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줄 때 얼른 가!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하는 게 슬슬 본격적으로 시합이 시작될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라이를 보냈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기에 라이는 구석으로 사라졌다.
[마스터,미워어.]
쓸데없는 말을 남기기는 했지만.
방금 전에는 미 투라며!
한 입으로 두말하면 너 엉덩이에 털 난다,라이!
아참,이미 있던가?
황제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무릎 꿇은 에쉬와 르네의 앞에 서서 둘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수고했다느니 건투를 빈다느니 하는 말은 일절 없었다.
다만 무뚝뚝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런 황제를 가디언들은 멀찍이 떨어져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아직 가디언들에게는 황제를 마주서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다.
"......시작하라."
그것을 끝으로 부자간의 상봉은 끝이었다.
에쉬의 말로는 성에 돌아와서 처음 본 것이라는데.
역시 황족이라 그런가?
그래도 일설에 의하면 황제는 제1황자 르네보다는 제 2황자 에쉬를 총애한다고 들었다.
"후우......"
우리 쪽으로 되돌아온 에쉬가 긴장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흐름,황제를 어려워 하는 걸까?
현재 상황은 간단했다.
동그란 홀 안에 네모난 시합장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남쪽에는 황제의 단상이,서쪽에는 르네 황자와 로베닌을 포함한 가디언들,동쪽에는 에쉬와 우리 일행이 서로를 마주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북쪽에는 심사위원 인 듯한 고위귀족들이 자리잡았다.
덤으로 홀 안을 빼곡히 두르고 있는 기사들까지.
으윽,사람이 너무 많으면 불편하단 말이지.
황제도 단상으로 돌아가자 홀 안 가득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나는 라이가 상자에 잘 들어갔을지,하는 걱정과 로베닌에 대한 적개심에 신경이 곤두섰다.
드디어 시작할 모양인지 로크스가 일행을 불러들이며 말했다.
"모두들 이쪽으로 와주세요.지금부터 가디언들을 황제 폐하께 소개할 겁니다.우선 제 1황자 전하의 가디언들부터 시작할 테지만 우리 차례도 금방입니다.각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춘 뒤 혹시라도 폐하나 원로 귀족회 분들께서 질문을 하신다면 성심껏 대답하시면 됩니다."
에?그냥 고위 귀족인 줄 알았더니 원로회였어?
안 늙은 사람도 있는데?
여하튼 원로회라면 엘란에서 제일 입김이 센 자들인 것만은 틀림없군.
겁 많은 일행은 황제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해 벌벌 떨고 있었다.
"그만들 떨어!그래가지고 에쉬의 가디언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그럼 너는 안 떨린다는 거야,지니?우린 떨려 죽겠어!"
"맞아요.나중에 스승님에게 이 일을 말씀드리면 스승님은 분명 졸도하실 거에요!"
"나름 감싱장이라고 자부하지만,이런 일은 처음이라......"
쯔쯧,이 소심한 녀석들.
저쪽의 로베닌을 본받아!
태연하잖아!아니,그저 만사에 관심이 없을 뿐인가?
어쨌든 제1황자 르네의 가디언들은 제법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로베닌이나 5서클 마법사나,크리디트도 말이다.
저 마법사,과하게 침착한 것이 귀족 같은걸.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원로 귀족 중 한 명이 조용히 일어나 확성 마법을 이용해 말했다.
"우선,제 1황자 전하 에론 드 폰 글로리스르네 님의 가디언들의 소개 및 인사가 있겠습니다.베일란 출신 마법사 헨쇼 하르다프,앞으로 나와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시오."
으윽,그것 봐!
귀족이지!
첫 번째로 나온 자는 5서클 마법사였는데 그는 하르다프라는 성을 가진 베일란의 귀족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저 성......분명 황후의 친가 아냐?
이거 반칙이잖아!
르네 황자는 황후의 아들이다.
또한 황후는 베일란의 귀족가 출신이고.
그리고 우연일 리 없겠지만 그런 황후의 친가 쪽 사람이,그것도 5서클이나 되는 자가 르네 황자의 가디언으로 나타났다.
다분히 수상한 냄새가 났지만 원로회 귀족들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르네 황자가 중앙귀족들의 지지를 받는다고 했던가?
꽤나 치사하게 나오는걸.
"헨쇼 하르다프,대제국 엘란의 황자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부디 만수무강 하시기를......"
시합장과 대기장의 경계까지 걸어 나온 하르다프는 콧수염을 기르고 로브 차림의 전형적인 마법사였는데 예를 한껏 갖춰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뒤 질문이 없자 대기장으로 돌아갔다.
인사하는 것만 봐도 귀족이 분명하구만.
이봐,황제.
조사 좀 해보라고!이거 반칙 아냐?
"다음,베일란 출신 마법사 포네야 앞으로."
"헨쇼님의 제자입니다.황제 폐하께 영광을......"
성의 없었다.
평민인 듯 했고 여자였지만 쟈이맘 선배같이 남자처럼 꾸민 그녀는 매우 딱딱한 표정과 싸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흐음,저자의 제자라......그렇다면 저 여자도 수상한걸.
"헤이드리케 출신 정령사 바네사 크리디트."
"안녕하십니까,폐하.제 이름 바네사 크리디트.불의 중급정령사입니다.아버지께서는 헤이드리케의 백작위에 계시며 저는 그 차녀로서 신부수업......"
푸훗,크리디트의 말이 길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황제가 손사래를 쳤다.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소리다.
푸후훗,입을 여니 구린내가 심해지질 않는가?
잠시 그 냄새에 익숙해졌지만 크리디트가 입을 열자 그 냄새는 제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 한층 독하게 풍겼다.
"들어가시오,크리디트양."
"하,하지만 아직 소개가......"
"들어가시오!"
"이익......"
지가 반항해봤자,엘란의 원로회가 말씀하시는데 어찌 거부할 것인가?
아무리 위대한 귀족이라고 잘난 척해봤자 작은 섬나라 헤이케의 백작가 딸일 뿐이었고 여기 있는 이들은 최하 백작.
그렇다는 것은 헤이케로 치면 후작 이상이다.
크리디트는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듯 나늘 노려보며 대기장으로 돌아갔다.
뭐,대기하면서도 나를 줄곧 노려보고 있었지만.
거참,눈길 한 번 따끈따끈한 게 몸 풀기 좋구만.
"다음 드미트리 출신 검사 니켈 자멘."
응?저 여자 검사,우리나라 출신이었어?
어쩐지 멍청하더라.
드미트리 출신들은 대개 호전적인 성격 탓에 지능이 조금 떨어져 보인다.
가까운 예로 채드가 있겠다.
나는 보지 말라고!
"그건 애칭이고 본명은 니케르 자멘......아참,죄송합니다."
니켈이나 니케르나.
감히 원로회의 말씀을 정정하려던 니켈은 호된 눈길을 받아야 했다.
야야,원로회한테 밉보이지 마라.
피곤해진다.
나 봐,나.
이제 진이랑 지니랑 상관 안 하잖아.
니켈은 몰락귀족 출신이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대기 장소로 돌아갔다.
그러고보니 이제야 르네 황자 성격이 보이는 듯 했다.
가디언이랍시고 모아온 자들이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귀족이다.
평민은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일부러 저러기도 힘들었을 텐데.
"다음,으흐흠.우리 엘란의 검사 로베닌 페드리 공자.앞으로."
뭐야?이봐,귀족!
그 으흐흠은 무슨 뜻이지?왜 좋아해?
왜 간드러지듯 말하는데?
저 귀족,르네 황자파게 분명했다.
그러니 르네 쪽에 나타난 로베닌의 존재를 반기는 것일 테지.
원로회들의 표정을 보니 한 두명을 빼고는 대부분이 르네파인 것 같았다.
열 명 중 여덟이라......에쉬도 힘들겠군.
"로베닌 페드리,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로베닌 공자,그대를 이렇게 볼 줄은 몰랐군."
처음으로 황제가 가디언에게 입을 열었다.
그에 원로회들이 좋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원로회와 가까이에 있던 나는 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떠드나 들어볼까?
"후후,페드리 공자의 등장으로 르네 황자님의 승리는 거의 확실해진 것 같군요.황자님도 참 잘하시지 않았습니까?저 까다로운 페드리 공자를 끌어들이시다니요."
"그러게 말입니다.신은 역시 우리 편인 게지요."
"후일 페드리 공자를 르네 황자님 쪽으로 확실히 끌어들인다면 앞으로 우리의 입지도 분명해질 겁니다.후후,페드리 공자만 잡으면......"
".....듣자 듣자 하니까!이보시요,아직 시합은 시작도 하지 않았소!이 시합은 토너먼트가 아닌 일대 일의 형식이니 그런 말은 거두시오.로스 황자님의 가디언들도 충분히 뛰어나니 말이오.한 명이 페드리 공자에게 진다고 해도 다른 네 명의 가디언들이 이길 수도 있소!"
흐음,저 마지막 귀족은 에쉬파네.
아니,세간에서 에쉬는 로스 황자니 로스파라고 해야 하나?
로스파?
왠지 먹는 것 같은데.
여하튼,댁의 말이 맞아.
이건 한 명이 진다고 끝나는 시합이 아니지.
그 덕에 내가 로베닌과 붙어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고 말이야.
게다가 그쪽에 로베닌이 있다면 이쪽에는 내가 있다고!
"그래,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지금은 어떤가?"
"완쾌됐습니다."
얌마!그래도 황제가 말씀하시는데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든가,하는 말도 안 하냐,넌!
하여간 저 녀석은 대륙 최고의 무재 뿐 아니라 대륙 최고의 무뚝뚝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헤이드리케의 소드마스터......트렌페 백작은 강하던가?"
"강했습니다."
"얼마나?"
"......제 아버님의......71프로 정도......"
이봐요.그 수치는 어떻게 나오는 건가요?
70프로도 아니고 71프로?
트렌페 백작에게 피 떡이 되게 당했다면서 고작 71프로?
너무 짠 거 아녀?
로베닌 녀석에게 호감이 없는 탓인지 녀석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귀에 거슬렸다.
에잇,얄미운 놈!
치사한 놈!
두고 보자!아니,있다 보자!
"그런가?좋다.들어가 봐라."
황제의 말에 로베닌은 고개를 꾸벅하는 것을 끝으로 대기 장소로 돌아갔다.
황제도 저 녀석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싸가지 없는 걸 그냥 보아 넘기니 말이다.
하긴,저 녀석 정도면 예뻐할 만했다.
나름 엘란의 간판스타 아닌가.
"다음으로 제2황자 전하 에론 드 폰 에피로스님의 가지언 소개가 있겠습니다.우선......드미트리 출신 검사,평민 채드."
야!왜 평민에 힘줘 말해!르네 황자에서 포네야 인지 뭔지 하는 애한테는 안 그랬잖아!
이거 차별이야!에쉬의 가디언이라고 무시하는 거지!
아악, 저 귀족......비웃고 있어!
한껏 소개를 맡은 귀족을 노려보았지만 되레 가소롭다는 눈빛이 돌아왔다.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어.
"아,안녕하십니까,전하!아니,폐하!저기......제 이름은......채드입니다.음,에쉬같이......좋은 아들,아니 황장님을 두셔서 참 부럽습니다요.아하핫!"
저 바보......아악!
꼭 지능 낮은 티를 내요!
저를 평민이라고 힘주어 소개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예를 모르는 녀석이라 자기소개도 개성이 넘쳤다.
그냥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나 할 것이지......
분명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돌아오면 한대 패......
"......고맙군."
"아하하핫!"
......응?
난 내 귀를 후벼팠다.
고맙다고?
황제가 지금 그런 거지?
채드 녀석이 마음에 들었나?
저 대머리 녀석이?
뭐 웃는 얼굴이 순박하긴 하지만......어쨌든 황제는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채드의 인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채드는 나올 생각도 않고 바보같이 웃다가 로크스의 손에 끌려 들어왔다.
저걸 그냥......
"다음!엘란 출신 검사,역시 평민 게일."
"안.녕.하.십.니.까.하?게,게일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딱딱 끊어 말하니?
그리고 마지막에 삑사리 났어!
으휴,르네 황자 족의 가디언들이야 귀족이 대부분이라 인사하는 것에 익숙했지만 우리 쪽은 그렇지 않았다.
게일이 빳빳하게 굳은 몸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털썩 주저앉았다.
어지간히 떨렸나보다.
"코란 출신 창술가 평민 엔크."
"엔크입니다.코란의 타티오족의 일원입니다.황제 폐하를 만나 뵙게 되어 타이오 일족의 영광입니다."
오호,그나마 엔크의 인사가 가장 좋았다.
그런데 엔크가 타티오족이었구나.
코란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를 자랑하는 부족이다.
창병이 유난히 많은 부족이기도 했다.
흐음,엔크의 창술 실력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기운으로는 족히 소드 유저,이니 스피어 유저는 되어 보이니 안심이었다.
"다음,헤이드리케 출신 정령사......신분 모름?자네 혹시 천민인가?"
"예?그,그게......고아라서......"
야!그런 거 묻지 마!
그리고 위드리 너도 그런 거 솔직하게 말하지 마!
천민,거의 인간 대접을 못 받는 계급이다.
노예계급이라고도 한다.
위드리가 앞으로 나가다 말고 우물쭈물 서버렸다.
원로 귀족의 차가운 눈길 탓이다.
"진행하라."
"죄,죄송합니다.정령사 위드리......소개하도록."
뜻박에도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있던 황제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진행할 것을 지시했고 그에 위드리가 감동이라도 받은 듯 울먹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폐하!전 고아지만......열심히 살고 있어요!헤이드리케 출신으로 이래뵈도 티아트라젠님의 수석제자입니다."
......야,그거 비밀로 하는 거 아니었니?
아마도 에쉬의 가디언으로 있는 자신이 무시 받는 게 싫어서 말한 모양이었는데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원로회가 술렁거린 것은 물론이고 황제의 눈에도 반짝이는 빛이 떠올랐다.
뭐,우리 일행이 화들짝 놀란 것에 비하면 놀란 것도 아니지만.
"에엑,위드리 씨가 티아트라젠님의 제자였어요?"
"나,난 몰랐는데?위드리가 나한테 그런 말 안 했어!"
"티아트라젠?그게 뭐야?"
"......먹는 건 아니지?"
로크스나 게일까진 티아트라젠이 누구인지 아는 듯했지만 채드와 엔크는 그게 뭐냐는 표정이다.
으이그,로베닌은 알면서 티아트라젠은 모르냐?
정령사 무시하지 마!
이내 위드리가 입술을 꾹 다물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게일에게 다가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흐어엉,저 잘한 거죠,게일님?"
"응?끄럼,잘했어,잘했어!저 귀족도 고약하지 뭐야?왜 그런 걸 묻는담?"
"흐윽,이제......스승님한테 혼나겠다.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흑흑."
슬쩍 위드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씨익 웃었다.
티아트라젠을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될 만한 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게 살짝 걸리던 차였는데,후훗.
"위드리,뭔지는 몰라도 스승님한테 혼나기 싫으면 그냥 여기서 살아."
"예?어떻게 그래요?이건 사실 후계자 시험이었다고요."
"응?몰랐어?에쉬가 황태자가 되면 우리는 엘란의 자작 지위를 받게 돼.그럼 자동으로 엘란의 시민권도 주어지지.어차피 게일이랑 결혼하면 엘란에서 살아야 하잖아.그러니 이참에 엘란에서 게일이랑 둘이 커플 자작으로 살아가는 거야,어때?"
위드리는 물론이고 일행의 눈이 동그래졌다.
몰랐다는 태도다.
아참,애들은 아직 모르지!나중에 어떻게 알았냐고 구박하면 에쉬한테 들었다고 해야겠다.
에쉬야 내 말이면 껌벅 죽는 걸.
"그,그래요?하지만 아직 시합이......"
"그건 걱정 마.설마 다섯 명 중 세 명이 지겠어?세 명만 시합에서 이기면 우린 자작이야."
난 이미 드미트리엥 귀족위가 있지만,하나 더 있어도 나쁠 건 없다.
혹하는 위드리를 한껏 주물럭주물럭 손바닥 위에 올리려는 찰나,나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드미트리 출신 정령사,또 평민 지니"
아쭈구리?
저 귀족,위드리가 티아트라젠의 제자라는 데에 심통이 난 것 같았다.
흥,르네파라 에쉬가 잘 되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지?
나는 성큼성큼 대기장을 걸어 나가 시합장 위에 발을 디뎠다.
사실 시합장 위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지만 보다 효과적인 서프라이즈 쇼를 위해서랄까?
그리고 라이가 상자에 잘 들어가 있는지도 볼 겸 말이다.
시합장은 매우 넓었기에 그 위로 올라왔음에도 상자와는 열 걸음 정도 남아있었다.
상자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수상해 보일 터였기에 나는 그쯤에서 멈췄다.
[라이!상자에 있어?]
[끄으응.마스터,여기 너무 좁아요옹.]
라이가 상자에 있음을 확인한 나는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황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왼쪽 다리를 뒤로 빼며 허리를 숙이고 왼손은 가슴에 오른 손은 허리 뒤로.
이것은 귀족 간의 인사방법이었는데 자신보다 높은 귀족,혹은 남자가 여자에게 존중의 뜻으로 하는 인사다.
"안녕하셨습니까,폐하.그간 무고하셨나요?"
"그,그대는......?"
내가 아는 체를 했지만 황제는 나를 못 알아보는 듯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한 것은 10년 전의 일이었고 얼핏 스친 것도 벌써 반 년 전이다.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황제에게 내 얼굴을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건 야무진 꿈이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잠시만요!이의있습니다!"
막 정체를 밝히려는데,아니 딱히 정체랄 것도 없이 그냥 본명을 말할 생각이었는데 크리디트가 내 말을 끊으며 시합장 위로 올라왔다.
뭐야,저건?
왜 나서고 난리야!중요한 순간인데!
눈을 번득이며 크리디트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뭔가?폐하의 앞일세,당장 들어가!"
"하지만 저 여자는 가디언으로 자질이 부족함은 물론이고 아주 무식하고 잔인한 여자라고요!어떻게 저런 여자를 가디언으로서 황제 폐하 앞에 나서게 할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소린가?쩌 지니라는 정령사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물론이죠!제 입에서 이런 냄새가 나는 이유는 바로 저 여자에게 속았기 때문이라고요!저 여자가 제게 이상한 꽃을 먹였어요!그 꽃을 먹은 다음부터 이런 썩은 내가......으윽,더군다나 그 꽃은 황궁에 있던 꽃이라고요!황궁의 물건에 손을 댔으니 당연히 엄벌에 처벌해야 해요!"
무슨 소리하나 했더니 그거였어?
그게 뭐가 잔인해.제 엉덩이 더듬었다고 사람 손을 병신으로 만드는 댁보다는 나아!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 욕을 지껄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지니'가 아니라 '지니 크로웰'이 되어야 할 차례였기에 참았다.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내가 이미지 관리를 좀 한다.
특히 황제나 국왕앞에서는.
그래야 인생이 편할 것 아닌가.
"그게 사실인가,자네?"
"......꽃을 하나 따기는 했습니다.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요?"
"흐음,그렇다면 저이가 말하는 냄새라는 건 뭔가?"
"글쎄요.그냥 꽃이 예뻐서 하나 땄다가 저분에게 드렸을 뿐입니다.친해지자는 뜻으로요.헌데 냄새라니......저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내 태연한 거짓말에 귀족은 도통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황제는 지루하다는 표정이었는데 대충넘어가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본래 꽃이란 지기위해 피는 것이다.헌데 미리 좀 땄기로서니 벌을 내려라?짐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다.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자네다.크리디트라고 했던가?귀족가의 여식이라는 자가 어찌 그리 경망스러운가?"
"하지만 폐하......!"
"듣고 싶지 않다.지금 자네는 내게 설교를 하려는 겐가?글로리스르네!네 가디언은 정말이지 철없고 경망스럽구나.저런 이에게 네 뒤를 맡길 셈이냐?"
"아니옵니다,폐하!제가 잘 타이를 테니 화,화를 푸소서......"
오호호 쌤통이다,르네.
황제에게 혼나는 르네 황자가 왜 이리 고소한지.
내 소개를 할 타이밍은 놓쳤지만 크리디트의 똥씹은 표정을 보았으니 고이 넘어가련다.
푸훗,똥내 나는 입으로 그런 표정 지어봤자 더 우스울 뿐이란 걸 왜 모를까?
"크흠!드미트리 출신 정령사,지니!다시 소개 인사를 올리도록."
"으흠,그럼 잠시 훼방이 있었지만 인사 올리겠습니다.폐하,저는 앞서 들으셨듯이 드미트리인입니다.또한 제법 애국자라고도 자부합니다."
"......흐음?"
"제 고향은 드미트리의 크로웰 영지입니다.또한 정령 중에서도 미천하나마 물의 정령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알아들어줬으면 좋겠는데 하나같이 뭔 소리냐는 표정이다.
하긴,지금의 나와 세간의 소문으로 떠도는 그 지니 크로웰을 매치하기란 어려울 터.
무엇보다 짧은 금발은 소문처럼 우아하고 희생정신이 넘친다는 귀족 영애 지니 크로웰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평민 중에서도 나만큼이나짧은 머리를 찾아보기는 힘드랃.
머리가 짧은 여성은 대개......그래,용병이나 검사 정도 되겠다.
"소개를 끝냈다면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게."
"어머?제 소개는 이제부터입니다만......아무도 몰라주시니 섭섭하군요.그래도 명색에 제국공신인데 말입니다.황제 폐하께서 친히 하사하여주신 이름이 아닙니까?황제 폐하와 저희 국왕 전하,그리고 각국의 주요 귀족들의 목숨을 구하고 희생했던 저에게 말입니다."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얼핏 황제의 눈동자 위로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이중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다.
하긴,그러니 황제의 자리에 있겠지.
"......자네의 이름이 뭐라고?"
그래,그 질문을 기다렸거든.
살며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듯 수근거리는 원로회 귀족 무리와 르네 황자,그의 가디언들.
물론 내가 그중 로베닌을 눈여겨보았음을 두말할 것도 없다.
유독 혼자만 초연한 표정의 녀석을 보며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그 돌같은 얼굴 위로 내가 10초 안에 감정이라는 걸 떠오르게 해주지.
"제 이름은 지니입니다.그리고......성은 크로웰이죠.지니라는 이름은 흔하지만 성은 그렇지 않죠?후훗,풀 네임은 지니 크로웰,그리고 지니 텐 크로웰이라고도 간혹 불리더군요."
"텐......!"
장내가 한껏 술렁였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원로 귀족이고 할 것 없었다.
그중 에쉬를 빼고는 모두 한마음이 아닐가 싶다.
황제의 표정 가득 이채가 어렸다.
황제가 붙여준 이름이니 모를 리 없다.
이름과 성 사이에 들어간 '텐'은 제국공신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 3대간 천자에 한해서만 세습이 허락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힐 때 써도 좋고,쓰지 않아도 좋다.
일반 평민들은 '텐'이라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므로 나를 칭할 때 스지 않고 나는 개인적으로 넣어봤자 어감이 좋지 않아 안 쓰게 될 것 같다.
어감이 안 좋아,어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