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71)

일행 중 특히 채드가 투덜거렸지만 결국은 내 말대로 가슴을 펴고 당당함을 가장해야 했다.

여기 있는 예복 차림의 기사들 하나하나가 나중에 에쉬를 받쳐줘야 할 테고,그런 그들과 에쉬의 중간에는 너희가 있어야 해.

그런데 그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 않겠어?

"이쪽으로 오시죠.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얼마든지.

이제 가장 본격적이고 중요한 시험이 남았다.

내가 할 일은 이 순둥이들을 데리고 '헤이오스의 저울'을 에쉬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

까짓,이 쪽으로 안 기울면 부숴버리겠어.

그러나......이봐,듣고 있어 신님?

기사들이 안내해준 방은 생각보다 호화롭지 못했다.

황궁의 외관처럼 눈이 돌아갈 만한 번쩍이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제법 고급품에 일가견이 있는 내 눈으로 감정해보니,번쩍이지 않을 뿐이지 그래도 전부 비싼 것들이었다.

그것은 방 한 가운데 민망하다는 듯 쑥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사내의 옷 역시 마찬가지다.

짙은 청색으로 물들었지만 얼핏 소매나 옷깃에 새겨진 금색 수는 매우 정교했으며 어깨에 장식된 완장 역시 그랬다.

그를 정중히 가리키며 기사가 말했다.

"제 2황자 에론 드 폰 에피로스 전하이십니다.인사 올리십시오."

알아,에쉬잖아.

그 새까만 머리카락이나 내 머리색과 닮은 금안은 어디 가지 않았다.

나는 대번에 녀석을 알아보았다.

전혀 낯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저 모습이 실제 본인의 얼굴인걸.

그때의 앳된 모습은 없었지만 에쉬가 분명했다.

"화,황자 전하?"

"흐이익!"

"안,안녕하십니까!저는 네이칼에서 태어나 네이칼에서 자란......그,뭐시기 평민 게일입니다!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전하!"

"저는,저는......그 평민일지도 모르는......위드리입니다아."

황자를 마주한 일행의 반응은 천차만별.

놀라는 녀석부터 얼결에 제 소개를 하는 녀석까지.

뭐,그 소개란 것이 참으로 우스웠지만 딴에는 나름 제국민이라고 예의를 차린 것 같았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일행의 긴장이나 풀어줄 겸 장난스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에쉬.아니,에피로스 전하.우리 하루만이죠?"

"지니!"

[에쉬?저게?잉?]

[잘 봐,기운이 똑같잖아.변화마법이 걸린 목걸이를 빼서 얼굴이 바뀐 거야.원래대로.]

쑥스러워하던 에쉬도 내 가벼운 반응에 조금 마음을 놓는 듯했다.

여기서 나까지 허둥대면 수습이 어려울 터였다.

내가 제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에쉬는 그저 내가 단번에 저를 알아본 것이 반가운듯 웃는데 일행이 또 한번 술렁였다.

"에쉬 님......?"

"뭐야?황자 전하가 에쉬라고?"

"뭐?누가 그래?"

"지니!그게 무슨 말이야?"

그중 게일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고 나는 그게 뭐 별거냐는 듯 대답했다.

"보면 알잖아.키랑 목소리가 똑같은걸."

"......하아?"

"이게......대체 무슨?"

"에쉬님이......황자 전하.에쉬님이......황자 전......꼬르륵."

결국 심약한 위드리가 뒤로 넘어갔다.

이런,이런.

긴장 풀라니까.

이게 기절할 일인가?

처음부터 알고 있던 나는 모르겠다.

게일은 에쉬와 황자가 매치가 안 되는지 얼이 빠져 있어서 위드리가 쓰러지는 것도 몰랐다.

위드리를 부축한 것은 그나마 진정 중이던 엔크였다.

"어이!위드리?이봐,게일!위드리가......로크스!"

[오오,안경잡이!나 그 목걸이 줘라 목걸이.야야야,에쉬가 꼈던 목걸이 줘!]

이내 로크스가 등장했다.

우리처럼 문으로 들어왔는데 그에 위드리는 곁에 있던 소파 위로 던져졌다.

일행은 대번에 로크스에게 벌떼같이 달려들어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라이는 에쉬가 쓰던 마법 아이템을 탐냈고.

백날 떠들어봐라,걔가 알아듣나.

"에쉬가 황자 전하라니!황자 전하가 에쉬라니!뭐가,뭐냐고?"

"로크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목걸이!]

"으아악!머리 아파.말해봐,로크스!에쉬가 황자가 된 거야?"

틀렸어,채드.

머리를 좀 더 굴리라고.

에쉬가 황자가 된 게 아니라 원래 황자였는데 에쉬가 되었던 거라고.

"진정들 해주세요.제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에쉬님은 황자 전하가 맞습니다.그것도 이 대제국 엘란의 정통 황위 계승자 에피로스 전하이십니다.현재 제 1황자 전하와 황태자자리를 놓고 시험을 치르고 계시며,거기서 큰 역할을 해주실 분들이 바로......여러분입니다."

"황태자 시험?에쉬가......아니,에쉬님이?황자님이?뭐라고 불러야 하지?"

"잠깐,그럼 에쉬가 우릴 속인 거야?그 시험인지 뭔지에 쓰려고 평민인 척 우릴 속인 거냐고?우리가 아는 에쉬는 황자가 아니었어!"

"속였다고?우릴 속임으로써 황자가 얻는 건 대체 뭐지?"

[끄앙,목걸이......]

아무래도 일행의 감정은 경악에서 배신감으로 바뀐 것 같았다.

파티의 대장으로서 줄곧 믿고 따른 에쉬가 황족이다.

그것도 황위계승권이 있는 제 2 황자.

솔직히 평민들은 귀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황족이라면 더더욱.

세금만 걷어갈 뿐 딱히 눈에 보이는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 밑의 귀족들이 얼마나 오만하게 나대는지를 봐왔으니 그럴 만했다.

에쉬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지금 나서서 사과를 해봤자 혼란만 가증될 뿐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여기서 보통은 잠자코 일행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지만 그보다 최선책이 있다.

누군가 이들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다들 조용히 해.에쉬가 우릴 속였어?무엇을?본인 입으로 본인이 황자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속이지 않았어.우리가 멋대로 평민이라고 생각한 것 뿐이야.그리고 에쉬는 언제나 우리를 진심으로 대했어.난 그거면 충분해.너희는 아닌 모양이지?"

"그,그렇지만......갑자기 황자라고 하면......"

"물론 우리도 묻지는 않았지만 에쉬가 속일 생각으로 말하지 않은 거라고 볼 수밖에 없어."

"나는 속았다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을 뿐이야."

일행의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에 에쉬는 말없이 우리 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우리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로크스며 기사들이 놀라 펄쩍 뛰었다.

뭐,나야 저 성격에 무릎 꿇을지도 모른다고 얼핏 생각은 했지만.

"에피로스님!"

"채드,게일......엔크!그리고 지니와 위드리.모두 속여서 미안해.하지만......난 너희의 도움이 필요해!그러니 부디 날 도와다오."

기절해 있는 위드리는 신경 쓸 것 없는데.

돌연 무릎을 꿇은 에쉬 앞에 일행은 숨을 죽였다.

황자가 무릎을 꿇었다.

우리 앞에.

불과 하루 전까지 일행이었으며 함께 웃고 떠들던 이가 지금은 고귀한 차림을 하고 전과 달라진 얼굴로 도움을 청하고 있다.

모두의 머릿속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은 진작 정해져 있었고 먼저 운을 뗀 것도 나였다.

"내 힘이 필요하다면 나는 너를 돕겠어,에쉬.에쉬는 에쉬니까.에피로스든 에론 드 폰 에피로스든 이름이 몇 글자로 늘어나더라도 너는 내 친구이자 동료니까,에쉬."

"나도......뭔지는......모르지만,도울게.그럼 되는 거지?황자님이 무릎 꿇고 호소하시는데 도와야지,아무렴."

"난......도와주는 게 아니라......돕게 해줘,에쉬.너는 말했었지?네 동료로서 헛된 시간을 보내게 하지 않겠다고.난......그 말을 믿었고 그 말은 실현됬어.그러니 너를 돕겠어."

"나도......돕지.정말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말이야."

결국 일행은 뭐가 뭐지도 모르겠다는 뚱한 표정을 하고도 에쉬를 돕겠다고 했다.

에쉬의 인간성이 좋은 덕이지 싶다.

일행은 여전히 놀람을 진정시키지는 못했지만 에쉬는 에쉬일 뿐이라는 것은 인정한 듯 했고 에쉬는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감동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다들......고마워.정말......고마워."

벌써 고마워하면 안 되지!

자아,아직 설명할 것도 많고 이해할 것도 많지만,결론은 발 벗고 에쉬를 돕겠다는 거지.

흥,조금 더 튕기는 녀석이 있었으면......

그놈은 어찌됐을까요?

아마 나한테 무사하진 못했을 거다.

시합은 이틀 뒤에 치러진다고 했다.

에쉬는 그 르네 황자보다 늦게 도착해서 당도하자마자 가디언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은 시합을 치르기 위한 준비 중이었고 우리는 성 안에 각기 방을 배정받고 호화로운 식사를 배식 받았다.

에쉬는 벌써부터 바쁜 듯 자주 얼굴을 보이지 못 했다.

단 하루 황궁에서 지냈을 뿐인데 온몸이 고급스러워진 기분이었다.

레이스가 달린 침대도 그렇고 배속된 하인들까지.

심히 부담스러웠다.

뭐,방은 다르지만 같은 대우를 받는 위드리는 조금 부담스럽긴 해도 공주님이 된 것 같다며 좋아했다.

지금도 여유를 즐기며 정원 산책 중이었다.

나도 마지못해 끌려나왔다.

아아,이럴 시간에 명상이나......

"지니님,이 꽃 좀 보세요.이거 굉장히 희귀한 꽃인데......역시 황궁이라 그런가 봐요."

"응?무슨 꽃?빨간 거?노란 거?"

나와 위드리는 궁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전언과 함께 몇몇 정원들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임시 출입증을 받았다.

쳇,이왕 줄 것이면 황궁 도서관 출입증이나 줄 것이지.

나는 꽃보다는 책이 좋다고!

정령에 관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이 빨강색에 검은 점박이가 있는 꽃이요.스승님이 이 꽃을 찾으러 산에 가셨다가 결국 못 찾고 오신 적이 있어서 기억해요."

"아아,이 점박이?이 꽃 먹으면 입에서 똥 냄새가 일주일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설의 꽃이야."

"어머,그런 효과가 있어요?스승님은 왜 이런 것을 찾으셨을까?"

"그야 누군가한테 먹이려고 그랬겠지.이게 보기에는 예뻐도 '냄새의 저주'라고 불리는 별명을 가진 꽃인걸."

일찍이 저주의 정령에 알게 된 뒤 혹시 그에 대한 내용이 있을까 싶어 그와 관련된 책들을 독파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알게 된 꽃이었다.

진짜 이름이 뭐더라?

제법 꼬랑꼬랑한 이름이었는데.

여하튼 '냄새의 저주'는 맞다.

"그나저나 멍멍이가 못 들어와서 아쉽네요.원래 동물들은 잔디가 어울리는데 말이에요."

라이는 외관상 동물인 관계로 황궁 안에 '실례'를 할지도 모른다며 내게 배정된 방 안에 있어야만 했다.

뭐,아직 시합도 아니고 황궁 안에서 딱히 위험한 일도 없을 테니 라이를 떼놓고야 다니지만 혼자서 몸을 비비 꼬고 있을 걸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했다.

"멍멍이가 아니라 라이야."

"에,알지만 라이야,하고 물러도 안 돌아봐주는걸요.멍멍이라든가 똥개라고 불러야 왠지 화난 것 같은 눈으로 돌아봐요."

"......그래?"

"네,그리곤 이를 드러내면서 '꺼져르르르'하고 노려봐요.저도 이상하죠?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까요?"

들리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러거든.

위드리는 그래도 정령사라서 라이의 말을 저금이나마 알아듣는 것 같았다.

본인은 환청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정원의 꽃들이 예쁘기는 했으나 나로서는 산책이 너무 지루했다.

나는 작게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정말 나른하......에?"

"예?왜요,지니님?"

"크리디트야.그 옆의 여자는......검사."

문득 감지된 두 개의 이질직인 기운.

시선을 돌리니 정원을 꾸민 나무 뒤로 크리디트와 낯선 여자가 보였다.

단단한 기운으로 보건대 기사였다.

쳇,같은 출입증을 받았나?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칠 게 뭐람?

황궁도 좁은 모양이다.

딱히 피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들도 나와 위드리르 본 듯 멈칫하곤 수군거리나 싶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단단한 기운과 몰랑몰랑한 기운이 한껏 적의를 드러냈다.

기운이라는 게 그 수련 방법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검사나 기사,격투가처럼 몸을 단련하는 이들은 대개 단단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단한 마나를 가지고 잇다고 봐도 된다.

그리고 마법사는 그와 반대로 물과 같이 흐물흐물한 기운을 지닌다.

강한 유동성을 가진 마나를 말이다.

기사가 고체라면 마법사는 액체다.

그리고 나나 위드리,크리디트같이 정신력과 체력의 화합을 요하는 정령사의 경우는 몰랑몰랑,푸딩 같은 느낌일까?

아니,그보다는 찰흙이 더 낫겠다.

찰흙보다는 조금 더 유동성과 탄력이 있어야겠지만 여하튼 그런 느낌이다.

몰랑몰랑한 기운.

고체도 액체도 아닌 그 중간.

그래도 액체 쪽에 조금 더 가까운 기운이 아닐까 싶다.

"지니 씨,당신이 왜 여기 있지?"

"그러는 댁은왜 여기 있을까요?"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척해야 할 상황일 뿐이지.

내 질문에 크리디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반지를 여럿 낀 검지를 내게 치켜들며 말이다.

감히 어디다 삿대질이야!

물어버릴가 보다.

"흥!듣고 놀라시나 마시라고.내가 말했던 그이 알지?울 그이가 알고 보니 황자시더군!오호홋!자,까무러쳐 보시지!당신이 공격했던 우리 그이가 황자 전하라고!"

"아,그러세요?"

"왜,왜 안 놀라?황자 전하라니까?"

"전에 댁이 심심하다고 했던 내 그이도 황자 전하거든요."

시답잖다는 내 태도에 표정을 구긴 크리디트가 이번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나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이쿠,이봐.

크리디트!

나한테까지 데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걸.

뭐가 어려워서 뜸을 들이나?

"그,그럼......당신도 가디언이라는 소리야?나랑 같은?"

"딩동댕.바로 그거죠.더불어 여기 위드리도."

"흐,흐흥.벼,별것 아니네!당신쯤이야 내가 가뿐히 해치울 수 있는 걸!우리 르네님의 승리가 확실하군.오호호홋!"

어쭈구리.

그때 나보다 마법발현도 한참 늦게 한 주제에 배짱을 부리네?

얼핏,크리디트가 곁에 서 있는 여검사의 옆구리를 치는 것이 보였다.

너도 뭔가 말해보라는 뜻인 듯 했다.

여검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음......그,그 머리......짧네요.여자가 말입니다."

내 머리?

곱슬곱슬해서 금방 자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커트에서 단발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많이 자란 거다.

뭐,그리고......

"댁보단 긴데요?"

"......으흠,나는 검사니까 괜찮습니다."

그게 누가 정한 법이지?

여자는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꽤나 짧았다.

자기 머리는 잊어먹었나 보지?

왜 남의 머리가지고 타박이야?

크리디트가 말 잘했다는 듯 야비하게 웃으며 한술 더 떴다.

"오호호!그러게.아무리 평민이라지만 너무 짧은 것 아냐?"

"이 여자가 더 짧다니까!"

"니켈 양은 검사니까 괜찮아!"

니켈인지 뭔지 검사랑 정령사 차별이냐?

자기도 정령사면서......내참.

황궁 안인 데다가 에쉬의 가디언이라는 신분상 한 대 갈기지도 못하겠다.

그리고 가디언들과의 싸움은 절대금지라는 전언 또한 있었음으로 나는 이를 갈 뿐이었다.

크리디트,기가 팍 살았는데.

그게 언제까지 가나 보겠어.

"왜,왜 지니님을 타박하세요?너무하신 것 아녜요?제가 보기에 지니님은 단발도 충분히 어울리신다구요!"

"뭐야?이 천한 것이 어디서 감히!"

"꺄악,지니님!"

위드리가 모처럼 용기를 낸 것은 좋았는데 그 용기는 채 3초를 가지 못했다.

나는 크리디트가 눈을 부릅 떴을 뿐인데도 내 뒤로 매달리는 위드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옹호해준 건 고마운데 겨우 그정도에 겁먹......앗,저거 쓸 만하겠는데?

순간 내 눈을 번뜩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크리디트.댁은 귀족이니까 뭐든 알겠죠?"

"......당연하죠!나는 위대한 귀족이니까!"

"그럼 저 꽃이 어디에 좋은 꽃인 줄도 알겠네요?"

내가 슬쩍 가리킨 것은 예의 그 '냄새의 저주'라는 별명의 붉은 바탕에 검은 점박이를 가진 꽃이었다.

예절 교육이나 받았을 크리디트가 그것을 알 리는 없었고 나는 그것을 써먹으리라 마음 먹었다.

"으응?저,저건......그러니까......니켈!저게 뭐죠?"

"모르겠습니다만......"

크리디트와 니켈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둘이 머리를 맞대봤자 나올 것은 없었다.

그 머리가 그 머린데 뭐.

"모르나 보죠?이건 여성한테 정말......꼭,아주......"

"아!알았어요!아니,안다구요.피,피부에 좋은 꽃이죠?"

아니,여성한테 정말 곡 아주 없어도 되는 거라고.

사람 말을 끝가지 들어야지.

내가 늘여서 말한 탓은 아니다.

그녀가 멋대로 아는 체하려고 내 말은 자른 탓이지.

"어머,역시 귀족 아가씨라 잘 알고 계시네요.그럼 당연히 이걸 즐겨 드시겠죠?희귀한 것이지만 위대한 귀족 아가씨니까요.그런데......이건 어떻게 먹는 건가요?"

나는 슬쩍 문제의 꽃을 땄다.

그리곤 그것을 크리디트의 앞에서 팔락거려보였다.

자,어떻게 먹을래?

네 입에서 나와 봤자.

생으로 먹거나 아니면 삶아먹거나,우려먹거나?

어떻게 먹든 냄새는 나겠지만 말이야.

"이건 그러니까......새,생으로 먹는 거에요.생으로!아니면 차로......우려먹거나.음,여하튼 생으로 먹으면 좋을......아니,좋아요!아무렴."

"그렇구나.그럼 이거 크리디트 씨가 드세요.황궁의 꽃인데 제가 얼결에 따버렸네요.저보단 크리디트 씨의 피부가 안 좋아 보이니 선심 쓰죠."

"뭐에요?내 피부가 어때서......"

"어머,싫으면 말아요.먹는 방법도 안다는 사람이 왜 거부하고 그래요?"

황궁의 꽃 딴다고 사형이란 소리는 못 들어봤고 크리디트의 입에서 똥냄새 나는 걸 볼 수 있다면 이쯤이야 몇 송이든 따리라.

"누가,누가 거부한데요?내 피부가 나쁘다니까 하는 소리죠!"

"그럼 드세요.이 꽃도 저보다는 크리디트 씨같이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먹어주는 걸 기뻐할 테니까요."

"어머?뭐 그렇게......당연한 소리를.흐흠,이리 줘요!내가 먹을 테니까!"

채찍 다음엔 당근이지.

후훗,내 손에서 크리디트의 손으로 넘어간 꽃.

꽃아,꽃아,너의 희생에 묵념하마.

그러니 부디 오래 오래 그 자취를 남기렴.

크리디트의 입속에서 말이야.

크리디트는 슬쩍 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여봐란 듯 꽃을 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교양 차리는 것도 잊은 듯 아주 잘근잘근.

"푸훗.쿠,쿠후후......"

저 꽃이 어떤 꽃인지 아는 위드리가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나도 마찬가지였지만.

"크흐흐......"

대결,편파판정

드디어 그날이 왔다.

마지막 시험 '헤이오스의 저울'이 치러지는 날.

사안이 사안인 만큼 황제 또한 자리하고 있었으며 족히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고위 귀족들이 늘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호위 목적인 듯한 기사들까지.

제법 많은 인원이 시합이 치러지는 홀에 모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과 코는 뭔가를 찾고 있었다.

참다못한 귀족 하나가 기어코 코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대체 무슨 냄샙니까,이게?폐하도 계시건만......"

"그러게 말입니다.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누가 감히......"

"내 살다 살다 이런 지독한 냄새는 처음입니다."

"어흠......"

엘란에서 손꼽히는 고위 귀족들이 분명한 이들을 중심으로 장내는 술렁거렸다.

사라질 기미가 없는 구린내에 황제는 말없이 언짢은 심사를 보였고 나와 위드리는 서로를 마주하며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시합장을 중심으로 반대편에서 대기하고 서 있는 크리디트는 얼굴을 붉힌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그 냄새가 어디 갈까.

분한 듯 입을 앙다물고 나를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는 크리디트의 눈길은 과연 불의 정령사다웠다.

"저쪽에서 나는 냄새 같은데?"

"그러게.그나저나 저 남자 로베닌 페드리 아냐?"

"로베닌 페드리 맞아!"

"흐억?"

시합이 치러지는 오늘에서야 르네 황자의 가디언들을 마주한 남자들은 로베닌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생각지도 못한 강적의 등장.

그것도 하필이면 또래에는 적수가 없다는 엘란이 자랑하는 무재 로베닌이 아닌가?

그중 엘란 출신인 게일은 저러다 눈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놀라고 있었다.

그런 게일에게 위드리가 뭣 모르고 물었다.

"로베닌 페드리가 누군가요,게일님?"

"모,몰라서 묻는 거야,위드리?저 사람이 바로 그 로베닌 페드리라고!대륙 최고의 무가 페드리 가의 장남!"

"......네에?"

얼빠진 위드리의 반응에 누구할 것 없이 이거 뭐냐는 시선으로 위드리를 돌아보았다.

에쉬까지 돌아봤으니 말 다했다.

자신의 여자친구가 일행 앞에서 얼빠짐을 드러낸 것이 민망했는지 게일이 위드리와 함께 멀찍이 사라졌다.

남은 일행 중 엔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나저나 로베닌은 누가 맡지?"

"난 싫어."

그리고 이어지는 채드의 즉답.

이것들아!로베닌이 그렇게 무섭냐!

하긴,나도 저 무시무시한 눈길이 부담스럽기는 해.

내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는 것은 입 냄새 가득한 크리디트뿐 아니라 투기 어린 로베닌도 있었는데 나와 싸워보고 싶은 듯 했다.

"흥,로베닌은 내가 맡을 거야.그러니 너희는 다른 시합에나 신경 쓰라고!"

"엥?네가 로베닌 페드리를 맡겠다고?그러다 죽어!"

"맞아,그는 손속에 정이 없기로 유명......"

"그럼 너희가 할래?"

대번에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하는 엔크와 채드.

말이나 말지,으이구!

혀를 차는데 에쉬가 슬쩍 내게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기 지니......상대는 자신이 정할 수 없어."

"뭐?왜?"

생각지 못한 소식에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에쉬가 더듬더듬 입을 뗐다.

"그,그야......규칙이 그런 걸.잠시 뒤에 상대를 뽑을 거야.저기 저 금색 상자 보이지?저 안에 열 개의 공이 들었는데 그중 같은 색을 뽑은 상대와 겨루게 되어 있어."

"......아군끼리 같은 색이 나오면?"

"그럼 다시 뽑아."

쳇,그렇게 되는 건가?

금테가 둘러진 새하얀 상자로 눈을 돌렸다.

저 속에서 공을 뽑는 거라 이거지?

뭐,상관 없겠군.

[라이,이리와 봐 라이!]

[쓰르으읍.마스터,이거 탐나요!]

[후딱 튀어온나.]

라이는 가디언들에게 준비된 의자를 탐내고 있었다.

알이 굵은 보석이 박혀 있었고 백금으로 잘 코팅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였다.

라이는 연신 의자를 물고 빨고,조금만 더 두면 아예 의자를 꿀꺽 삼켜버릴 태세다.

[힝,왜요?]

[그렇게 먹고도 또 먹고 싶디?]

[에이,저는 배고프지도 않지만 배부르지도 않아요.마스터,이왕이면 한 돌이라도 더 먹어야죠.]

일단 라이를 불러들인 나는 다시 계획 정리에 들어갔다.

내 계산에 의하면 나와 로베닌이 싸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5서클의 뇌 속성 마법사는 중급정령사인 위드리가,불의 중급정령사 크리디트는 창술가 엔크,니켈이라는 소드 유저는 같은 소드 유저인 채드,그리고 3서클 여마법사는 속검을 쓰는 게일에게.

얼핏 크리디트와 위드리를 붙여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불의 정령사인 크리디트에게 바람의 정령사인 위드리는 그야말로 밥,아니 빵이었다.

위드리가 기술만 좋아도 붙여보겠지만 일단은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뭐,애초에 내가 약해 보이는 자와 싸움으로써 1승이라도 더 거두는 게 안전하겠으나 로베닌이랑 싸우고 싶은걸!

[저 상자 보이지,라이?]

[어떤 거요?아,저 상아로 만든 상자요?저것도 맛있겠......]

[몇 대 맞을래?]

[아잉......상자가 왜요,마스터?뭐든 시켜만 줍쇼.]

쯧,그 놈의 식탐은 어디 가질 않는구나.

나는 상안지 뭔지는 몰라도 시합장의 가운데 마련된 하얀 상자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보자.저 정도 크기면......그것뿐인가?

[저 안에 들어가 줘야겠다,라이.]

[상자 안에요?왜요?]

[저 상자 안에는 공이 들어 있거든?그러니까 내가 정해준 사람끼리 같은 색의 공을 뽑을 수 있게 네가 조작해줘.]

[호오,저 안에 들어가려면......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뱀도 크단다.

저 안에 들어가려면 그것 뿐이야,라이.

나 또한 그것은 결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퀴벌레.]

[......앙?]

[잘 부탁한다,라이.]

그 커다란 눈망울을 불쌍하게 치켜떠봤자 소용없어.

너는 이럴 운명이었던 거야,라이.

[차,차라리 쥐는......]

[라이,알라뷰.]

[......미 투,마스터.하,하지만 그건 좀......]

[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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