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19화 (19/70)

19. 일그러진 마음2016.05.05.

상단에서 지내는 동안 제법 요령이 늘어서 여울은 낭인 무사로 다닐 수 있었다.

소년의 외모는 여전히 장벽이었지만, 무력시위를 한두 번 해 주면 일거리를 잡는 건 가능했다.

답서 한 번 보내지 않는 보주에게 서간을 부치는 건 습관이 되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지금까지는 한 차례도 빼먹지 않았다.

떠돌면서 많은 일을 보았다. 상단주의 외동딸을 지키는 호위무사라는 신분이 있을 때와는 달랐다. 아무 뒷배가 없는 곱상한 이국 소년은 만만한 먹잇감으로 보였다.

배신을 당하고, 호의를 악의로 돌려받고, 속임수에 넘어가 죽을 뻔하기도 했다. 관아는 무력했고 공신 가문의 횡포는 도를 넘었다. 약자라고 반드시 선한 것도 아니었다.

하계는 그가 꿈꿨던 것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실제로 겪어 본 하계는 혼란스럽고 추했다.

실망이 쌓였다. 본능을 억누를 정도로 강했던 자유에 대한 욕망은 시간에 풍화되듯 사라져 갔다.

계절이 일곱 번쯤 바뀌었다.

궐로 돌아갈까. 돌아가서 보주의 곁에 머물까.

형식적으로 서간을 채우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보주에게는 그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보낸 서간들은 읽지도 않은 채 처박혔을 수도 있다.

그래도, 돌아갈까. 그런 충동이 들었다.

여울은 몇 줄 되지 않는 서간을 가만 내려다보다 마지막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보주의 곁에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써 놓고 나니 지우고 싶어지는 문장이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지우지 않고 서간을 봉했다.

그것을 보내기 위해 머물고 있던 방을 나섰다.

그 순간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찌릿한 감각이 팔뚝에서부터 퍼져 나와 전신을 흔들었다.

비늘이 부서졌다. 어디서 부서졌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미향에게 주었던 비늘이었다. 도와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는 서간을 품에 집어넣고 곧바로 용미로 향했다. 가능한 빠르게 이동했다. 마침 용미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상단 본부에서는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담을 넘었다.

미향의 기척을 익숙하게 찾아내었다. 생기가 넘쳤던 그녀의 기척은 꺼질 듯이 약해져 있었다.

경비 무사들의 시선을 피해 심처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상단 안주인의 처소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가 창문을 두드렸다.

“미향.”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놀라는 게 느껴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울? 여울이야?”

“그래.”

“진짜 왔네…….”

쉰 목소리가 울음으로 잠겨 들었다. 그녀가 들어오라고 했다. 여울은 문고리를 소리 나지 않게 부수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죽음의 냄새가 약 냄새와 뒤섞여 풍기고 있었다. 미향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산산이 부서진 비늘이 종이에 싸인 채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너…….”

“오지 마. 보이기 싫어.”

미향은 팔을 뻗어 침상 근처의 등잔불을 꺼 버렸다. 언뜻 보이는 팔은 나뭇가지 같이 말라 있었다.

여울은 석상처럼 굳었다.

어둠 속에서 이불을 조금 내린 그녀가 그를 보았다. 밖의 화톳불이 창호지를 뚫고 어름어름 비쳐 그의 모습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이무기니까.”

“진짜 처음 봤을 때랑 똑같이 아름답고 어리네. 요마 같아.”

그녀의 목소리는 사포를 긁는 것처럼 쉬어 있었다. 여울이 물었다.

“어디 아픈가?”

미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불을 움켜잡은 그녀의 손가락은 바싹 말라 자벌레처럼 보였다.

“아프냐고? 너 있잖아, 내가 부행수랑 혼인하면 행복해질 거라며? 인간끼리니까.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

“그런데 어떡하지? 이런 꼴이 됐어. 너는 똑같은데, 나는 추해졌어!”

미향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이불을 팽개친 그녀는 병색이 완연했다. 말라붙은 몸에는 생기가 없었다. 불과 2년여 만에 시들어 가고 있었다.

여울은 숨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

“이제야 궁금한가 보네? 그동안 왜 안 찾아왔어? 내가 꼴 보기 싫다던 말을 진짜 믿었어? 내가 싫다고 해도 찾아왔어야 하잖아! 넌 그랬어야 했어!”

그는 여전히 거짓말과 진실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외침을 곧이곧대로 듣고서 그녀의 앞에 다신 나타나지 않았었다.

미향은 그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여울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부행수 개자식 때문이야. 아마 아버지도 그 개자식이 죽였을 거야. 그 새끼, 숨겨 둔 마누라가 있었어. 나랑 혼인해서 벽씨 성 얻고 나니 이제 내가 필요 없었겠지. 그랬겠지. 내가, 병에 걸렸대. 병은 무슨. 이건 다 독이야! 그 새끼가 독을 탄 걸 거야!”

“……병이라고?”

“어쩔 거야! 네가 나보고 행복해질 거라며! 너 때문이야! 네가 나를 배신하고 버려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 거야!”

미향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여울은 창백하게 질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숨을 내뱉고는 무겁게 말했다.

“치료하러 가자.”

“필요 없어! 난 알아. 난 곧 죽어. 그러니까 이건 유언이야, 여울.”

섬뜩하면서도 나긋한 음성이었다. 여울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저었다. 죽음의 냄새를 부정했다.

“나가서, 의원을 찾아가면.”

“늦었어, 늦었다고. 구해 주려면 그때 구해 줬어야지.”

미향이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그렇지?”

“……그래.”

“그럼 내 복수를 해 줘.”

해골처럼 마른 얼굴에 눈만이 형형했다. 미향은 빠득 이를 갈았다.

“다 죽여 버려. 부행수도, 그 마누라란 것도, 전부 다 죽여 줘. 다 죽여 버리란 말이야!”

“그건…….”

“연인의 유언도 못 들어줘? 나를 구해 주지도 않았으면서! 네 연정은 고작 그 정도야?”

뼈와 가죽만 남은 팔이 그를 얽어매었다. 여울은 움직이지 못했다. 미향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약속해! 다 죽여 줄 거라고! 내 복수를 해 줄 거라고 약속해!”

이무기의 약속은 어길 수 없는 맹세다. 그는 몸부림치는 그녀를 먹먹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밝게 웃던 소녀가 이렇게 된 건 그녀의 말대로 자신 때문인 걸까. 연정이란 말이 숨통을 틀어막는다. 질척한 늪이 차올랐다.

미향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에게서 죽음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자 특유의 기괴한 기운이 돌았다.

“이번에도 버릴 거야? 네가 버려서 내가 이 꼴이 되었는데도? 유언인데도 못 들어주겠다고?”

“진정해라. 일단 여길 나가서.”

“진정?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진정하게 생겼어? 나는 지금 모든 게 끔찍해! 나가 봤자 무슨 소용이야! 난 죽는다고! 그러니까 복수라도 해 달라는 거잖아!”

생기를 잃은 몸에 남은 건 독기와 분노뿐이었다. 그를 움켜쥔 그녀의 손이 팔뚝을 할퀴었다.

고여 썩어 버린 감정이 그녀에게 붙잡힌 팔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듯했다. 미향은 문드러질 듯한 절규를 내뱉었다.

“전부 죽여 버려! 내 마지막 소원이야!”

여울이 알던 소녀는 거기에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망가진 그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절규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답해 주었다.

“……알겠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주마. 그러니 일단 나가자.”

미향의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매달렸다.

여울에게 미향을 몰래 데리고 나오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용미의 객잔을 하나 잡고 거기에서 미향을 돌보았다.

그동안 모은 돈을 아낌없이 써서 의원을 불러 왔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녀는 하루하루 말라 갔다.

매일 조금씩 죽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미향은 그 모든 고통을 여울에게 전가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어. 너는 연정을 배신했어. 나는 죽게 될 거야. 내가 죽으면 그 놈들에게 복수해 줘. 약속한 거지?

혼자 죽는 건 억울해. 살고 싶어. 다 죽여 줘.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해 줘야 해. 죽을 연인의 소원도 못 들어주는 건 아니지?

네가 버려서 내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데! 맹세해, 복수해 주겠다고!

그녀는 발작하듯 패악을 부렸고 끊임없이 복수를 확답 받았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여자는 제 죽음을 무기로 휘둘렀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폭언이 퍼부어졌다.

여울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독을 삼키는 것 같은 나날이 흘렀다. 이무기는 살의를 배웠다.

벽미향은 석 달 후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여울은 그녀를 화장했다.

그는 검을 든 채 무작정 벽씨 상단의 본부로 향했다. 약속을 지켜야 했다.

막는 자를 모조리 도륙했다. 죽이고 싶었다. 무엇이든 부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미향이 그에게 쏟아 부었던 새카만 감정들이 숨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것을 토해 놓아야 했다. 검을 쥔 손잡이가 피로 진득해졌다.

마침내 미향이 원했던 대로 부행수와 그가 들인 아내까지 베었다.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그제야 멈췄다.

더러워진 검은 눈에 새빨간 풍경이 비쳐 들었다. 일방적인 학살의 광경이었다.

약속을 지킨다는 핑계로 제 안에 쌓인 살의를 배출한 결과였다. 평범한 이무기라면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그는 천벌을 기다리듯 피바다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이게 무슨 개판이야.”

생소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울은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앳된 청년이 덩치 큰 호위무사를 거느린 채 입구에 서 있었다. 벽씨 상단과 거래하러 왔던 류산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겁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무기? 아니 미친, 화예교룡 아니야?”

화예교룡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여울은 교룡이었다.

그는 보주와 약속을 했다. 세 가지 명령. 아직 둘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지켜야 했다. 이 자리에서 달아나기 위해 검을 고쳐 쥐었다.

그 동작을 본 산은 슬쩍 호위무사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가 고개만 쭉 빼서 말했다.

“야, 야, 검 놔라. 무섭게. 나 왕족이야. 교룡이 왕족을 해치면 쓰나.”

여울은 반사적으로 산의 눈동자를 살폈다. 주홍빛이 아니었다.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눈을 봤다는 걸 안 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의주가 없긴 해도 왕족은 왕족이라고. 너도 여의주 없는 온녕대군 소리는 좀 들어봤을 건데? 그게 나야. 내가 온녕대군이 아니면 어떻게 널 보자마자 화예교룡인 걸 알아보겠어? 진정하고 대화를 좀 하자, 응?”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여울은 지쳐 있었다. 그가 검끝을 늘어뜨렸다.

어쩐지 온몸이 뜨거웠다. 탈피가 시작되는 신호였다. 성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울을 거둔 산은 탈피라는 말에 은신처를 구해 주었다. 산중에 있는 깊은 동굴이었다. 어린 청화가 동굴 입구에 생필품을 날랐다.

여울은 동굴 안에 틀어박혔다.

오랜만에 본체로 돌아갔다. 거대한 검은 뱀은 똬리를 튼 채 자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비늘이 올올이 일어선다. 탈피는 열병과도 비슷했다. 열에 들뜬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웃고 있는 미향이 그에게 손을 뻗는다. 웃음은 곧 소름 끼치는 비명으로 변했다.

닿은 곳이 썩어 들어가는 환상이 보였다.

그것을 덮으며 어린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주한 주홍빛 눈동자가 말한다.

〈아니, 필요 없다〉

〈옆에 머물지 말거라〉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검은 마니전 앞에 서 있는 보주는 인형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세 번만 명령하겠다〉

보주의 명령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저에게 무엇을 시키실 작정입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홀로 되뇐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서간이 쌓여 간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죽었고 감정은 지긋지긋했다.

7일 밤낮이 지났다. 몸을 불사르던 열기가 사라졌다. 마지막 탈피가 끝났다.

뇌리를 메우던 환상들이 어느 순간 깨끗하게 사라졌다. 명료한 이성이 돌아왔다.

여울은 느리게 눈을 떴다. 심호흡 한 번에 온몸에 힘이 돌아왔다. 거울처럼 깨끗한 검은 비늘을 두른 뱀이 허물 더미에서 머리를 들었다.

이제는 본체보다 익숙한 인간의 태를 취했다.

시야가 높아져 있었다. 손발이 커졌다. 소년은 사내가 되었다.

길게 자라 엉킨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웠다. 여울은 기를 일으켜 머리를 잘라 버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실타래처럼 떨어져 내렸다.

청화가 두고 간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다 매끈해진 손등이 눈에 띄었다. 미향의 자살을 막다 생겼던 상처는 흔적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가 겪은 일과 저지른 짓이 모두 꿈에 불과했다는 듯이.

한쪽에 여울의 짐이 챙겨져 있었다. 그것을 뒤적이던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감촉이 걸렸다.

보내지 못한 서간이 있었다. 용미로 가서 미향에게 휘말리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봉해진 것을 뜯어보았다. 형식적인 글들 아래에 덧붙인 문장.

보주의 곁에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그 문장을 쓸 때의 그와 지금의 그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 느껴졌다. 그는 서간을 구겨 버렸다.

짐들 사이에서 검을 찾아 뽑았다. 망설임 없이 손등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대로 힘을 주어 그었다. 생생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무표정하게 상처를 만들었다.

“뭐 하는 거야? 돌았냐?”

가냘픈 비명 소리와 함께 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화가 비명을 지르며 산의 뒤에 숨어 있었다.

산은 질린 표정으로 여울을 보았다. 여울은 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기억하려고.”

“뭘?”

“내 어리석음을.”

“뭔 헛소리야.”

여울은 피가 흐르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환멸, 공포, 피로, 살의, 죄의식. 검게 차올라 숨을 틀어막던 느낌.

잊을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경고를 남겨야 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

“흐음.”

산이 완연한 성인으로 보이는 여울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는 청화를 토닥여 내보내고는 여울에게 손짓을 했다.

“술이나 한잔할까.”

여울이 어두운 눈으로 산을 돌아보았다. 산은 씩 웃었다.

“술 못해? 복잡한 심사를 태워 버리기엔 아주 그만인데. 아, 싫어도 따라와. 은신처를 마련해 준 내 은혜를 갚아야 할 거 아냐.”

여울이 탈피를 하는 동안 산은 이미 조사를 끝냈다. 벽씨 상단주의 금지옥엽이었던 벽미향과 사미국 출신 여울에 대한 이야기.

상단주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부행수와 벽미향의 혼례. 병에 걸린 벽미향. 석 달 전 일어난 벽미향의 실종. 여울이 벽씨 상단에서 벌인 학살까지.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만 조합해도 어느 정도는 상상이 갔다. 조사와 함께 뒤처리를 하고 벽씨 상단을 집어삼킬 준비를 했다.

여울이 본부에서 가로막는 자들을 모조리 도륙한 덕에 거대한 상단은 수뇌를 완전히 잃었다.

산은 머리 잃은 거인 정도는 길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 정확한 사실을 여울에게서 알아내야 했다.

사실 그냥 인간이었다면 관아에 고발하여 치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무기였다.

왕족으로 태어났음에도 산이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이무기. 이무기답지않은 짓을 저지른 자. 산은 그에게 아주 관심이 많았다.

호기심 어린 접근이 진심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에게 마음을 터놓아도 안심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는 처음이었다. 그는 여울이 마음에 들었다. 친우가 되고 싶었다.

산은 여울이 흘린 단편적인 말과 드러난 사실로 벽미향과 얽힌 일을 대략적으로 짐작했기에 그에게 무리하게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환멸에 빠져 있는 그에게 은혜를 핑계로 끊임없이 일을 시켰다. 평범한 사람들과 부대끼게 만들었다.

경계하며 날을 세우던 여울은 조금씩 무뎌졌다. 인간들이 모조리 끔찍하지는 않았다. 산에게도 제법 마음을 열었다.

그럼에도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여울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외면했다. 그것은 결국 습관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여울은 보내지 못했던 서간을 다시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가 서간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보주는 그를 찾지 않았다.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제게 관심이 없습니까? 보주께는 교룡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까?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제 안에서 무언가 변한 것 같습니다. 감정이 두렵습니다. 저 자신이 두렵습니다.

마음속에 있던 갈망이 죽어 버렸습니다.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잘못 태어난 이무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울은 빈 종이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그는 느리게 붓을 들었다.

속내는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의무적이고 표면적인 글이 서간을 채웠다.

답서를 받고 싶습니다.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그 문장이 떠올랐다. 붓이 허공 중에 멈추었다. 여울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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