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15화 (15/70)

15. 알 수 없는 감정2016.04.21.

“어이, 멍청한 친구야.”

마루에 기대앉아 허공을 보고 있던 여울이 고개를 돌렸다. 산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오더니 제멋대로 옆에 앉았다.

“아주 넋이 나갔구먼. 뭔 생각 하냐?”

“아무것도.”

“그럼 여기서 뭐 하는데?”

여울의 시선이 잠시 마루 건너편 서란의 방으로 향했다. 산이 그것을 알아챘다.

“걘 내가 온천욕이나 하라고 보냈는데? 방에 없어.”

그의 몸이 흠칫 굳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 여울의 옷자락을 산이 붙잡았다.

산은 그것을 당겨 여울을 도로 앉히려 했다. 여울이 요지부동이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이 안에선 괜찮아. 청화도 붙여 놨고. 방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다니, 너 상태가 좀 많이 안 좋다? 맛이 갔냐?”

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산이 손을 들어 전각 쪽을 가리켰다.

“저 안에 있을 거야. 호들갑 떨지 말고 앉아 봐. 얘기 좀 하지?”

여울이 내키지 않는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간신히 전각 쪽에서 떨어졌다. 어젯밤부터 내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서란 탓이었다.

여울을 보던 산이 혀를 찼다.

“와, 이 자식 못 본 사이에 뱀이 아니라 개가 됐네. 그것도 충견.”

“…….”

“예전엔 너 보주 얘기조차 안 했잖아.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만. 막상 만나 보니 떨어지기 싫어? 여의주가 그렇게 강력한가? 근데 너 맹약식 때 걔 만났었잖아. 그땐 잘만 떠나 놓고 이제 와서?”

“모르겠다.”

“뭘 몰라.”

여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산이 자세히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여울은 고심하다가 짧게 답했다.

“신경이 쓰여서.”

“뭐가? 걔가? 왜?”

“맹약식 후에 떠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둔해 빠진 새끼. 이무기들이 원래 욕심이 없다 보니 만사에 관심이 덜하긴 한데, 넌 좀 심해. 최소한 네 감정 정도는 좀 알아라.”

“예전에는…….”

여울은 말을 끊었다. 그는 괜히 품에 기대 놓았던 검을 만지작거렸다.

과거의 그는 특이할 정도로 강렬한 욕망이 있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것은 홀릴 듯한 여의주의 향이나 용이 되고자 하는 본능보다 강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보주의 곁을 떠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갈망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일하던 욕심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목적 없이 떠돌고 눈에 보이는 일을 하고 싸움에 몸을 던졌다.

“예전에는, 뭐?”

“소룡전에 있을 때에는 단순했다. 그 이후로는 어려운 것투성이로군.”

“뭐가 그리 어렵냐.”

산이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여울의 턱을 들어올렸다. 이질적인 동공이 그를 향한다. 산은 씩 웃었다.

“너는 이무기고, 걔는 여의주가 있는 왕족이잖아. 그리고 너희는 맹약을 했지. 교룡이 보주에게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당연한가?”

“이무기는 본능적으로 여의주한테 끌린다며? 그냥 오랜만이라 끌리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거겠지.”

산은 명쾌하게 말했다. 여울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그가 제 턱을 받친 부채를 밀어냈다.

여의주라서? 차라리 그랬으면 어렵지 않았다. 그 어떤 이무기도 여의주를 보고 자신 같은 욕심이 차오르진 않을 것이다.

향을 맡고 닿고 싶고 가까이 있고 싶고 손에 넣고 싶은 건 당연하다.

물론 여울은 용이 되고픈 본능이 부족한 만큼 여의주에 영향을 받는 것도 덜하긴 했다. 그래도 그런 감정이 드는 건 이무기로서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무기들은 여의주라고 해서 범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생각이 그 지점에 이르는 순간 여울은 충격을 받았다. 어렴풋 느껴지던 욕심의 실체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야, 여울?”

산이 의아하게 그를 살피고 있었다.

여울은 목석처럼 굳었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여도 속으로는 격랑이 일었다. 그는 자신을 되짚어 보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고 싶다. 이건 느껴 본 적 있다. 가깝게는 산을 볼 때도 드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것도 정상이다.

만지고 싶다. 닿고 싶다. 이건 여의주니까, 그럴 수도 있다. 무언가 다른 것 같아도 그는 그렇게 납득하고 넘어갔다.

그녀가 웃는 게 보고 싶다. 이건 좀 이상하다. 이런 건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를 볼 때 심장이 죄이는 기분이 든다. 이것도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이상했다.

안고 싶다. 이건, 비정상이다!

정상적인 교룡이라면 보주를 탐하려 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그가 알기로는 그랬다.

“왜 그래?”

산이 여울의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자신이 미친 것처럼 느껴졌다.

넌 이상해. 소룡전의 모든 이무기들이 그에게 말했었다. 그 말대로인가.

“야, 말하다 말고 어디다 정신이 팔린 거야?”

산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심결에 손등의 흉터를 움켜쥐었다.

그의 움직임을 본 산이 입을 비죽이더니 물었다.

“그때 일은 여전히 말하기 싫으냐? 란아는 알고 싶은 모양이던데.”

“……란아?”

“네 보주 말이야.”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인마, 일단은 걔가 내 동생이거든?”

여울은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듯한 낯으로 산을 보았다. 산이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잠재적인 적(敵)에서 투자해 볼 동생으로 생각이 바뀐 지는 두 시진도 되지 않았지만,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시치미를 뗐다.

“아까 걔랑 얘기를 좀 해 봤어.”

“무슨?”

산은 친구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조금 전에 창으로 보낼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서간을 보냈다. 서란은 여울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라고 했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이무기에게 흘리기엔 지나치게 큰 사안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이유였다. 침묵으로도 얼마든지 비밀을 지킬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건 그 말들에 실낱같은 희망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낮은 희망은 독이다.

창의 기록에서 답을 찾아낸다면 몰라도 지금은 모르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야기는? 죽기 전에 바다를 보고 싶어서라니. 세 번째 명령이 반쯤 예상이 가는 말이 아닌가.

남이나 다름없는 그도 동요했는데 그녀의 교룡인 여울에게 말하긴 어려웠다.

네 보주가 거기서 죽을 생각이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짐작하고 있다 쳐도 귀로 듣는 것과 막연한 추측은 확실히 다른 법이다.

산은 결국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서란보다 여울을 아끼는 산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매간의 은밀한 비밀이다.”

산은 뻔뻔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여울이 낮게 추궁했다.

“들어야겠다.”

“비밀이라니깐?”

그 부정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여울은 턱을 굳혔다. 눈빛이 절로 싸늘해졌다.

“내 보주의 일이다.”

“걔도 너한테 알리지 말라고 했어.”

내내 팽팽하던 무언가가 산의 말에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살기가 솟았다.

산이 기겁했다. 무표정한 여울을 돌아보며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투덜거렸다.

“망할 자식아, 이게 지금 도와준 은인한테 보일 태도야?”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지.”

“허어.”

그가 낯선 눈으로 여울을 훑었다. 배 위에서도 낌새가 이상했는데. 산은 설마하며 떠오르는 직감을 부정했다.

“야, 막말로 너도 걔한테 얘기 안 한 거 많잖아. 벽미향 일만 해도 그렇지. 걔가 물어보는 거 일부러 모른다고 해 줬더니만.”

여울이 침묵했다. 살기가 수그러들었다.

산은 등줄기에 돋은 소름을 티 내지 않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나 잘 추슬러라. 여기도 오래는 못 버티니까.”

“고맙다.”

“인사를 참 빨리도 한다, 이 배은망덕한 뱀 놈아.”

“……미안하군.”

“됐고, 이따가 와라. 오랜만에 바둑이나 한판 두자.”

산이 시원하게 웃고는 멀어졌다. 여울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을 떠돌던 시선이 저절로 전각 쪽으로 향했다. 그는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느린 걸음으로 전각에 들어갔다.

감각을 곤두세우자 닫혀 있는 문 너머에 인기척이 둘 느껴졌다. 하나는 아는 기척이었고, 하나는 느끼는 순간 아릿하게 숨이 막혀 왔다. 어느 쪽이 그의 보주인지는 분명했다.

여울은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대섰다. 상처가 눌리며 느껴지는 얼얼한 고통이 엉킨 생각들을 흩뜨려 주었다.

그것이 반가웠다. 교룡 둘을 상대로 싸울 때보다 지금이 더 피곤했다.

감정은 언제나 어렵고, 지치며, 두렵다.

의미 없이 둘러보던 시야에 바구니가 걸렸다. 서란의 옷가지가 걸쳐진 그 안에 비단으로 감싼 서간집이 있었다.

여울은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책인가 싶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고 그것을 펼쳤다.

첫 장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글씨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11년 전 그가 처음 보냈던 서간이 거기에 있었다. 낡은 종이가 손끝에 걸렸다.

건평 10년 초봄

우룡강을 타고 용미로 향하는 배에 있습니다.

외견이 어리다 보니 곧잘 아이로 취급당합니다. 익숙하지 않아 어렵습니다.

보통의 인간들과 소룡전의 이무기들 사이에는 무공 차이가 큽니다. 무공을 익힌 무사나 주술사 자체가 흔하지 않은 듯합니다. 적당히 조절하여 숨겨야 할 텐데 가늠이 잘 되질 않습니다.

저를 사미국 출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미국에 대해 조금 알아둘 작정입니다.

곧 도착할 용미에는 타국의 문물이 많다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깁니다.

서간을 처음 써 보는지라 서툽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한동안 용미에 있을 예정입니다. 관아에 행적을 알려 두겠습니다. 답서는 그리로 주시면 됩니다.

여울 배상.

아직 무구했던 시절이었다. 첫 서간을 쓰고 나서는 당연히 답서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종종 관아에 들려 그를 위한 답서가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1년도 되지 않아 답서를 받는 것을 포기했었다.

여울은 가만히 그것을 보다가 한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서간이 있었다.

건평 10년 초봄

첫 서간이 잘 도착했단다. 나도 서간을 받아 보는 것은 처음이니라. 서로가 처음이니 서툰 것은 신경 쓰지 말자꾸나.

소년으로 보이니 소년으로 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이무기들이 강한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였구나.

적응이 많이 어려우냐?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음, 응원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구나.

그러고 보니 바다 건너 사미국은 이무기처럼 피부가 갈빛인 사람들이 사는 사막의 나라라고 들었단다.

사막이라니, 끝없이 모래가 펼쳐져 있다는데 어떤 곳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구나. 언젠가 볼 수 있■■■

나도 사미국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느니라. 서고에 들리는 나인에게 부탁을 해야겠다.

항상 책을 많이 요구해서 가끔 미안해진단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는걸. 자수나 금을 타는 것은 그리 재미가 없어서.

용미는 서부 제일의 항구라고 배웠느니라. 바다 건너에서 온 신기한 물건들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도 많다던데.

무척 궁금하구나. 네가 자세히 써 주었으면 좋겠다.

서간을 기다린다는 건 생각보다 설레었단다. 보내 주어서 고맙다.

네게 이 답서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

여울은 뚫어질 듯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답서였다. 열 살의 보주가 그에게 써 놓고 보내지 않았던.

어린아이치고는 정갈한 필체였다. 중간과 끝에 글을 썼다가 지운 자국이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종이를 더 넘겼다.

그가 보냈던 서간과 그녀가 보내지 못했던 답서가 나란히 철해져 있었다. 11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그 위로 흘렀다.

정신없이 답서를 읽어 나가던 여울의 시선이 한 곳에 못 박혔다.

알고 있느냐?

무디고 말이 적은 네가 바다에 대해 쓸 때면 유난히 묘사가 많단다.

비릿한 내음이라든지, 탁 트이는 수평선과, 하얗게 이는 물거품이나, 이끼 낀 바위, 조개껍질과 파도에 다듬어진 자잘한 자갈, 모래사장까지.

네가 썼던 바다에 대한 글을 모두 기억하고 있느니라.

내가 아는 바다는 네가 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단다. 네가 그리도 바다를 좋아하니 나도■■■

어차피 보내지 못할 답서인데도 말을 고르게 되는구나. 이미 일기나 다름없는데.

네가 보았다는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볼 기회가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보고 싶구나.

바다가 보고 싶어. 나는 왜 마니여서■■■

나도 너처럼■■■

먹을 덧칠한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다. 여울은 한참을 굳은 채로 있었다.

두 번째 명령을 내린 직후 그녀가 물었었다.

〈왜 이런 명령을 하는지는 묻지 않느냐?〉

그는 뭐라고 답했던가.

〈제가 알아야 하는 일입니까?〉

그녀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답서를 왜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엔, 그녀가 도로 되물었다. 너는 왜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냐고 했었다.

관심이, 없었을 거라고. 그리 생각했었다.

여울은 그녀가 그에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것에 화가 나기도 했다.

사실 그녀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것을 그가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득했다. 정신이 기이하게 비틀렸다. 여울은 거친 손놀림으로 종이를 넘겼다.

답서, 답서, 답서들. 그에게 보내지 않은 64통의 답서.

눈동자가 글자 위를 떠돌았다. 집어삼킬 듯이 읽었다. 그 글들이, 그 아래 묻혀 있던 세월이, 온몸을 휩쓸어 부수는 듯했다.

쫓기듯 숨이 가빴다. 전부 읽었다. 그는 넋을 놓고 서간집을 넘겼다. 그러다 중간으로 되돌아갔다.

네가 그리도 바다를 좋아하니 나도■■■

지워진 글자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간신히 보이는 획으로 추측했다.

‘본 적도 없는 바다가 좋아졌다.’

이게 뭐라고 보내지도 못할 답서임에도 덧칠을 하여 지웠을까. 왜.

이어서 종이를 넘긴다. 다시 읽는다.

건평 17년 초봄

왜 서간을 보내지 않았느냐?

네가 명령을 어기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혹 무슨 일이 있느냐?

걱정이 되는구나. 기다리고 있단다.

화예옹주 유리서란.

지운 자국이 있거나 먹물이 튀고 번져도 그대로 내버려 둔 다른 것들과 달리 이 답서는 깨끗했다. 내용도 일기를 쓰듯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 간 다른 답서들과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접힌 자국이 있었다. 봉투에 넣기 위해 접었던 자국이.

그것들이 의미하는 건 분명했다. 이건 그녀가 그에게 보냈던 답서다. 그녀가 답서를 보낸 적이 있다.

그가 쓴 문장 하나하나에 일일이 답해 둔 다른 답서들과 달리 지극히 짧다. 그 짧은 문장들에서 깊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먹물로 지운 문장이 아무 자국도 없는 흰 종이 아래에서 보일 듯했다.

몇 번이고 누르고 누르다 튀어나온 신음 같은 답서. 가장 간결하게 남은 문장들.

울컥 속에서 치미는 것이 있었다. 눈가가 달아올랐다. 여울은 서간집을 늘어뜨리며 눈 위를 손으로 덮었다.

그가 단 한 번 서간을 보내지 않았을 때. 내내 참고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답서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지 못했다.

그때의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검게 가라앉던 시기를 거쳐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에.

서간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답서 한 장 없다고 원망했다. 정말로 자신의 보주는 그에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련을 버렸다. 포기했다. 껍데기로 서간을 채웠다.

여울은 느리게 손을 뗐다. 서간집을 내려다보았다.

정성들여 비단으로 감싼 표지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서간의 끄트머리도 닳았다.

그가 의무적으로 보냈던 서간들을 그녀는 외울 정도로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는 서간집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손끝이 떨렸다.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지러웠다.

문득 그녀가 웃으며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가고 있지. 그것이 기대가 되어 가슴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단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뜨끈한 것이 솟았다. 용암처럼 휘몰아치는 그 감정이 심장을 조각조각 잘라 놓았다.

숨이 턱 막혔다. 후회된다. 죄여든다. 괴롭다. 뜨겁다. 외면하고 싶다. 그럴 수 없다. 기쁘다. 원한다. 탐하고 싶다. 삼켜 버리고 싶다.

가슴을 태운 불이 목을 타고 오른다. 머리가 열기에 잠식된다.

그것은 격렬하고 적나라하여 추하게까지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그는 이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그가 알던 ‘연정’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여울은 흐트러진 걸음으로 전각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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