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21화 (21/70)

21. 눈부시게 빛나면서 질척하게 가라앉는2016.05.12.

“뭐,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아. 그런데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라고? 지금 당장만 해도 출두하라고 소환장이 날아왔는데 말이지.”

서란이 멈칫했다. 그녀는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조금 비껴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울은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손과 달리 그녀의 낯빛은 태연했다.

“우리가 와호산맥에 접어들 즈음 의금부로 출두하여 온녕대군임을 밝히십시오.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세요.”

“그게 말이 되냐? 뻔한 상황인데.”

“역모도 아닌데 모르쇠로 나오는 왕족을, 그것도 대군을 겁박할 수 있는 의금부의 관원은 없을 겁니다.”

“임시변통에 불과하군. 아바마마는 둘째 치고 형님만 나와도 그런 헛소리가 먹힐 리가 없잖아?”

“그걸 노리고 부정하시라는 겁니다.”

산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서란이 덧붙였다.

“이 일은 어쨌건 왕실 내부의 일입니다. 마니와 관계된 일이니까요. 오라버니가 온녕대군임이 밝혀지면 세자 저하가 직접 나올 확률이 높지요. 추궁당하게 되면 주위를 물려 달라고 하십시오.”

“형님이랑 담판을 지으란 말이냐? 어떻게?”

“여울과의 친분만 긍정하세요. 제가 그를 가지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제 행적을 공개하세요. 창으로 달아날 작정이라고. 서해로 가고 있다는 말보다 차라리 그쪽이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그래 놓고 정작 창으로 가는 마차가 비어 있는 건 어찌 설명하라고?”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세요. 제가 당신을 의심하여 행적을 숨긴 것 같다고 하면 납득할 겁니다.”

“……형님이 너에 대해 알아?”

“제가 의심이 많다는 건 아시지요.”

서란은 살짝 웃었다. 직접적으로는 1년에 한 번, 생일 때만 만났으나 마니전의 궁녀 대부분이 세자의 눈과 귀인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서란의 말에 산은 기묘한 낯을 했다. 기가 찬 듯도 하고, 쓴 것을 삼킨 것도 같은.

“그건 그렇게 넘어간다 해도, 너희를 도운 건 무마하기가…….”

“세자 저하가 우리를 도운 일로 압박하면 수배령의 거짓을 밝히겠다고 하십시오. 바라는 건 여울의 안위일 뿐 마니에겐 관심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해?”

“진실과 섞인 거짓이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우니까요. 그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을 테니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저하의 입장에서는 보위에 위협이 되지 않을 오라버니를 괜히 적으로 만드느니,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을 잡는 것에 만족할 확률이 높습니다.”

“형님이 거기서 그냥 물러나기만 할 리가 없는데.”

“만약 여울의 목숨을 보장해 줄 테니 마니의 추적에 협조하라고 명하면 적당히 따르시면 됩니다. 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 추적이 이루어져도 한동안은 괜찮을 테니까요.”

산은 길게 침묵했다. 서란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탁자 위에 팔을 괴더니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지막이 묻는다.

“내가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로 말입니까?”

“상단주로 대리인을 출석시킨다면 어떨까.”

“……금산상단이 무너지겠지요.”

서란이 눈을 들어 산을 응시했다. 가라앉은 시선이었다. 그녀는 한 호흡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를 배에 태운 순간부터 선택지는 두 가지였을 텐데요. 금산상단을 포기하거나, 왕족의 신분을 이용하거나.”

“…….”

“그리고 처음부터 후자를 선택하실 계획이 아니었나요? 저를…….”

그녀가 말을 끊었다. 신분을 공개한 후에 여울을 봐주는 대가로 그녀를 넘길 작정이 아니었냐고, 그리 말하려다 말았다.

산은 서란이 끊은 말을 알아차렸다. 여울을 구해 내기로 결심했을 때, 처음의 계획은 분명 그랬다. 그것을 서란이 파악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자라면 애가 이렇게 크지?”

“네?”

“어제도 그렇고.”

“제가 실례를 했나요?”

“칭찬이다.”

서란이 당황하여 눈을 깜박였다. 산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절반만.”

“……나머지 절반은요?”

“스스로 생각해 봐.”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산이 그녀 앞에 놓여 있던 소환장을 제 쪽으로 당겼다.

“네 계획대로 해 주마. 너한테 투자하기로 했으니까.”

여울이 미미하게 어깨를 굳혔다. 그는 산의 저 말이 알아내지 못한 어제의 대화와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은 소환장을 도로 접으며 말했다.

“2주 후에 임천의 호명객잔 별관을 사흘 동안 예약하겠다. 거기에 이것저것 준비해 두지. 방에 들어가는 건 요령껏 창문을 타 넘든 어쩌든 안 들키게 하고. 대놓고 들어가면 잡아 가라고 시위하는 꼴일 테니. 기간 맞춰서 도착하는 것도 알아서 해.”

산은 다시 거북이 모양이 된 소환장을 손끝으로 튕기더니 잡아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의 출발은 내일이다. 충분히 쉬고 준비해 둬. 특히 여울 너. 란아는 그 외에 필요한 거 있으면 청화한테 말하고.”

거북이를 흔들며 밖으로 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서란이 물었다.

“정말 괜찮은가요?”

구체적인 질문이 아니었지만 산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궐로 돌아가 버렸던 신분을 활용하는 것이 괜찮은가요. 당신이 이뤄 놓은 것들은 괜찮은가요. 우리를 도와줘도 괜찮은가요.

희미한 걱정이 느껴졌다. 산은 돌아보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원.”

그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여울과 서란만이 남았다. 일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서란은 어쩐지 여울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둔 채 그에게 쉬러 가라고 말을 꺼내려 했다. 그녀보다 그가 빨랐다.

“전에 제게, 마니식이 중조 대부터 생긴 것이라 하신 적이 있지요.”

“……그랬었느니.”

“산이 보주께 투자하겠다고 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여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일어났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서란에게 인사를 했다.

“험한 여행이 될 터이니 체력을 보중하십시오.”

“너야말로 제발 무리하지 말거라.”

그녀는 끝까지 그를 보지 않았다. 여울이 물러났다.

그녀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산이 쓰고 있는 본채 쪽으로 향했다.

한 발 앞서 나갔던 산은 입구에 서서 청화에게 무언가 시키고 있었다. 여울이 다가오자 그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절시켜서 눕혀 놔야 좀 쉬겠냐?”

“부탁할 게 있다.”

“뭔데.”

“마니전에서 보주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다. 알아봐 줄 수 있겠나?”

산은 묘한 눈으로 친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나도 알아볼 생각이었으니 별 상관은 없는데, 너…….”

산이 그간 보아 온 여울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보주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해도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고 답을 주지 않으면 포기한다. 그게 그가 아는 여울이었다.

아무래도 배 위에서부터 느꼈던 찝찝한 예감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그는 덤덤한 여울을 아래위로 쓱 훑어보더니 손짓을 했다.

여울이 반사적으로 가까이 오자 산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란아, 예쁘지?”

여울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산을 보았다. 산은 태연히 경고했다.

“그래도 덮치지는 마라. 내 여동생이거든?”

“…….”

“이 새끼 왜 대답을 안 해? 이놈 자식이?”

“언제부터 여동생을 챙겼다고.”

“어제부터. 그런데 친구야, 너 지금 말 돌렸냐?”

여울은 산의 손을 밀어내고 돌아섰다. 산이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말하다 말고 어딜 가?”

“쉬러.”

“와, 쉬랄 땐 안 쉬더니?”

“…….”

“야! 대답 안 해?”

“쉰다고 했잖아.”

“그거 말고! 란아 말이야!”

“답할 가치가 없다.”

여울이 멀어졌다.

산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채 그가 별채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에 있던 청화가 목을 빼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설마가 뱀 잡게 생겼어.”

“네?”

“아무래도 심상찮아.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알아듣게 말해요, 대행수.”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다. 할 거 많으니 일이나 하자.”

산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일이 많아 낭비할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

각자의 하루가 흐르고 해가 저물었다.

서란은 서간집을 팔락팔락 넘겨보고 있었다. 여울이 이것들을 봤다고 생각하니 낯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힘이 빠진 손으로 그것을 덮었다. 뉘엿뉘엿한 창밖을 보았다.

이무기의 향이 유지되는 시간은 약 하루. 밤이 되면 여울이 찾아올 것이다.

이전에는 별 생각이 없었던 일이 지금은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가 답서를 보아서? 아니면 어제의 입맞춤이 달랐기 때문일까. 혹은 그가 드러낸 과거 탓일지도.

여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피하고 싶었다.

서란은 입술을 깨물고 고심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할 시간에 그냥 빨리 하고 잠드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강행군이 이어질 터다.

그녀는 마루를 가로질러 여울의 방 앞에 섰다. 망설이다간 달아날 것 같아 곧바로 그를 불렀다.

“여울,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란은 문을 열었다.

여울이 약과 붕대를 펼쳐 놓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려 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내저어 그를 말렸다.

“붕대를 갈려던 것이냐? 혼자서?”

“예.”

“그걸 어찌 혼자 하고 있느냐. 부상을 입은 곳은 등일진대.”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와주마. 청화에게 기본은 배웠단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그녀를 가만 바라보았다.

충동적으로 말해 놓고 서란은 아차 했다. 지금 그와 있는 것은 뭔가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계속 붙어 있어야 하니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서란은 스스로를 그렇게 다잡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여울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가 옷깃을 내렸다.

서란은 등잔에 불을 붙여 가까이 끌어당긴 후 그의 뒤에 앉았다. 등을 가로질러 매어 두느라 상체를 거의 다 차지한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짙은 갈색의 피부 위로 길고 흉한 상처가 드러났다. 봉합을 했는지 실이 보였다. 붕대를 풀고 직접 눈으로 본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피딱지가 엉겨 있었다.

서란은 숨을 들이켰다.

“내일 출발하는 것, 무리하는 게 아니냐?”

“이무기는 인간보다 회복 속도가 빠릅니다. 내일 아침에 실밥을 제거할 것이니 출발하는 데엔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느냐…….”

그녀는 깨끗한 면 수건을 약물로 적셔 상처 주위를 꼼꼼히 닦아 냈다. 그러곤 고약을 덧발랐다. 상처를 건드릴 때마다 아파할까 봐 긴장한 서란과 달리 여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무리로 새 붕대를 들어 상처 위로 감았다. 등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 탓에 그를 뒤에서 끌어안는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녀는 신중하게 움직이느라 온 신경이 쏠려 알아채지 못했지만, 여울은 잠깐 호흡을 멈추었다. 그녀가 떨어지고 나서야 호흡이 되돌아왔다.

“불편하진 않느냐?”

매듭을 짓고 물러난 서란이 물었다. 여울은 옷깃을 추스르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가 돌아앉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사이에 정적이 들어찼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와 단둘이 있는 게 불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서란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 온 목적을 말했다.

“그럼, 향을 지워 주렴.”

여울이 찰나 굳었다.

긴 숨이 흐른 후에 그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굉장히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등불에 비친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지기 직전에 서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긴장이 온몸을 죄었다.

턱에 여울의 손이 와 닿았다. 검을 다루는 만큼 그의 손끝은 거친 편이었다. 그 손가락이 턱선을 덧그리며 감싸쥐었다.

새끼손가락이 목덜미를 스쳤다. 턱을 들어올렸다. 얼굴에 그가 내쉬는 숨이 닿아 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것을 후회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촉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뜨기도 민망했다.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입술이 접했다. 서늘한 입술이었다.

그녀와 닿은 곳부터 그의 체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벌어진 그녀의 아랫입술을 그가 머금듯 물더니 이윽고 안으로 파고든다.

보통은 그녀가 그의 혀 아래에 고여 있는 타액을 받아 오곤 했다. 지금 그녀의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서란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가 건네주는 타액을 간신히 받아 삼켰다.

어제의 거친 입맞춤과 달리 더디고 절제된 행위였다.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이자 그가 깔끔하게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을 받치고 있던 손이 볼을 닿을 듯 말 듯 어루만지며 떨어져 나갔다.

고르지 못한 호흡이 튀었다.

서란은 눈을 떴다. 미묘하게 흐트러진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는 이상한 표정을 짓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익숙한 미소로 얼굴을 덮었다. 그에게 묻는 목소리 끝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지워졌느냐?”

여울이 손을 뻗었다. 손끝이 그녀의 귓불을 스치며 귀 아래의 연한 살을 훑고 내려간다. 손가락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가 닿는 곳에 피가 몰리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훑은 손을 코에 대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예.”

짧은 대답이 바람 소리처럼 새었다. 손 너머로 보이는 눈이 심유했다. 직시하는 눈동자에 붙들려 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서란은 그대로 일어났다.

“내일 보자꾸나.”

“보주.”

황급히 돌아서는 그녀를 그의 부름이 붙잡았다. 그녀가 멈칫 섰다. 긴 머리카락이 팔랑거리다가 내려앉았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보주께…… 접문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입니까?”

어제만 해도 쉽게 대답할 수 있던 질문이었다. 그저 향을 지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몇 번이고 속으로 가다듬고서야 태연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무슨 뜻이냐?”

여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란의 등 뒤로 그가 다가왔다.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그녀의 앞으로 향해 문을 열었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커다란 손이었다.

“편히 쉬십시오.”

낮은 음성과 함께 그가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서란은 그가 열어 준 문 밖으로 나갔다. 몇 걸음 되지 않는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자신의 방문 앞에 선 후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여울은 문틀을 잡고 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가 묵례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연 다음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여울은 창호지에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등불이 꺼지고 그녀의 그림자가 어둠에 묻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고 쓰렸다. 눈부시게 빛나면서 질척하게 가라앉는다.

한 가지 감정이 이렇게 다양한 색채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자드락이 야릇하게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지고,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해질 거다.〉

이무기에게 예지 능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이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이미 이루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여울은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창호지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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