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4화 (4/70)

4. 왜 아니 보내셨습니까?2016.03.13.

“이건 무어냐? 이것도 주술이냐?”

“그러합니다. 진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울은 수풀 사이로 떠나갔다.

서란은 얌전히 앉았다가 나머지 한쪽 발의 신과 버선을 벗어 버렸다. 꽉 죄어 있던 것이 풀어지니 발이 시원했다. 좀 따갑긴 했으나 그 정도는 괜찮았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울창한 숲은 가을이 다가와 색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정말로 궐을 빠져나왔다. 너무 쉬웠다. 스무 해를 넘게 그 안에 갇혀 살았건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체통을 지키라 눈총 줄 사람도 없겠다, 그녀는 그대로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란은 놀라 입을 다물다가 기침을 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여울의 눈이 기이한 것을 보는 듯했다.

“그냥, 좋아서 그런다.”

그녀가 미처 가시지 못한 웃음기를 입가에 매단 채 대꾸했다. 여울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다가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허벅지 위에 그녀의 발을 잡아 올렸다. 그제야 그의 곁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물 덩어리를 본 서란이 감탄의 목소리를 냈다.

“이무기가 물을 다스린다더니 정말이구나.”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여울의 손짓에 따라 물 덩어리가 다가왔다. 그는 물속에 서란의 발을 대뜸 집어넣었다.

시리도록 차가웠다. 물이 닿자 상처가 쓰렸다. 서란은 흠칫 몸을 떨었다.

여울은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발을 다 물에 집어넣더니 손으로 씻겼다.

커다랗고 거친 손가락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렀다. 간지럽고 따갑고 민망했다. 서란은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뺐지만 바로 붙들렸다.

“가만 계십시오.”

“내가 직접 하마.”

“됐습니다.”

그의 미간에 미약한 짜증이 어렸다. 서란은 그것을 눈치 채고 포기했다.

참방거리는 물소리만 조용히 흘렀다.

여울은 다 씻은 물을 허공에 흩어 버리고 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발을 닦았다.

버선과 신을 도로 신겨 준 그는 허리춤에 달고 있던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어 수통과 함께 그녀에게 내밀었다.

“드시지요.”

서란이 순순히 받아 들자 그가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근처 나무에 기대서더니 눈을 내리감았다.

서란은 제 손에 들린 것들과 그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육포를 입에 물었다. 짜고 질겼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수통의 물은 갓 떠온 것인지 차가웠다. 물을 삼키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알 수 있었다. 물이 달게 느껴질 정도였다.

배고픔과 갈증을 채우고 나자 조금 정신이 드는 듯했다. 서란은 내내 눈을 감고 서 있는 여울을 흘깃 보았다.

“너는 쉬지 않느냐? 식사는?”

“괜찮습니다.”

밀어내는 것 같은 대답이었다. 서란은 양손에 턱을 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무리한 명령을 해서 화가 났느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겸양이 굉장히 안 어울리는구나. 지금 책 읽느냐?”

그녀가 피식피식 웃었다. 여울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건조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은 못하니 진짜 화가 안 났다는 말이겠지. 왜? 따르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너까지 죄인으로 만드는 일을 시키는데 화도 안 나더냐?”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서란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얼?”

“죽음을 앞둔 인간이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여울은 희미한 비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그는 그녀가 분노하거나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란의 반응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혀를 찼다.

“밖에서 꽤나 고생한 모양이구나. 서간에는 그리 대충대충 써 놓고선. 내 그럴 줄 알았다.”

되레 저를 동정하는 것 같은 어조에 여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가 본 적도 없는 분이 저보다 밖을 잘 아시나 봅니다.”

“윽, 아픈 곳을 찌르는구나. 밖이 아니라 네 서간 모양새 탓이다.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하고 마는 서간을 볼 때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자세히 좀 말해 보라고 답서를 보내려다 말았느니.”

서란이 거창하게 한숨을 쉬었다.

여울은 여기저기 떠돌긴 했으나 그래도 한곳에 머물기도 하고 제가 있는 위치도 꼬박꼬박 알렸다. 그럼에도 한 번도 그녀의 답서를 받지 못했다.

그럴 거면 왜 서간을 쓰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건 또 아니었다. 일말의 서운함을 담아 여울이 대꾸했다.

“왜 아니 보내셨습니까?”

“글쎄. 왜일 것 같니?”

그녀가 되물었다. 여울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이유를 댔다.

“제게 별로 관심이 없으셨던 게지요.”

서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럼 그걸로 하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이리 시간을 허비해도 되겠느냐? 날이 밝았으니 내가 없어진 게 들켰을 텐데.”

대놓고 말을 돌리고 있었다.

여울은 눈살을 찌푸리고 제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별로 개의치 않던 일인데 이리 답을 피하는 걸 보니 캐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보이고 앉았다.

“업히십시오.”

“내 발로 걸을 수 있다.”

“오기 부리지 마십시오. 고작 그만큼 걸었다고 발이 그 꼴이 되시는 판에.”

“너 의외로 자상하구나?”

여울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서란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제가 아무리 곁에 있지 않았다지만 보주의 교룡입니다. 당신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약했잖습니까.”

“맹약이 무슨 소용이냐? 어차피 난 너한테 여의주도 못 주는 것을.”

가볍게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새털 같이 가벼웠다.

여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잔말 말고 업히시지요.”

“숫제 협박할 기세구나.”

투덜거리던 그녀가 겨우 그의 등에 손을 댔다.

그는 쉽게 일어났다. 한 팔로 안아 올리는 것도 가능한데, 등에 업는 것 정도야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줄기에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닿는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서란이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까도 느꼈던 건데, 몸이 차구나. 이무기라 그런 것이냐?”

“그러합니다. 추우십니까?”

“아니, 시원해서 좋다.”

그녀가 귓가에 대고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울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기를 운용하기 시작하자 사슴이 달리는 것처럼 빨라졌다.

“고맙다.”

휙휙 지나가는 바람 소리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귀에 와 박혔다. 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위에 올라 방향을 가늠했다. 이 정도 속도면 소서촌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산 아래쪽으로 흔적을 내며 내려갔다가 계곡에서 방향을 틀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서촌에서 향을 감추는 게 가능해질 경우 추적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밑져야 본전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저물어가기 시작할 때까지 그나 서란이나 말이 없었다. 등에서 전해지는 체온으로 온몸이 따뜻해졌다.

문득 여울은 그녀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가 워낙 빨라 말을 꺼내면 혀를 깨물 수도 있으니 입을 닫고 있는 게 낫긴 했다.

그래도 너무 조용했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보주, 잠드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귓가에 색색 하는 숨소리만 들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서란을 나무에 기대게 해서 내려놓았다. 그녀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순간 덜컹하는 기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황급히 맥을 짚었다. 팔딱팔딱 뛰는 혈관이 느껴졌다.

여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조그만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뱉는 숨이 뜨겁다.

그는 서란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였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한동안 낭인 무사 노릇을 하며 혼자 돌아다녔더니 보통 인간의 체력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보주는 구중궁궐에서 살아온 옹주가 아닌가.

자신의 실책이었다. 여울은 혀를 차고는 힘없이 늘어지는 서란을 앞으로 안아 올렸다.

소서촌이 멀지 않았다. 유배지니 뭐니 해도 마을이긴 하니 빨리 거기로 가는 게 나을 것이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다.

그는 품에 안긴 서란의 안색을 확인해 가며 속도를 더 높였다.

*

“화예옹주가 없어졌다고?”

야로는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검은 원삼 차림의 소녀가 한심한 눈으로 야로를 쳐다보았다.

그녀 외의 다른 이들은 야로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자의 난간에 방만한 자세로 기대 있던 느루가 대꾸했다.

“그래, 여울도 같이.”

“미친.”

야로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싸쥐었다. 옆에 앉아 있던 소녀, 희나리는 슬그머니 발광하는 야로 곁에서 떨어졌다.

단정하게 관복을 갖춰 입고 기둥에 기대 있던 긴 머리의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자는 뭐라 하던가?”

“당연히, 잡아 오라 하셨지. 이미 항구와 국경 관문에는 은밀히 서찰을 보냈다.”

느루가 턱밑을 쓸었다. 그의 눈이 정자에 모여 있는 교룡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야로는 세자의 동복누이인 화련공주의 교룡이었다.

세자에게는 동복아우이자 궐을 나가 버린 온녕대군도 있었지만, 그는 여의주가 없는 왕족이라 이무기를 얻지 못했다.

강빈의 아들인 제녕군의 교룡 온, 역시 강빈의 아들인 진녕군의 교룡 희나리까지.

흑룡궁에 머물고 있는 모든 교룡이 모여 있었다. 자리에 없는 것은 혼인해 궁을 나간 옹주의 교룡과 화예교룡 여울뿐이었다.

느루가 빙긋이 웃었다.

“물론 도망친 게 마니이니, 교룡들이 나서야겠지. 안 그래, 형제자매 여러분?”

야로가 인상을 썼다. 희나리는 한숨을 쉬었고 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 전부가 갈 필요가 있나?”

“선대의 경우를 떠올려 봐. 안 다치고 해결하려면 당연히 다 가야지. 물론 나는 빼고.”

“뭐야? 넌 왜?”

야로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느루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자께서 내린 명이다. 너희 셋이면 충분하잖아?”

“망할, 자기 교룡이라고…….”

“불만이면 빠지든가. 강제는 안 해.”

느루는 스산한 눈으로 교룡들을 훑어보았다. 그가 느긋하게 제 입술을 핥았다.

“못 잡으면 너희 중 누군가의 보주를 다음 마니로 삼으면 되는 거니까.”

세 교룡들이 얼굴을 굳혔다. 야로는 이를 갈기까지 했다. 느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너희끼리 알아서 마니를 잡아 와. 마니식 전까지.”

그는 살래살래 손을 흔들더니 한량처럼 걸어가 버렸다. 정자에 남은 셋은 잡아먹을 듯이 느루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야로가 짜증스럽게 머리띠를 풀고 마루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가 동동 발을 굴렀다.

“아, 짜증 나! 짜증 나아! 저 자식 진짜 싫어!”

“각자 준비하고 한 시진 후에 만나자.”

희나리가 냉정하게 말하며 원삼 자락을 가다듬고 일어났다. 야로는 드러누운 채로 입술을 내밀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넌 화도 안 나?”

“화가 나. 여울한테.”

싸늘한 눈이 번뜩였다.

“마니인 거 알고 선택했잖아?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데리고 도망쳐? 난 절대 내 보주 포기 못해. 그 자식 죽여 버리고 마니 끌어다 느루 앞에 던져 줄 거야.”

“뭐? 야! 누굴 죽인다는 거야! 여울이 원해서 그랬겠어? 틀림없이 그 마니 계집애가 죽기 싫다고 징징댔을 거야. 너도 여울 알잖아? 걔가 자기 보주에 집착할 놈이면 10년이나 떠나 있지도 않았겠지!”

“알 게 뭐야, 네 말마따나 10년이나 지났는데. 한 시진 후에 보자.”

희나리가 코웃음을 치더니 정자 밖으로 나갔다.

야로는 화가 치미는지 마룻바닥을 탕탕 때렸다. 그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온을 노려보았다.

“너는? 나만 느루 저 자식이 짜증 나는 거야?”

“보주들이 세자의 신하인 이상 세자의 교룡인 느루의 명을 따라야겠지. 그게 법도다.”

“법도고 자시고 여울을 죽일 거냐고.”

“마니만 끌고 오면 될 일을, 굳이 동기를 해칠 필요가 있겠나. 그가 막아서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어쨌든 죽이기 싫다는 거지? 역시 넌 말이 좀 통하는 거 같아. 되도록 여울은 건드리지 말자, 응?”

“글쎄. 노력은 해 보지.”

온은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야로를 떼어 냈다.

그 역시 떠나 버리자 야로는 혼자 널브러진 채 허공을 향해 욕을 뱉었다. 여울을 추격하고 싶지도 않았고 느루의 말에 따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따르지 않으면 세자는 그의 보주인 화련공주를 마니로 삼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키지 않는 움직임으로 일어나 준비를 하기 위해 제 방으로 향했다.

*

소서촌은 스무 채가 되지 않는 너와집들이 모여 있는 화전민촌이었다. 해가 저물 때가 되어 저녁을 짓는 연기가 듬성듬성 올라왔다.

여울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결계도, 지키는 병사도 없다.

이무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소서촌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아무도 지키지 않아도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큰 키의 이방인이 품에 사람을 안고 논밭 사이 길을 걸어오자 쇠스랑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남자가 잔뜩 긴장하는 게 보였다. 남자는 달아날지, 말지 갈등하더니 쇠스랑을 목숨줄처럼 부여잡고 여울에게 다가왔다.

“뉘, 뉘시오?”

“자드락을 만나러 왔다.”

“이무기님?”

남자가 기겁을 했다.

언뜻 보아서는 이무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세로로 긴 동공이나 갈색 피부로 구별할 수 있지만, 눈은 그냥 검게 보일 뿐이고 피부가 짙은 사람은 바다 건너의 사미국 출신이겠거니 하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이런 촌락의 남자가 이무기를 알아보는 것은 여기에 자드락이 유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가 부들부들 떨더니 흙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소, 소인이 미처 몰라 뵙고......”

“되었다. 이 마을에 의원이 있나?”

“그게, 따로 의술을 배운 사람이 없어서 자드락님이 봐 주고 계십니다요.”

“자드락은 어디 있지?”

“안, 안내해 드릴깝쇼?”

남자가 눈치를 보며 일어나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힐끔힐끔 여울의 품에 안겨 있는 서란을 훔쳐보았다. 무슨 사연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여울이 사납게 눈을 치뜨자 그가 경고를 알아들었는지 얼른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과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는 공터를 지나쳐 산기슭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보였다. 남자가 굽신거렸다.

“여기서 머무십니다요. 가끔 외출하시기도 하지만 기다리면 오실 겁니다요.”

“수고했다.”

여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부리나케 마을 쪽으로 달아났다.

여울은 동굴로 들어갔다. 서늘하고 습기가 찬 동굴은 인간이 살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었지만 이무기에게는 쾌적한 편이었다.

그리 깊지 않은 동굴 안에 세간이 제법 갖추어져 있었다. 집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여울은 일단 보이는 침상에 서란을 눕혔다. 멋대로 이불을 꺼내 덮어 주고 신을 벗겼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이마를 짚어 보았다. 델 듯이 뜨겁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술은 아주 기초적인 것밖에 알지 못했다.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도 모르겠다.

여울은 물이라도 떠 오기 위해 일어났다. 침상 주위에 진을 그려 놓는 건 잊지 않았다.

그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와 함께 자드락이 돌아왔다. 검은 긴 머리를 제멋대로 늘어뜨린 청년은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킬킬 웃으며 동굴 벽을 짚던 자드락은 콧속을 파고드는 향에 흠칫 놀랐다.

달고 그리운 향. 두 번 다시 맡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여의주의 냄새.

그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의 침상에서 향기가 나고 있었다.

반쯤 눈이 풀린 채 침상으로 다가가던 자드락은 진에 부딪쳤다.

허공에 정전기가 튀었다. 그는 공기를 잡고 찢듯이 손을 움직였다. 진은 손쉽게 부서졌다.

진이 사라지자 향이 더 농밀해졌다. 자드락은 우뚝 선 채 눈을 감고 음미하듯 향을 들이마셨다.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떴다. 검은 눈이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자드락은 침상에 걸터앉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에 젖은 여자는 정신을 잃은 채였다. 그는 손끝으로 여자의 얼굴을 덧그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젖히고 그 목덜미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지독하게 그리운 향기가 훅 끼쳐 왔다.

저절로 목을 울리며 신음이 나온다. 자드락은 그녀의 목에 맺힌 식은땀을 핥았다. 폭죽이 터지듯 눈앞이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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