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룡의 주인-1화 (1/70)

1. 맹약2016.03.03.

이무기는 여의주를 얻어야 용이 될 수 있다.

예락(霓落)의 왕족들은 심장에 여의주를 품고 있었다.

화예옹주 유리서란(流理曙蘭)은 새삼스럽게 그 사실들을 되새겼다.

그녀는 어제 열 살 생일을 맞이했다.

거울을 들여다보자 고운 당의를 걸친 어린 소녀가 비쳤다.

정성스레 땋은 검은 머리와 하얀 얼굴이 보였다. 둥글고 커다란 눈동자는 노을이 지는 하늘같은 주홍빛이었다.

왕족의 눈에서 비치는 주홍빛은 여의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의주가 없는 왕족은 평범한 검은 눈이었으므로.

이무기는 용이 되길 원하며, 그로 인해 여의주에게 이끌린다. 유리 왕족들이 이무기와 맹약을 맺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옹주마마, 용께서 납시었습니다.”

“나가마.”

서란은 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머무는 마니전의 앞마당에 긴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갈색 피부의 청년이 서 있었다. 예락의 왕이 거느린 용(龍)인 헤살이었다.

인간과 달리 세로로 길쭉한 동공의 눈동자가 서란을 응시했다. 그 눈은 그녀와 같은 주홍빛이었다. 그가 여의주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준비되었나?”

헤살의 물음에 서란이 가만히 끄덕였다. 헤살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절대로 열리지 않던 마니전의 대문이, 헤살에게는 너무도 쉽게 열렸다.

그는 그녀가 뒤처지지 않도록 느리게 걸었다. 그들은 궁궐 안을 가로질러 갔다.

궐에 맞닿아 있는 청람산에 접어들었다. 청람산은 전체가 결계로 격리되어 있는 예락의 성소였다.

“이무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헤살이 흘리듯 말했다.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울의 공기는 시리고 맑았다.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왕족은 열 살이 되면 제 이무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무기는 왕족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며, 대신 왕족은 수명이 다할 때 심장의 여의주를 이무기에게 주었다. 여의주를 받은 이무기는 용이 되어 천계로 승천한다.

예락국의 태조가 처음 이무기와 만난 이래로 이 맹약은 계속 반복되어 왔다.

용이 새겨진 철문이 나타났다. 이무기들이 격리되어 자라는 소룡전의 입구였다.

헤살은 그 앞에서 멈춰서 서란을 돌아보았다. 소녀는 열 살짜리 답지 않게 무표정했다.

그는 그녀의 모친이 죽은 지 1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 위로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그럴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친이 죽지 않았어도, 서란은 아이다울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잠시 기다려라.”

이번에도 서란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헤살은 그녀를 두고 철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

이무기들은 넓은 공동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하나같이 짙은 피부에 새카만 머리와 눈동자였으나 생김은 저마다 달랐다.

간혹 티격태격하는 이들도 있었고 작은 속닥임이 오갔으며 눈을 감고 뭔가를 중얼중얼 외는 자도 있었다.

소년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괸 팔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눈만 들어 입구를 보고 있었다.

공동의 입구에는 철문이 있다. 철문에는 구름 사이를 노니는 용이 새겨져 있었다. 용의 입에는 여의주가 물려 있다.

소년은 그 여의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철문에 새겨진 용이 반으로 갈라졌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모든 이무기들의 눈이 입구로 쏠렸다.

헤살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본 이무기들의 눈이 선망의 빛을 띠었다. 그는 그들의 선배이자 왕의 용이었으므로.

헤살은 이무기들을 서늘한 눈으로 훑었다. 이무기들과 구분되는 선명한 주홍색 눈이었다.

“곧 왕족이 들어올 것이다.”

이무기들의 얼굴이 환희로 뒤덮였다.

그들이 앞 다투어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어린 이무기들은 왕족에게 선택받고자 서로를 밀치며 자리를 잡았다. 나이가 있는 이무기들은 어린 것들 뒤쪽에 바르게 섰다.

소년은 그저 그들을 지켜만 보았다.

헤살은 소란한 어린 것들을 내려다보다가 홀로 벽에 붙어 앉은 소년을 잠깐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금세 시선을 돌린 헤살이 말을 이었다.

“내, 동기간의 정을 보아 하나 충고해 주마. 이번 왕족은 마니(摩尼)로 낙점된 아이다.”

소란이 뚝 멎었다. 이무기들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몇은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 숨으려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솔직한 것들.

소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니의 이무기는 결코 용이 될 수 없다. 이무기들이 대놓고 꺼리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왕족은 여의주를 심장에 품고 있다.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헤살처럼 주인이 살아 있는데도 용이 된 이무기는 어떻게 여의주를 얻었겠는가. 헤살의 주인이 제 형제의 심장을 뽑아 자신의 이무기를 용으로 만든 것이다.

용은 천계의 존재였다. 원칙적으로 하계에 있을 수도 없고, 간섭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예락국의 왕은 대대로 용을 거느렸고, 그 힘으로 왕국을 유지했다.

용이 되었어도 주인이 살아 있으면 이무기 시절의 맹약에 따라 주인이 죽을 때까지 충성하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상태로 용을 거느려야 하는 세자는 자신의 심장에 있는 여의주가 아니라 다른 여의주가 필요했다.

따라서 형제자매 중에 하나를 뽑아 마니로 삼는다.

오늘 이무기를 선택할 왕족은 바로 그 마니였다.

얼어붙은 공동 내부를 훑던 헤살의 시선이 다시 소년에게 와 박혔다. 헤살은 이번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소년은 그 시선에서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헤살은 이곳, 소룡전에서 이무기들을 가르치는 선생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소년의 특이한 성정도 알고 있다.

마니의 이무기가 될 생각이 없느냐?

헤살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년은 처음부터 용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매우 옅었다. 첫 번째 탈피를 마칠 무렵 제가 다른 이무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동기들은 나이가 적든 많든, 네 번의 탈피를 거쳐 다 자란 이무기라 해도 용이 되는 것에 집착했다. 소년은 저 혼자만이 다른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세상을 알고 싶었다. 좁은 소룡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년호에서 태어난 이무기에게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맹약을 맺어서 나간다 해도 내내 왕족의 곁에 있어야 한다.

모시던 왕족이 죽고 용이 되어 천계에 오르면 자유로울까?

이무기들도, 심지어 용이 된 헤살도 천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설화인지 민담인지 모를 전설들뿐. 한번 천계에 들어간 용은 하계로 나오지 않았다.

소년이 소룡전에서 배우고 익힌 것은 하계였다. 그는 하계를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하계를 자유롭게 누비고 싶었다.

그것이 용이 되는 것보다 더 큰 소망이었다.

소년은 헤살의 시선을 외면했다. 동기들에 비해 욕심이 적다지만, 그라고 용이 되기 싫은 것은 아니다.

일부러 막힌 길로 갈 필요는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소년의 안색이 변했다.

주인이 죽는다고 이무기가 죽는 것은 아니다. 용이 되지 못하고 평생을 이무기로 살다 죽어야 할 뿐이다. 다른 모든 이무기에게는 그것이 죽음보다 끔찍한 삶으로 느껴질 터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달랐다.

마니로 낙점된 왕족의 삶은 지극히 짧다. 그 잠시만 참으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오히려 다른 왕족의 이무기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가다듬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보이는 구석으로 숨어 버린 동기들을 지나쳐 걸었다.

소년이 가장 앞에 섰다. 헤살은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시 철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닫히지 않았다.

철문 밖으로 나간 헤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란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를 공동 안으로 안내한 그가 문을 닫았다.

철문으로 막힌 공동 안에 농밀한 향이 흐른다. 오직 이무기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향이었다.

여의주의 기운.

들어온 왕족이 마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원하게 되는 향.

몇몇 어린 이무기들은 풀린 눈으로 몇 걸음 걸어 나왔다. 가장 앞에 있던 소년은 흠칫 놀라 반걸음 정도 물러섰다.

소년은 이미 몇몇 왕족의 선택을 지켜본 경험이 있었다. 눈앞의 왕족은 여의주의 향이 꽤 짙은 편이었다.

「정신 차려라」

헤살이 용언으로 내뱉었다. 말 자체에 힘이 담긴 용의 언어는 천둥처럼 이무기들의 귀를 울렸다.

그제야 정신이 든 몇몇 이무기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물러났다.

어수선하던 공동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자 앞에 서 있는 것은 여전히 소년뿐이었다.

“둘러보아라.”

서란이 헤살의 말에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타오르는 노을 같은 주홍빛 눈동자가 공동 내부를 훑었다.

겉으로 보기엔 인형처럼 귀여운 아기씨였으나 그 눈빛은 아이답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화예옹주 유리서란이다.”

서란의 목소리는 앳되고 가늘었다. 그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번 대의 마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직접 그 입으로 들을 줄은 몰랐다.

숨죽인 동요가 이무기들 사이에서 바쁘게 오갔다. 헤살은 그린 듯이 서서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서란은 고요한 소란이 가시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다들 나를 원하지 않을 터다. 그러니 조건을 걸겠다. 너희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서란이 숨을 고르듯 간격을 두었다.

“나는 내 이무기에게 딱 세 번만 명령하겠다. 그 외에는 자유를 줄 것이니, 내 곁에 머물지 않아도 좋다.”

어린아이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마니의 이무기가 되기엔 부족한 조건이지만 이게 내 최선이다. 혹 지원할 자가 있느냐?”

서란의 말대로 고작 저런 조건에 용이 될 길을 포기할 이무기는 없었다. 역대 마니들의 경우 모든 이무기가 거부해서 이무기를 거느리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달랐다.

죽을 때까지 모시면서 참을 각오를 다졌는데 바로 자유를 주겠다니. 곁에 머물 필요도 없다. 그에게는 이 이상의 조건이 없었다.

소년은 서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 번의 탈피를 거친 그는 열여섯은 되어 보였기에, 무릎을 꿇었는데도 어린 서란과 눈높이가 비슷했다.

“저를 택하소서.”

말간 눈이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여울입니다.”

“여울이라. 상냥한 이름이구나.”

한 번도 제 이름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란이 조그만 손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화사하게 웃는다.

“내 교룡(蛟龍)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 주마.”

*

다른 왕족들의 맹약식은 성대한 행사에 가깝다. 그러나 마니인 서란의 맹약식은 단출했다.

청람산 아래의 내원에 왕족들이 모여 있었다. 왕족과 맹약한 이무기인 교룡들이 자신들의 주인 뒤에 시립했다.

헤살은 서란과 여울을 데리고 그 앞에 섰다.

“맹약의 내용은 외고 있겠지?”

“네.”

서란이 대답하자 헤살이 물러났다. 왕을 포함한 왕족들은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서란의 앞에 여울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휘장처럼 늘어졌다.

“이무기 여울. 나 유리서란을 주인으로 받들겠느냐?”

“예.”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느냐?”

“예.”

“내 허락 없이 다른 왕족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느냐?”

“예.”

이무기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같은 맥락으로, 약속을 하면 어길 수 없다. 따라서 맹약에 주술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서란은 제 앞에 배례한 그를 내려다보았다. 차분하게 마지막 말을 읊었다.

“너는 이제부터 내 교룡이다. 내 수명이 다하는 날에, 내 여의주는 네 것이 되리라.”

모든 왕족들이 공통적으로 읊는 맹약의 문장이었다. 허나 마니인 서란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다.

여울은 그것을 알면서도 맹약을 받아들였다.

“받들겠습니다, 보주(寶珠).”

이것으로 끝이었다. 연회도 음악도 없었다. 황량한 맹약식이었다.

지루한 듯이 지켜보고 있던 왕이 입을 열었다.

“화예옹주, 교룡을 맞이한 것을 축하한다. 화예교룡, 옹주를 잘 부탁하마.”

의례적인 치하였다. 왕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헤살이 그 뒤를 따랐다. 뒤이어 왕족들이 제 교룡들과 함께 떠나갔다.

왕족들 중 유일하게 주홍빛이 아닌 검은 눈을 가진 소년이 있었다.

온녕대군 유리산응.

그는 잠시 머물러 저보다 어린 서란과 그녀의 교룡을 눈에 담았다. 내관이 그를 채근했다.

“대군마마, 곧 강학이 시작될 겁니다.”

“알았다.”

온녕대군이 내관을 따라 사라졌다. 그에게는 뒤따르는 교룡이 없었다.

서란은 기다리고 있던 상궁과 함께 마니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녀의 뒤에서 여울이 조용히 따랐다.

마니전은 옻칠을 하여 온통 검었다. 대문을 넘는 순간 등 뒤로 문이 굳게 닫혔다.

서란이 여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찬찬히 그를 훑었다.

“너는 내 곁에 있고 싶으냐?”

여린 목소리 끝이 아주 미미하게 떨렸다. 여울은 무심하게 되물었다.

“그러길 원하십니까?”

서란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큰 눈을 깜박인 뒤, 무언가 치받아 오르는 것을 꿀꺽 삼키고, 곱게 웃었다.

“아니, 필요 없다.”

그 말로는 모자라게 느껴졌다. 서란은 말을 덧붙였다.

“옆에 머물지 말거라.”

“그리하겠습니다.”

그가 원하던 바였다. 서란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조금 우물거리다 물었다.

“바로 떠날 것이냐?”

“제게 세 가지 명령을 내리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서란은 조그맣게 답하고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여울은 별 생각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니전의 담은 유난히 높았다. 그래서인지 내부가 기묘하게 숨이 막혔다.

마니로 뽑힌 왕족은 마니전에서 격리된 채 자란다고 들었다. 천년호에서 태어난 이무기가 교룡으로 선택되지 않는 한 소룡전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박 상궁.”

“예, 옹주마마.”

서란이 상궁을 불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상궁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그녀가 또렷한 목소리로 상궁에게 명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을 내주어라.”

“알겠사옵니다.”

“여울, 떠날 준비를 하고 오너라.”

서란은 여울을 외면한 채 말했다. 상궁이 앞장섰다. 여울은 뒤따르지 않고 물었다.

“명령은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죽기 전에만 들어주면 되는 것이니, 지금은 신경 쓰지 말렴.”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어색했다.

“시간이 많이 남았잖느냐.”

여울은 순순히 납득했다.

그는 상궁을 따라 이동하여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받았다. 짐을 챙긴 후에 마니전의 앞마당으로 돌아왔다.

빈 마당에서 잠시 기다렸다. 거대한 마니전은 웅크린 짐승처럼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락거리는 치마 소리가 가까워졌다.

여울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서란이 그의 앞에 섰다. 금박 물린 치마 아래로 앙증맞은 당혜가 찰나 보였다가 치맛자락에 덮였다.

“떠나기 전에.”

그가 준비하는 동안 서란은 생각을 했다. 무엇을 명할 것인지 결정했다. 그녀가 조용히 말한다.

“첫 번째 명령을 내리마.”

서란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서간을 보내 다오.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써서 내게 보내다오. 바쁘더라도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보내 주어야 한다. 이게 내 첫 번째 명령이다.”

의외의 명령이었다.

여울은 가만히 어린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마니전을 뒤로 하고 서 있는 서란은 어린 새처럼 보였다. 그녀의 뒤에 줄줄이 늘어선 나인들은 그녀를 보좌한다기보다는 그녀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알 수 없는 갈망이 일렁였다. 여울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보주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교룡은 제 보주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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