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부정할 수 없는 질문2016.05.15.
벽씨 상단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를 불린 금산상단의 힘은 대단했다. 다음 날 오전에 바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호화롭고 튼튼한 마차는 대나무 발과 주렴이 드리워져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두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열 명의 고용된 무사가 호위했다.
산은 어제 나눴던 계획을 구체화하여 서란에게 전달했다. 일정을 맞추고 각자의 운을 빌었다.
대갓집 규수처럼 차려입은 서란은 면사를 쓴 채 마차에 올랐다. 여울이 함께 타고 나서 발을 내렸다.
마차는 곧 흑룡강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산과 청화가 탄 또 다른 마차가 도하를 향해 떠났다.
희나리, 온, 야로가 금산상단의 별저에 온 것은 마차들이 출발한 다음 날의 일이었다.
각지의 관아와 연락하여 홍평에 금산상단 일행이 들어왔다는 걸 알아낸 덕이었다. 입이 무거운 별저의 관리인은 상단주가 머물다 떠났다고만 말했다.
교룡들은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별채 근처에도 가지 말라 했습죠. 청소도 못하게 하더라니까요? 도대체 얼마나 귀한 손님이기에…….”
“본 사람은 없나? 누가 머물렀는지?”
“그게, 크흠.”
온의 말에 하인이 헛기침을 하며 힐끔거렸다. 곁에 서 있던 희나리가 은전을 꺼내 건넸다. 하인은 너스레를 떨며 꾸벅 절을 하더니 제가 본 것을 털어놓았다.
“어제 아침에 낭인 무사들이 무더기로 왔습죠. 별채 앞에 마차 들여 놓으래서 제가 끌고 갔고요. 물러나면서 슬쩍 보니까 면사 쓴 규수하고 무사가 하나 탔지요.”
“무사? 어떤 무사?”
희나리가 조급하게 물었다.
“거리도 멀고, 삿갓을 눌러써서 자세히는 못 봤지만……. 언뜻 보니까 피부가 유난히 검더라고요. 거, 사미국인가? 그쪽 사람들이 검다고 들었는데 본 적은 없지만 거기 사람인가 했었죠.”
하인이 턱을 긁적이더니 희나리와 온,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야로까지 세 이무기를 흘깃흘깃 훑어보았다. 그가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교룡님들이랑 비슷한 게, 아무래도 수배령에 있던 그 미친 이무기 맞는 거 같습니다요. 그럼 저, 포상을 받을 수 있겠지요?”
희나리와 온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희나리가 끄덕였다. 온이 하인을 향해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보았나?”
“예, 물론입지요. 흑룡강 쪽으로 갑디다.”
“가자. 더 늦기 전에.”
희나리는 빠르게 말하고 돌아서며 야로를 불렀다. 온이 하인에게 서찰을 휘갈겨 건네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관아에 가면 포상을 받을 것이다. 수고했다.”
하인이 함박 웃더니 굽실거리며 사라졌다. 교룡들은 곧바로 마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잠을 자지 않고 하루를 꼬박 달린 끝에 따라잡은 마차는, 비어 있었다.
무사들은 맨몸으로 말을 추격해 따라잡은 그들의 무위에 기가 질렸다. 돈으로 고용된 자들은 지킬 의리가 없었다. 그들은 아는 것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전날 밤에 마차를 세우고 노숙할 때만 해도 분명 사미국인 놈도, 규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불렀더니 조용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같이 마차를 열어 보았는데, 안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근처를 몽땅 뒤졌는데 흔적도 없고…….”
“불침번은 저랑 이놈이 보았는데,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그들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온이 물었다.
“밤사이 사라진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요.”
“우리끼리 이걸 어쩌나 하다가, 뭐 도적이 든 것도 아니니까, 보수는 받아야겠다 싶어서 흑룡강으로 가던 중입니다.”
“대금을 흑룡강 나루터에서 받기로 했거든요.”
“어째 고용할 때부터 돈에 비해 일이 쉬워 보이더니만…….”
“우리는 정말 몰랐습니다요. 수배 중인 자들인 줄 알았으면 이런 의뢰를 받느니 신고를 했겠지요.”
“저희는 진짜 무고합니다.”
무사들이 두서없이 나서서 한마디씩 했다. 희나리가 갈수록 푸념이 되어 가는 그들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걔들이 어디로 갔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온이 깊은 한숨을 쉬더니 가 보라고 손짓했다. 무사들은 그들이 마음을 바꿔 처벌할까 봐 두려웠는지 마차를 끌고 급하게 떠나갔다.
“막막하네.”
희나리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기 말이야.”
야로가 끼어들었다. 희나리와 온의 시선이 쏠렸다. 야로는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결국 여울은 마니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 하는 거야?”
“그야 어디론가 도망쳐서 숨으려는 거겠…… 아.”
건성으로 답하던 희나리는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온이 입을 열었다.
“예락 안에서 숨어 봤자 어떻게 되는지는 자드락 선배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그건 그래. 걔들, 도하에서 배를 타려고 했었지?”
“그 배는 창릉으로 가는 배였다. 창릉은 국외까지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서해 최대의 항구고.”
“국외로 달아나려는 거겠네.”
희나리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온은 머릿속으로 예락의 지도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예락에서 해외로 가는 배가 있는 항구는 다섯. 남부의 두 곳은 너무 멀어. 동부의 용미나, 서부의 창릉, 아니면 좌수로 갔을 확률이 높지.”
“근데 항구는 이미 봉쇄했잖아. 타국으로 가는 배는 타는 인원도 한정되어 있고 검문도 엄격해서 무리야. 수배령이 내리기 전이라면 몰라도.”
“금산상단의 본부가 있는 용미라면 상단 소속 상선을 이용할 수 있을 텐데?”
“이미 용미 관아에서 조사가 들어갔을 거야. 거긴 못 움직여.”
“그럼 육로인가.”
“북으로 가서 홍진강만 넘으면 바로 창이었지, 아마.”
“일단은 그쪽이 가능성이 높군.”
“그래 봤자 추측이야.”
희나리는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온은 그때 이후로 소년의 활기가 줄어든 게 걱정스러웠지만 야로를 챙겨 줄 틈이 없었다. 그가 결정을 내렸다.
“홍평으로 돌아가자. 각지의 관아에 연락하고 거기서 소식을 기다려야겠어.”
“소식이 들어올까?”
“여울 혼자라면 모를까, 마니를 데리고 있는데 마을에 아예 들르지 않는 건 불가능해. 반드시 행적이 드러날 거다.”
“별수 없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는 길에 그들이 사라졌다던 곳 근처는 수색해 보는 게 어때?”
“그러지.”
빠르게 논의를 마친 교룡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무사들이 잠든 한밤중에 마차에서 빠져나온 여울은 서란을 안고 홍평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데다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느라, 약속했던 장소까지 가는 데 하룻밤을 거의 다 썼다.
부근에 요마가 늘면서 버려진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폐가 안에 말 두 마리와 식량, 모포와 기타 도구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산이 사람을 시켜 가져다 둔 것이었다.
여울은 서란을 제 앞에 태우고 말을 몰았다. 그녀가 말을 탈 줄 몰랐기 때문에 함께 탈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말 위에서 육포 따위로 때우고 두 마리를 갈아타 가며 달렸다. 마을도, 길도 피해서 가야 했다. 강행군이었다.
그들은 쉼 없이 달린 말이 한계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어둠이 내리고 있어 어차피 더 달릴 수도 없었다.
주위는 잡초와 드문드문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있는 황무지였다. 여울은 나무에 말을 매고 모포를 내렸다.
사방이 평지라 눈에 띄기 쉽기 때문에 불을 피워서는 안 되었다. 그는 말들을 앉히고 두 마리의 말 사이에 털가죽을 깐 다음 모포를 덮어 서란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서란에게는 첫 야숙이었는데 불조차 피울 수 없었고 가을밤은 싸늘했다. 여울은 그녀가 걱정되었다. 말의 체온이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종일 말을 타고 있었던 서란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녀는 현기증이 이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여울이 마련한 잠자리에 그녀가 앉았다. 그녀가 편히 눕도록 모포를 다듬은 그가 다가왔다.
다가오는 이유는 뻔했다. 서란은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갑작스레 여울이 멈췄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주의하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향을 지우려던 게 아니냐?”
여울은 치맛자락을 쥔 서란의 손을 보았다. 힘이 들어가 하얗게 드러나는 손마디가 보였다.
그는 뒤로 물러나더니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검을 뽑아 들어 왼손의 손바닥을 그었다. 서란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울?”
“드십시오.”
여울이 왼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서란은 멍하니 제 앞에 디밀린 손바닥을 보았다. 베인 상처에서 피가 몽글몽글 솟았다.
손바닥에 고인 피가 손금을 타고 흘러 흙바닥에 톡 하고 떨어졌다. 메마른 땅에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피가 흐릅니다.”
그의 말에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손바닥에 입을 댔다.
흐른 피를 핥아 올라가 고인 것을 삼켰다. 그의 피는 인간의 피와 달리 비린내가 거의 없었다. 역하지 않고 물처럼 넘어 갔다.
그녀의 감긴 속눈썹과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여울의 온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그녀가 입을 뗐다. 그가 손을 거두었다.
서란은 화가 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왜 상처를 낸 게냐?”
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제 상처를 핥았다. 의도적으로 얇게 낸 상처였기에 피는 금방 멎었다.
자신이 핥았던 곳을 그가 핥는 모습에 서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수건을 꺼냈다. 핏자국을 닦아 내고 나무에 기대앉아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일도 힘든 일정이 될 겁니다. 주무십시오.”
서란은 눕지 않았다. 그녀는 힘주어 움켜쥔 바람에 구겨진 제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물었다.
“내가 접문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느냐? 그래서 상처를 낸 것이냐?”
거짓말로 둘러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울은 검 위에 손을 올린 채 침묵했다.
서란이 지친 듯이 얼굴을 문질렀다.
“다시는 이러지 말거라.”
“그 명은 따를 수 없습니다.”
여울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지금도 너는 무리하고 있거늘, 여기서 더 피를 흘릴 참이냐? 나는 괜찮다. 그저 조금, 당황했을 뿐이니라.”
네가 사내로 보여서.
그저 자신의 교룡이라고 생각했었다. 믿을 수 있는 존재. 그녀의 반신이자 분신. 그래서 의식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그가 제 상처를 털어놓았다. 제 어둠을 보였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그가 보인다. 그가 그녀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열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본다.
몰랐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간은 끝났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 같은 건 사소한 문제였다. 그들은 쫓기고 있었다. 그에게 더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서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여울이 답했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녀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하기 싫은 게냐?”
물으면서 벽미향을 떠올렸다. 여울은 그 소녀에게 감정을 강요당했다. 그것이 결국 그를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녀와의 기억 때문에 여울이 저러는 것일까. 원치 않는 접문은 기분이 나쁠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를 배려했어야 했다. 너무 가벼이 생각했다. 그녀가 그리 판단하고 사과하려는 찰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반대입니다.”
여울은 자신을 응시하는 서란의 눈동자를 피했다.
연정을 자각하고 나자 그녀와 닿을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입술을 머금으면 지극히 행복하면서도 이것이 그녀에겐 그저 수단일 뿐임을 알기에 괴로웠다.
그때 이후 접문할 때마다 그녀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버젓이 보면서도 더 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갈망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며 동시에 알아주었으면 했다. 흘러넘치는 것을 매순간 잡아 매기 힘들었다. 답을 원하면서도 답이 두려웠다.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음은 스스로도 규정하기 어려웠다.
“쉬십시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서란은 한동안 그를 지켜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모포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기 싫다는 것의 반대라면.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모포 속에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정말로?
상상해 보지 않았던 감정. 그것을 처음으로 더듬어 본다. 마음 한 자락이 꽃잎 색으로 물든다.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다.
그녀는 누운 채로 하늘을 보았다.
검푸른 하늘에는 별이 모래처럼 박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작게 중얼거렸다.
“잠들었느냐?”
“아닙니다.”
“오늘 무리했을 텐데, 상처는 괜찮으냐?”
“아물어 갑니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여울은 문득 마니전에서 서란이 내놓았던 보퉁이가 떠올랐다. 그중에는 모아 뒀다던 수면제가 있었다.
불면증이 있었다고 했던가. 그가 말을 꺼냈다.
“불면증이 있었다고 하셨지요.”
“지금은 괜찮다.”
“그럼 왜 잠들지 않으십니까? 익숙하지 않은 여행이라 몸이 곤하실 텐데요.”
서란이 모포 속에서 뒤척이더니 돌아누웠다. 엎드린 그녀가 팔을 괴고 여울을 바라보았다.
불 하나 피우지 않아 달과 별이 드리운 흐린 빛에 그의 윤곽만 간신히 보였다.
잘 보이지 않으니 홀로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풀을 헤치는 소리와 말의 숨소리가 고요를 채웠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 때문이다.”
그녀와 달리 여울은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서란은 무표정했다.
한없이 잡아당겨져 팽팽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가늘게 진동했다.
공기가 찼다. 몸이 떨렸다. 서란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란아, 하고 부르며 그녀를 안아 주던 체온.
그녀는 충동적으로 속내를 일부 끄집어냈다.
“내 어머니는 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늘 말해 주셨단다. 너는 마니이고, 마니는 죽을 운명이라고.”
어둠 속에서 여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서란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죽는다는 게 뭔지도 모르던 때였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영원히 깨지 않는 잠이라고 알려 주었느니라.”
나이가 차고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되자 잠들 수가 없었다. 잠들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까마득한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자국 같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그녀에게는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른 말을 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게 힘이 든다고 하셨지.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셨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니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싶다며 나를 품에서 놓지 않으셨단다.”
서란은 무심코 제 손을 보았다. 밤이 깊어 자기 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우습게도, 당신께서 나보다 먼저 떠나셨느니라. 역병이었다. 병이 발견된 순간 어머니는 궐에서 나가야 했단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모든 소지품을 불살라 버려 나는 어머니의 유품 하나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쉽사리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읊었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여울은 그녀의 눈이 그리움에 젖어드는 것을 보았다. 단조로운 말들 속에 고여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그의 입매가 굳었다. 서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어머니를 잃고서야 그분이 했던 말을 이해했단다. 날 사랑하는 게 힘들다고 하신 이유를 깨달았느니라.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도. 어머니의 말씀대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어머니의 품에 매달렸던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
“허나 딱 그만큼, 그분을 떠나보내는 게 너무나 힘들어서. 한편으로는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어서. 그런 마음이 사무쳐서.”
서란이 고개를 기울였다. 보이지 않는 그의 표정을 상상하며 그녀가 속삭였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이런 고통을 겪는 건 싫다고 생각했다.”
내내 침묵하던 여울이 신음처럼 말을 토해 냈다.
“보주, 저는.”
“라는 것은, 그럴 듯한 겉포장이란다.”
서란이 냉큼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묘한 웃음을 띠었다.
“그리 고결하기만 했다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마니식을 치렀겠지. 허나 나는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아서.”
그녀는 턱을 괸 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휙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여울 쪽에서는 까만 정수리만 보였다.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꿈을 꾸었다. 다 털어 버릴 수가 없어서 꾸역꾸역 쌓아 놓았단다.”
“……그게, 잘못입니까?”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짐승조차 제 목숨을 아껴 이를 드러내는데.
그녀는 그의 물음을 듣지 못한 양 말했다.
“그러다 끝내 궐 밖으로 나와 버렸지 않느냐. 그저 내 욕심으로. 너를 이리 고생시키면서 말이다.”
“고생이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보주의 것이잖습니까.”
“그래, 너는, 너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 말라 했지. 후회라도 기껍다 말하며.”
“그러니…….”
“차라리 네가 인간이었다면 입 발린 말이니 하겠거늘.”
“…….”
“그래서 네가 두렵다.”
“어째서입니까?”
“네가 나를 흔들고 있으니까.”
하늘에 별이 너무 많다. 시야 끝까지 거슬리는 것 없이 오직 하늘이다. 검은 처마나 높은 담이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여전히 그 익숙한 천장인 것은 아닐까.
그녀가 팔을 들었다. 헐거운 소맷자락이 흘러내려 하얀 팔이 드러났다. 그 팔이 별을 움켜쥐고 싶은 것처럼 하늘을 향했다.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것을 검은 손이 잡아챘다. 그녀의 몸이 움찔 굳었다. 어느새 머리맡에 다가온 여울이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손목을 타고 올라온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싼다. 손가락이 얽혀 든다.
그는 느릿하게 그녀의 손을 끌어내려 모포 속에 여며 주었다.
“바람이 찹니다.”
더디게 떨어져 나가는 손끝에 미련이 묻었다. 닿는 시선에서 희미한 열망이 흘러 떨어졌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것이라 해도 더 이상은 모를 수가 없었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색채가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나를 연모하느냐?”
일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주홍색 눈동자 속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의 물음이 칼날처럼 선뜩하게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부정할 수 없다.
칼에 베인 곳에서 붉은 피가 솟듯이, 여울은 치솟는 진실을 토해 냈다.
“예.”
그 짧은 대답이 그녀의 정신을 뒤흔든다. 갖가지 의문이 그녀의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서란은 외면하듯 눈을 감아 버렸다. 그가 그녀의 머리맡에서 사라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적막한 밤이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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