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이유2016.03.17.
좀, 더.
이성을 잃어 가던 순간. 본능이 살기를 감지했다.
자드락은 훌쩍 뛰어 벽으로 물러났다. 그가 있던 자리를 검이 가르고 지나갔다.
어둠을 가르며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들이 몇 개 솟아올랐다. 그 아래에 서늘한 표정의 여울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짓이냐.”
차가운 말에 자드락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한참을 그러고 서서 침상의 서란과 여울을 번갈아 보던 그가 느닷없이 손뼉을 치더니 서란을 가리켰다.
“네 거냐?”
“……일단은.”
“일단은? 보주랑 교룡 사이에 일단이 어디 있, 아.”
자드락의 풀린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킬킬 웃어 댔다.
“마니구나?”
여울은 대답 없이 검을 집어넣었다. 자드락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는 웃다 못해 힉힉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동굴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광기가 맴돌았다.
“와, 나 말고도, 이런 짓, 하는 놈, 이, 또 있었네, 푸하.”
웃음 사이사이에 말소리가 섞였다. 여울은 그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그릇을 꺼내 가져온 물을 담았다.
자드락은 여울이 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 서란의 식은땀을 닦는 것을 키득거리며 지켜보았다. 겨우 웃음을 삼킨 그가 비척비척 일어나 다가왔다.
“비켜 봐. 상태 좀 보게.”
“허튼짓하면…….”
“지금은 안 해. 아깐 너무 오랜만에 향을 맡아서 맛이 갔던 거고.”
자드락이 여울을 밀어내고 의자를 당겨 침상 옆에 앉았다. 그가 서란의 맥을 짚어 보고 열을 재며 흥얼거렸다.
“몸살이네, 몸살이야. 너 이름이 뭐냐? 어떻게 모시면 제 보주가 몸살이 나게 만들어.”
“여울이다.”
“넌 나 알지? 하긴 이무기들 사이에서 날 모를 놈이 있겠어. 마니를 모시고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보나마나 목적은…….”
자드락이 고개를 틀어 여울을 올려다보았다. 반딧불 같은 흐린 빛 속에서 긴 동공이 번뜩였다.
“도망갈 건데 여의주 향을 감추는 방법을 몰라서. 맞지?”
“잘 아는군.”
“뻔하니까.”
자드락이 실실 웃으며 일어나더니 등잔에 불을 켰다. 동굴 안이 밝아지자 여울은 허공을 떠돌던 불빛들을 쥐어 없앴다.
자드락은 서랍을 뒤적이더니 말린 약초를 꺼내고 빻아 약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재료들을 약탕기에 털어 넣은 그가 여울에게 대뜸 그것을 내밀었다.
“밖에 나가서 달여.”
“너는?”
“너희가 질질 흘리고 온 여의주 흔적 지우러 간다.”
“……고맙군.”
“오랜만에 여의주 향 맡게 해 준 보답이다.”
끙 하며 몸을 일으킨 자드락이 고개를 내저었다. 술기운이 덜 가신 듯 걸음이 휘청거렸다.
못미더운 눈으로 그것을 보던 여울은 별수 없이 약탕기를 들고 그와 함께 동굴 밖으로 나갔다. 자드락이 저보다 큰 여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왕 하는 김에 밥도 좀 해 놔라? 안에 쌀 있어.”
“…….”
“뭐, 불만이냐?”
“알겠다.”
“싱겁기는.”
자드락은 입을 벌리며 웃더니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여울은 소서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흔적을 지운다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저 자는 백 살이 넘은 이무기였다. 어련히 방법이 있겠거니 싶어 그는 입을 다물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
서란이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온몸이 찌뿌드드하고 목이 탔다.
기운 없이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에 불쑥 사발이 들이밀어졌다. 약내가 진동했다.
“쭉 들이켜.”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피부와 새카만 머리카락, 까만 눈을 보자 감이 왔다.
“희명교룡 자드락인가?”
“정답. 그 칭호는 오랜만에 듣는걸. 약이니까 식기 전에 얼른 마셔라.”
“여울은?”
“심부름 보냈어.”
이무기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서란은 순순히 사발을 받아 들었다.
질끈 눈을 감고 단번에 쓴 약을 들이켰다.
지켜보고 있던 자드락이 빈 사발을 받아 들었다.
“거 호쾌하게도 마시네. 물 좀 줄까?”
“부탁하마.”
“옛다.”
자드락이 한쪽의 항아리에서 물을 바가지로 퍼서 내밀었다.
서란은 그것을 받아 달게 마셨다. 동굴의 그늘에 보관된 덕인지 물은 시렸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녀는 총기가 돌아온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그대의 거처인가?”
“그렇지.”
자드락이 빈 바가지를 항아리 안으로 던져 넣었다. 조준이 잘못되었는지 바가지는 항아리 주둥이를 치고 튕겨 나와 바닥에 굴렀다.
자드락은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걸 보더니 외면했다. 그가 서란이 앉은 침상에 팔을 괴었다.
“너, 마니 맞지?”
“그러하다. 내가 기절했더냐?”
“어, 하룻밤.”
서란은 미약하게 두통이 남은 이마를 짚었다. 자드락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니를 데리고 도망치는 교룡이 있긴 하지. 나도 그런 놈이었고.”
자드락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풀어내려 늘어뜨린 서란의 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감아올렸다.
“평생을 지켜본 주인이 죽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해 달아나게 되는 거야. 그럼 뭔가 사이에 애틋한, 응? 그런 정이 있기 마련인데.”
자드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냄새를 맡듯 킁킁거리며 여의주의 향을 들이킨 그가 눈만 들어 그녀를 보았다.
“너희는 뭔가 이상해. 건조하다고 해야 하나.”
서란은 무표정했다. 자드락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라면 이무기건 뭐건 다른 녀석한테 보주를 맡기고 자리를 비우지 않아. 아니, 이무기라면 더 위험하지. 죽여 버리고 여의주를 파낼지 어떻게 알고?”
“이무기가 그런 짓도 하더냐?”
“지금의 맹약 내용이 어떻게 정해졌다고 생각해? 수명이 다하는 걸 못 기다리고 제 보주를 죽인 놈, 차마 제 보주는 못 해치겠다고 다른 왕족을 죽인 놈. 예락 유리왕조의 역사에는 별별 놈이 다 있었지.”
“미처 몰랐구나.”
“맹약할 때 주인의 허락 없이는 왕족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잖아. 그런 놈들 덕분에 생긴 내용이라고. 이무기니까 약속하면 안심이라고 다들 생각하지.”
자드락이 비스듬히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가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다.
“너, 이무기가 왜 거짓말을 못하는지 알아?”
서란은 그를 피해 허리를 젖히다 결국 눕혀졌다.
늘씬한 몸이 그녀 위를 덮쳐 왔다. 자드락이 뱀처럼 제 입술을 핥았다.
“이무기는 원래 짐승이니까. 영물이 되었어도 근본은 뱀이란 말이야. 거짓말을 하다 보면 겨우 얻은 영성이 흐려져서 도로 짐승으로 타락해 버려. 그게 두려워서 아무도 거짓말을 안 해. 못하는 게 아니야. 안 할 뿐이지.”
그가 가느스름한 눈매를 반달처럼 휘었다. 눈 아래에 눈물점이 있었다.
서란은 제 위를 덮은 자드락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내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여울과 약속을 했구나.”
“똑똑하네.”
“그래서 짐승이 되고 싶다는 게냐?”
“어차피 난 보주가 없는데, 그냥 너를 죽이고 네 여의주를 손에 넣는 게 어떨까? 한 번쯤 약속을 어기는 걸로는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가늘고 길어 여인처럼 보이는 손이 그녀의 목을 거머쥐었다.
서란은 반항하지 않았다.
자드락이 여울에 비해 여리다지만 그녀보다는 큰 사내였다. 사내 이전에 이무기이기도 했다. 힘으로 이길 방도는 없었다.
소름이 등을 타고 흐른다. 그녀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하거라. 어설픈 협박은 그만두고.”
그녀의 말에 자드락이 갸웃거렸다.
짐승처럼 보이는 몸짓이었다. 제멋대로 흘러내리며 몸 위를 뒤덮은 긴 머리카락은 비늘처럼 보였다.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쇄골을 훑으며 물었다.
“내가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해?”
“그리 보인다.”
“왜?”
“진심이면 일일이 설명해 줄 시간에 이미 저질렀겠지. 잠들었을 때 처리하면 편했을 것 아니냐.”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라면?”
“그럼 원하는 대로 하여라.”
서란은 눈을 감았다. 자드락의 손이 그녀의 심장 쪽으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녀에게 와 닿는 그의 손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포기하는 거야?”
“진실로 짐승이 되겠다면 말이 통할 리가 없잖느냐? 무력한 나는 얌전히 죽어 주는 수밖에.”
자드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위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침상 옆의 의자로 돌아가 앉은 자드락이 어깨를 으쓱였다.
“재미없네. 겁도 안 먹고.”
서란은 잘게 떨리는 손끝을 이불 속에 감추었다. 자드락은 그 손끝을 보았으나 모른 체했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가 의자에 기대며 축 늘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위험하고 낭창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걸인 같은 꼴이 되었다. 그는 푸념처럼 말했다.
“누군 보주가 죽을 때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는데, 누군 시킨다고 제 보주를 남한테 맡겨 놓고 가는 꼴이 괘씸해서 말이지. 너희, 무슨 관계야?”
“보주와 교룡이지 다른 게 있겠느냐.”
“너희 같은 보주와 교룡은 처음 보니까 하는 소리지. 이무기가 집착하는 유일한 대상이 자기 주인이라고. 근데 여울 걘 왜 집착이 안 느껴지냐? 사이가 안 좋아? 가끔 사이 나쁜 보주랑 교룡도 있긴 한데, 그러면 마니를 데리고 탈출할 리가 없잖아.”
“그는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른 것이다.”
“약속이라고? 어떤 거?”
“마니인 내 교룡이 되는 대신에, 딱 세 번의 명령만 들어주기로 했느니라.”
“뭐 그런 게 다 있어? 아니, 그래도 같이 지내다 보면 정이 들 거 아냐.”
“그 명령만 들어주면 곁을 지킬 필요도 없다 했었다. 여울과 나는 맹약 이후 이번에 처음 만났으니 정이니 뭐니 있을 리가 없지. 나를 데리고 나온 건 내가 명령을 했기 때문이고.”
“무슨 명령?”
고분고분 답하던 서란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의욕 없이 늘어진 척 해도 유심히 자신을 보고 있는 자드락의 태도를 알아차렸다.
붉은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비밀이다.”
“어?”
“여의주의 향을 숨기는 법을 알려 주면 가르쳐 주마.”
“허.”
자드락이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가 팔짱을 꼈다.
“제법이네. 불청객 주제에. 내 침상도 마음대로 써 놓고.”
“그건 미안하구나. 사례를 하마.”
“사례, 뭐? 돈? 에이,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은 그가 아이처럼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무언가를 입 속으로 웅얼거리더니 씩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향 감추는 법 가르쳐 줄게. 이건 명령 내용 알려 주는 값으로 하지. 약값이랑 숙박료는 따로 받겠어.”
“돈이 필요 없다 했지. 뭘 원하느냐?”
“네 피.”
웃고 있는 자드락의 입 안에서 뱀의 송곳니가 드러났다.
서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차분한 주홍색 눈동자가 검게 일렁이는 이무기의 눈을 주시했다.
“뭐에 쓸 것이냐?”
“그건 알 필요 없고. 죽을 정도로 뽑아 달라는 건 아니니까. 조금만 줘.”
“아무래도 그대는 이미 거짓말을 몇 번 했었나 보구나.”
“이런, 티 나?”
낄낄거리는 자드락은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았다.
웃다가 돌변하여 대뜸 서란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플 정도로 힘주어 손목을 잡은 그가 노래하듯 말했다.
“동굴에 갇혀 사는 불쌍한 이무기는, 용이 될 수도 없고, 지킬 보주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미치지도 못하고. 그럼 뭘 하고 살지? 짐승이 될까?”
“거절하면 향을 숨기는 법도 알려 주지 않을 심산인 게로구나.”
“그러엄. 하지만 수락하면 그것도 알려 주고, 최대한 도와주지. 거짓말이 아니야. 내가 좀 놀아서, 더 거짓말하면 위험하거든. 어때? 피 줄 거야?”
움켜쥐는 힘이나 섬뜩한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거부할 수 없는 거래였다. 서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받아들이마. 너를 믿겠다.”
“믿어도 된다니깐.”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목에 날카롭게 파고드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가 몸에 힘을 풀었다.
눈을 뜨자 손목 안쪽에 이를 박고 있는 자드락과 시선이 마주쳤다. 자드락은 눈으로 웃고는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뱀이 문 것처럼 두 개의 구멍이 남았다. 상처의 크기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다. 혈관이 뚫렸는지 피가 뭉클뭉클 솟아났다.
그가 호리병을 꺼내 그녀의 피를 받기 시작했다. 억세게 쥐였던 손목은 붉게 달아오른 것이 내일이면 멍이 들 게 분명했다.
“이야기나 계속하지. 무슨 명령 내렸어?”
“……바다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바다? 웬 바다? 그거 때문에 궐에서 나온 거야?”
서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드락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왜? 명령 세 번이라며? 마니식이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으면 차라리 궐 밖에서 살게 해 달라고 명령을 하지 그랬어?”
“불가능한 일을 명령할 생각은 없다.”
“네가 살아남는 게 불가능한 일이야?”
“그럼, 가능하겠느냐? 그대가 가장 잘 알 텐데.”
자드락이 조용해졌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마니를 데리고 1년을 도망 다녔으나 결국 잡힌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건 사실이었다.
여의주의 향을 감춰도, 아무리 숨어도 한계가 있다. 이무기의 갈색 피부를 사미국 출신이라 얼버무린다 해도 여의주를 가진 왕족이 지닌 주홍색 눈은 감출 수가 없다.
하물며 그 특이한 둘이 붙어 다니는 상황이니 1년이라도 잡히지 않은 게 용했다.
이무기 혼자라면 감시를 피해 바다를 건너거나 국경을 넘어 달아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주를 데리고 그럴 수는 없었다.
서란이 창백해진 얼굴로 웃었다.
“바다에 갈 정도만. 두어 달이면 되겠지.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느냐.”
“왜 그래야 하는데? 곱게 죽어 주긴 싫어서?”
“이건 진짜 비밀이란다, 자드락. 여울에게는 말하지 마렴.”
서란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자드락이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더니 귀를 가까이 했다.
그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말이 끝나고 새침한 얼굴로 떨어지는 서란을 멍하니 보던 그는, 호리병 입구를 쥐고 있던 손에 피가 닿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호리병이 꽉 찼다.
그는 병을 닫아 치우고 뚝뚝 흐르는 핏물을 전부 핥아먹었다. 상처 주위까지 핥아 낸 그가 약초와 붕대를 집어 드는 순간 동굴 입구에서 기척이 났다.
“자드락, 뭐 하는 짓이지?”
여울이 사냥해 온 사슴을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동굴 안에 피 냄새가 가득했다. 서란의 손목에 난 상처와 자드락의 입 주위에 묻은 피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었다.
자드락은 천진하게 미소지었다.
“거래했어.”
“무슨…….”
“사실이다. 신경 쓰지 마렴.”
날카로운 여울의 목소리를 서란이 끊어 냈다.
여울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멈췄다.
그녀가 뭘 하든 그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명령한 대로 바다까지 데려다 주고, 세 번째 명령을 듣고, 그러면 끝일 텐데.
그는 제 속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각을 외면했다. 여울은 사슴을 도로 집어 들었다.
“손질해 오겠습니다.”
“다녀오너라.”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자드락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만 흔들고는 서란의 손목에 약초를 꼼꼼하게 붙이고 있었다.
여울은 그 광경을 가만 쳐다보다가 동굴 밖으로 향했다.
신경 쓰지 말라 했으니 신경 쓰지 말자. 그리 다짐했다.
이리 다짐하는 것부터가 이미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라는 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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