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14화 (14/70)

14. 암흑 속의 불씨2016.04.17.

당연히 나오리라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절망이 느껴졌다. 새까만 늪이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라 목을 죄었다.

서란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열기가 빠져나갔다.

“그것을 찾았다면 제가 도박이라고 하지 않았겠지요.”

오래 묵은 체념이 그녀의 위로 흘러내렸다.

“손닿는 모든 기록을 훑어도 단서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리라는 확신은 드는데도. 알아차려도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눈꺼풀이 약간 떨렸다. 그것을 감추듯 그녀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저는 마니로 죽어야겠지요.”

저리 담담하게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산은 멀거니 되물었다.

“그럼 바다는 왜?”

“태조께서 그곳에서 이무기를 용으로 만들었으니, 가 보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단서가 아무것도 없는 거냐?”

“예, 그저 막연한 희망이지요. 실패할 도박이고요. 저도 압니다. 그리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는.”

서란의 시선이 멀어졌다. 그녀는 아득한 허공에 눈을 둔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궐 밖을 보고 싶었어요. 마지막이니 원하는 것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나머지 이유입니다.”

“…….”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느냐고, 화를 내셔도 됩니다.”

그녀가 농담처럼 가벼이 덧붙였다. 어투는 농이었으되 그것은 진담이었다. 많은 것이 그녀의 말에 묻어 있었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가 나야 하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서 깊이를 보았다. 그 깊이가 생겨나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체념을 쌓아 올렸을지도.

그리고 벼락같이 깨달았다. 바다에 이르면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 하는지를.

그는 간신히 입술을 뗐다.

“너…… 세 번째 명으로…….”

“이번엔 제가 물을 차례 아닌가요?”

“그러면 그 여파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무어라 말을 하려던 산은 서란의 낯빛을 보고 말을 멈췄다.

모를 리가 없다. 아마도 그 명령 이후에 생겨날 정치적인 여파까지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대화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가슴께가 이상하게 울렸다. 먹먹했다. 산은 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서란은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홀로 속에 담고 있던 걸 일부 쏟아 내고 나니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체념과 절망은 그녀에게 공기처럼 익숙했으므로, 이제 와서 그것에 빠져들진 않았다. 그저 그 후련함이 즐거웠다.

산이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제정신인지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서란은 그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여울에게는 알리지 않으시리라 믿겠어요. 그럼 질문은…….”

“잠깐만.”

산은 복잡한 머리를 붙잡았다.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서란이 쏟아 놓은 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혼돈 속에서 한 줄기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대로 모른 척 바다로 가는 것을 돕고, 그녀가 세 번째 명령을 하게 내버려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떠오른 이상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녀로 인해 꺼내진 의문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날, 이 자리에서 나눴던 모든 말들이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가시처럼 박혀 있을 터다. 그러므로.

산은 결정했다. 그는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하다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 네가 질문할 건 내가 정해 주마.”

“……?”

“네 손에 닿는 기록이라 해 봤자 궐내의 것들이었겠지. 네 말대로 중조 반정 때 태조로부터 이어진 것들이 뒤집혔다면 궐 안에 진실이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 이건 어떠냐.”

산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속삭였다.

“창의 기록.”

그 말은 천둥처럼 들렸다.

창 제국. 예락의 태조인 유리하가 태어난 땅. 청룡의 후손인 황족들이 다스리는 천년 제국.

예락은 창의 제후국이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독립국에 가깝긴 해도 창에 조공을 바치고 왕이 바뀌면 형식적으로나마 보고하는 사신을 보냈다.

중조가 예락을 뒤집고 예락의 모든 기록을 지워 버렸어도 창의 기록에는 손대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안색이 흐트러지는 것을 응시하며 산이 빠르게 말했다.

“내게 물어라. 창의 기록에서는 중조 반정에 대해 어떻게 쓰고 있으며, 태조와 그 용에 대해 뭐라고 써 두었는가를.”

“…….”

“창에서는 태조의 신화나 예락의 개변된 기록들보다는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역사를 남겨 놓았겠지. 타국의 역사를 미화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아니 그러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그녀는 간신히 되물었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충분히.”

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실패할 게 뻔한 도박이라 했지. 나도 동의한다.”

“그럼, 어째서…….”

“대신 성공하면 모든 게 변할 테니까.”

“성공이라니, 무엇이 성공입니까.”

“네게 투자하겠다.”

그가 그녀의 물음을 무시하고 약조하듯 말했다. 서란이 눈을 깜박였다.

얼이 빠진 그녀의 얼굴이 그제야 제 나이대로 앳되게 보였다. 산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흐트러진다.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잘 부탁한다, 란아.”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그는 마음이 급한지 벌떡 일어났다.

그녀를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방을 나간다.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서란은 망연히 창호지 너머로 비치는 산의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방금 그녀가 들은 말들은 무슨 의미였지?

멀어지던 그림자가 느닷없이 돌아서더니 도로 문을 열었다. 고개를 들이민 산이 퍼뜩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심심하면 방에만 있지 말고 온천이라도 다녀와. 긴장 풀어도 된다. 날 그만 세우고. 진짜로 예뻐해 주고 싶어졌으니까.”

“……네?”

“이따가 청화 보내 줄게.”

산은 쾌활한 목소리로 제 할 말만 던지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당황하여 그가 쓰다듬고 간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름을 불려서? 뜻밖의 가능성이 주어져서?

창의 기록.

별것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격류처럼 희망이 스미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희망. 달콤한 울림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서란은 손을 뺨에 대 보았다. 뺨에 바짝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조그만 불씨가 암흑 속에서 피어난다. 그녀는 오래 묵어 익숙한 체념들을 꺼내 그 불씨를 덮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내젓다가 깨달았다. 산이 꺼낸 창의 기록이란 말에 넋이 나가 그에게 완전히 휘둘렸다.

그에게 알아낼 것이 많았는데. 특히 여울에 대해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실패한 대화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서란은 양손을 모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텅 빈 손.

“기대는 하지 마, 유리서란.”

그녀는 다짐하듯 되뇌었다. 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청화는 오후 무렵에 서란의 방으로 왔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어제는 정신이 없어 인사를 못 드렸지요? 저는 대행수의 비서인 소청화(素淸華)라 합니다. 청화라 불러 주세요.”

그녀는 서란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였다. 웃는 눈매가 강아지 같았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만큼 행동력도 좋았다. 청화는 바로 서란을 이끌고 별채 옆에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목책을 두르고 전각을 세워 외부 시선으로부터 격리된 노천 온천이었다.

서란은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전각 안의 바구니에 옷가지와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얇은 속적삼만 걸친 채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홍평에는 임금과 왕족들을 위한 행궁이 있고, 왕족들은 대부분 행궁에서 온천욕을 즐겨 보았다.

물론 서란은 거기서도 예외였다. 온천은 처음이다. 훤한 대낮에 천장이 뚫린 야외에서 속적삼 차림이라니, 심하게 부끄러웠다.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그녀를 청화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잡아당겼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금산상단 귀빈과 수뇌부 전용이라서 꽤 괜찮답니다.”

그녀의 말대로 온천은 제법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잘 가꾸어진 화초와 정교한 조각상 사이로 다듬어진 하얀 온천이 보였다.

청화가 먼저 물속에 들어갔다. 그녀를 보다가 서란이 주춤주춤 발끝을 담갔다.

“일단 들어오시면 별로 뜨겁지 않아요. 어서요.”

서란은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이 몸을 감싸자 피가 돌며 긴장이 확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나른해졌다. 곁에 앉은 청화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어때요? 좋죠? 쉴 때는 그만이에요.”

“응, 그렇구나. 생각보다…….”

“대행수한테 소처럼 부려지다 지쳤을 때 온천욕 한 번 하면 개운해져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언제부터 비서로 일한 것이냐?”

“아, 제가 대행수한테 아주 어릴 때 거둬져서요. 붙어서 교육받으면서 잔심부름으로 시작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비서까지 하고 있더라고요.”

청화는 미묘하게 인상을 구겼다가 아차 하고 도로 폈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울 님도 자주 보았답니다. 여울 님이 탈피할 때 은신처에 물건 나르는 것도 제 일이었거든요. 이무기를 아무한테나 보일 수 없으니 만만한 제가 다 했죠.”

서란은 호기심이 돌았다. 교룡과 떨어져 지낸 그녀는 탈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몰랐다. 일정 세월마다 탈피를 하고 새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르게 그녀의 반응을 알아챈 청화가 설명을 덧붙였다.

“여울 님의 탈피는 1주일 정도 걸렸어요. 본체 상태였는데 예민하니 가까이 접근해선 안 된다고 대행수가 경고해서 저도 오며 가며 슬쩍 본 게 다랍니다. 크고 검었다는 것만 기억나요.”

“신기한 경험이었겠구나.”

“그렇죠? 남은 허물은 불태워 버리셔서 좀 아쉬웠어요. 이무기의 허물이라니, 그런 귀한 것을…….”

청화는 진심으로 아쉬운 어투였다. 서란은 옅게 웃으며 탕 안의 벽에 편히 기댔다.

우유처럼 뿌옇고 불투명한 온천수는 젖은 속적삼이 피부에 달라붙어 만들어진 민망한 꼴을 가려 주었다. 덕분에 훤한 대낮의 야외인데도 그럭저럭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열이 올라 붉어진 제 뺨을 괜히 문지르다가 청화를 돌아보았다. 서란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그녀는 익숙하게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서란은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 여울이 벽씨 상단에서 일으킨 일에 대해 아느냐?”

“네, 전해 들은 거긴 하지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죄송한 듯이 머리를 숙였다. 서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그냥 물어본 것이니.”

산이 알려 주지 않으려 했던 물음이었다. 청화는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여울도 답을 피했다. 그럼 더 이상 그녀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하나 남은 명령은 예전부터 정해 두었다. 이런 일에 쓸 수는 없다.

둘만 있는 온천 안은 조용하고 평온했다.

서란은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하얀 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복잡하던 생각도 그 물을 따라 흘러내려 갔다.

체온이 오르며 맺혔던 땀은 바람에 금방 식었다. 긴장했던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올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닦아 내며 잠을 쫓았다. 졸지 않기 위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대가 여울의 상처를 치료했지?”

“네. 치료라기보다는 응급 처치였지만요. 음, 여울 님인 걸 감안하면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에요. 더 심하게 다쳐서 오신 적도 있는걸요.”

“다쳐서 왔다고? 그가?”

전투나 무공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흑룡강에서 여울이 보인 무위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깜박깜박 오던 졸음이 확 달아났다. 그녀가 놀라 돌아보는 서슬에 고요하던 수면이 찰랑였다.

청화가 손을 내저었다. 서란과 그녀의 신분 차를 생각하면 꽤나 편한 태도였다. 산에게 익숙한 덕이었다.

“에이,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이무기시잖아요. 웬만하면 사람을 해하지 않고 처리하려 하다 보니 가끔 상해서 오셨어요. 강한 요마가 날뛴다는 소릴 들으면 자꾸 거길 찾아가니까 그렇기도 하고요.”

벽씨 상단을 피바다로 만들었다던 여울과 지금 청화가 말하는 여울 사이에는 간극이 컸다.

〈연정입니다〉

〈그녀는 죽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가 말한 ‘그녀’와 벽씨 상단의 참사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련을 버리려 했으나 알고 싶어졌다. 묘한 거슬림이 가시처럼 속에 돋아났다.

달달 외우고 있는 서간집을 다시 펼쳐 보고 싶어졌다. 몸에 계속 지니고 다녔던 그것은 벗어 둔 옷가지와 함께 바구니에 있었다.

보아 봤자 그런 말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여울은 중요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 서간들은 의무로만 채워져 있었다.

만약 답서를 보내서 물었다면 알려 주었을까?

서란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청화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 아가씨?”

서란은 익숙한 미소로 표정을 가렸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것을 떠올렸다.

여울의 등을 길게 가른 상처가 뇌리에 난입했다.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 자신도. 청화가 치료할 도구들을 들고 그를 살피던 모습이 생각났다.

“……응급 처치라는 건 어려우냐? 배우는 데 오래 걸릴까?”

“상처 주위를 닦고 압박해서 붕대를 감으면 끝나는걸요. 약이 있으면 약을 바르고, 뼈가 부러지면 부목을 댄다든가? 별거 아니에요. 가르쳐 드릴까요?”

“그리 해 주면 고맙겠구나.”

“이따 나가면 알려 드릴게요. 지금은 좀 쉬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신걸요.”

“내가?”

서란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청화는 내심 혀를 찼다. 그녀도 나이보다 어려 보일 정도로 작은 편인데, 서란은 더 말랐다.

마니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산으로부터 대강 들었다. 내내 갇혀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험한 여정까지 거쳤으니.

청화는 지고한 왕족인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부러 밝게 대꾸했다.

“이틀 밤 샌 대행수 같아요. 물론 대행수는 훨씬 심한 꼴이 되곤 하지만.”

“어떤 꼴이 되기에?”

“골병 든 산적 같아지죠.”

“……산적이라니.”

“이렇게 수염이 나고, 얼굴은 허여멀건 하고, 눈 밑은 시꺼멓고. 아, 아가씨가 지금 그런 상태라는 건 아니에요. 아가씨는 얼굴만 창백하니까.”

청화의 너스레에 서란이 작게 웃었다.

“그러니 얼른 푹 담그세요. 조금 주무시는 것도 괜찮아요. 제가 깨워 드릴 테니까요.”

“고맙구나.”

서란은 목 아래까지 물에 담그며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물속과 달리 위로는 서늘한 가을 공기가 맴돌았다.

그녀의 소망. 그의 부상. 창의 기록. 스스로 낸 흉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런 것에 흔들리면 안 된다. 그녀는 기대를 보답받아 본 적이 드물다. 무슨 결심으로 세 가지의 명령을 정했는지 되새겼다.

어른거리는 불씨를 다시 짓밟았다. 여울에 대한 의문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물에서 약초향이 났다. 가을에 접어들어 약해진 햇살이 수면에 부서진다. 청화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물소리와 약간 떨어진 곳에 앉은 청화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 고요가 자신을 다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길지 않을 여유였다. 서란은 짧은 평온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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