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25화 (25/70)

25. 답하지 않아도2016.05.26.

서란의 심란한 마음과 별개로 고된 일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체력 탓에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앞서 걷는 여울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에도 향을 지워야 할 것이다.

서란은 지친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어도 지금이 나았다. 감정에 매몰될 틈이 없길 바랐다.

해는 그녀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여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한쪽을 응시하더니 서란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움찔 놀랐다.

그는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그녀를 보고 그냥 다물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반쯤 누운 나무와 수풀을 헤치고 조금 더 들어가자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그늘진 샘이 있었다. 물이 제법 맑았다. 여울이 이무기의 감각으로 물의 존재를 느끼고 이리 온 듯했다.

“씻고 싶으실 듯하여.”

여울이 물에 시선을 둔 채 나지막이 말했다.

땀과 흙과 낙엽 부스러기 따위로 엉망이라 그녀는 진작부터 씻고 싶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 표를 내지 않았는데 그가 알아챈 모양이었다.

“……고맙구나.”

서란은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 여울이 샘의 근처에 진을 그렸다. 그가 짐을 풀어 그녀의 옷가지와 수건 등을 근처의 바위 위에 올려 두었다.

“저는 머물 곳을 마련하고 오겠습니다.”

“다녀오렴.”

여울이 풀숲 사이로 멀어졌다.

서란은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옷을 벗었다. 가을인데도 속적삼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한쪽에 내려놓고 나니 속곳 차림이 되었다.

발끝을 물에 담갔다.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으나 한껏 땀을 흘리고 달아올라 있었던지라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종아리까지 잠기는 샘 가장자리에 선 채 잠시 고민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숲속이라 해도 야외에서 나신이 되는 것은 꺼려졌다. 하지만 찝찝한 건 사실이고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서란은 결국 속곳까지 모두 벗었다.

나신이 부끄러워 서둘러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오랜만의 목욕이었다. 물이 찬 것과 상관없이 상쾌해졌다. 그녀는 곧 민망함도 잊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기자 생각이 찾아들었다. 모닥불이 일렁거리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표정. 그 눈빛.

〈그럼, 알려 주십시오!〉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물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머리가 제멋대로 가정을 한다. 만약 마니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낯이 달아오른다. 상황에 맞지 않는 상상이 자꾸만 떠오른다.

“미쳤구나.”

그녀는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요동치는 수면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미소가 떠올라 있지 않은 얼굴은 생기가 없어 보였다. 오랜 체념에 절어 버린 얼굴.

“죽고 싶지 않아.”

중얼거림은 그녀 자신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흉했다.

익숙한 웃음을 덮어 보았다. 밝아 보인다. 이쪽이, 낫다.

여울이 말했던 벽미향의 끝을 떠올렸다. 그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늪은 홀로 고요히 가라앉는 것이 옳다.

냉정해져야 한다. 참는 것은 그녀의 특기가 아니던가. 그녀에겐 미래가 없다. 그에게 손을 내미는 건 기만이다.

……손을, 내밀고 싶었었나, 나는?

서란은 선명해지려는 생각을 황급히 눌렀다. 이성을 억지로 끄집어낸다.

그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가 연정을 버리도록 행동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모욕하고, 그의 감정을 비웃으면 된다.

“싫어…….”

비참했다.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거부감에 물든 머리가 사력을 다해 그래선 안 되는 이유들을 찾아냈다. 정신없이 이유를 늘어놓았다.

지금부터 내내 상처를 주는 것이나, 마지막에 그런 명령을 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지? 어느 쪽이든 그는 괴로울 텐데. 되돌리기엔 늦었어.

너무 쉽게 생각했다. 바다를 보여 달라 명할 때, 이리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명을 후회하느냐고?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창의 기록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

희망, 죄책감, 소망, 체념, 그리고 보드라운 감정. 마음이 제멋대로 온몸을 휘저었다.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질적인 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것이 쇳덩이 위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 쪽을 본 서란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샘가에 요마가 있었다.

몸은 누런 털의 호랑이였고, 얼굴은 수염이 성성한 늙은이 같았다. 인간 같은 얼굴에서 눈만이 기이한 색으로 번들거렸다. 길게 벌어지는 입에서 침이 진득하게 흘러 떨어졌다.

“애애앵.”

그것이 갓난애 같은 소리로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뭔가 못마땅한 듯 허공에 발을 들어 긁었다. 호랑이와 유사한 앞발에 청동색 발톱이 튀어나와 있었다.

재차 쇠를 긁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그려진 진이 요마를 가로막고 있었다.

처음 보는 요마였으나 특징이 확연해서 그녀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산해경에서 마복(馬腹)이라 하는, 사람을 잡아먹는 요마였다.

“아.”

서란은 절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샘 가운데로 물러났다. 피가 냉수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차게 식었다.

“애앵.”

마복이 이를 드러내며 다시금 짧은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맨몸의 서란을 탐욕스럽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떠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수풀 사이로 사라졌던 그것이 바람 소리를 내며 다시 튀어나왔다. 육중한 덩치가 그대로 진을 들이받았다. 허공이 우그러지는 게 보였다.

진이 뚫리지 않자 마복이 못마땅한 듯 발톱으로 땅을 긁었다. 다시 물러나 도움닫기를 하여 진에 부딪쳤다. 들이받을 때마다 쿵, 쿵, 소리가 울렸다.

서란은 새파랗게 질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울.’

목을 타고 기어오르는 비명 같은 부름을 눌렀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진을 부숴 가는 마복을 바라보았다.

우지직, 하고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마복이 한 차례 몸을 털더니 만족스럽게 머리를 들었다. 뚝 떨어진 침이 기능을 잃은 진 위에 고였다. 그것이 그 위로 발을 디뎠다.

마복의 몸이 움츠러든다. 유연하고 두꺼운 근육이 수축했다. 곧 폭발적으로 도약할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삽시간에 생각과 감정이 범람했다. 죽음을 각오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마복의 육중한 몸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시간이 한없이 느려진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에게…….

그 순간, 하얀 칼이 벼락처럼 날아와 마복의 머리를 꿰뚫었다.

검에 실린 힘이 지나치게 강해 요마의 머리는 수박처럼 터져 버렸다. 시뻘건 피와 파편이 뇌수와 함께 퍽 하고 흩뿌려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여울이 다가왔다.

얼마나 급하게 온 건지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뺨에는 나뭇가지에 긁힌 탓에 꽤 깊은 생채기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등의 부상이 무리한 움직임에 뒤틀렸는지 혈흔이 살짝 비쳤다.

마복의 시체 앞에 선 그가 검을 주워 들었다. 그는 그것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괜…… 찮으십니까.”

갈라진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서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괜찮단다.”

여울이 그녀를 돌아보다가 아연해져서 빠르게 고개를 틀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서란의 흰 몸에 물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숨이 흐트러졌다.

서란은 뒤늦게 제 꼴을 깨닫고 물속에 잠겨들었다.

여울은 돌아서서 검을 닦았다. 헝겊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엉망으로 무너졌던 호흡이 겨우 가라앉았다.

등 뒤에서 물소리가 잦아들더니 그녀가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천이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미세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어 열이 되어 흐른다. 스치듯 본 하얀 몸이 동공에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검을 닦느라 쥐고 있던 헝겊이 손 안에서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옷자락 소리가 이리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 줄 몰랐다.

그는 훅 하고 솟구치는 것들을 누르기 위해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 되새겼다.

여울이 쳐 둔 진은 삿된 것의 난입을 막음과 동시에, 침입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면 느낄 수 있는 간단한 경계용 진이었다.

잘 곳을 마련하던 여울은 충돌이 느껴지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왔다. 가느다란 그녀 앞에 거대한 요마가 있는 꼴을 보자마자 검부터 내던졌다.

그 찰나에 느껴졌던 것은 그의 평생에 처음 겪어 보는 감각이었다. 얼어붙은 날붙이가 심장을 헤집는 느낌. 공포. 공포라는 두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녀로 인해 알게 되는 것이 너무나 많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마복 앞에서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그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왜 소리를 내지 않으셨습니까?”

속적삼을 걸치던 서란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비명을 참은 것은 반쯤 습관이었다. 들어 줄 이가 없으면 어린아이가 울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멈췄던 손을 놀려 옷을 걸치며 대꾸했다.

“네가 진을 쳐 두었잖느냐.”

“부서지고 있었잖습니까. 왜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서란은 뒤돌아선 그의 등을 보았다. 짧은 정적 끝에, 그녀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네가 오리라 믿었단다.”

그녀는 비슷한 말을 전에도 한 적이 있었다. 마니식을 반년 앞두고도 돌아오지 않는 교룡에게 독촉 한 번 하지 않고서, 그제야 돌아온 그에게 네가 아니 오겠느냐고, 웃으며 말했었다.

그게 정말 신뢰였을까. 그건 어쩌면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었나. 불러도 아무도 오지 않을 거란 불신은 아니었나.

그는 이제 의심하는 법을 안다. 서툴더라도 이면을 읽을 수 있다.

“정말 믿으신 겁니까? 제가 오리라고?”

여울은 울컥하여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옷고름을 마무리하는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돌아보자 웃는다.

“실제로 왔지 않느냐.”

말문이 턱 막혔다. 여울은 저절로 그녀를 향하려는 팔을 간신히 멈춰 세웠다. 그녀에게 닿는 대신 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믿었다면, 어째서 두려워하셨습니까?”

그녀는 말없이 젖은 머리칼을 모아 짜냈다.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여울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서란은 생채기가 남은 그의 뺨을 응시했다. 수풀을 헤쳐 달려오느라 난 그 상처가 그의 절박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부르지 않아도, 그가 왔다.

서란은 그의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젖은 손이 상처 근처에 닿자 여울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몸이 찹니다.”

“씻은 탓이니 곧 괜찮아질 게다.”

“잠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서…….”

“잠시만.”

서란이 그의 얼굴을 붙잡고 당겼다.

가까워지는 하얀 얼굴. 여울이 숨을 멈추었다.

서란이 그의 상처를 핥았다. 따뜻하고 말캉한 것이 상처 위에 문질러졌다. 피를 핥아 내 삼킨 그녀가 그를 놓아주었다.

그가 멍하니 제 뺨을 더듬더니 주춤 물러났다. 물러나지 않았다간 그녀를 붙잡을 것 같았다.

“……오늘은 접문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넋이 나가 있던 그의 귓가에 차분한 말이 들려왔다. 타액 대신, 혈액. 그 말에 여울은 정신이 들었다. 방금 자신은 무엇을 상상했던가. 그의 낯빛이 기묘하게 굳었다.

서란은 흘깃 마복의 시체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이 진을 뚫고 들어왔을 때 그녀의 안에서 범람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중에 가장 미련이 짙었던 것. 그에게 주지 못했던 대답. 늪에 짓눌려 언어로 형상화되지 못한 마음.

그녀는 물러서 있는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너를 꺼려서 접문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

“네가, 사내로 느껴져서…….”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속에서 맴돌던 붉은 것이 표면에 언뜻 드러났다. 희게 질려 있던 낯에 붉은 기가 돈다. 그녀는 뒤늦게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여울은 자신이 부담스럽게 굴어 그녀가 접문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저 말은.

그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보주, 그건…….”

“좀, 춥구나.”

서란이 그의 말을 잘랐다. 급히 나온 말이었으나 진심이었다. 젖은 채 한참을 있었고 날은 서늘했다.

여울은 그녀의 입술이 푸른 것을 보고 생각을 일단 제쳐 두었다. 안 그래도 무리하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감기라도 걸렸다간 큰일이었다.

그는 제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미리 불을 피워 두었습니다. 일단 가시지요.”

서란이 가만히 끄덕였다. 여울은 마복의 시체를 대충 샘가에서 떨어뜨려 치우고 젖은 옷가지와 짐들을 챙겼다.

그동안 그녀는 제 위에 덮인 그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무기의 체취는 강한 무향이다. 다른 냄새를 덮으며 제 냄새도 없는 물과 닮았다. 그럼에도 내내 그의 향을 묻혀 온 그녀는 그의 옷에서 그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아주 희미한 물비린내. 솔잎이 한두 잎 떨어진 듯한. 그 향이 좋았다. 파묻히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옷자락에 코를 묻었다.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짐을 챙겨 돌아서던 여울은 그것을 보았다. 그가 그대로 굳어 버리자, 그녀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여울이 돌아서서 걸었다. 서란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제가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녀는 그의 흐트러진 낯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오늘 접문을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여울은 제 인내를 과신하지 않았다.

*

건평 21년 9월 27일.

산은 홍평을 출발한 지 닷새 만에 예경에 들어섰다. 그는 일부러 천천히 이동했다. 서란과 여울이 되도록 멀리 가도록.

의금부에 출두하자마자 신분을 공개했다. 증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세자와 너무 닮아 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한갓 상인이라 여겼던 관원들은 모조리 뒤집어졌다.

예락의 왕족은 여의주를 품고 이무기를 거느리는 존재다. 그 권위는 기실 종교적이었다.

여의주 없이 태어난 결함 있는 왕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용의 보필을 받는 왕의 적자다. 대군이 모르는 일이라 하는데 역모가 아니고서야 감히 문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관원들은 일단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 소식을 듣고 세자 유리천응(流理天應)이 직접 행차했다.

산은 옥이 아니라 객방에 안내되어 있었다. 세자는 쩔쩔매고 있는 관원들과 제 교룡인 느루조차 물리고 홀로 객방에 들었다.

방만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산이 들어서는 세자를 보고 건성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형님, 오랜만.”

“방종하여 나돌더니 예법은 모조리 잊었나 보군.”

세자가 차갑게 대꾸했다. 산이 픽 웃었다.

“언제는 나한테 기대를 하긴 했어?”

세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선연한 주홍색 눈으로 산을 깔아 보았다. 산은 일어나지도, 그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세자가 손수 의자를 빼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산이 다리를 꼬고 부채를 펴 들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부채 끄트머리에 매달린 호화로운 술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세월이 흐르긴 했어. 우리 형님도 많이 크셨네. 이쯤이면 한 소리 해야 하는데 참고 말이야.”

“시정잡배가 다 됐군. 잘 어울리니 딱히 지적할 수도 없구나.”

“어이쿠, 말하기가 무섭게. 잘 어울리는 게 당연하지. 누구 동생인데.”

“한배에서 난 새끼들 중에서도 무녀리가 있곤 하지.”

“물론, 여러 마리 새끼 중에 가장 먼저 나온 맏이를 무녀리라 하지, 아마?”

“말꼬리를 잡는 솜씨 하나는 여전히 특출하구나.”

“누구 덕분에.”

“달아나더니 기껏 한다는 게 장사치에, 소환장을 받고 의금부에 출두하는 꼴이라니.”

빼닮은 형제 사이에서 사나운 기세가 튀었다.

세자는 비웃음을 띠었다. 산이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세자를 응시했다. 세자가 서늘하게 추궁했다.

“교룡들이 장계를 올렸다. 금산상단에 여울이라 하는 무사가 있다고. 도하에서 금산상단이 사들인 배가 그들을 태워 떠났다더군.”

“…….”

“이렇게 명백한 증좌가 있는데 모른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 할 것 아니냐. 그자는 마니를 납치한 죄인이다. 당장 이실직고해라.”

“형님, 수배령 죄목 한번 참 그럴싸하게 붙였더라. 교룡이 보주를 납치해? 지나가던 개가 처웃겠네.”

“예를 갖춰라, 온녕!”

세자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벼루에 담겨 있던 먹물이 주위로 몇 방울 튀고 쌓여 있던 두루마리들이 미끄러졌다.

산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부채를 내려놓더니 일어나 우아하게 읍했다.

“저하, 소인이 귀한 존안을 뵈어 황송한 나머지 무례를 범했사옵니다. 하해와 같은 자비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청하나이다.”

“지금이 농을 할 때냐?”

세자가 이를 갈았다. 산이 허리를 펴더니 으쓱였다.

“예를 갖추라 하여 예를 갖추었더니 농이라 하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네 정녕 왕명으로 추국을 열어야 답하겠느냐?”

“거 참, 성질 급하기는.”

불리한 건 분명 산이었으나 그는 태연히 여유를 부렸다. 쫓길 듯이 굴면 손해만 본다.

그는 도로 앉아 탁자에 턱을 괴었다. 세자는 그 태평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지적하는 건 포기했다.

산이 툭 던지듯 말했다.

“거래하자, 형님.”

“무슨 수작이냐.”

“마니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지. 대신 화예교룡의 안위를 보장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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