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20화 (20/70)

20. 변화2016.05.08.

“그래서 서간을 보내지 못했었습니다.”

저녁에 시작된 이야기는 늦은 밤중에야 마무리되었다.

서란은 동요를 보이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가 담담하게 늘어놓은 말들 속에서 묻어나는 것들 때문에 어지러웠다.

무엇보다도 죽어 가던 미향이 여울에게 퍼부었던 감정들이 실체를 가진 것처럼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진득한 원념은 그녀가 인내로 누르고 체념으로 덮어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어 버린 어둠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회고하며 재차 깨달았다. 그가 미향에게 배운 것은 연정이 아니었다.

반면 미향이 여울에게 보였던 것은 연정이 맞았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던 시선에 담겨 있던 열기는, 서란을 보며 그의 속에 차올랐던 것과 유사했다.

이것이 진짜 ‘연정’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깨닫는 순간 그의 세상은 다른 색채로 물들었다. 비어있던 속에 다른 갈망이 차올랐다.

마주 보고 앉은 채 그들은 길게 침묵했다. 그 침묵을 서란이 깼다.

“참으로…… 힘들었겠구나. 이런 기억을 꺼내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떨림을 감춘 차분한 위로였다. 여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해 말한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보주의 귀를 더럽혔을까 저어됩니다.”

“더럽히다니,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아둔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벽미향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허나 지금의 그는 이해했다.

미향은 이무기니 인간이니, 그런 걸 따지기 이전에 마음이 움직여 버리는 게 연정이라고 소리쳤었다. 진정 연정을 품으니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저 좋았다. 그게 모든 것을 우선하여 온몸을 지배한다.

이제야 알았다. 그가 떠나던 밤에 미향이 왜 무너져 내렸는지를. 꺼지라던 외침들이 사실 자신을 좀 봐 달라는 절규였음을.

인간은 거짓말을 한다.

때로 그것은 진심보다 절절한 거짓이었다. 서란이 여울에게 그러했듯이.

“보주께선 스스로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다 하셨습니다. 허나 저는.”

감정이 언어로 바뀌지 않았다. 알지 못할 때는 그토록 쉽게 말했던 연정이 한없이 무거워져서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 이면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퍼부어진 연정이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그는 알고 있다.

자신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이 감정은 얼마든지 일그러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벽미향처럼.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열기가 심장을 채우고 목 안을 태운다. 여울은 그것을 삼켜 버리고 다른 말을 했다.

“보주를 알고 싶습니다.”

서란은 멍하니 제 교룡을 응시했다. 그는 그녀가 처음 보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의 낮은 음성이 귀로 파고들었다.

“제가 상처받을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숨기지 마십시오. 그건 제가 판단할 일입니다.”

“……자드락을 보았지 않느냐.”

“그래서 그가 제 보주를 잊고 싶어 하더이까. 잊기 싫어 몸부림쳤겠지요.”

서란은 자드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이거 부를 때 가사를 붙여서 부르지 않아. 걔가 불러 줬던 걸 까먹고 싶지 않거든〉

여울의 말대로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교룡을 당신의 반신이라 여긴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게 여기시면서 어찌 대하는 것은 남을 대하듯 하십니까.”

“나는, 너를 얽어매고 싶지 않다.”

“저는 얽매이고 싶습니다.”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서란이 살짝 입을 벌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담고 있다. 그녀를 보는 여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맹약식을 마치자마자 떠난 주제에 이제 와서 이리 구는 것이 당황스러우실 줄 압니다. 제멋대로인 놈이라고 벌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벌하다니, 내가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는 처음부터 네게 세 번만 명하겠다고 했었다. 그것만 해 준다면 너는 자유롭게…….”

“제게는 이제 자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교룡입니다. 그러니 저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두려워한다고.

서란은 여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하나 더 두려운 점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외면할까 봐 두려웠다.

누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처받지 않겠지만 여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그녀의 교룡이었다.

그가 그녀를 꺼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거리를 두었다. 정들지 않도록.

그건 그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방법이기도 했다.

냉대와 경계는 익숙했다. 이해타산적인 관계도 괜찮았다.

그녀에게 정을 주고 조건 없는 호의를 보인 건 두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스승님. 어미는 죽었고 스승은 잃었다.

그녀의 곁에 남은 것은 여울뿐이다. 그녀에게는 아무도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을 내보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서란은 더 이상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서란은 신음처럼 말했다.

“나를 알아서 뭘 하려고? 나는.”

네 상상보다 더 이기적이고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서란은 뒷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쓴 물을 들이키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안에는 절망이 고여 썩어 가는 늪이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들여다보지 않는 늪이다.

여울이 환멸을 느끼며 손등을 긋게 만든 망가진 미향보다 더 악취가 날지도 모른다.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 본 적이 드물다. 꺼내 보지 않았기에 그것이 어떤 모양일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한다. 여울은 그녀의 핏기가 가신 흰 얼굴을 가만 지켜보았다.

속눈썹이 떨리는 것까지 세세하게 보였다. 불빛에 드러나는 선이 아스라했다.

긴장한 모습이 안타깝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목울대에서 맥박이 뛴다. 닿고 싶으나 닿으면 스러질까 무섭다. 숨소리조차 의식하며 고르게 된다.

그녀가 보내지 않았던 답서들 속에서 읽은 문장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바다가 보고 싶어.

그의 물음에 웃으며 답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를 쉬이 잊길 원했느니라.

알 것 같다. 애틋하다는 건 이런 감정이었다.

내부에서 흘러넘친 마음이 저절로 얼굴 위로 떠오른다. 굳어 있던 얼굴이 흐릿하게 풀어졌다.

“그저 알고 싶습니다. 그것으로는 안 되는 겁니까?”

“후회할지도 모른다.”

“후회라도 기꺼울 것입니다. 보주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서란이 입을 다물었다. 여울은 기다렸다.

그녀는 몇 번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창 밖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여울이 새까맣게 어둠이 내린 사위를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란의 막막한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늦어졌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가 단정히 읍했다. 등을 가로지르는 부상 때문에 아플 게 틀림없는데 그런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서란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허리를 편 그가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속삭였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시면 제가 직접 내어서라도 받겠습니다.”

부드러운 협박이었다. 저음이 귀를 타고 흘러 떨어졌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서란은 굳어 있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심정이 소용돌이쳤다. 그 중에는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도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비슷하지만 좀 더 붉고 보드라웠다.

*

“어이쿠. 소환장이라. 청화야, 너 일처리 제대로 한 거 맞냐?”

“전 최선을 다했어요. 애초에 수배령 내려진 사람들을 빼내서 튀는데 안 걸리길 바라는 게 무리 아니에요?”

두루마리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던 청화가 툴툴거렸다. 산은 못마땅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소환장을 노려보았다.

마니를 납치한 참람한 이무기를 추적하기 위해 임명된 어사(御使) 제녕교룡 온의 이름으로 발부된 것이었다.

금산상단 상단주 류산은 의금부로 출두하라.

날아갈 듯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 망할 걸 어떻게 처리한다…….”

산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청화가 그를 흘긋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산이 불쑥 말했다.

“내 귀여운 동생이랑 배은망덕한 뱀 친구는 뭘 하고 있더냐?”

“별채에 그대로 계실 거예요.”

“그으래.”

“……대행수, 지금 뭐 하세요?”

소환장을 접고 있던 산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다 접은 소환장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짠, 거북이. 어떠냐? 잘 접었지?”

“…….”

“안 미쳤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산이 씩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청화가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등 뒤에 따라붙었다.

별채는 가까웠다. 마루에 여울이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산은 그를 보고 낯을 구겼다.

“너, 부상자라는 자각이 있긴 하냐?”

“곧 나아.”

“안정과 휴식이 그 속도를 높여 준다는 상식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쉬는 중이다.”

“퍽이나.”

인상을 쓴 산이 서란의 방 쪽으로 턱짓했다.

“란아, 안에 있지?”

여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아챈 산이 대놓고 혀를 찼다.

“안 따돌려, 인마. 너도 따라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얘기 좀 해야겠거든.”

산은 여울을 지나쳐 마루에 올라가더니 대뜸 서란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책을 펼쳐 놓았지만 눈은 책을 보고 있지 않던 서란이 흠칫 놀라 문 쪽을 보았다.

산이 거침없이 들어오더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뒤로 여울이 소리 없이 들어왔다.

서란은 부러 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산을 응시했다. 산이 탁자 위에 어설프게 접은 거북이를 올려놓았다.

“이게 뭐게?”

“……거북인가요?”

서란이 눈을 깜박였다. 황당해서 풀린 표정이 그녀 나이답게 앳되다. 산은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그것을 서란 쪽으로 밀었다.

“너 오래오래 살라고 접었지.”

그녀는 뭐라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거북은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이다. 별것 아닌 듯 간단히 던져진 농이 쿵 하고 가슴 안쪽을 쳤다.

접힌 종이에 글자가 비쳐 보였다. 그것을 보자 일순 잃었던 평정이 되돌아왔다.

서란은 거북을 집어 펼쳐 보았다. 소환장. 그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있던 여울도 그것을 보았다.

산이 턱을 괴고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교룡들이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도하 근처에 있는 우리 상단 소유의 건물을 전부 관아를 동원해서 뒤진다면 길어야 사나흘이겠지.”

“일반 객잔에 머무는 경우는, 고려할 필요가 없겠군요. 수배령이 내렸으니.”

“수배령을 보지도 못할 촌구석이 아니고서야. 저 녀석이 부상을 입었으니 멀리 가진 못할 거라는 게 뻔하고.”

산이 심드렁하게 턱짓했다. 여울이 차분히 말했다.

“저는 당장 움직여도 괜찮습니다.”

“괜찮긴 개뿔이 괜찮대. 서 있지 말고 좀 앉아라, 망할 놈아.”

산이 앉은 채로 다리를 뻗어 여울의 오금을 걷어차려 했다. 여울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피했다. 산이 투덜거렸다. 서란이 입을 열었다.

“무리하면 덧나기만 할 것이다. 앉거라. 매양 이리 말을 해야겠느냐?”

그녀는 그에게 말하면서도 그를 보지 않고 있었다. 여울은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길게 그녀에게 머문다. 서란은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산이 그 광경을 보며 가느스름하게 눈을 치떴다.

얘네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뭐지.

산은 그들을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늦어도 모레엔 여기서 나가야 할 거다. 생각해 둔 바는 있느냐?”

“오라버니는 어찌할 작정이세요? 소환장이 떨어졌는데.”

서란이 도로 되물었다. 산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먼저 물었거든? 네 생각부터 들어 보려고.”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시선을 접힌 자국이 남은 소환장에 둔 채 그녀가 여울을 불렀다.

“여울.”

“예, 보주.”

“네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느냐?”

“무엇을 물으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룡과 직접적으로 전투하게 되면 승산이 어떻게 되느냐?”

“……제압이 아니라 탈출을 목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대의 교룡들이라면 1 대 1로는 10할, 둘일 경우 물이 가까우면 8할, 물이 없으면 6할, 셋일 경우에는 5할 이하입니다.”

“그건 나를 지키는 상황을 포함한 확률이냐?”

“그러합니다.”

오만하게 들릴 법도 한 말이었다. 사람 하나를 지키면서 교룡들을 상대로 저 정도 승산이 있다니.

그러나 여울은 사실을 말하듯 단조롭게 읊었다. 서란 역시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이번에는 산을 돌아보았다.

“오라버니는 저희를 어디까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왜?”

“손에 든 패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나니까요.”

“들어 보고 결정하지. 뭐가 필요한데?”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미 생각해 본 일이었는지 막힘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우선 필요한 것은 배와 마차, 낭인 무사들입니다.”

“흠.”

“우리는 수배령이 내려진 자들입니다. 신성한 제물인 마니와 그 납치범이지요. 대부분의 백성은 우리를 신고하는 데 망설임이 없을 겁니다. 오라버니가 얼마나 상단을 장악하고 계시든 간에 말이 새지 않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 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야 그렇지. 아무도 별채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지만, 오지 말라고 명한 것 자체가 여기에 죄인들이 있다는 소리와 별로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산은 조금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행적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그럼 차라리 알려질 것을 가정하고 움직이는 게 낫습니다.”

“어떻게?”

“무사들을 고용하고 마차에 탄 채 대놓고 여기서 출발하겠습니다. 마차는 흑룡강으로 향해서 배를 타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동하는 중간에 빠져나올 겁니다.”

“빠져나와서 어딜 가려고?”

“북으로 가서 와호산맥을 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행적이 드러나도 괜찮습니다. 추적하는 자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모릅니다. 와호산맥으로 향한 것을 알게 된다 해도 창 제국으로 가려는 것이라 생각하겠지요.”

마니가 살기 위해 탈출했으리라 여긴다면 그럴 확률이 높다. 국외로 도망가면 추적이 어려워진다.

예락은 반도국이다. 달아나고자 한다면 이미 통제되고 있을 항구보다 완벽하게 통제하기엔 어려운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교룡들은 그저 바다에 도달하는 게 마니의 목표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서란의 입장에서는 바다에 가기만 하면 그 이후의 일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와호산맥 내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천으로 가겠습니다. 임천은 좌룡강을 끼고 있는 나루터지요. 좌룡강을 타고 서해로 갈 것입니다.”

“서해라…….”

“허나 우리는 배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특이한 외양 때문에 함께 다니면 눈에 띄니까요. 따라서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도움?”

“우선 임천에서 출발하는 배표를 구해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면사를 쓰고 여울과 따로 탑승하면 승객들 틈에 섞이는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요. 그 무렵에 와호산맥 너머 북재에서도 마차가 준비되었으면 합니다.”

“속임수를 쓰려는 거냐.”

“예. 이미 빈 마차라는 속임수를 한 번 썼으니 또 쓰진 않으리라고 조금쯤 방심해 주면 좋겠군요. 의심해도 아예 무시하긴 어려울 겁니다. 맞을 경우를 배제할 수 없을 테니까요. 내부를 공개하지 않은 마차가 급하게 북으로 향하면 신경이 그리로 쏠리겠지요.”

“첫 번째 마차에서 그냥 바로 임천으로 가는 게 낫지 않나. 굳이 와호산맥을 끼고 돌아갈 필요가 있어? 그들이 마차에서 빠져나온 너희가 어디로 갈지 어떻게 알겠냐.”

“홍평과 흑룡강 사이는 황무지잖습니까. 주의한다 해도 산속에 비해서 흔적이 남기 쉽습니다. 들키는 걸 전제로 움직여야 합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전제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나 당사자가 그리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되도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을 텐데. 산은 또다시 그녀에 대한 인상을 수정했다.

산이 입을 다물자 서란이 이어 말했다.

“행적을 알아냈다면 교룡들은 우리가 창으로 가려 한다 여길 것입니다. 북재의 마차를 구한 자가…….”

그녀가 문득 말을 멈췄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약간 망설였다.

“왜?”

“……금산 상단 소속이라고 살짝 드러내 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금산 상단이 우리를 도왔다는 건 드러난 상황이니까요.”

산은 그녀가 왜 망설였는지 깨달았다. 그의 입가에 모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없는 듯이 있던 여울은 내심 그녀의 적극성에 놀라는 중이었다. 도하에 이를 때까지의 서란은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밖을 잘 아는 건 그녀보다 그일 것이라며 일임하지 않았던가. 그의 능력에 대해 물을 기회가 많았지만 물어본 적이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긴 했어도 분명 이전의 그녀는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여울은 알 수 없었으나 그 변화의 바탕에는 희미하게 움튼 희망이 있었다.

산이 제시했던 희망이었다. 창의 기록에서 무언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서란은 그 희망을 애써 누르려 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포기했던 사람과 한 톨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사람의 태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본격적으로 금산 상단이 위험해지는 길이군. 안 그래?”

산이 서늘하게 물었다. 서란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보았던 거예요. 어디까지 도와주실 수 있는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