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2화 (2/70)

2. 11년만의 귀환2016.03.06.

건평 21년 9월 7일.

여름의 더위가 수그러지고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고 곡식이 여물어 가는 시기였다.

서란은 하릴없이 들고 있던 수틀을 내려놓았다. 놓는 둥 마는 둥 한 수틀에는 푸른 실들만 얼기설기 꿰여 있었다.

열어 놓은 창으로 서늘한 바람이 슬금슬금 넘어 들어왔다. 그녀는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답답하던 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옹주마마.”

나인이 조르륵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서란이 말없이 돌아보았다. 나인은 들뜬 어조로 말했다.

“교룡께서 돌아오셨사옵니다.”

서란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장서거라.”

“예.”

나인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서란은 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나인의 뒤를 따랐다. 심장이 조금씩 뛰었다.

마니전의 앞마당에 옛날과 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1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는 이무기였으니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길었던 머리카락은 목 어림에서 짧게 잘려 있었다. 옷이나 봇짐에 여행의 흔적이 누덕누덕 내려앉은 게 보였다.

검집을 쥐고 있는 손등에는 긴 흉터가 있었다.

매끄러운 갈색 피부는 그대로였으나 고상한 도령 같던 얼굴은 이제 서늘한 사내가 되었다. 키가 훌쩍 자라고 어깨가 넓어져 예전에 묻어나던 어린 티는 흔적도 없었다.

그것이 낯설어 서란은 마루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라, 여울.”

튀어나온 목소리는 그녀 스스로 듣기에도 담담했다. 이 정도면 합격점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약간 길다 싶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은 지난 세월만큼 깊어져 검은 늪처럼 보였다.

서란은 그린 듯이 웃었다.

“꽤나 변하였구나.”

“탈피를 한 번 하였습니다.”

이무기는 본신이 뱀이니만큼 탈피를 할 때마다 쑥 자랐다.

떠나기 전의 여울이 세 번 탈피한 상태였으니 이번이 네 번째였을 것이다. 네 번의 탈피를 거치고 나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마지막 탈피였구나. 그가 꾸준히 보내 온 서간에서 탈피했다는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랬지. 내 잠깐 잊었다. 피로하겠구나.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보자.”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보주.”

여울이 길게 읍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보주라는 단어에 섬뜩 소름이 돋았다.

왕족을 모시는 이무기인 교룡들은 제 주인을 보주라고 불렀다. 제 여의주라는 뜻이었다.

서란은 티 내지 않고 태연하게 웃어 준 후 돌아섰다. 나인이 여울에게 다가가 안내를 했다.

그녀는 제 침전으로 돌아와 문갑을 열었다. 깊숙한 곳에 가지런히 철해 둔 서간집을 꺼냈다.

지난 세월 동안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두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내 온 여울의 서간을 모아둔 것이다. 그녀가 써 놓고도 보내지 못했던 답서도 여기에 있었다.

서간집을 뒤적이던 그녀는 금세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4년 전 여름에 보낸 서간이었다.

건평 17년 초여름.

안 좋은 일이 있어 서간을 한 번 보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마지막 탈피를 끝냈습니다.

조령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사과와 송이버섯이 많이 납니다.

과수원에 요마가 출몰한다 하여 처리해 주었습니다. 관에 청을 넣으면 처리가 늦는지라 낭인무사를 반기는 듯했습니다.

요마는 대단한 것이 못 되어 쉽사리 해결했습니다. 보답으로 숙식을 제공받았습니다.

날이 더워집니다. 더위에 유의하십시오.

여울 배상

탈피 같은 중요한 일을 이렇게 언급만 하고 넘어갔으니 그가 낯설게 보일 만도 했다.

서란은 서간집을 도로 덮었다. 그녀는 가만히 비단으로 싼 서간집의 표지를 쓸어 보았다.

총 63통.

그리 길지 않고 자세하지도 않은 짧은 서간들. 그녀가 아는 여울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신뢰할 수 있는 자는 그뿐이다. 그가 그녀의 이무기이므로.

그녀는 오래도록 품어 온 결심을 재차 다졌다. 서간집을 쥐고 일어났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

다음 날 아침, 서란은 눈 뜨자마자 창가에 어른어른 비치는 사람 형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명을 지르기 전에 가까스로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여울이냐?”

“예, 보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건만 여울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빛이 비쳐 들며 얼굴이 드러났다. 반듯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공손하게 읍했다.

서란은 침상에서 내려와 속적삼 위에 덧옷을 걸쳤다.

그녀의 차림새를 보고도 여울은 나가지 않았다. 그저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보았을 뿐이다.

교룡은 원래 주인의 곁을 잘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호위무사가 아니었지만 그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지간해서는 보주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맹약을 맺자마자 떠나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던 여울이 특이한 것이다.

이무기와 인간 사이에서 남녀의 유별함을 논하는 자도 없으니 그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이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되 다른 왕족들과 달리 교룡과 떨어져 지냈던 그녀는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서란은 이마를 짚었다.

“밤새 게 있었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새벽녘에 일찍 깨어 온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시중을 들기 위해 나인이 들어왔다. 나인은 들어오자마자 온통 새카만 여울이 목석처럼 서 있는 걸 보고 질겁했다.

에구머니, 하며 주저앉아 버리는 나인을 보고도 여울은 별 반응이 없었다. 서란은 한숨을 쉬고 여울에게 손짓했다.

“나가 있어라. 조반을 함께 들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마라.”

순순히 나가던 여울이 멈칫했다. 까만 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물었다.

“명령이십니까?”

서란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니, 부탁이다.”

“예.”

여울이 나가자 나인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화예교룡께선 좀 이상한 것 같사옵니다. 말도 없으시고, 옹주마마께 대하는 것도 영……. 다른 교룡분들과는 달리 궁 밖에서 살다 오셔서 그런 것이옵니까?”

나인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서란은 그저 미소만 흘렸다.

*

조반은 서란과 여울 단둘이서 받았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나인들이 상을 내가고 나서야 그녀가 여울을 돌아보았다.

“좀 걷자꾸나.”

그녀는 따라붙는 나인들을 내치고 마니전의 후원으로 향했다.

마니전의 후원은 대숲이었다. 자그마한 대숲 사이로 산책을 할 수 있도록 꼬불꼬불한 길이 나 있었다.

서란은 여울만 거느린 채 대숲 안으로 들어섰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사방이 대나무로 가득 찼다. 사위가 적막했다.

“그간 별일 없었느냐.”

서란은 가볍게 운을 뗐다.

여울은 제 앞에서 걷고 있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인간은 서서히 그러나 빠르게 자란다. 어린아이는 어느새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라는 동안 곁에 있지 않았던 여울에게는 이무기가 탈피한 것처럼 보였다.

왕실의 예법대로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흰 목덜미가 보인다.

댓잎 냄새와 뒤섞여 그리운 향이 났다. 농밀한 여의주의 향. 여울은 그 향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예. 보주께서는 무탈하셨습니까?”

“나야 내내 마니전 안에만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니.”

그녀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들어온 길마저 대숲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문득 멈춰 섰다.

“너는 말이 적구나.”

“싫으십니까?”

“아니, 살가운 것보다는 마음에 든다.”

이상한 말이었다.

여울은 컸다 해도 여전히 자신보다 한참 작은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대나무 사이로 흘러 지나갔다. 다가오는 가을을 알리듯 조금 차가웠다. 서란이 살짝 어깨를 떨었다.

“이쯤 네가 오겠거니 했다. 마니식이 반년밖에 안 남았으니.”

“오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려고 그러셨습니까.”

“아직 약속한 명령이 둘이나 남았는데 네가 아니 오겠느냐.”

멈춰선 서란이 돌아섰다. 그녀가 곱게 눈을 휘며 웃었다.

“오랜만에 궁에 왔지? 소룡전에도 들러 보고, 다른 이무기들과도 만나렴. 내 곧 네게 두 번째 명령을 내릴 것이야. 그 전에 궁에서 하고픈 것을 다 해 두도록 해라. 내 곁에 있을 필요는 없다.”

여울은 그늘 없이 웃고 있는 서란이 기이했다.

마니식은 세자의 이무기가 용이 되는 날이다. 마니인 화예옹주 유리서란이 죽는 날이란 소리다.

그녀는 죽을 날을 반년 앞둔 여자 같지가 않았다.

여울은 지금 바로 명령해도 된다고 하려다 말았다.

서란은 그에게 서간을 보내라 했지만 답서를 보낸 적은 없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하계를 떠돌며 수많은 인간을 보았다. 그는 그 인간들을 바탕으로 그녀를 판단했다.

어쩌면 같이 죽어 달라고 명령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뒷정리를 하라는 뜻으로 저런 제안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준비가 되면 내게 말해라.”

“예.”

서란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금박을 물린 댕기가 한들한들 흔들린다.

그녀는 뒤를 따르는 기척에 도로 멈추더니 돌아보았다.

“내 곁에 있을 필요가 없다지 않았니. 가 보아라.”

“홀로 계시면 위험합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구중궁궐에서 마니를 누가 해하겠느냐? 내버려 둬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걱정 말고 가렴.”

반쯤은 습관적으로 한 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안전에 문제가 없다면 굳이 곁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여울이 읍을 하고 물러났다. 서란은 검은 무복이 멀어져 대숲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뒤도 안 돌아보는구나.”

그녀는 투정처럼 중얼거렸다. 찰나 얼굴에 희미하게 쓴 기색이 어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딱 이 정도가 좋다.”

허공에 속삭이며 그녀는 대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여울은 소룡전으로 향했다. 소룡전은 예락국의 왕궁인 흑룡궁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흑룡궁 바로 뒤에 자리한 청람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용이 새겨진 철문이 나온다. 철문 뒤편으로는 공동이 있고 공동에 난 갈라진 틈을 지나가면 절벽에 둘러싸인 분지가 있었다.

그 안에 자리한 전각이 소룡전이었다.

그 분지는 주인 없는 이무기들에게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교룡이 되기 전에는 그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므로.

이무기들이 태어나는 천년호는 청람산의 정상에 있었다. 청람산 전체가 예락국의 성역이라 입구부터 사람을 가리는 굳건한 결계가 쳐져 있었다.

이무기나 왕족은 결계에 걸리지 않는다. 여울은 손쉽게 결계를 통과하여 오솔길을 올랐다.

“오랜만이군, 여울.”

“이야, 이게 누구야.”

철문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들이 그를 보고 아는 체했다. 여울은 금세 그들을 알아보았다. 왕의 용인 헤살, 그 옆은 세자의 이무기인 느루였다.

느루는 곱슬한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으로 장식한 머리띠를 두르고 관복을 걸친 훤칠한 청년이었다. 그가 빙글빙글 웃었다.

“마니식이 가까워지니까 아무리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겠다 싶었어?”

“느루, 하지 마라.”

헤살이 눈살을 찌푸렸다. 느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햇빛을 받자 평소에는 검은 홍채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무기 특유의 눈동자였다.

“저 녀석은 어차피 제 보주한테 별 관심도 없어. 뭐, 현명한 태도지. 정 붙여 봤자 자드락 선배 꼴이 될 텐데. 안 그래?”

헤살은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대거리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하고 있는 여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마니 곁에 있지 마라.”

그 말에는 마니와 마니의 이무기에 대한 동정이 스며 있었다.

여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용에 대한 예우만 적당히 갖추었다.

헤살이 떠나고 나자 느루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네가 영리하다고 생각해. 맹약 맺자마자 떠나다니.”

“네 인정은 필요 없다.”

“그런데 내내 궁금하긴 했지.”

그는 쌀쌀한 여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서며 말을 붙였다. 여울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용이 되길 포기하고 나가 본 세상은 어땠어? 후회되지 않는 선택이었나?”

여울이 그를 노려보았다. 뱀의 흉포함이 그 눈에 서렸다.

그것에서 무언가를 읽어 낸 느루가 비죽이 입술을 올렸다. 그는 친근한 형제처럼 여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쉬다 가라. 너라면 자드락 선배처럼은 안 되겠지.”

느루가 길을 내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여울은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는 오른쪽 손등을 길게 가른 흉터를 내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어릴 때는 절대 열 수 없었던 철문에 손을 댔다. 철문은 소리조차 나지 않고 열렸다. 공동 안은 비어 있었다.

공동을 가로질러 벽에 난 틈을 통과하자 무릉도원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풍경이 햇빛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잘 가꿔진 정원에서 뛰어놀던 갈색 피부의 어린아이 몇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헉, 여울 선배다.”

“누구야?”

“넌 모르는 유명한 선배.”

“유명하다고?”

“마니한테 자원했대.”

아이들 중 몇이 얼굴을 찡그렸다.

“미쳤대?”

“몰라, 원래 좀 이상했다더라.”

여울은 아이들의 소곤거림을 무심히 지나쳤다.

연못가 정자의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누워 있던 소년이 그 소란에 벌떡 일어났다. 소년은 전각으로 향하는 여울의 등에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여울!”

멈칫한 여울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다리를 흔들거리더니 사뿐하게 정자 아래로 뛰어내렸다. 열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그는 이무기가 수놓인 흉배가 달린 검은 관복 자락을 제멋대로 걷어올려 다리를 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관모 대신 교룡들이 두르는 머리띠는 어디다 팽개쳤는지 보이지도 않고 검은 머리는 제멋대로 뻗친 상태다.

“야로.”

“10년만이네? 아니, 더 됐나?”

야로는 개구지게 웃으며 여울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여울은 소년을 허리에 매단 채 소룡전의 대문을 넘었다.

“11년이다.”

“우와, 진짜 오랜만이네. 너무한다, 그 동안 한 번도 안 오고. 탈피해서 못 알아볼 뻔했잖아. 내 관복 보여? 나도 이제 교룡이야. 내가 누구 교룡 됐는지 안 궁금해?”

“화련공주냐?”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어?”

여울의 야로의 팔목에 대충 감겨 있는 머리띠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야로가 제 팔목을 보았다. 머리띠의 뒷면에 새겨진 화련이라는 글자를 본 그가 낄낄거렸다.

그는 묻지도 않은 다른 이무기들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온은 제녕군 교룡이 됐어. 제녕군이 좀 무뚝뚝하다 보니 은근히 서먹한 거 같더라. 세자랑 느루는 데면데면해 보여도 꽤나 사이가 좋은데 말이지.”

“그렇군.”

“막내인 진녕군 교룡은 희나리! 진녕군이 희나리를 누나처럼 따른대. 희나리는 애 보는 기분이래.”

“너는?”

“나? 음, 내 보주인 화련공주는 좀 까칠하긴 해도 되게 예쁘다? 여의주 향도 좋은 게 얼굴도 예쁘니까 떽떽거려도 마냥 귀엽지 뭐야. 아, 온녕대군이 여의주만 있었어도 교룡이 하나 더 생겼을 텐데. 걘 왜 여의주가 없었을까.”

여울은 야로가 떠드는 것에 간간히 대꾸하며 소룡전 안을 가로질렀다.

연무장에서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무기 서넛을 데리고 검술을 가르치던 중년인이 연무장에 들어서는 그들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는 주름진 눈으로 여울을 훑어보았다.

“여울이십니까?”

“오랜만이다, 장 교관. 바쁜가?”

“무사히 탈피하셨군요.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 교관이 이무기들을 가르치는 동안 여울은 한쪽으로 물러나 기다렸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소룡전 안을 둘러보는 그에게 야로가 물었다.

“마니식 때문에 온 거야? 영영 안 올 것처럼 나가더니.”

“아직 있었나.”

“우와, 너무하네. 내 존재감이 무시할 정도는 아닐 텐데?”

여울이 입을 다물었다. 혼자 투덜거리던 야로가 기지개를 폈다.

“이쯤이면 내 공주님 목욕도 끝났겠지. 목욕할 땐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쫓아내서 여기서 놀고 있었거든. 어릴 땐 같이 목욕도 했는데 쪼끄만 게 좀 컸다고 난리야. 볼 것도 없는 게.”

“사이가 좋은 모양이군.”

“어, 뭐, 그렇지? 헤헤. 가랄 땐 언제고 끝났는데 없으면 성질부리니까, 슬슬 가 봐야겠어.”

“잘 가라.”

몸을 일으킨 야로는 잠시 망설였다. 애꿎은 바닥을 툭툭 차던 그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음, 저기 웬만하면 마니식은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너도 알잖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야로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헤집더니 훌쩍 자리를 떴다.

여울은 애초부터 마니식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제 주인이 목숨을 잃고 제 것이어야 할 여의주가 다른 이무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무엇하러 보겠는가.

느루의 말처럼 주인이 죽기 전에 얼굴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야로의 말처럼 마니식을 보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남은 두 개의 명령 때문에 돌아온 것이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무슨 명령을 내릴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훈련을 끝낸 장 교관이 다가왔다. 검을 쥔 어린 이무기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 쪽을 갸웃거리다 저들끼리 떠들며 멀어졌다.

연무장 근처에 있는 방으로 여울을 안내한 장 교관은 문을 닫고 차를 내왔다. 여울은 찻물로 입술만 가볍게 적셨다. 장 교관의 차는 여전히 맛이 없었다.

“그간 꽤나 많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장 교관의 눈이 손등의 흉터에 길게 머물렀다.

탈피는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흉터는 사라지는 게 정상이었다.

흉터가 남아 있다는 건 탈피 이후에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다.

여울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직접 낸 것이다.”

“예? 어째서…… 아닙니다.”

놀라 되묻던 장 교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여울은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들렀다.”

“무엇입니까?”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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