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충돌2016.04.07.
“어차피 내버려 뒀던 보주였잖아! 이렇게까지 해야 해?”
야로의 고함은 곧 빗소리에 묻혔다.
사방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굵은 빗줄기가 강물과 부딪치며 튀어 오른다. 시야가 엉망이 되었다.
용이라면 날씨를 바꿀 수도 있지만, 이무기에게 그 정도 권능은 허락되지 않는다.
야로는 비구름을 흩어 버리기 위해 집중했다. 덕분에 더 이상은 강을 얼리는 주술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까마득한 상공에서 비구름을 놓고 야로와 여울의 도술이 경쟁했다. 여울이 비구름을 끌어들이면 야로가 흩어 버리는 식이었다.
온과 마주친 직후부터 비구름을 모아 놨던 여울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야로는 드넓은 해변의 모래를 맨손으로 퍼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쏟아지는 비와 흐려지는 풍경 속에서 검광만 계속해서 번뜩였다.
“아오, 안 되겠다.”
야로는 결국 비를 그치게 하는 것을 포기했다. 소년은 다시 강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의 뱀 두 마리가 강물에서 일어났다.
가시거리가 짧았다. 야로가 비를 막아 보려다 포기하는 사이에 온은 여울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물 위에 길게 궤적을 그리며 온이 튕겨 나왔다.
야로가 당황하여 물을 일으켜 온을 받아 내었다. 덕분에 멈춰 선 온이 가볍게 핏물을 뱉었다.
“네 말이 과장이 아니었군.”
“그렇지? 여울 진짜 강해.”
“좋아할 일이 아니잖나.”
온이 검을 고쳐 쥐며 내뱉는 말에 저도 모르게 신이 나서 동의했던 야로가 풀이 죽었다.
몸을 돌리던 온이 얼어붙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든 야로는 입을 쩍 벌렸다.
비 사이로 야로가 만든 것보다 굵은 물의 뱀들이 머리를 들고 있었다. 총 여섯 마리였다.
여울이 비구름에 힘을 쓸 필요가 없어지니 모조리 물의 통제에 사용한 모양이었다.
검은빛이 도는 물 덩어리로 이루어진 뱀의 몸체 안에 재수 없이 함께 걸려든 물고기들이 수초나 나뭇조각 따위의 부유물과 함께 빙빙 돌고 있었다.
투명한 뱀들은 까마득한 높이까지 몸을 치켜 올리고 온과 야로를 향해 입을 벌렸다.
캬아악.
한갓 도술의 응용일 뿐인데 그 울부짖음은 진짜 포효처럼 공기를 진동시켰다. 새카만 먹구름 아래로 드러난 거대한 여섯 뱀은 압도적이었다.
온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여울 주력이…… 검술이라며?”
“어…… 그러니까, 내가 알기론 그랬어.”
“어떻게든 흩어 봐라.”
“미친…….”
야로가 양 팔을 휘저었다. 그의 뱀 두 마리가 여섯 마리의 뱀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이 기를 휘감고 수면을 박찼다. 그는 뱀을 향해 달려들며 물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으려 시도하다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너무 쉽게 통제권이 넘어왔다. 한 마리가 그대로 형태를 잃고 물벼락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온은 직감적으로 몸을 틀어 뱀들을 지나쳐 달렸다. 머리 위의 물뱀들이 야로의 뱀과 부딪치는 순간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흐린 시야 속을 살폈다. 빗속으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위협적인 모양새로 뱀들을 만들어 세워 놓기만 하고 여울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달려가는 방향에는 웬 배가 있었다.
폭우 속에서 출렁이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배는 번듯하고 날렵한 모양새였다. 뱃전이 상당히 높았다.
위에 있던 사람이 다가오는 여울에게 밧줄을 집어던졌다.
여울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멈칫했다. 망설임은 짧았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한 팔로 그 밧줄을 잡았다.
서란을 안은 채 그가 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달아나게 둘 수는 없었다. 온은 배를 뒤집어 버리기 위해 장거리에서 물을 조종하려 했다.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여울의 통제권이 그의 통제권과 물을 놓고 다투었다. 온의 실력으로는 여울의 통제권을 빼앗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온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놓칠 수는 없다.
그가 전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반달형의 검기가 그들을 향해 내쏘아졌다.
한 팔은 밧줄, 한 팔은 서란을 안고 있던 여울은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물을 일으키기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여울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검기가 먼 곳에서 번뜩이는 것을 보자마자 그는 서란을 감싸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날아온 검기가 등을 쳤다. 길게 피가 튀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반토막이 났을 공격이었으나 그는 버텨 냈다.
베인 옷자락 사이로 검게 일어난 비늘이 보였다. 찰나에 이무기의 비늘로 피부를 덮어 부상에 그친 것이다.
빗물에 섞여 벌건 피가 흘렀다. 그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빠르게 몸을 놀려 그녀를 데리고 배 위로 올라탔다.
긴 검기는 뱃전도 함께 벴지만 여울에게 먼저 부딪치는 바람에 힘이 줄어 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뱃전에는 긁힌 상처 정도만이 남았다.
그들이 올라타자마자 배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그 속도는 여울이 배 아래의 물을 조종한 덕분이었다.
달려서는 쫓아갈 수 없다. 온은 허탈하게 검을 늘어뜨렸다.
물뱀들을 전부 흩어 버리고 달려온 야로도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배를 보았다. 소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배는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저거 언제 나타났어?”
“나루로 돌아가자. 희나리의 합류를 기다려야겠군.”
“안 쫓아가?”
“배를 구해 오는 사이에 사라지고도 남을 거다. 돌아가서 저 배가 어디서 온 배인지 알아보고, 이제부터는 희나리까지 셋이 함께 행동하도록 하지.”
온이 검을 갈무리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우리 둘로는 무리니까.”
“여기가 강이라서 그래. 나도 여울이 도술에 이렇게 능할 줄은 몰랐단 말이야.”
야로가 지친 듯 말했다. 온은 무어라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는 우울하게 제 검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두 교룡은 강 위를 걸어 나루로 돌아갔다.
*
“친구야, 회포를 풀기엔 여유가 없어 보이는걸.”
배 위에서 밧줄을 던졌던 남자, 산이 쯧쯧 혀를 찼다.
여울은 야로와 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물을 조종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배의 바닥에 손을 대고 있었다. 배의 양 옆에서 물보라가 쳤다.
등에서는 빗물을 타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길게 갈라진 상처 속으로 벌건 속살이 보였다.
치료할 도구를 들고 온 청화가 눈치를 보았다. 부상을 입은 채 물의 통제에 집중하고 있는 여울의 기세가 흉흉해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전투의 직후였다. 가라앉지 않은 적의와 경계가 그의 근처로 퍼져 나갔다. 가까이 가면 베일 듯한 느낌이었다.
“야, 진정해. 끝났어.”
“여울 님, 피가 많이 나는데…….”
“좀 기다려라, 청화야. 지금 가까이 가면 물린다.”
산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울은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예민할 때에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나았다. 잠시 기다리면 스스로를 추스를 터였다.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산의 옆으로 사람이 지나쳐 갔다.
여울이 내려놓은 그 자리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서란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교룡이 두렵지 않았다.
“여울.”
작은 부름이었으나 단번에 기세가 가라앉았다. 며칠 만에 익숙해진 보주의 목소리였다.
여울이 바닥에서 손을 떼자 배 주위에서 몰아치던 물이 가라앉았다.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날서 있던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그는 덤덤한 얼굴이 되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란이 어설프게 웃었다.
“이 정도 거리면 괜찮을 거다. 치료해야지.”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은 것은 네가 아니냐.”
사실은, 그녀도 괜찮지 않았다.
안겨 있었을 뿐이라 해도 그녀가 겪기에는 지나치게 격렬한 전투였다. 토할 것 같았고 온몸이 쑤셨다. 비에 흠뻑 젖어 추웠다.
그러나 다쳐 놓고도 제 상태를 살피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는 벌건 피가 흥건한 그의 등에서 간신히 눈을 뗐다. 그녀가 태어나 처음 보는 중상이었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도와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없다. 그녀는 약간 물러났다. 기다리던 청화가 다가가 그에게 치료를 권했다.
여울이 머뭇거렸다. 산을 알아보고 배에 오르긴 했으나 낯선 곳이다. 보주를 홀로 두어도 될지 걱정이 되었다.
그가 그녀 곁을 떠나는 것을 망설이며 서란을 돌아보았다. 그런 여울의 태도를 산이 유심히 보고 있었다.
서란은 가지 않으려는 그를 떠밀어 보냈다.
“안전하다 생각해서 이 배에 오른 것이 아니냐.”
그녀의 말에 여울이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산에게 머물렀다. 청화가 여울을 이끌자 그가 겨우 자리를 떴다.
산은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읽고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저 뱀 친구가 나한테 경고한 건가? 제 보주를 잘 돌보라고?
산이 여울을 봐 온 세월은 5년이 넘었다. 그 세월 동안 가끔 서간이나 보낼 뿐, 그가 제 주인에 대해 얘기하는 꼴은 본 적이 없었다.
여울은 산에게 친밀하게 굴지는 않았으나 경계하지도 않았다. 여울 스스로는 제가 산에게 허물없이 대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는 산을 신뢰했고, 산은 그 신뢰를 알고 있었다. 여울이 ‘부탁’을 하는 유일한 대상이 산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한테, 그간 관심도 보이지 않던 주인을 위해 경고를 했단 말이지. 저 무심한 놈이.
산은 그리 생각하며 홀로 남은 서란을 기이한 것 보듯 훑어보았다.
그녀는 여울이 있던 곳에 고인 핏자국을 망연히 보고 있었다. 비에 젖어 흰 얼굴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낯이 창백했다.
산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대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 반갑구나, 동생아.”
서란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갑판 위에 쳐 놓은 차양 안에 있었던 산은 폭우에도 그다지 젖지 않았다. 자수가 들어간 화려한 도포차림의 남자는 쾌활한 인상이었다.
유들유들하게 처진 눈꼬리나 그와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콧대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세자의 모습이었다.
마니인 서란은 형제자매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모든 왕족이 태조의 능에서 제를 지내는 흑룡제 때 옆눈으로 보는 게 다였다.
그나마 그녀에게 익숙한 얼굴은 세자뿐이다.
세자는 1년에 한 번 서란의 생일에 마니전으로 찾아왔다. 명목은 축하였으나 서란은 그것이 마치 잡아먹을 가축이 잘 크고 있나 확인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세자와 닮았지만 세자가 아니다. 산의 눈은 평범한 검은색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던 그녀는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어릴 때 스치듯 봤던 얼굴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열한 살일 때 궐을 나가 버린 온녕대군 유리산응(流理山應). 세자의 동복아우이자 여의주가 없는 돌연변이 왕족이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어라, 못 알아보나? 이거 실망인…….”
“온녕대군.”
서란이 그의 말을 끊었다. 산이 칭찬하듯 휘파람을 불었다.
“딱딱하게 그게 뭐냐. 갖다 버린 지 오래된 봉작을. 지금은 그저 류산이다.”
“류…… 산요?”
가명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낯선 오라비를 관찰하듯 올려다보았다. 왕족답지 않은 검은 눈이 그녀를 향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래, 산 오라버니라고 귀엽게 불러 보렴.”
서란의 표정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말이 남매였지, 산과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산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주운 건 친구랑 동생인데, 그중 하나가 동생이 아닌 모양이네. 그럼 도로 버려야지.”
“……산 오라버니.”
“오, 좋아. 제법 귀엽구나.”
지나치게 친밀한 호칭이라 꺼려졌지만, 그들을 도와준 보답으로 이 정도쯤은 상관없었다. 서란은 만족스러워하는 그를 응시하다 물었다.
“여울과 아는 사이입니까? 왜 저희를…….”
“잠깐. 피차간에 할 말이 많긴 한데, 좀 쉬고 나서 얘기하자. 너 꼴이 아주 볼 만해.”
그녀의 말을 가로막은 산이 흠뻑 젖은 서란의 옷자락과 파랗게 질린 입술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안색이었다.
“한 시진 정도 더 가면 나루가 나온다. 거기서 마차로 갈아타고 홍평으로 갈 거야. 일단 쉬어 둬.”
성큼 다가온 산이 서란의 어깨를 친근하게 건드렸다. 그녀가 흠칫 굳었다. 어색했다.
산은 직접 그녀를 이끌어 배 안의 방까지 들여보냈다. 잠자리와 수건, 갈아입을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란은 방 안에 어정쩡하게 섰다. 그녀의 시선이 언뜻 벽 너머로 향했다.
그 의미를 알아챈 산이 픽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여울이 그 정도로 어떻게 될 놈은 아니니까. 거기 청화가 옷이랑 이것저것 챙겨 놨다. 닦고 갈아입고, 눈이라도 좀 붙여. 지쳐 보인다.”
그가 서란의 등을 툭 하고 쳤다. 사이좋은 남매처럼 가벼운 접촉이었다.
“……감사합니다.”
친한 적 없고 종적도 없던 배다른 오라비가 딱 좋은 때에 나타나 적절한 조력을 주는 게 서란은 불안했다. 지나치게 허물없이 구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울과 아는 사이인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나중에 여울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지금 경계해 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서란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살짝 웃었다.
그 웃음에 산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그는 흠뻑 젖어 있는 ‘여동생’을 다시 훑어보았다. 쓰러질 듯한 꼴을 하고서 제법 의연했다.
“푹 쉬어라.”
산은 그녀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그가 떠나며 문이 닫혔다.
서란은 비틀, 침상에 걸터앉았다. 버티고 있던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수건을 집으려다 그 손에 핏방울이 튀어 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여울의 피였다.
속이 아릿해졌다. 그녀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방금 전 그의 품 안에서 지켜본 싸움을 떠올렸다. 열 두엇으로 보이던 어린 이무기가 외치던 말이 선명했다.
〈우리가 뭐 하러 싸워야 하는데!〉
〈어차피 내버려 뒀던 보주였잖아!〉
여울과 그 이무기들은 소룡전에서 함께 배우고 자랐을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녀 때문에.
그리고 결국 다쳤다.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마니식을 치렀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명령 따위 쉬운 것으로 적당히 내린 다음, 홀로 숨을 거두었으면 아무도 괴롭지 않았겠지.
그녀만 체념했다면 모든 것이 문제없이 끝났으리라.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명령을 취소하겠다 말하고 궐로 돌아가면. 여울을 떠나보내고 마니식을 받아들이면.
여울을 위해서는 그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소망. 간절하게 차오르는.
“참으로 이기적이구나, 나는.”
가느다랗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울지는 않았다. 울 정도로 뻔뻔해지고 싶진 않다.
서란은 혼자 수건을 들어 핏자국을 닦았다.
*
홍평은 도하의 서남쪽에 있는 도시였다. 풍광이 아름답고 온천이 솟아서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했다.
도심지에는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잣거리가 형성되어 있고 온천을 하나씩 낀 별저들이 숲 속에 띄엄띄엄 있었다.
도하처럼 성벽으로 둘러싸여 반드시 성문을 지나야만 하는 도시도 아니었고,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곧잘 드나들다 보니 탐문하기 쉬운 곳도 아니었다. 수배령이 내려졌다 해도 마찬가지다.
원래 마차를 타고 도하에서 홍평까지 오려면 이틀은 걸렸다. 하지만 물을 조종하는 이무기의 힘으로 엄청난 속도로 배를 몬 다음 마차로 갈아탄 그들은 하루 만에 홍평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었다. 금산상단의 별저는 이미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멈추지도 않고 마차를 달리며 선잠을 자느라 모두가 지쳤다.
산은 서란과 여울에게 별채를 하나 내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쉬라고 말해 놓고 뒤처리를 하러 자리를 떴다.
서란은 그녀에게 배정된 방 안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녀는 시간을 어림해 보았다. 여의주의 향이 다시 날 때가 되었다. 그녀 스스로는 향을 맡을 수 없지만 시간상 그러했다.
그에게 찾아가 부탁하기가 면구스러웠다. 스스로가 염치없다 느껴졌다.
서란은 멍하니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손. 여울의 피가 묻었던 손이었다.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곧 그녀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울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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