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거짓 연정2016.05.01.
여울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미향은 꿀꺽 침을 삼키고 조곤조곤 말했다.
“네가 자각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너는 둔하니까 내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영원히 모를 것 같단 말이지. 너, 나보다 좋아하는 여자 애 있어? 없잖아?”
그녀의 말에 그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은 검은 마니전을 뒤로 하고 서 있던 자그만 보주의 모습이었다.
〈너는 내 곁에 있고 싶으냐?〉
그리 묻던 조그만 얼굴. 어딘가 어색하던 웃음.
여울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미향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그를 잡아당겼다.
“너 지금 다른 애 생각했지! 나랑 있는 게 좋다면서. 걔랑 있는 거랑 비교하면 어때?”
미향은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울에게 관심을 가진 소녀는 많았다. 벽씨 상단 금지옥엽이 열을 올리고 있으니 나서질 못할 뿐이었다.
그것을 아는 미향은 도대체 어느 계집애가 자신 몰래 그에게 접근했나 머릿속으로 후보를 추리고 있었다.
여울은 보주에 대해 생각했다. 맹약식을 하고 바로 빠져나왔으니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서간을 보냈지만 답서는 오지 않았다.
그녀보다 미향과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다. 미향 쪽이 더 편할 수밖에 없었다.
“너와 있는 게 더 편하다.”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있는 게 더 좋다는 거지?”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울이 끄덕였다.
미향의 얼굴이 봄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역시 넌 날 좋아하고 있는 거야. 자기 마음도 모르다니, 하여간.”
미향이 여울의 품에 파고들었다. 안겨 들며 대담하게 얼굴을 가까이 댄다. 고운 소녀가 볼을 붉히고 미소지으며 매달렸다.
“아니라면 나를 밀쳐 내 봐.”
여울은 혼란스러웠다. 소룡전 밖의 세상은 너무나 복잡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
벽미향은 그런 그를 도와주고 이끌어 준 소녀였다. 친근하게 달라붙고 당돌하게 말하는 건 그가 아는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알게 모르게 겉돌던 여울의 곁에 대놓고 엉기던 어린 이무기. 야로. 여울은 거리낌 없이 다가오던 야로를 제법 아꼈다.
그 아이처럼 느껴져서 미향을 밀쳐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여울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우물 같은 눈이었다. 그는 그녀를 마주 안아 주지는 않았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미향은 웃었다. 그녀는 조금 더 대담해지기로 했다.
“입 맞춰 줘.”
“……?”
“날 사랑하잖아? 나도 네가 좋아. 그러니까 우린 연인이 되는 거야. 그 시작으로 입맞춤을 해 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미향처럼 친밀한 여인은 처음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딱히 그녀와 입 맞추고 싶진 않았다.
그가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자 미향은 풀이 죽었다.
“싫어? 그럼 여울은 내가 싫은 거네.”
그녀가 싫은 것과 그녀에게 입맞춤하기 싫은 것은 별개다. 당연한 것인데도 그는 그것을 구별하는 법을 몰랐다.
친애의 정과 연정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감정에 서툰 그는 백지에 가까웠다. 그 위에 미향이 새기듯 말한다.
“내가 싫지 않고, 내가 행복하길 바라고, 나랑 있는 게 제일 좋다며. 그게 연정이야.”
미향은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확신하게 만들었다.
여울에게 가장 특별한 소녀는 그녀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미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발돋움했다. 그에게 입을 맞췄다. 당황한 그가 물러나려 했다. 미향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이제 우린 연인이 된 거야, 여울.”
사랑에 빠진 소녀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직 소년인 이무기는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이 만난 지 1년이 흐른 무렵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2년이 흘렀다.
소녀는 여인으로 성장했다. 미향은 앳된 티를 거의 벗어 버렸다. 그에 비해 이무기는 변하지 않았다.
가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있었으나 긴 세월은 아니었기에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여울은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고 연인이라 주장하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아버지인 벽경환까지 공인한 상태였다.
상행을 돕거나 요마를 퇴치하며 여울이 뛰어난 무위를 선보여 그에 대한 잡설도 수그러든 상태였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향은 조금씩 지쳐갔다. 그녀는 여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아꼈다. 다만 남녀 간의 연정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남자로서의 욕망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미향은 그와 함께 있으면 두근거려 죽을 것 같은데, 그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와 그녀는 연인이라기보다 남매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확신한 날 미향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이라 해도 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관례를 치르면 혼례를 할 작정이었다.
혼례까지 치르고 평생을 그와 함께 살면 된다. 그러다 보면 그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날이 올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진실을 외면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미향의 관례를 두 달 앞둔 날, 상행을 떠났던 벽경환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도적을 만났다고 했다.
함께 갔던 사람들 중에 살아 돌아온 건 부행수와 몇몇 무사뿐이었다. 진실인지, 부행수가 꾸민 음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빠, 아빠……!”
아비의 시체를 보고 오열하는 미향에게 부행수가 다가왔다. 굵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대행수의 유언입니다, 아가씨.”
“유언……?”
“대행수께선 저와 아가씨가 혼인하여 벽씨 상단을 이끌어 가길 원하셨습니다.”
미향은 그 말에 순간 슬픔조차 잊고 얼어붙었다.
대놓고 언급하지 않아도 경환은 분명 여울과 미향을 혼인시킬 작정이었다. 한두 번쯤 미향에게 그런 언질을 준 적도 있다.
“아빠가 그랬을 리가 없어! 아빠는, 여울이랑…….”
“아가씨, 대행수께서 남긴 유언은 분명히 그랬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저도요. 부행수께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사들이 거들었다. 미향은 그럴 리가 없다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켰던 건 부행수와 무사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같은 증언을 했다.
오래도록 부행수로 일해 온 남자는 이미 상단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관례도 치르지 않은 소녀의 발언은 힘을 얻지 못했다.
조부는 없었고, 외가는 먼 데다 그녀를 낳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교류가 뜸한 지 오래되었다.
미향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모든 결론이 났다. 상단은 순식간에 부행수의 손에 넘어갔고 그와의 혼례일이 결정되었다.
벽씨 상단은 벽가의 상단이었다. 부행수에게 반발하던 사람들도 그가 미향과 혼인하여 데릴사위가 된다고 하자 납득했다.
그녀가 울던 사이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미향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그녀와 부행수는 열네 살 차이가 났다. 혼례를 치를 생각이 없다는 주장은 철없는 소녀의 투정으로 취급되었다.
혼례일을 통보받은 날 밤이었다. 미향은 여울을 불러들였다.
“나랑, 나랑 혼인해 줘, 여울.”
그녀는 울어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말했다. 여울은 당황했다. 미향이 그에게 다가왔다.
“나를 데리고 달아나 줘. 패물을 챙겨서, 달아나서, 우리 멀리멀리 가자. 둘이 살자. 응? 나와 혼인해 줘.”
그녀는 울음 섞인 말을 쏟아 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그에게 매달렸다.
여울은 우울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너와 혼인할 수는 없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미향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정식으로 혼담을 나눈 적은 없다. 그래도 그녀와 그는 나름대로 연인이었고, 여울에게 다른 여인이 없는 건 확실했다.
이렇게 고민조차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어째서? 나를 사랑하잖아!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그런데 왜!”
“사정이 있다.”
“무슨 사정인데! 말도 안 돼! 너는 연인을 버리겠다는 거야? 나를 구해 달란 말이야!”
미향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는 자신을 할퀼 듯이 매달리는 그녀를 받아 주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돌려 말할 재주도 없다. 여울은 오랜 고민 끝에 진실을 말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발악하던 미향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가 눈물 자국을 매단 얼굴로 그를 보았다.
불빛에 비쳐 드러나는 이질적인 동공. 뱀의 눈동자.
3년 전 처음 보았을 때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아름다운 소년이 담담하게 고백했다.
“나는 이무기다. 그러니 너와 혼인하는 건 불가능해.”
그녀는 언뜻 알아듣지 못했다. 귀에 들려온 말이 의미가 되어 인식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미향의 입술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무기? 궐에 사는, 그, 왕족들을 지킨다는 이무기?”
“그래.”
“이무기라고? 네가? 이무기는 왕족들 곁에만 있다고 들었는데?”
“내 보주께선 궐에 계신다. 나는 허락하에 밖으로 나온 것이고.”
“말도 안 돼.”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가 휘청 주저앉았다.
여울은 씁쓸했다. 이무기의 수명은 인간의 두 배가 넘는다. 노화는 죽기 직전까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과 혼인하여 산다는 건 무리였다.
그가 생각하기엔 당연한 명제였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넋을 놓고 있던 미향이 피식 웃었다.
“어쩐지. 너는 너무 강했고, 너무 순진했고, 눈동자도 이상했지. 당연한 거구나. 이무기라서 그런 거였어.”
“숨겨서 미안하다. 드러내 놓고 다닐 만한 일이 아니어서.”
“아냐, 괜찮아. 오히려 잘됐네.”
미향의 눈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그녀가 여울을 잡아당겼다.
“이무기니까 인간들 따윈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네가 인간이든 이무기든 난 상관없어.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그렇잖아? 나를 데리고 가 줘. 나와 혼인해서 살아. 네 긴 수명의 일부를 나를 위해 써 줘. 사랑하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여울은 자신을 옭아매는 감정에 질식할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갈퀴처럼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달아나게 해 달라는 건 들어줄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마. 하지만 혼인해 함께 살 수는 없다.”
“그럼 의미가 없어!”
미향은 울음을 터트렸다. 알고 있다. 여울이 그녀를 사랑한 적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깨닫는 건 고통스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향은 그에게 매달려 울부짖었다.
“사랑한다며!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거야? 사랑하는데 인간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네 연인이잖아! 내가 다른 남자랑 혼인해도 넌 아무렇지도 않아?”
“부행수는 유능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네가 내게 말했었지. 너는 인간이니까 인간과 함께 사는 게 더 행복할 거다. 내게는 교룡으로서 해야 할 일도…….”
“이상해!”
미향이 절규처럼 소리를 질렀다. 여울은 입을 다물었다.
첫 탈피를 할 무렵 다른 이무기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다들 용이 되고 싶어 하는 거지?〉
그 순간 이무기들이 그를 보던 시선을 기억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상해. 너는 비정상이야〉
그들에게 그것은 왜 숨을 쉬느냐는 것과 비슷하게 들렸으리라.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미향이 부들부들 떨며 그의 앞에 말을 쏟아 놓았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함께 있고 싶어 해. 이무기니 인간이니, 그런 걸 따지기 이전에 마음이 움직여 버리는 게 연정이라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사는 게 더 행복할 거라고? 보통이라면 그런 생각 안 해! 너는 이상해!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말해 봐, 나를 사랑하지 않아?”
눈앞에서 미향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했다.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아낀다.
그가 배운 대로라면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너를 사랑한다.”
그 음성에는 열정도 열기도 없었다. 그러나 미향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미향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이것 봐. 그런데도 너는, 나를 버리겠다는 거야?”
“나는…….”
“너는 이상해! 이무기라서가 아니야! 이럴 땐 이무기라도 괜찮으냐고 물으면서,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건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게 정상이야. 알겠어? 다른 사람이라면 너를 꺼려하겠지만 나는 이해해 줄 수 있어. 이상해도 괜찮아. 배우면 되잖아. 자, 말해 봐.”
사랑의 종류를 구별하지 못하는 그를 몰아붙였다. 여울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떼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여울은 그저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미향은 그를 올려다보다가 물러섰다. 그녀는 문갑으로 다가갔다.
아버지가 선물해 주었던 호신용 단도를 꺼냈다. 금으로 상감하고 호화로운 술을 단 물건이었다.
“끝까지 말하지 않는구나, 여울.”
“도망치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주겠다. 혼인은 무리야.”
“너 진짜 너무하다.”
그녀가 웃으며 단도를 빼들었다.
“너한테 버림받을 바엔 차라리 죽어 버릴 거야. 여울, 내가 죽는 꼴을 꼭 봐야겠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내려놔.”
여울이 당황하여 다가왔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만큼 미향이 물러났다.
흰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댔다. 값비싼 단도는 가볍게 긋기만 해도 연약한 살 따위는 쉽게 가를 듯한 예기를 풍겼다.
“다가오지 마. 진짜 죽어 버릴 거야.”
“미향.”
“혼인하겠다고 답해 줘.”
고통스러운 한숨이 흐른다. 거짓으로 답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무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지친 목소리로 설명했다.
“나는 교룡이고, 궐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다. 너와는 수명부터 달라. 혼인은 불가능하다. 부행수와 혼인하기 싫은 거라면 네가 원하는 곳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주마. 네가 어디에 있든 자주 찾아갈 테니까.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여울로서는 최선의 설득이었다. 단도를 쥐고 있는 미향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울었다. 정말로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녀가 가르친 감정을 연정이라 믿었을 뿐.
그는 이 와중에도 침착했다. 그와 그녀의 선명한 온도차가 적나라했다.
미향은 손을 움직였다.
“미향!”
여울은 그녀보다 훨씬 빨랐지만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과 단도 사이에 제 손을 집어넣었다.
날선 단도가 미향의 목 대신 여울의 손등을 길게 그었다.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여울이 단도를 쳐냈다. 미향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의 손등에서 줄줄 흐르는 붉은 피를 쳐다보았다.
인간이 아니라면서 피는 똑같이 붉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가 굳은 어조로 말했다.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라.”
미향은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다 돌변하여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광기가 도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가. 여울.”
“너는.”
“이제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가 버려. 꺼져 버려! 다시는 네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난 잘 먹고 잘 살 거야. 너 따위는 이제 필요 없어!”
미향은 악을 쓰며 주위에 있던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넌 지금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 그래, 넌 평생 알 수 없을 거야! 이제 알겠어. 넌 정상이 아니야!”
여울은 피가 흐르는 상처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던져지는 물건들을 피하지 않았다.
“꼴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미향이 던진 책이 이마를 찢고 날아갔다. 더 이상 던질 것이 없자 그녀는 씩씩대다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여울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소맷자락에 손을 넣더니 검은 비늘을 하나 뽑았다.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이걸 부숴라. 어디에 있든 느낄 수 있으니까, 네게 찾아가겠다.”
그는 그녀의 발치에 비늘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이었다.
미향은 대답하지 않고 소리 높여 울었다.
여울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그날 밤 바로 짐을 챙겨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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