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13화 (13/70)

13. 역모에 준하는 발언2016.04.14.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되묻는 말끝이 조금 떨렸다. 산이 척하니 손을 들었다.

“내 차례야, 동생. 바다로 가겠다는 이유가 뭐지?”

서란이 멈칫했다. 그녀는 고민했다.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 숨기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여울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내가 약속하면 믿을 거냐?”

산은 놀리듯 물었다. 서란은 입꼬리를 올렸다.

“제게 할 약속은 믿지 않습니다. 제게는 당신을 강제할 수단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그를 아끼니까, 듣고 나면 말하지 않으리라는 건 믿습니다. 여울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내용이거든요.”

편안하게 기대고 있던 산이 몸을 세웠다. 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물정 모르는 어린애라 보던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웃음기가 가신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들어보지. 네 말대로라면 약속해 주마.”

“예락의 건국 신화를 알고 있으시지요.”

“뭐? 태조 이야기? 당연히 알지.”

“당신이 아는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아까부터 자꾸 당신, 당신 하는데. 당신이 아니고 산 오라버니라니깐?”

“……오라버니가 아는 이야기는 어떤가요?”

“그건 왜 물어?”

“어떤 내용으로 알고 계십니까?”

예락의 태조였던 유리하는 창(昌) 제국 방계 황족 출신이다.

창 제국의 황족은 청룡과 인간의 혼혈로부터 유래했다. 기나긴 역사동안 용의 피는 흐려졌지만, 그나마 피가 짙은 직계 황족들은 아직도 도술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창의 황족들의 성씨는 유(遊) 씨다. 유리하는 반역을 일으켜 유배당한 창 황족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신화에 따르면 태조 유리하가 태어난 후 하늘에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무지개가 떨어져 내렸다고 하지. 그 신성한 무지개를 받아 그녀가 몸속에 여의주를 품게 되었고.”

산이 별 생각 없이 대꾸했다. 서란이 가만히 끄덕였다.

“이후 태조께서는 무지개를 타고 유배지를 탈출하여 세상을 떠돌다가 천년호에서 백년 묵은 이무기인 마파람과 만났지요.”

“다 아는 이야기는 왜 하는 거냐?”

“그 뒷이야기도 아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태조 유리하가 마파람을 거느리고 떠도는 백성을 모아 나라를 세우니 그 이름이 예락(霓落)이라. 태조는 더 이상 창의 황족이 아니라 새 왕조의 시조라는 뜻으로 성을 유리(流理)씨로 바꾸니, 이것이 예락의 시작이자 유리왕조의 시작이로다.”

달달 외울 정도로 배운 건국 신화였다. 그것을 노래하듯 읊던 산은 문득 깨달았다.

태조 유리하와 얽힌 전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전설들 중에서 바다가 등장하는 것이 있었다.

태조가 자신의 이무기인 마파람을 용으로 만든 곳이 바다였다.

마파람이 용이 되면서 해일이 일고 용오름이 몇 개나 솟았다고 전해진다. 그 난리에도 바닷가의 어촌에는 아무 피해가 없었고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그것을 떠올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싶더라니. 마파람이 용이 된 장소가 바다라는 걸 듣고 쓸데없는 망상에 빠진 건 아니겠지?”

“500년 전의 이야기지요. 어디까지가 역사고 어디까지가 덧칠된 신화인지 알기 어려운.”

서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오라버니는 그 전설의 배경이 되는 실제 역사를 궁금해하신 적이 없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마파람은 바다에서 용이 되었지요. 태조께서는 용과 함께 예락을 다스렸습니다. 그럼 태조의 이무기를 용으로 만든 여의주는 어디서 난 것입니까?”

“그거야 마니식으로…… 잠깐.”

하늘에서 무지개가 떨어져 내려 여의주를 품게 된 인간이 유리하라고 한다. 그 전설이 사실이면 그녀 이전에는 여의주를 품고 있는 인간이 없었다는 소리다.

그녀의 후손들이 여의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다면 유리하가 자녀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심장에 여의주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제 이무기를 용으로 만든 것인가?

자식을 낳아 죽였는가? 아니면 전설이 틀려서, 그녀 이전에도 여의주를 가진 인간이 있었는가? 바다에서 굴러다니던 여의주라도 주웠나?

어느 쪽도 아니라면, 도대체 유리왕조의 시조였던 그녀는 어떻게 제 심장을 뽑지 않고도 자신의 교룡을 용으로 만들었는가?

섬뜩 소름이 돋았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이야기였다. 500년 전의 전설이기 때문에.

산이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서란이 조용히 말했다.

“제가 바다로 가려는 이유는, 절반은 도박, 나머지 절반은 소망입니다. 사실 그 도박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소망이 더 크다고 해야겠군요.”

“더 자세히 말해 봐라.”

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은 제 차례입니다.”

“약은 것. 빨리 물어라.”

“벽씨 상단에서 여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는데?”

산은 어깨를 으쓱였다. 태연한 낯으로 부정했다. 서란은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캐물을까. 그런다고 대답해 줄 것인가.

그녀는 무력하다. 산이 일방적으로 묻기만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질문을 주고받는 건 어디까지나 산에게 달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어쩌다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사이가 된 건지 알려 주시지요.”

산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듯 뜸을 들이다 말을 꺼냈다.

“그때 보자마자 그녀석이 이무기인 걸 알아봤었다. 네가 맹약식 할 때 봤던 놈이니까. 경계하는 놈한테 내가 왕족인 걸 알려 준 다음 어르고 달래서 데려왔고. 데려온 직후에 탈피가 시작되어서 은신처도 제공해 줬지. 그 뒤에 그 녀석이 박살내 놓는 바람에 수뇌부를 잃은 벽씨 상단을 수습해서 잡아먹었다.”

탈피라니. 마지막 탈피였을 것이다. 여울이 단 한 번 서간을 보내지 않았던 때였다.

서란은 안 좋은 일이 있어 서간을 보내지 못했다던 그의 서간을 떠올렸다.

산이 말을 이어 갔다.

“덕분에 내 상단이 이렇게 빠르게 커졌어. 나로서는 행운이었지. 처음에는 그게 고마워서 열심히 돌봐 줬거든. 그런데 탈피 끝나자마자 제 손등에 자해를 하더라고. 미친 이무기인줄 알았다. 뭐, 얘기해 보니 돈 건 아니었고. 좀 인간 불신에 걸린 것 같긴 했다만.”

그녀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손등의 흉터에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라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스스로 낸 상처일 줄은 몰랐었다.

“그 뒤로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고 있지. 거처 없이 떠도는 녀석이지만 딱히 머물 데가 없으면 돌아오는 곳이 우리 상단이라서. 할 거 없다고 하면 일 찾아다 주고, 겸사겸사 우리 상단 일도 좀 시키고. 같이 바둑도 좀 두고, 뭐 그런 거야.”

“벗이 되셨군요.”

“그 뱀 놈은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봐야겠지? 어쨌든 그렇게 지내다가 쟤가 너랑 맹약할 때 명령 세 번만 하기로 했다는 조건을 들었거든.”

산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래도 나름 친구 놈인데,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명령 들으러 돌아간다니까 걱정이 되잖아. 마니식도 얼마 안 남았으니 좀 지켜볼까 했지.”

그의 말에는 ‘여동생’인 서란에 대한 감상은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기준은 벗인 여울이다. 마니식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서란은 예민하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여울을 걱정하여 도하에 있었던 건가요?”

“맞아. 상황을 알아보려고 예경에 가는 길이었지. 사실 수도에 대뜸 들어가기엔 내 입장이 좀 그렇잖아? 도하에 머물면서 사람을 보내서 궐의 사정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다 수배령을 보신 거로군요.”

“잘 아네. 그 녀석이 갑자기 너를 가엾게 여겼다거나 그 종이 쪼가리에 적힌 것처럼 정신이 나가서 널 데리고 튀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럼 보나마나 네가 명령한 것 때문이겠거니 싶었고. 그러니까 나는, 너흴 신고할 생각 따위는 없어. 어때, 이제 좀 경계심이 풀리나?”

마지막 질문은 그녀의 속내를 떠 보는 듯 했다.

산의 말들이 날카롭게 그녀를 찔렀다. 이러리라 예상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아프다. 그녀는 고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란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경계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협상 중인 것처럼 구는 태도부터 어떻게 해 봐. 난 네 편이라고.”

산이 입술을 비죽였다. 서란은 부드럽게 답했다.

“용서하시지요. 오라버니의 호의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상태라 조심스럽습니다.”

“조심스럽다면서 칼같이 질문을 자르느냐?”

“먼저 질문을 주고받자고 하신 건 오라버니십니다.”

“거, 남매간에 좀 친해져 보자는 거였는데.”

그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미끄러졌다. 절제된 동작과 꾸며 낸 미소에는 빈틈이 없었다.

“정말로 원하신다면 귀여운 동생이 되어 보도록 노력할 테지만요. 저를 진짜 동생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산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서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저는 친구를 위험하게 만들 적에 가깝겠지요. 치워 버릴 수도 없이 성가신.”

산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정확했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서란의 생모는 봉작도 제대로 받지 못한 특별 상궁이었다.

정실인 중전의 아이도 아니었으며, 사대부 출신인 강빈의 아이도 아니었고, 부왕이 총애하던 숙원 김씨의 자식도 아니었다.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마니로 결정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마니로 결정되는 것은 정치적이고 사적인 맥락을 통한 것이지만, 백성들에게 알려질 때는 하늘로부터 점지 받은 제물이라 탈바꿈된다.

어차피 죽을 아이이니 철저히 격리되어 키워졌다.

동복 남매인 화련공주는 물론이고, 어릴 때부터 오며 가며 마주한 숙원 김씨의 화영옹주나, 이복이라 해도 제법 부대끼며 자란 제녕군, 진녕군에 비하면 동생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게 사실이다.

아예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라비라 부르라 하며 친근하게 군 이유는 경계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가 유일하게 친우라고 생각하는 여울의 주인이 그녀이기 때문에.

궐에 내내 갇혀 살다가 여울을 이용해서 탈출한 철모르는 어린 계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수배령을 보자마자 화가 났다. 마니야 어찌 됐든, 여울이 죽거나 소서촌에 유배되는 결말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도왔다.

“……그래서, 미우냐?”

산이 느릿하게 물었다. 서란은 미소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단정하게 말한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 단정함이 기이할 정도로 깊게 그를 파헤쳤다. 산은 처음으로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날이 정해져 살아온 삶. 얼굴도, 존재도 잊고 있던 이복 여동생.

그래, 그의 혈육이었다. 그의 형을 위해 죽을 제물은.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음에도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왔고 무슨 생각으로 여울에게 명령을 한 것일까.

아무것도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는 한없이 낯선 것을 보듯 그녀를 응시했다.

“……아까 하다 만 질문을 하지. 도박이니, 소망이니 하는 게 다 무슨 뜻이냐?”

“태조께서는 마니 없이 자신의 이무기를 용으로 만든 것일 확률이 높지요. 마니식이 중조 반정 이후부터 생겨난 것을 아십니까?”

“……뭐라고?”

“어쩌면 중조 이전에는 죽지 않고도 자신의 여의주를 이무기에게 줄 방법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마니식이라는 건 그 방법이 실전된 후에 생겨난 비정상적인 제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잠깐만. 그런 게 있었다 해도 이미 없어졌다면…….”

“하다못해 그 방법이 사라졌다 해도 형제의 피를 보느니 선왕의 여의주를 세자가 물려받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지. 선왕의 여의주는 천년호에 바쳐야 한다. 그래야 이무기가 계속 태어나니까.”

산은 창백해진 채 반박했다. 서란이 기다렸다는 듯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천년호에 여의주를 바쳤다는 기록은 중조 원년부터 등장합니다. 이전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중조 이전보다 중조 이후부터 이무기의 수가 확연히 늘긴 했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중조 이전에 이무기가 모자랐던 건 아닙니다.”

“아까부터 중조, 중조. 중조 대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냐?”

“예, 그래요. 사실 여의주를 바치지 않아도 천년호에서는 이무기가 태어났던 게 아닐까요? 왜 갑자기 중조 대에 선왕의 여의주를 천년호에 바치기 시작한 걸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녀가 던진 물음들은 하나같이 강렬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산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공격적으로 되물었다.

“네 말대로 비정상적인 제도라면 몇 대를 거치도록 유지될 리가 없지. 이건 네가 마니이기 때문에 가진 의문이 아니냐? 네가 마니라서, 마니 제도를 부정하고 싶어서……!”

“예, 제가 마니가 아니었다면 이런 전통들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마니였지요. 그래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의 질문에도 서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선명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여의주 없이 태어난 오라버니는 왕족과 여의주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모든 것이 당연한 거라고만 생각했나요?”

산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산은 가출하기 전에 몰래 소룡전에 숨어 든 적이 있었다.

이무기들은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산이 자신을 왕족이라 소개했을 때 아무도 그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왕족임을 부정하기로 했다. 그리 결심하고 궐을 나왔다.

그 결심까지 고뇌와 방황이 있었다. 그 중에는 서란이 물었듯 여의주와 왕족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침묵하고 있는 그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저는 의문을 가지고 기록을 뒤졌습니다. 오례의, 왕조실록, 의궤, 각부의 일기들까지. 제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 말고는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무언가…… 있더냐?”

“있었습니다. 분명한 단절이. 어디에서나 단절이 보였습니다. 그 단절은 모두 중조 원년이 기점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초기 예락의 체제를 중조가 반정하며 망가뜨렸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알 수 없는 열기가 그녀를 타고 흘렀다. 산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보다 한참 가녀린 몸의, 그보다 어린 그녀에게. 그녀가 선고했다.

“그것은 반정(反正)이라기보다, 반역(反逆)이었을 겁니다.”

잠깐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 지금 네가 얼마나 위험한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역모에 준하는 발언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생글 웃었다. 묘한 위압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이상한 유쾌함만이 감돌았다.

“이미 마니인데, 죽을죄를 좀 지은들 뭐 어떻습니까?”

“하.”

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손에 얼굴을 파묻더니 어깨를 떨며 쿡쿡거렸다.

“걸작이네, 진짜. 돌겠군.”

그는 그대로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란은 가만히 기다렸다. 긴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유리서란이었지?”

“예.”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으나, 산은 이제야 그 이름을 제대로 곱씹어보았다. 같은 성씨. 같은 아비가 지어 준. 그의 다른 여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서(曙)’ 자 돌림의 이름.

산은 얼굴을 덮은 손 아래로 빙긋 웃었다.

“좋아, 란아. 이제부터 너를 ‘란아’라고 부르마.”

서란이 흠칫 놀랐다.

란아. 얼마 만에 듣는 애칭인지. 그 다정한 부름에서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원래 왕의 자식은 아무리 어미라 해도 특별 상궁에 불과한 자가 멋대로 이름을 부를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몰래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곤 했다.

애틋한 목소리였었다.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부름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불러 줄 이가 아무도 없기에.

그 부름 하나에 마음이 성기게 풀어진다. 지독하게 외로워서, 쉽사리 흔들린다.

그래서는 안 된다. 차오르는 기억을 다시 파묻는다. 서란은 스스로를 내리눌렀다.

숙이고 있던 산은 그녀에게 찰나 드러난 흔들림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 스스로를 가다듬은 그녀는 태연해 보였다.

“그래서 란아, 너는.”

산이 말을 골랐다. 그가 토해 내듯 묻는다.

“심장을 뽑아 주는 것 말고, 이무기를 용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더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