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3화 (3/70)

3. 두 번째 명령2016.03.10.

“……저는 무관입니다. 전쟁에 참가한 적도 있지요. 하지만 그걸 물으시는 것 같진 않군요.”

장 교관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탁자에 올렸다.

“살의를 느끼신 겁니까?”

이무기는 탐욕에 빠지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잡아먹고 필요하면 살생을 할 수는 있어도 욕심이나 재미로 생명을 해치지는 않는다. 부나 권력에도 관심이 없고 무언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용이 되는 것에만 집중되었다. 왕족들에게 여의주가 없었다면 이무기들은 진작 예락을 떠났을 것이다.

“죽이고 싶어져서 사람을 죽였다.”

여울이 손등의 흉터를 응시했다.

“그 이후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 네가 보기엔 어떻지?”

장 교관은 검게 가라앉은 이무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생의 절반 이상을 이무기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보냈다. 여울도 그가 가르쳤다.

그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전쟁 중에 살육에 맛 들여 망가진 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당신이 그리된 것 같지는 않군요. 일단 질문에 답하자면, 사적인 원한으로 누군가를 죽인 적은 없습니다. 죽이고 싶었던 적은 있습니다만.”

“내가 그러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장 교관이 빙그레 웃었다.

“아니오, 당신은 이무기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 영물이잖습니까. 당신이 그리할 정도라면 그 자는 죽어 마땅한 자였겠지요.”

여울은 눈을 내리깔았다.

과연 그럴까. 그는 동기들과 달랐다. 자유와 하계에 대한 욕심을 품었었다. 감정에 치우쳐 살인을 했다.

자신은 무언가 잘못된 이무기일지도 모른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해 줘서 고맙다.”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장 교관은 정중히 그를 배웅했다.

*

여울을 내보내고 나서 서란은 하루 종일 바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더했다. 수를 놓는 척하거나 창밖으로 정원을 내다보는 척하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야심한 시각이 되어 홀로 침실에 남은 그녀는 비단으로 싼 보퉁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2년이 넘게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다.

그게 고작 이거뿐이라는 게 한심했지만, 마니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니인 그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서란은 빠르게 보퉁이를 서랍 깊숙이 숨겼다.

“여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련.”

서란은 서책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다. 여울은 그녀가 앉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벌써?”

서란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녀는 여울의 얼굴이나 행색을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얕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너는 이 궁에 미련이 없구나.”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탁자에 팔을 올리더니 턱을 괴었다.

“아무리 그래도 2, 3일은 쉴 줄 알았느니라. 뭐, 듣고 나서 바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

“…….”

“두 번째 명령을 내리마.”

도대체 무슨 명령을 하려는 걸까. 여울은 순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보려다가 의미 없는 짓으로 느껴져서 그만두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를 바다로 데려가 다오.”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하얀 얼굴이 천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무슨 뜻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내게 바다를 보여 줘. 이 궐을 나가서.”

“진심이십니까?”

“그럼 농이겠느냐?”

서란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여울은 입을 다물었다.

마니는 마니전을 벗어날 수 없다. 마니전 내에서도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니는 고이 키워지는 산 제물이니까.

심장에 박힌 여의주가 완전해지려면 스무 해가 넘게 걸렸다. 마니식이 마니의 스물둘 생일로 규정되어 있는 것도 완전한 여의주를 얻기 위해서였다.

여의주가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식생활까지도 까다롭게 통제되었다. 외부의 사람이 마니전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외출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것도 마니식까지 반년 남은 시점에서 저런 이유로 외출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가 봐도 마니식을 피해 도망치는 것으로 보일 것이고,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을 터다.

몰래 탈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소리인지 나도 안다. 그래서 네게 명령하는 것이다.”

너는 내 교룡이지 않느냐. 서란은 뒷말을 내뱉지 않고 입 안으로 삼켰다.

그녀는 숨겼던 보퉁이를 도로 꺼냈다. 보퉁이를 풀어헤쳐 안에 있던 것들을 늘어놓았다.

“마니전 주위 경비 상황을 대략 기록해 두었다. 마니전 밖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던 터라 정보가 없구나. 갈아입을 의복과 여비는 내가 준비해 놓았다. 나갈 때 나인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수면제를 약간 모아 놓았느니라. 여로는 대충 짜 놓긴 했으나, 나가 보지도 못한 나보다는 네가 잘 알 터이니……. 내가 준비한 건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모두 네게 맡기마.”

펼쳐 놓고 보니 더욱 초라하여 서란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여울은 일어서서 탁자 위의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런 것을 모으셨으니 보주께서 탈출을 준비 중이라는 건 이미 발각되었을 겁니다.”

“아닐 것이다. 2년이 넘는 시간을 들였느니라.”

서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무명 저고리와 치마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수놓는 것과 옷을 짓는 것이 취미란다. 아니, 그것이 취미라고 믿게 만들었느니라. 옷감이란 옷감은 종류별로 다 들이라 했다. 마니가 궐 밖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흑룡제 때마다 거리에 몰려든 백성들의 옷을 훔쳐보았다. 시도 끝에 겉보기로나마 비슷한 형태로 이 옷을 만들었다. 담을 넘는다 해도 이런 번쩍번쩍한 금박이 들어간 당의로는 무리지 않느냐.”

저고리를 내려놓은 그녀가 은자가 든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집에 빚이 있어 돈이 궁한 나인을 매수했다. 마니전의 예산으로 꽃놀이나 단풍놀이를 할 때 매번 그 아이를 칭찬하고 후한 상금을 내렸다. 대가로 그 일부를 상납받았지. 이건 그 돈을 모은 것이다.”

그녀는 주머니를 도로 보퉁이 안에 넣었다. 경비 상황을 기록한 것과 종이로 싸 놓은 수면제를 이어 집어 들었다.

“바느질은 항상 담과 가장 가까운 창가에서 했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수를 놓으며 발걸음 소리나 말소리로 교대 시각과 인원을 추측했단다. 2년간 관찰하며 한 번도 변하지 않았으니 어지간하면 옳을 것이니라. 수면제는 원래 자주 처방을 받았던 것이다. 불면증이 좀 있었거든.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떼어 모아 두었단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며 보퉁이를 정리했다. 그것을 여울에게 내밀었다. 여울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것을 받았다.

“뭐, 발각되었어도 무슨 상관이냐. 내가 실제로 나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으니 이리 내버려 두는 것 아니겠느냐.”

“나가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아니 내버려 두는 것이겠지요. 추격이 붙을 겁니다. 이무기는 여의주의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교룡들이 추적해 오면 여의주인 보주께선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바다는커녕…….”

“일단 소서촌으로 가면 된다.”

서란이 그의 말을 끊었다.

흑룡궁은 청람산과 이어져 있고, 청람산은 와호 산맥과 닿아 있다.

그 와호 산맥 산중에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촌락인 소서촌이 있다. 이 조그만 촌락의 이름을 서란과 여울 둘 다 알고 있었다.

소서촌은 유배지였다. 이무기가 미치거나 큰 죄를 지으면 그곳에 가두게 된다.

탐욕도 거짓도 없는 이무기가 죄를 짓거나 미칠 일은 극히 드문지라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현재 소서촌에는 선대 마니의 이무기인 자드락만이 갇혀 있었다.

자드락은 마니식에서 마니를 데리고 탈주한 죄로 그곳에 유배되었다.

그는 1년여를 도망 다녔으나 결국 붙잡혔다. 소서촌에 유배된 뒤에는 뒤늦게 다시 치러진 마니식에도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라면 여의주의 향을 감추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긴 시간을 도망 다닐 수는 없었을 터이니.

“다시 말하마. 나를 바다로 데려가라. 이건 내가 네게 내리는 두 번째 명령이다. 너는 반드시 해내야 하느니라.”

선명한 주홍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울은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방 안에 흐르던 여의주의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같이 죽으라는 명령까지도 예상했었다.

보주라 해도 죽음을 앞둔 인간이니 어떤 꼴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다. 이해할 수 없고 무리한 요구라 해도 약속했으니 따라야 한다.

포기는 쉬웠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서란은 복종하는 교룡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왜 이런 명령을 하는지는 묻지 않느냐?”

“제가 알아야 하는 일입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그저 따를 뿐입니다.”

“현명하구나. 네가 내 교룡인 게 참으로 다행이야.”

그녀는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에게 그녀의 감정이나 생각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원해서 답서를 보내지 않았었다.

“준비할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보주.”

“물론. 지금 당장 떠나자는 것은 아니었다. 때가 되면 알려다오.”

“예.”

여울은 그녀가 준 보퉁이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란은 그를 내보내고 침상에 누웠다. 오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사흘 후 새벽에 가까운 밤이었다.

문 앞을 지키는 나인은 수면제가 섞인 차를 마시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서란은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궁의 물건은 추적당하기 쉬워서 들고 갈 수가 없다. 혹시 몰라서 패물 중에 구별하기 어려운 진주나 보석만 떼어 내 은자 주머니에 같이 집어넣었다. 여울이 가져다준 지도도 함께 들어 있었다.

주머니를 품에 넣고 침전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서간집을 꺼냈다.

비단으로 감싼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그것을 품에 넣었다.

침상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호지 너머로 흐린 달빛이 스며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미세하게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이 열리고 여울이 보였다.

서란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평생 살아온 방 안에는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창밖에 서 있는 여울은 검고 컸다.

갈색 피부에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 검은 옷.

날카롭게 굳어 있는 얼굴까지 합하자 그림자가 일어선 요마처럼 보였다.

서란은 창턱을 넘어 그가 내미는 팔을 잡다가 작게 웃었다.

“누가 보면 자객인 줄 알겠구나.”

여울은 대꾸 없이 서란을 부축했다. 그가 한 팔로 그녀를 아이처럼 안아 올렸다. 덩치 차이가 꽤 나다 보니 그녀는 그의 품에 폭 파묻혔다.

서란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이렇게 들면 무겁지 않느냐? 업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만약의 사태가 생기면 등 쪽은 지키기 어렵습니다.”

딱딱하게 답한 그가 담 쪽으로 움직였다.

달은 눈썹처럼 가늘어 밤이 짙었다.

마니전의 담장은 유난히 높다. 서란의 키의 두 배는 될 높이였다.

여울은 뒤로 약간 물러나서 달렸다. 몇 발 되지 않는 도움닫기였건만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서란을 안지 않은 팔로 기와를 잡고 단번에 담 위에 올라섰다. 기왓장이 부딪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바로 아래에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금군이 보였다. 일부러 이리로 올라온 것이었다.

그는 아래로 뛰어내리며 하품을 하던 금군의 목덜미를 손날로 쳤다. 기절한 금군이 무너지는 것을 팔로 받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눕혔다.

그가 어둠 속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동안 서란은 입을 다물고 그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딱 달라붙어 있었다.

인간과 다른 생물인 이무기라는 것을 배워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그는 망설임 없이 지나갔고 순찰하는 금군의 횃불이 보이기도 전에 몸을 숨겼다. 그녀라는 짐을 안고 있는데도 빈손인 것처럼 빨랐다.

무사들 중에 무공(武功)이라 하여 자연의 기를 익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다던데, 그런 것인가 싶었다.

여울은 청람산 방향으로 움직였다. 경계가 더 엄중한 궁궐 외벽을 뛰어넘느니 결계가 있어 감시가 없는 청람산을 타는 게 훨씬 나았다.

그는 소룡전과 연결되는 철문을 지나쳐 길조차 없는 바위투성이의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란은 아래를 보다 아찔해져서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까마득한 벼랑은 끝나고 그럭저럭 평평한 땅이 나왔다. 여울은 그제야 내내 안고 있던 서란을 내려놓았다.

그는 말없이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길이랄 게 없어 수풀과 가지, 나무뿌리가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여울이 풀을 밟고 검으로 가지를 쳐내며 대강 길을 만들었다.

흔적을 남기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지만, 어차피 여의주의 향 때문에 남기지 않아도 소용이 없으니 소서촌까지 빠르게 가는 게 나았다.

서란은 눈을 부릅뜨고 그가 밟았던 자리를 골라 밟았다. 달빛이 거의 비쳐 들지 않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태위태하게 걷던 그녀가 결국 나무뿌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휘청 넘어지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팔이 그녀를 받쳤다.

그녀는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좀 어둡구나.”

여울이 허공을 휘젓듯 손을 움직였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반딧불처럼 작은 불이 둥실 떠올라 발치를 비췄다.

서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소소한 주술입니다.”

그가 등을 돌렸다. 그녀는 제 발치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는 불빛에 의지하여 걸었다.

그렇게 꽤 걸은 후에 갑작스레 그들의 앞이 확 트였다.

푸르스름한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너른 호수가 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년호(千年湖).

용에게 두 개의 여의주는 필요가 없었다. 마니를 얻은 왕의 용들은 맹약에 따라 자신의 왕이 죽고 나면 두 번째 여의주를 얻게 된다.

용은 맹약에서 풀려나 승천하기 전에 그 필요 없는 두 번째 여의주를 천년호에 버린다고 전해진다.

천년호에는 검은 뱀들이 살았다. 태조의 용이 이무기였을 적에 살았던 호수니, 뱀들은 그의 동족이었다.

천년호에 녹아든 여의주의 힘이 뱀들 중에서 몇몇을 이무기로 만들었다.

그렇게 태어난 이무기들이 소룡전에서 자라난다. 왕족과 맹약을 맺지 않은 이무기는 소룡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선대 용들은 인간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결계를 쳐서 천년호의 이무기들을 가두고 엄격하게 훈육했다. 그리고 그 이무기들이 다시 왕족과 맹약을 맺었다.

그런 순환이었고 그런 전통이었다.

호수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호수의 중앙에 똬리를 틀 듯 웅크린 검은 형상이 보였다. 태조의 이무기가 벗어 둔 허물이 바위가 된 것이었다.

여울은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서란은 그 뒤를 따르며 처음으로 보는 천년호를 흘긋거렸다.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는 호수의 물은 유리처럼 투명했다. 별이 박힌 밤하늘이 그 표면에 거울처럼 비쳤다.

고요한 수면 아래에 검은 뱀들이 보였다. 때때로 헤엄치는 뱀의 움직임에 수면이 이지러졌다.

“천년호에 있을 적이 기억나느냐?”

서란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여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걸으며 대답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무기가 되면서 혼이 깃들고 태어났으니, 제 기억은 그 때부터입니다.”

“그럼 태어나던 순간은 기억하느냐?”

“예.”

어떠했느냐고 물어보려던 서란이 입을 다물었다.

이끼가 듬성한 바윗돌 옆을 지나치면서 산 아래의 풍경이 보였다. 곳곳에 피워진 불로 어렴풋이 모습이 드러나는 흑룡궁은 끝없이 넓었고, 장난감처럼 작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저렇게 넓었고 저렇게 작았구나.

여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서란은 궐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아침이 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움직여야 합니다. 교룡들이 추적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들킬 것입니다.”

“알고 있다.”

천년호가 내는 푸르스름한 빛에 그들의 얼굴은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여울은 잠시 검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밤새도록 산을 탔다.

여울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나 서란은 눈앞이 가물거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정비 출신이 아니라 해도 왕의 딸인 옹주였으며 감금당하다시피 자란 마니였다. 가끔 말이라도 탈 수 있는 다른 왕녀들보다도 체력이 모자랐다.

여울이 그녀를 배려하여 앞에서 길을 다지고 천천히 걷는다 해도 몇 시진에 걸친 산행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녀는 우는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어둠이 저물며 사위가 빠르게 밝아졌다. 여울은 그제야 멈추었다.

“쉬었다 가시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서란은 힘없이 웃고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에게 다가온 그가 허리를 굽혔다. 여전히 그녀의 종아리 근처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불을 움켜쥐었다. 손을 펴자 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어나려던 그의 시선이 문득 그녀의 발에 가 닿았다.

피 냄새. 여울이 대뜸 손을 뻗어 발목을 움켜쥐었다.

서란이 기겁했다.

“무슨 짓이냐?”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발목을 잡아당겨 신을 벗겨 냈다. 버선에 피가 묻어 있었다. 버선까지 벗겨 내자 서란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물집이 잡혔다 터지고 까져서 엉망이 된 발이 드러났다. 굳은살 하나 없는 부드러운 발의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여울은 무릎 위에 그녀의 발을 올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손에 잡히는 가느다란 발목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피부는 종잇장처럼 얇고 발바닥은 그의 손바닥보다 작다.

연약하다. 훌쩍 컸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봤었던 어린아이 때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이리 되도록 말씀 한 번 아니하셨습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손이 가만히 상처를 훑는다. 따가움과 통증이 밀려들어 서란은 몸을 움츠렸다.

“괜찮다. 가는 길이 급한 것을. 각오한 일이다.”

“미련하십니다.”

여울이 천천히 그녀의 발을 내려놓았다.

그가 근처에서 돌멩이를 주워 들더니 그녀가 앉은 바위 주변에 빙 둘러 원을 그렸다. 원 곳곳에 문자를 써 놓고서 손을 털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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