냄새가 났다. 떨어진 단풍잎이 물을 타고 졸졸 흘러갔다.

풍광이 한가로워 유람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서란은 계곡 가에 걸터앉아 여울을 돌아보았다. 그는 수통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교룡들이 이 드넓은 산중에서 단서조차 없이 우리를 찾아내는 것은 무리입니다.”

“모든 흔적을 지우진 못했잖느냐.”

“혹여 흔적을 찾아내더라도, 그때쯤에 우리는 이미 임천에 도착했을 겁니다.”

“나는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구나. 다 똑같은 숲으로 보이느니.”

그녀가 푸념조로 말했다. 여울은 수통을 닫으며 답했다.

“호류산의 서북쪽에 있는 산들 중 하나인 학운산 중턱쯤 됩니다.”

“너는 어찌 그리 잘 아느냐?”

“처음부터 와호산맥 속에서 임천 방향으로 간다 하실 때에 저를 믿고 그리 계획을 짜신 게 아니었습니까?”

“막상 산속에 와 보니 길도 없는 곳을 척척 가는 것이 신기해서 그런단다.”

여울이 그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부드럽게 휘는 눈매와 호선을 그리는 입술. 다감한 눈 안에 그녀가 담겼다.

서란은 잠깐 말을 잊었다. 쓴웃음이나 비틀린 게 아닌, 제대로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가슴 한쪽이 덜걱거렸다.

“요마를 잡느라 산을 자주 탔습니다. 사람이 많은 도시보다는 아무래도 자연이 편하여 산에 머무를 때도 많았지요. 와호산맥도 꽤 다녀보았습니다. 그래서 익숙합니다.”

“그, 그렇구나.”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다. 요즈음 속내를 감추는 것이 어렵다.

여울이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짧은 미소는 어느새 지워지고 무표정이 자리했다.

“목소리가 이상합니다, 보주. 많이 지치셨습니까?”

“아니.”

서란은 미소를 지었다. 무거워지고 싶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가 갑자기 웃는 바람에, 놀라서 그랬느니라.”

그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이질적인 눈동자가 잘 닦인 거울처럼 반짝였다.

“제가, 웃었습니까?”

“몰랐느냐?”

“……예.”

여울이 제 입가를 매만졌다. 약간 멍한 낯이었다.

그가 저리 감정에 무뎌진 것은 본래 나기를 그리 난 탓도 있겠으나, 그가 말해 주었던 과거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속이 쓰렸다. 그녀는 부러 밝게 말했다.

“이제 좀 자주 웃으렴. 웃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진단다.”

여울은 입가를 가린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덤덤히 답했다.

“제가 정말로 보주를 좋아하나 봅니다.”

학운산 중턱쯤 됩니다, 라는 말과 같은 어조로 나온 말이 저것이었다. 서란은 언뜻 못 알아듣다가 뒤늦게 알아들었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다.

“……갑자기 왜?”

여울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의도적으로 지은 미소는 그녀를 마주한 순간 자연스러워졌다. 녹을 듯한 웃음이었다. 그 얼굴 위로 선명한 연심이 읽혔다.

가슴 속에 파문이 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내 분명, 그 마음 버리라 했다.”

“싫습니다.”

“곧 죽을 사람한테 이리 해 봤자 너만 손해니라.”

“오래 사실 겁니다.”

“무슨 수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지금부터 생각해 보지요.”

“몰랐는데 꽤나 대책이 없구나.”

무거운 말들이 새털처럼 가볍게 오갔다. 지나치게 무겁기에 도리어 농처럼 나누었다.

“그런데 보주, 제 마음을 버리란 이유가 그것뿐입니까?”

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등을 돌린 채 흐르는 물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그의 뒷말이 들려왔다.

“그건, 살게 되면 저를 받아 주신다는 뜻입니까?”

끝내 언어로 만들지 않았던 대답을 그가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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