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저 남자.저 회색머리 남자,혹시 마법 아이템을 끼고 있지 않아?에쉬 목걸이같이 변화 계통의!]
[에에?으음......아,있어요.저기 귀고리요.]
역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잘 될 일일지도......
에쉬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저 야비한 웃음을 짓는 르네라는 자는 그가 분명했다.
그로리스르네,엘란 제국의 제 1황자!
황후를 친모로 둔 잔인한 자이자 에쉬의 이복형임과 동시에 라이벌.
그를 제 1황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 점은 그가 크리디트에게 '네이칼'에 함께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대륙에 드문 불의 중급 정령사.
하필이면 네이칼,그 외에도 르네라는 이름에 변화 계통의 마법 아이템!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걸 에쉬에게 말해줘야 하나?
아냐,에쉬는 내가 자신이 황자라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나 혼자 알고 있어야 하나?
"넌 뭐야?저리 안 꺼져?"
"안 됩니다!사람의 목숨은 무거운 거에요!"
이봐,댁들 형제야.
그것도 지금 황태자 자리를 걸고 시합 중인.
말해주지 못해 아쉽네.
힐끔 손이 까맣게 탄 용병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남자의 타버린 팔 위에 앉아 있는 운디네.
저것만으로 약간이나마 진정효과가 있을 테지만 뭔가 시원해지는 마법을 걸어줄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아이,정말.그냥 이 남자까지 태워버릴 거야!셀레맨더!더블 파이어 볼!"
"운디네!워터 실드."
주문을 외는 것은 내가 늦었지만 먼저 마법이 발동된 것은 내 쪽이었다.
두 개의 파이어 볼은 워터 실드에 가볍게 막혀 사라졌다.
동그랗게 압축된 불길이 워터 실드 앞에 눈 녹듯 사라진 것이다.
명백한 힘의 차이다.
같은 하급이지만 당신과 내 정령은 질적으로 달라!
그리고 왜 에쉬까지 공격하는 거야?
이게 괜찮다,괜찮다 해줬더니 기어오르네?
"지니 씨,당신......"
"난 불을 싫어해요.더욱이 내 사람을 공격하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미쳤어요?친하게 지내주려고 했더니......감히!"
"어머,그랬어요?나도 그랬는데.하지만 우린 친하게 지낼 운명이 아닌 것 같네요."
여자들 우정이라는 게 원래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잇는 것이다.
뭐,이 여자와는 애초에 우정에 '우'자도 없었고,르네 황자의 가디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적으로 간주된 차였지만.
나도 손바닥을 잘 뒤집거든.
"비켜요!안 그러면 당신부터 죽여 버릴 거야!내가 우스워 보여?"
"누가 누굴......죽인다구요?"
[크르르르.감히!목 줄기를 뜯어버리겠어!]
딱히 운디네를 쓸 것도 없이 라이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충성심하면 라이인지라 크리디트의 말에 화가 난 모양이다.
"어때요?똥개한테 물려 죽어볼래요?아니면......그냥 사라질래요?"
"내,내게 이런 치욕을 주고도 무사할 것 같아!당신 가만두지 않......"
"얼른 꺼져요.당신 손을 이자랑 똑같이 만들어줄 수도 있어.그러니 아예 갈아 마시기 전에 사라지라고."
"뭐,뭐,뭐 이런......르네,저 여자가 하는 말 들었어요?어쩜 내게 저런 망발을......"
에휴,본인도 중급정령사면서 왜 별것 아닌 저자에게 의지한담?
크리디트가 더욱 언짢게 느껴졌다.
여자들의 문제는 역시 저거다.
결정적인 순간 남자에게 의지한다는 것.
그건 여자의 본능인가?
나도 저렇게 되려나?
그건 싫어!
르네가 싫었다.
에쉬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싫었다.
검도 제대로 다룰지 모르는 겉만 번지르르한 멍청이 같으니......
너 같은 건 에쉬의 상대가 못 돼!
"귀 먹었어?꺼져!"
"하,무슨 여자가 이렇게 난폭하담?"
"웃겨,댁의 여자는 안 그런 줄 알아?"
"내 여자는 괜찮아.품위 유지를 위한 거니까.하지만 너 같은 천한 것들은 안 됄 이야기지."
호오,천해?누가?내가?
그렇게 천하지도 않지만,실제로 천하다고 해도 댁한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
어깨 위에 앉은 운디네에게 손짓을 했다.
르네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표적이라는 뜻이다.
"운디네!워터 볼!"
"에엣,셀레맨더 파이어 실드!힉!"
"크흑!"
크리디트가 에쉬에게 썼던 것과 흡사한 마법이다.
크리디트는 파이어 볼이었고 나는 워터 볼.
둘 다 가볍고 빠르게 사용할 수 있다.
워터 실드와 파이어 실드도 마찬가지.
하지만 내가 크리디트의 파이어볼을 막아낸 것과는 달리 크리디트는 내 워터 볼을 막기는 커녕 아예 공격이 르네에게 직격으로 명중된 다음에야 마법이 발동되었다.
본래 정령이 가진 힘을 실현하는 속도의 차이도 잇엇지만 이렇게 큰 차이면 거의 소환주의 능력의 차이였다.
불의 정령이 아무리 마법발동이 더디다지만......심하군.
"한 번 더 할까요?아니면......라이로?"
"크흥!그르르르릉."
"르네,괜찮아요?"
"'요'자 붙여줄 때......빨리 꺼져요!"
나는 빨리 이 작자들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야 정확한 적의 전력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실제로 오래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에 범벅된 르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아프기보다는 쪽팔릴걸!
"지니,왜 그렇게 화를 내?너답지 않아."
에쉬의 눈에는 내가 용병 때문에 화를 내는 걸로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아냐,에쉬.
그런 것보단 이자들이 네 적이라는 데 있어.
네 적은 나의 적!
적어도 앞으로 두 달,아니 이제 한 달은 그럴 테지.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르네는 쪽팔렸는지 어땠는지 크리디트와 함께 사라졌다.
음,하지만 다시 올 확률이 제법 되지 않을까?
아니,어쩌면 당한 것이 쪽팔려서 오지 않을 수도 있어.
식탁 위에 놓인 과자를 한 입 가득 우겨넣고 씹었다.
그나저나 크리디트 그 여자 정말 괘씸하지 뭐야?
친하게 지내줘?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흥,한 달 뒤에 보자고.계속 천한 것,상것 그러는데,내가 이래뵈도 귀하게 자랐단 말임시롱!
"지,지니님?"
우물우물 꿀꺽
"왜?"
"물도 드시라고요."
위드리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물을 건넸다.
얘가 왜 이래?
전에는 안 이랬는데.
일단 받아는 들었지만 왠지 존경이 서린 위드리의 표정이 부담스러웠다.
"고마워."
"우후,지니님.저는 정말 지니님을 만나서 행복해요.지니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미젤란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있을 테니까요."
"하아?"
"아마 길기는 지금도 광장에서 사람을 찾고 있을걸요.흥!내가 전단지를 뿌린다고 할 때 쪽팔린다고 무시하더니......혹여 길기가 조건이 맞는 사람을 찾아도 지니 님이 최상이니까,제가 후계자가 될 수도 있어요!"
아아,그 얘기였구나.
나 괴팍하다고.
그러고 보니 위드리는 오늘만큼 사나운 나를 본 게 처음이지?
만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니......
아,그러고 보니 이제 보름만 더 가면 네이칼이고 한 달만 더 있으면 시합이다.
헤이오스의 저울,그게 끝나면......나는 뭘 하지?
위드리가 자신의 스승 티아트라젠을 만나달라고 했지만 그건 위험하다.
약속은 했지만 그다지 가줄 마음은 없다.
아,아니지?
내가 지니 크로웰이라는 걸 밝히고 나면 나를 두고 그 침입자랑 연관 짓지 못할지도?
호오,일단 티아트라젠을 만나는 것에 대한 결정은 한 달 뒤로 밀어야겠다.
그럼 남은 건 내 정체를 언제 밝히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딱히 밝히지 않아도 상관 없지만 본국에서는 이왕이면 시합 중에 밝히라고 했다.
그게 내 위명을 더 높여줄 거라나?
뭐,사실 지금 설정대로 하급정령사라는 것만 가지고는 '헤이오스의 저울'에서 확실히 이겨낼 자신도 없지만.
위드리가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아,기다려.내가 나갈께.]
라이에게는 날다람쥐로 변해서 르네와 크리디트를 쫓으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일행이 몇이나 되는지와 그들의 실력을 가늠해 오라고 시켰는데 날다람쥐 모습으로 식당 안에 오면 눈에 띌테니 내가 밖으로 나갔다.
식당 옆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라이가 벽을 타고 쪼르륵 내려왔다.
[마스터!마스터!굉장한 소식이에요!]
[뭔데?빨리 말해봐!그 녀석들 뭐 특출 난 거 있어?]
[있어요!있어!]
[빨리 말해!뜸 들이지 말고!]
호들갑스럽게 옷깃을 타고 내 손바닥 위로 올라온 라이.
귀엽긴 하다만 네 임무는 스파이였다고!
그러니 알아온 것을 토해내!
[그 녀석 파티요!여자가 셋이에요!]
"......그게 대단한 거야?"
[에?총 일곱명 중 여자가 셋이면 많은 거 아니에요?]
"그다지......"
뭐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놈 웃는게 음흉하다 했더니 여자를 중점적으로 끌어들였나?
여자가 상대일 경우,게일이나 엔크는 공격을 꺼릴 터.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 파티도 여자가 둘이라고!
[에잉,그래요오?쩝......그럼 별거 없어요.음,그 르네라는 쥐 같은 황자 하나에,수행원으로 보이는 연두색 머리 사내,이 둘은 별로 무력은 없어 보였어요.그 외에 여자 셋에 남자 둘이 마스터가 말하는 '가디언'같던데......]
"그래,그들 능력이 어때?무슨 직업이야?"
[에,그 불의 중급정령사 한 명이랑 마법사가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그리고 검을 쓰는 것도 여자 하나,남자 하나.]
"마법사는 어디서 그렇게 긁어모았지?무슨 마법을 쓰는데?"
에쉬가 무력파라면 르네는 지력파인 것 같았다.
대부분이 머리를 쓰는 직업들이다.
마법사들이라......
용케 모았군.
혹시 엘란 황비의 외가인 베일란에서 뭔가 원조를 받은 건?
아니지,수행원이 다 감시한다고 했잖아.
[남자 마법사는 5클래스 정도......아마도 전직마법을 쓰는 것 같아요.그리고 여자는 3클래스로 바람 마법,남자는 40대 정도?여자는 20대 후반이요.]
"5클래스?40대?뭐야?어떻게 그런 사람을 끌어들인 거지?르네 그 작자,혹시 베일란과 뭔가 내통하는 건......"
[그게 센 건가요?마스터가 더 세잖아요.그리고 그 녀석보다는 남자 검사 쪽이 더 세던데요.빨간 머리 검사.]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빨간 머리 검사?
5클래스 마법사보다 세다고?
설마 그 녀석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혹시......"
[맞아요.로베닌 뭐시기.]
"꺄아악!아악!"
그 녀석을 떠올려버렸다.
로베닌 페드리.
엘란의 공작가 장남이자 대륙 최고의 무제라고 평가되는 녀석!
나보다는 6살 많은.
10년 전 윈칸 축제에서 그 녀석에게 패한 것을 기점으로 내 라이벌이 되어버린 녀석.
반 년 전쯤에 만난 녀석은 나를 기억도 못하고 있었지만.
으윽,그때 이미 소드 익스퍼트였는데!
[왜,왜 경기를 하고 그러세요,마스터?]
"그 녀석!그 녀석이 왜 거기 붙어 있는 거야아!"
[글쎄요.그런데 그쪽에서도 회유중인 것 같던데요.확실히 그 쪽 편은 아닌 것 같았어요.여하튼,소드 익스퍼트의 끝자락 정도......이제 깨달음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소드 마스터가 될 것 같던데요.]
"제엔장,그노옴!"
좁은 골목에 서서 서서 여관 벽을 마구 발로 차고 짜증을 부렸다.
그 놈!
그 놈은 하여간 내 인생의 걸림돌이야!
내 인생의 가시라고!
벌써 그 만크 자랐단 말이야?
얄미워!얄미워!
[어차피 마스터가 훨씬 먼저 상급정령과 계약하셨잖아요?그러니까 마스터가 이기신 것 아녜요?]
"아냐,틀려!그놈은 제가 타고난 능력으로 갈고 닦았지만 나는 요행도 있었다고."
신의 제재로 인해 기괴하게도 정신력이 상승,신의 안배인지 뭔지는 몰라도 인간치고 뛰어난 친화력,라이로 인해 남아도는 마나까지!
물론 내가 잠도 자지 않고 수련한 것도 있지만 분명 요행이 없다고는 못한다.
그러니 열아홉 살에 상급정령과 계약을 했지.
내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정령사라는 것이 그렇다.
친화력만 받쳐주고 정신력만 된다면,그리고 최소한의 마나만 갖춰준다면 무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으윽,부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
그것도 전부 내 능력이라고!
생각해봐.
엔다이론도 처음에는 버거웠지만 지금은 여유있게 소환할 수 있다.
인어의 눈물이 주는 도움도 있지만 말이다.
어떤 요행이 있었든 다 내 힘이야.
요행도 내 실력!운도 실력!
에잇!나는 나라고!
[마스터,왠 파이팅 포즈?]
"후우,됐어.이제 진정이 됐으니까,그 하나 남은 검사 얘기......가 아니라!야!너 별것 없다며?로베닌 그 자식이 별게 아니면 뭐가 별거야?앙!너는 여자 셋 있는게 그렇게 신기하든?"
[아야야!마스터,아파요.크앙!]
네 수염 언젠가는 뽑아버리겠어!
로베닌 네 놈도 두고 봐!
언젠간 뽑아버릴 거라고!꼭!
내 손으로 이겨 보일 거라고!
기울어가는 저울
페밍턴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르네 황자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한창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에쉬가 산책을 가자고 했다.
오밤중에 말이다.
나는 툴툴거리긴 했지만 에쉬를 따라나섰다.
나름 데이트인지라 라이는 방에 놓고 왔다.
징징거리며 따라붙었지만 반 협박으로 떼어놓았다.
마침 자정이 지나 이제 내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지사.
벌써 한 달도 전부터 희귀한 보석이나 금속을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둔 터라 더욱 그랬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에쉬가 머쓱한 표정으로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꺄아!생일 최고!
"고마워,에쉬!"
"별 말씀을.대단한 것은 아니야.풀어봐,지니."
즐거운 마음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의 포장을 뜯었다.
벨벳으로 잘 감싼 상자가 나왔는데 보석상자 같았다.
희귀한 보석?
상자를 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석 원석 정도를 기대했는데 상자 안에 잇는 것은 잘 가공된 반지였다.
에?반지를 또 줘?
기대가 빗나갔지만 충분히 고마웠으므로 반지를 조심스레 빼들었다.
반지에 장식된 보석이 조금 특이했다.
마치 고양이 같은 모양이었다.
동그란 황금빛 안에 검고 가느다란 것이 세로로 박혀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고양이 눈?"
"묘안석이라고 해.불운을 쫓아준다는 보석이야.그전의 반지는 내가 준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래서.저기,그렇다고 이걸로 때울 생각은 아냐,지니!"
"응,고마워!난 이걸로도 충분해."
왼손에 끼었던 인어의 눈물을 오른손에 옮겨 끼고 새로 받은 반지를 왼손에 끼려는데 에쉬가 내 손에서 반지를 가져갔다.
응?
"내가 끼워줄게."
"그,그래......"
그러고 보니 직접 끼는 건 그렇겠다 싶어서 에쉬 앞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에쉬가 작게 웃으며 내 왼손을 쥐고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꼭 맞아서 괜스레 쑥스러워 하는데 에쉬의 얼굴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명백한 키스 분위기다.
마침 나만 앉아있던 차라 피하기도 그랬다.
서 있었다면 뒷걸음질을 쳤을지도 모른다.
"고마워,지니."
작게 중얼거린 에쉬의 코가 내 코에 맞닿았다.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고 내 나이 스물에 이것이 첫 키스라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쉬라면......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막 내 입술 위로 에쉬의 입술이 포개졌나 싶을 때였다.
피빛
뭔가가 내 감각에 잡혔다.
딱히 공격적이거나 살의를 띤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근처에 사람이 있었다.
밀려오는 화끈거림에 놀라 에쉬를 확 밀어냈는데 마침 에쉬도 기척을 느낀 참인지 몸을 세우고 있었다.
누구야?기척이 잡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핏 달빛에 비치는 붉은 머리카락.
"이,이이 너......"
"당신은......로베닌 페드리!맙소사,어떻게 여기에?"
아악!하필이면 저 녀석?
또 하필이면 에쉬가 저 녀석을 알잖아.싫어!
녀석은 나와 에쉬 앞을 지나가다 말고 제 이름이 나오자 발걸음을 멈췄다.
"......누구?"
으윽.저 '누구?'라는 말이 이가 떨리게 싫었다.
내가 저 소리 듣고 미칠 뻔한 걸 생각하면!
그리고 아무리 길이 여기뿐이라지만 분위기 잡는 커플 앞을 그렇게 태연히 지나가는 게 어디 있어!
좀 멀리 돌아가든가 아니면 좀 숨어 있든가.
하긴 천하의 로베닌 페드리에게 너무 과한 기대인가.
"아,아뇨.실례했습니다."
"당신 강해.그렇지?"
"예?아,아니오!페드리 공자에 비하면......"
"당신도 강하고,그 옆의 여자는......더 강해."
로베닌의 시선이 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녀석에게 관통당한 기분이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에쉬 곁에 섰다.
호오,그래도 감춘다고 감췄는데 용케 알아챘네?
나는 녀석을 도발할 겸 기운을 풀어볼까 하다가 곁에 에쉬가 있어 포기했다.
"맞아요.지니는 강합니다."
"어때?둘 다 내게 덤벼볼래?"
"에......"
"싫어."
에쉬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내가 먼저 거부했다.
나는 녀석의 손이 얼마나 가차 없는지 잘 알고 있다.
10년 전 그 결투에서도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내게 검기를 쓰지 않았던가?
이기기 위해서라면 상대를 죽일지도 모를 녀석이었다.
게다가 에쉬와 로베닌이 싸우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분명 에쉬를 피떡으로 만들어놓을 테니.
"......싸우자."
"싫어!"
"지니?"
녀석이 나와 에쉬를 번갈아보다가 결정권은 내게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꽤나 상대를 도발하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그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째서?"
"싫으니까!그러는 너는 어째서 싸움을 거는 거야?"
"강해 보이니까."
확실히 녀석은 몇 달 전보다 성장해 있었다.
그때는 내게 흥미가 없어 보이더니 지금은 스스로 싸움을 걸지 않는가.
강해진 만큼 눈이 좋아진 모양이다.
라이가 그랬지.당장이라도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오를 녀석이라고.
싸워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거부하겠어.너는 네 갈 길이나 가라고!"
"......싫다니까.나도 안 되고 에쉬도 안 돼!다른 사람 찾아봐!"
"여자,정령사지?잘은 모르지만 정령사야."
흥,그것까지 알아봐?
얄미워 죽겠군!
로베닌이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에쉬가 막아섰다.
"잠시만요,로베닌 공자!우린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정령사 맞지?낮에 싸운 그 여자랑 비슷해.하지만 뭔가 달라.그 여자는 불이었어.너는 뭐지?"
"크리디트랑......싸운 거야?"
"이름은 몰라.그 귀찮은 사내가 데려온 여자였지."
맞네,크리디트!
벌써 싸워본 거야?
이 놈이 아무래도 정령사 꺾는 데 맛들린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 이름 좀 기억해주라고!
"난 당신이랑 싸울 이유가 없다니까!나는 평화주의자라고!"
"죽이진 않을께.싸우자.분명 재미있을거야!"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나는 사실 무한이기주의자다.
그리고 로베닌 이 녀석은 아마도 무한결투주의......아니,혈투주의라고 해야 하나?
내 강력한 거부에도 로베닌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에쉬가 막았지만 힘의 차이는 완연했다.
나는 뒷걸음치지 않았고 결국 녀석이 눈앞에 섰을 때 이를 갈며 말했다.
"네 손에 죽지도 않겠지만......나는 너와 싸워 이득 볼 게 하나도 없어!"
지니 크로웰로서 싸워 이기면 모를까 지금은 녀석과 싸워봤자 남는 게 없었다.
로베닌과는 언젠가 싸우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에쉬를 황태자로 만드는 데 전력을 쏟아야 했다.
"이득?그 정령사 여자와는 싸우는 대신 그들과 함께 동행해주기로 했지.그러니 너도 뭔가 조건을 걸어봐."
"동행하기로......했어?그들과?"
"그렇다.하지만 그런 것치고 재미없는 상대였어.하지만 너는......싸울 가치가 있어 보여."
"그럼......안 되는데!너,내가 싸워주면......우리랑 동행할래?그들 말고......우리랑!"
가디언의 숫자에 제한은 없다.
최소 다섯 명.
그렇게 알고 있다.
많이 모아오면 그중 다섯 명을 골라 '헤이오스의 저울'을 치르면 된다.
르네와 동행하는 걸 눈뜨고 볼 바에야 에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백번 나았다.
"......다른 건 안 되나?"
로베닌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안 된다는 뜻이리라.
쳇,그래도 기사라고 한 입으로 두 말은 못 하겠다는 모양이군.
이 녀석은 역시 내 인생의 걸림돌이야.
아니,아주 큰 바위덩어리!
나는 넘치는 짜증에 버럭 소리쳤다.
"됐어.그들과 동행해!그리고......두고 보자고!"
"이봐!싸우자니까?"
"어엇,지니......"
로베닌을 뒤로 하고 에쉬의 손을 붙들고는 공원을 빠져나갔다.
녀석은 잠시 쫓아오나 싶더니 멀어졌는데 나는 녀석과 '헤이오스의 저울'에서 만나게 될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햇갈렸다.
드디어 싸우게 된 것은 기뻐할 일이나 그로 인해 혹시라도,만에 하나라도 진다면 에쉬를 볼 낯이 없어!
하여간......저 웬소 같으니!
페밍턴에서 네이칼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눈 깜짝할 새라고 해도 과하지 않으리라.
몇 달 인가를 험한 길을 헤치고 다녔더니 잘 정비된 페밍턴과 네이칼 사이의 길은 가히 고속도로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한 달이나 남은 터라 찬찬히 왔음에도 보름을 약간 넘겼을 뿐이었다.
나도 이제 여행에 제법 이골이 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그 5서클 마법사도 걸려.
하지만 나를 넘어지게 만들지도 모르는 것은 로베닌.
바로 그 녀석이었다.
"저......지니.나 잠시 나갔다 올게."
한참 머리를 바삐 굴리는데 에쉬가 외출을 하겠단다.
여관을 막 잡은 터라 모두 정신이 없었기에 제일 한가히 앉아 있는 내게 말한 것 같았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선 크리디트.
정령사니까 장거리 공격이 용이한 창술을 쓰는 엔크에게 넘긴다.
그리고 속검을 쓰는 게일은 그 3서클 여자 마법사에게 붙여주고.
소드 유저라는 여사 검사는 같은 소드 유저인 채드를 붙여주면 될 터.
제일 강적인 로베닌은 내가 맡는다고 쳐.
그럼 5서클 마법사는 누가 맡지?
위드리는 이제 겨우 하급이라 힘들었다.
만약 중급만 되어도 어찌어찌 막아볼텐데.
역시 버리는 시합이 되려나?
그러고 보니 위드리는 기운만 봐서는 중급은 충분히 될 텐데 어째서 하급에 머물러 있는 거지?
마나도 괜찮아 보였고.
그 정도 기운이면 친화력도 당연히 충분해.
나머지는 정신력인가?
일단 중급과 계약 시도를 해봐도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