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24화 (24/70)

24. 접문의 의미2016.05.22.

건평 21년 9월 26일.

서란과 여울은 와호산맥에 속한 호류산에 도달했다. 완연한 가을을 맞이한 산은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와호산맥은 넘나드는 이가 많아 곳곳에 길이 있었다. 흙길에 불과하지만 제법 번듯하여 마차가 지나다니는 곳도 있었다. 그들이 오르고 있는 호류산은 통행이 잦은 산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길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과 마주쳐서는 안 되는 그들은 풀숲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지금까지는 혹 행적이 드러나도 괜찮았으나 이제부터 들켜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다. 여울은 짐을 챙기고 말들을 풀어 떠나보냈다.

산맥을 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전처럼 서란을 업고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빠르게 낫고 있다지만, 여울은 등에 부상을 입은 지 1주일이 좀 넘은 상태였다. 지금 무리했다간 덧날 위험이 있었다.

부상은 앞으로 2, 3일 정도면 그럭저럭 회복될 예정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말렴.”

여울은 서란이 발이 엉망이 되도록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앞서 걸으며 말했다.

“발이 아프면 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물집이 터질 정도로 참는 건 좋지 않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알겠느니라.”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최대한 걷기 편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길이 아닌 쪽으로 향하니 어쩔 수 없이 발 디디기 어려운 곳이 나왔다.

여울이 아무리 도와도 서란에게는 힘겨웠다. 그녀의 호흡이 금세 가빠졌다.

그는 주의 깊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험한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자신의 한계조차 모를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서 참기는 또 잘 참으니 무리할 것 같았다.

이제 그는 그녀가 티를 내지 않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엄살을 피워 줬으면 싶었다.

산 속의 해는 빠르게 저물었다. 노을이 드리우자 여울이 멈췄다.

“근처에 머물 만한 곳이 있나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서란은 지쳐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무에 기댄 그녀의 주위에 진을 그린 여울이 자리를 비웠다.

그녀는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너무 힘드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조금 정신이 들 때쯤 여울이 돌아왔다.

“동굴을 찾았습니다.”

여울이 앞장서서 그녀를 안내했다.

암반이 그대로 드러난 곳에 길게 입을 벌린 동굴이 보였다. 바위 동굴 앞 공터 구석에 흑갈색 곰이 피 웅덩이에 잠겨 죽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보고 흠칫하자 여울이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곰이 있기에 잡았습니다.”

사람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거대한 곰이었다. 여울은 아무렇지도 않게 곰을 지나쳐 동굴로 들어가더니 입구에 간단한 진을 그렸다.

서란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굴 안에서는 곰이 남겨 둔 큼큼한 악취가 났다. 코가 막힐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여울이 짐을 풀어 그녀를 위해 가죽과 모포를 깔아 주었다. 이어 밖으로 나가더니 순식간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왔다. 그는 동굴 안에 모닥불을 피웠다.

서란은 그가 만들어 준 자리 위에 앉았다. 혹사당한 몸에 오랜만에 불의 온기가 닿자 녹을 것 같았다. 그동안은 내내 황무지를 거쳐 오느라 불을 피우질 못했다.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여울은 바쁘게 움직였다. 서란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내가 도울 것은 없느냐?”

“괜찮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짐 속에서 작은 솥과 수통을 꺼낸 그가 훌쩍 나갔다.

서란은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무릎을 세우고 신을 벗어 보았다. 다행히 물집만 좀 잡혔을 뿐 내일 걷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듯했다.

도로 신을 신은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배우고 익혔던 것 중에는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그녀는 마니라 해도 궐에서 자란 옹주였다.

정말 짐에 불과하구나. 서란은 약간 우울해졌다.

그녀와 반대로 떠돈 세월이 긴 여울은 야숙에 능했다. 그는 솥에 좀 전에 잡은 곰 고기와 그새 캐 온 산나물을 물과 함께 담아 왔다.

불 위에 솥을 올리고 간을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육식 동물의 고기는 누린내가 나기 마련인데 무슨 조치를 한 건지 고소한 냄새만 났다.

그가 나무 그릇에 고깃국을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십시오.”

서란은 그릇을 받아 들었다. 수저를 들어 맛을 보았다. 이런 환경에서 끓인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맛있었다. 사실 근 사흘 만에 먹는 따뜻한 음식이니, 평소보다 더 맛있게 느껴질 법도 했다.

그녀의 얼굴이 절로 밝아졌다. 맞은편에 앉은 여울은 제 몫의 그릇 너머로 흘깃 그녀를 보았다. 그릇에 가려진 그의 입술이 미미하게 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밖은 완전히 검게 어두워져 있었다. 쌀쌀한 밤이었지만 모닥불을 지핀 동굴 안은 제법 따뜻했다.

여울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하릴없이 앉아 있던 서란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내 어디가 좋으냐?”

그릇을 챙겨 넣던 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녀는 공기를 사르는 불에 시선을 둔 채 덧붙였다.

“네게 이리 폐만 끼치고 있는데 말이다.”

“폐가 아닙니다.”

“너는 나를 잘 알지도 못하잖느냐.”

“이제 알아갈 것입니다.”

서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여울은 멈췄던 손을 다시 놀리며 말을 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라면 저는 그리 헤매지 않았겠지요.”

그의 어깨 너머로 손등에 여전한 흉터가 보였다. 그녀는 이제 그가 왜 그 흉터를 냈는지 알고 있다.

서란은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생을 겪은 적 없는 고운 손등은 매끄러웠다.

“그 감정이 진실로 연정이라 믿느냐?”

너는 이미 착각한 적이 있잖느냐.

이면에 숨겨진 물음이 비수처럼 여울을 후벼 팠다. 서란은 일부러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그가 물러나 주길 원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것에 흔들리지 않길 바랐다. 이율배반적인 마음이었다.

여울이 돌아섰다. 검은 눈동자 안에 모닥불이 어른거렸다.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기척에 서란이 눈을 들었다. 시선이 고요하게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차마 피하지는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못 견디고 그녀가 제 무례를 사과하려는 차에 그가 손을 뻗었다.

느릿하게 다가온 손이 그녀의 볼에 와 닿았다.

“보주.”

그가 길게 호흡을 고른다.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이 훑듯이 내려가며 그녀의 턱을 감쌌다.

“제가 보주와 접문할 때, 무슨 충동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엄지가 그녀의 입술 끄트머리를 스쳤다. 거친 손끝이 부드러운 살을 쓸며 떨어져 나갔다.

“저는 사내입니다.”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서란은 그가 닿았던 곳이 불에 덴 듯 뜨겁게 느껴졌다. 그의 체온은 이무기답게 차가웠는데도.

여울이 멀어지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것을 당신으로 인해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사내라. 그래, 그녀가 접문을 꺼리게 된 것도 그것을 의식하게 되어서였다.

물러난 그가 검을 꺼냈다. 그 움직임이 뜻하는 바를 짐작한 서란은 다급히 다가가 검을 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 분명 상처를 내지 말라 했다.”

“이리 하는 편이 낫습니다.”

“접문을 할 때.”

서란이 머뭇거렸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한참 말이 없었다.

모닥불이 일렁이며 우둘투둘한 동굴 벽에 그들의 그림자를 그렸다.

그녀가 여울의 옷깃을 쥐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었다. 제 쪽으로 그를 잡아당겼다. 약한 동작이었다.

그 조그만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여울이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서란은 그의 품에 이마를 묻었다.

“동하여서 그런 거라면.”

격리되어 살아왔다 해도 이런 것까지 모르진 않았다. 자신과는 관계가 없으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는 실낱같은 목소리를 냈다.

“……참지 않아도 된다.”

서란은 그의 심장 고동이 급격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편이 낫다. 운우지락을 나누면 이무기의 향이 더 오래간다고 자드락이 알려 주었으니까.

그는 그녀의 명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고 죄인이 되었는데. 그가 매번 자해를 하는 걸 보느니 이런 것쯤은.

그의 손이 어깨를 잡아 왔다. 서란은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삼켰다.

“그저 욕정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무거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딱딱하게 끊기는 어투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여울이 그녀를 제 품에서 밀어냈다.

서란은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가 어딘지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단순한 욕심이라면, 이리 아프지 않았겠지요.”

“……아프다니?”

“보주의 감정이 저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란은 말문이 막혔다.

여울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그를 아꼈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가 품은 마음과는 다를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여울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하얀 피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보주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얇은 피부 아래에서 흐르는 생명. 맥박이 사랑스럽다. 벅차오른다. 끓어오른 마음이 그의 입술 밖으로 흘러넘쳤다.

“저는, 당신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터질 듯한 열기가 그 말에 눌러 담겨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울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허나 보주께서는…….”

연정이 아니시잖습니까.

자해를 하는 기분이 들어 뒷말은 꺼내지 못했다.

일방적인 연정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온몸으로 이해했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녀로 인해 절실하게 깨닫는다.

서란은 자신을 보는 여울의 눈에서 감정을 읽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났다.

변할 것 같다. 흔들릴 것 같아서.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연모하지 말거라.”

“왜입니까?”

그녀의 거부에도 그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서란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답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아니 된다. 버려라.”

“……잔인하십니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대꾸에 여울이 작게 항변했다. 서란은 그를 외면했다.

“미안하구나.”

“싫으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더 이상은, 제발.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주.”

“나는, 받아 줄 수 없으니…….”

“그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저 홀로 품는 것도 아니 됩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냐.”

“소용이 있고 없고가 중요합니까?”

“…….”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리 되어 버렸습니다.”

그 말에 가는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네가, 그러면.”

가슴이 뛴다. 이런 두근거림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가쁜 숨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녀가 결심했던 것은. 기다리는 미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앞이 까맣게 변한다.

흐트러진 틈으로 오랜 시간 묻혀 있었던 속내가 새어 나왔다.

“살고 싶어지잖느냐……!”

그 말은 비명에 가까웠다.

그것이 벼락처럼 그를 내리쳤다. 연정에 취해 반쯤 잊고 있었던 모든 것.

여울이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았다. 그가 억지로 그녀의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물기 어린 주홍색 눈이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부스러지며 솟구쳤다. 머리가 멍해졌다.

내내 죽음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언제나 그것을 품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무엇을 위해 사셨습니까.

물을 수가 없었다. 갈퀴 같은 것이 속을 할퀴어 파헤쳤다. 그는 이를 사려 물었다.

“사실 것입니다.”

“무리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제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대안도, 논리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결의였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이 단단했다. 서란은 그 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녀는 빠져나오기 위해 팔을 비틀었다. 절박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그가 손을 놓았다.

그녀가 도망치듯 물러났다. 울음 섞인 말이 억제할 틈도 없이 튀어나갔다.

“나는 평생에 걸쳐 각오해 왔다! 내가 어떻게 체념하고 어떻게 다잡은 마음인지 아느냐?”

무엇을 각오하고 무엇을 체념하고 무엇을 다잡은 것인지. 짐작하면서도 여울은 부정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저는 모릅니다!”

“모르면 흔들지 말거라, 제발!”

“그럼, 알려 주십시오!”

바싹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지탱하는 것인지, 움켜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움직임.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녀는 여울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놀라 눈물이 멎었다.

어지러운 호흡이 그들 사이에서 흩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제가 무엇을 모르는지, 보주께서, 알려 주시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삼키고 억눌렀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서란은 자신을 알고 싶다 말하는 그를 보았다. 그녀를 연모한다는 자. 그녀의 이무기. 그녀의 빈손에 있는 유일한 존재.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살고 싶다.

조그맣게 싹튼 이 감정이 꽃이 될지 키워 보고 싶다. 그것이 피어나면 어떤 기분일지 알고 싶다.

보고 싶은 것이 많다. 가고 싶은 곳이 많다.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꿈꿔서는 안 되는데. 자꾸 희망이 자란다. 산이 심어 둔 씨앗을 여울이 싹틔운다. 만약 그녀에게 미래가 있다면. 창의 기록에서 방법을 찾아낸다면.

부드러운 색이 퍼져 나가는 위로 먹물처럼 검은 늪이 쏟아졌다.

기대하지 마. 또 절망하게 될 거야. 이번에는 견디지 못할지도 몰라.

그가 너를 잊길 원했다고? 사실 진심은 그게 아니잖아? 기억해 주길 원하지? 그래서 바다로 데려가 달라고 한 거지?

정말 그가 소중하긴 해? 그랬으면 계속 놓아뒀어야지. 혼자 죽었어야지. 왜 그를 네게 끌어들였어? 왜?

차오르는 늪이 추했다. 이 늪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서란은 진저리를 치며 그를 밀어냈다. 창백해진 얼굴에 혼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와 그녀 사이에 반걸음의 거리가 생겼다.

그녀가 소맷자락으로 고인 눈물을 닦았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울은 정물처럼 밀려난 그대로 있었다.

긴 정적이 맺혔다.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향이 샙니다.”

“상처는, 내지 마라.”

그녀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여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접문해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뇌리를 휘젓던 모든 것이 일시에 날아갔다. 하얗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괜찮으냐?”

어른거리는 모닥불이 그의 얼굴에 깊게 음영을 드리웠다. 서늘하게 열망하는 남자의 얼굴.

서란은 문득 그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성을 압도하는 감정이 온몸을 휘돈다. 마음 한구석에서 속삭임이 들려온다.

만약 마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에게 무슨 대답을 했을까.

여울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씁쓸한 웃음이 그의 얼굴 위에 짧게 스쳐 갔다.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녀는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보다 높은 곳에 있는 그의 어깨를 짚고 턱을 들어 입술을 맞댔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안고 제게로 당겼다.

끌어안는다. 몸과 몸이 닿았다. 열리고 섞인다. 삼켰다. 바싹 닿은 몸에 미친 듯이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안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타고 미끄러진다.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나갔다.

입술이 떨어졌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오싹한 감각이 내달렸다.

서로의 손이 내키지 않는 듯이 머뭇거리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멀어지는 손끝이 스쳤다.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향에 대한 걸 잊었다. 그저 하고 싶어 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여울이 우물 같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서란은 그 시선을 피했다. 그는 길고 달뜬 숨을 내뱉고는, 힘겹게 그녀로부터 눈을 뗐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모닥불을 뒤적여 불을 키우더니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편히 주무십시오.”

서란은 그 인사에 답을 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간 엉뚱한 말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잊고 격류에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몸을 돌려 모포 속으로 파고들었다.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물처럼 늘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며칠 전에 여울이 던졌던 질문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보주께…… 접문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입니까?〉

의미. 원래 목적을 잊었던 방금 그 접문은 그럼 무슨 의미였던 것일까. 정답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속에서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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