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12화 (12/70)

12. 흔들림2016.04.10.

별채는 두 개의 방이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있는 구조였다. 그의 방은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서란은 문 앞에서 다시금 망설였다. 정신없이 몰아쳐 여기까지 오느라 그도 피곤할 것이다. 전투에서 무리도 했을 것이고. 부상도 심해 보였다.

쉬고 있는 걸 방해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안에서 먼저 장지문이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서란의 모습에 여울이 움찔 굳었다. 그 역시 그녀를 찾아가려던 길이었다.

“……들어오십시오.”

여울이 비켜섰다. 마찬가지로 놀랐던 서란이 숨을 고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문을 닫고 그녀를 방 안의 탁자로 안내했다. 부상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상처는 괜찮으냐?”

“별것 아닙니다.”

“아니기는, 피가 그리 났는데.”

“금방 낫습니다.”

서란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여 다오.”

여울이 머뭇거렸다. 서란이 그의 등 뒤로 자리를 옮겼다. 끝내 봐야겠다는 태도였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옷깃을 내렸다.

구릿빛의 매끄러운 피부가 겉보기에는 잘 보이지 않던 자잘한 근육을 덮고 있었다. 그 위를 하얀 붕대가 둘둘 감고 있었다.

오른쪽 날개 뼈 부근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길게 감긴 붕대에는 붉은 핏물이 약간 배어 있었다. 핏물의 궤적에서 상처의 크기가 짐작이 되었다.

“피가 뱄구나.”

“움직이느라 약간 묻어났을 뿐입니다.”

“아프지도 않느냐, 너는? 왜 누워 있질 않고.”

“그리 아프지 않습니다.”

그가 일어난 이유도 사실 그녀처럼 여의주의 향 때문이었다. 슬슬 지울 때가 되었다.

그러나 여울은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등 위에 아주 가벼운 접촉이 느껴졌다.

서란이 손끝으로 닿을 듯 말 듯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상처를 피해서, 그 주위를 덧그리며 상처의 크기를 가늠하듯이.

그가 보지 못하는 등 뒤에서 그녀의 내리깐 속눈썹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가 속삭였다.

“아파 보인다.”

“괜찮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너는 이무기구나.”

목소리의 끝이 떨렸다. 울음이 묻어났다.

순간 여울은 놀라 돌아보려 했다.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의 말이 그를 막았다.

“돌아보지 마라. 흉한 꼴이니라.”

“무엇이 흉하단 말씀이십니까.”

서란은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내지 않았다. 그녀는 눈에 새기듯 그의 상처를 응시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입은 상처다. 그녀의 명령 때문에 생긴 부상이다. 그녀는 이것을 봐 두어야만 했다.

이리 다치고도 괜찮다고. 차라리 빈말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는 이무기라, 저 말은 진심일 것이다. 그게 못내 쓰렸다. 왈칵 속내가 터져 나왔다.

“……나는 네게 사과할 생각이 없다. 더 이상 네가 다칠 일이 없게 하겠다는 약속도 할 수 없다. 네가 힘들다 해서 명령을 거둘 생각도 없다. 흉하지 않느냐, 참으로.”

나직하게 이어지는 말과 함께 그녀의 숨결이 맨 등에 와 닿는다. 옅게 새어 나온 여의주의 향이 코끝에 달게 감돌았다.

그리고 억눌러 참는 울음의 기척.

여울은 발끝부터 손등을 타고 오르는 기이한 감각에 잠시 숨을 멈췄다.

이상한 욕심이 든다. 이무기가 가질 수 없는 욕망이었다. 역시 자신은 무언가 잘못된 이무기인 것 같았다.

아니면 이것이 여의주를 탐내는 이무기의 갈망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여울은 제 욕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사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보주였고 그는 그녀의 교룡이었다. 그가 그녀를 지키는 것은 명령이 없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미안해하고 있는가. 왜 그가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가.

여울은 그녀의 명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서란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은 약간 파리했다.

갸름한 눈매 속에 주홍색 눈동자가 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그 눈물이 눈시울에 고였다가 툭 하고 떨어진다.

“흉하지 않습니다.”

여울은 그리 말하며 서란의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당황하여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 안을 들여다보았다.

일렁이는 주홍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여의주의 빛이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향이 납니다.”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가 눈을 감는다. 여울이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제 체액을 넘겨주었다. 혀끝이 얽히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것이 제가 원해서 하는 행위인지, 그녀의 향을 지우기 위해서 하는 행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유난히 길었다.

그의 어깨를 짚고 있던 서란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여울은 그것을 느끼고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서란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조금 물러섰다. 지금까지 매일 해 온 것인데 오늘따라 무언가 달랐다.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여울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에 흐른 눈물 자국을 닦아 냈다. 이어 그는 물러나려던 그녀의 허리를 감고 제게로 가볍게 당겼다.

가늘게 떨고 있는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확인하듯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이제 되었습니다.”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멀어지며 스치는 손길이 짙었다. 서란의 귓불이 약간 달아올랐다.

여울은 그녀에게 처음 입맞춤을 당했을 때 그녀가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그녀가 왜 재미있어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미묘하게 긴장된 공기가 그들 사이에 차올랐다. 향을 지우는 행위에 불과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서란은 의미 모를 혼란에 빠져 눈물도 쏙 들어간 모양이었다. 애매하게 시선을 돌리던 그녀가 우물거리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그, 온녕대군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냐?”

“금산상단의 상단주입니다.”

서란은 여울이 보냈던 서간에서 그의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벽씨 상단에 의탁한 게 초기였고, 금산상단의 이야기는 그 뒤에 나타났다.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이후부터였다.

간혹 금산상단 본부에 머물렀다거나, 지부에 들렀다거나, 금산상단의 일을 도왔다는 말 등이 있었다.

편지를 통해 벽씨 상단이 몰락하고 금산상단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건 알았었다. 하지만 상단주가 온녕대군 유리산응이라든가, 그와 여울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이 생겼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금산상단의 상단주가 온녕대군이라는 건 왜 서간에 쓰지 않았었느냐? 게다가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언급도 없고.”

“그는 왕족의 이름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깊은 친분은 아닙니다.”

서란은 옷깃을 추스르는 제 교룡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기가 막혀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제어하며 되물었다.

“수배령이 걸린 자를 위해 풍랑이 이는 강에 배를 끌어다 오는 사람과 깊은 친분이 아니라고?”

“…….”

“게다가 너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큰 망설임 없이 그의 구조를 받아들였잖느냐. 그를 믿어서가 아니냐? 지금도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돕고 있는데도 깊은 친분이 아니란 말이냐?”

여울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서로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그를 믿느냐?”

“예.”

“그럼 그도 너를 믿느냐?”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걸 벗이라 하는 것이다.”

여울이 무표정한 채 눈만 깜박였다.

벗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서란도 알 수 있는 것을 진짜 몰랐단 말인가. 아니, 몰랐다기보다는 아예 그쪽으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서란은 갑자기 낯설기만 하던 오라비가 가여워졌다. 이런 걸 친구랍시고 도와주다니.

“둔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느냐?”

“가끔 산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깊은 친분이 뭐라고 생각한 게냐?”

“…….”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게로구나.”

서란이 한숨을 쉬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여울이 불쑥 말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적이라니?”

“제가 제 자신의 감정을 깨닫도록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몰랐기에?”

여울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등잔불이 비쳐 일렁이며 검게 가라앉은 눈 속에서 긴 동공이 드러났다.

이무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연정입니다.”

서란은 살짝 눈을 치떴다.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기에 내심 놀랐다. 어쩐지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익숙한 웃음을 띠었다.

“연인이 있었다니, 하루빨리 그녀 곁으로 돌아가야겠구나. 너는 서간을 정말 대충 썼느니. 어찌 그런 것도 쓰지 않았단 말이냐.”

“없습니다.”

“응?”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 말은 담백했다. 서란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간을 보내지 않았던 그때의 일일까. 그때에 연인을 잃었던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물어도 될지 모르겠다.

그녀가 당황하고 있자 여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질문을 누르고 있었다.

제가 그때 배운 것이 진실로 연정이 맞는 것입니까. 그때에는 이런 욕심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이 손등의 흉터를 훑었다. 감정이란 늘 알 수 없고 두려웠다.

“밤이 늦었습니다. 쉬시지요.”

질문 대신 나온 말이었다.

여울은 직접 서란을 그녀의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부상자가 뭘 하는 짓이냐고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홀로 제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걸터앉았다. 어른어른한 기억 속에 생긋 웃던 소녀가 떠올랐다.

〈나를 싫어해?〉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와 있는 게 좋아?〉

〈그럼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그게 연정이야〉

등의 부상보다 심장 쪽이 아파 왔다.

여울은 지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런 흔들림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두려워졌다.

*

다음 날 오전이 되었다.

“안녕, 동생아. 우리 서로 할 말이 많지?”

인기척도 내지 않고 대뜸 문을 열어젖힌 산이 쾌활하게 말했다.

서란은 전날 심란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약간 퀭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산은 건너편에 있는 여울의 방을 잠시 돌아보더니 문을 닫았다. 그가 방 안으로 쑥 들어왔다.

서란은 우선 인사를 했다.

“이곳에 머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처박혀 있으면 당분간은 안전할 거다.”

산이 서란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그는 노련한 상인처럼 웃었다.

“너도 궁금한 게 많겠지? 나도 좀 많거든. 그러니 우리 질문을 서로 주고받는 건 어떠냐?”

“반가운 얘기로군요.”

서란은 긴장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마주 웃어 주었다.

산이 웃는 낯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속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인상이다.

산은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먼저 묻지. 두 번째 명령은 뭐였냐?”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인데 눈빛이 날카로웠다.

서란은 그 질문과 그의 태도에서 알아낸 것이 많았다.

여울과 서란이 맹약을 맺으면서 걸었던 조건을 산이 알고 있다. 그리고 말은 동생이라 하지만 산은 그녀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산과 여울의 친분은 생각보다 깊다. 그는 진심으로 여울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을 파악하며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저를 바다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바다? 웬 바다?”

“제 차례겠지요? 여울과는 어떻게 만난 사이십니까?”

“대답이 길어질 질문이군.”

산이 혀를 찼다.

“내가 궐을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고 있지?”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마니인지라 그녀가 접할 수 있는 소식은 극히 적었다.

하지만 온녕대군의 실종은 상당히 큰 사건이어서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나인들이 한동안은 그 얘기만 주구장창 했었다.

유리산응은 날 때부터 여의주가 없었다. 검은 눈의 왕족은 예락의 역사에서 드물게 나타났다. 일종의 돌연변이였다.

열 살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온통 신비롭게 빛나는 주홍색 눈을 가진 혈족들 사이에서 홀로 검은 눈이라 괴리감이 있긴 했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그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열 살이 된 세자가 처음으로 교룡을 선택했다.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것은 그였으나 여의주가 없어서 제외되었다.

그 다음은 숙원 김씨가 낳았던 옹주였다. 이어서 마니인 화예옹주마저도 교룡을 얻었다. 다음 차례인 제녕군도 교룡을 뽑았다.

하나같이 교룡을 거느린 왕족들 사이에서 그만이 교룡이 없었다. 아직 교룡이 없는 동생 둘도 열 살이 되면 교룡을 얻을 터였다.

그 무렵 온녕대군은 부왕께 궐을 나가 사가에서 머물게 해 달라고 청했다.

본래 예락의 왕족은 혼인을 한 후에 궐 밖에서 사는 것이 법도였다. 열여섯은 혼인을 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였다.

부왕은 여의주가 없는 그를 안쓰럽게 여긴 건지 미혼 상태의 독립을 허해 주었다.

풍족한 자금을 받아 사가로 나온 온녕대군은 며칠 지나지 않아 서찰 한 장을 남겨 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대군의 봉작도, 왕족의 이름도 버리겠다고 쓰여 있었다 한다.

그러면서 값나가는 물건은 전부 처분해서 돈은 한가득 짊어지고 떠났다고 했다. 날 때부터 붙어 있던 호위무사 하나만이 그를 따라갔다.

왕실은 굳이 왕자를 찾지 않았다. 딱히 중요한 위치의 왕자가 아닌 탓이 컸다. 납치된 것도 아니고 힘들어지면 어련히 돌아오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온녕대군은 그 뒤로 1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온녕대군 유리산응이 아니라, 이제 류산이 된 눈앞의 남자가 말했다.

“가출하면서 털어 온 돈으로 상단을 시작했지. 이래 봬도 오라비가 상재에 좀 밝았단다. 그럭저럭 몇 년 지나서 상단 꼴 정도는 갖췄을 때 거래 문제로 용미에 있는 벽씨 상단을 방문하러 갔었다. 거기서 여울을 처음 만났지.”

산이 서란을 응시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내가 벽씨 상단 본부에서 뭘 봤을 것 같아?”

“글쎄요.”

산이 무언가 기대하듯 그녀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가 속삭였다.

“피바다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산이 이어 말했다.

“입구부터 무사들이 뒈져 있었지. 온통 피가 흥건했다. 살아남은 무사들은 구석에 처박혀서 덜덜 떨고 있었고. 아니, 난 큰 건으로 약속 잡고 간 건데 말이야, 마중하는 사람은 없고 시체만 널브러져 있네?”

“…….”

“이게 웬 개판인가 싶어서 호위무사를 앞세워서 조심조심 들어갔지. 그랬더니 웬걸,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체가 늘더라? 어떻게든 침입자를 막고 싶어서 용을 썼나 본데, 막는 족족 베였나 보더라고.”

서란이 눈을 내리깔았다. 산은 턱을 괸 채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는 핏빛 말을 가볍게도 늘어놓았다.

“사방에 아주, 잘린 사지가 널려 있었지. 너 그거 아냐? 사람 뼈라는 게 생각보다 단단해서 쉽게 안 잘려. 근데도 팔이고 다리고 목이고, 죄다 토막이 나서 쌓여 있더라. 잘린 배 아래에 창자가 늘어져 있고 말이야. 피비린내가 진동을 해서 코가 썩을 것 같았지.”

부러 일일이 묘사를 했다. 산은 계속해서 서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듣고 있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별 동요가 없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부행수랑 그 마누라가 죽어 나자빠져 있더군. 그리고 그 가운데에 피로 칠갑을 한 애가 하나 서 있었어.”

설마. 그녀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우리가 들어가니까 목만 돌려서 돌아보는데, 어찌나 섬뜩한지. 새카만 눈에 귀기가 어려서 말이야. 대충 열대여섯 먹어 보이는 게 무슨 세월 다 산 늙은이처럼 표정이 죽어서는.”

산은 그 살육의 현장에서 홀로 서 있던 소년을 떠올렸다. 돌아보는 순간 마주쳤던 그 눈. 무너져 있던 얼굴.

산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여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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