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71)

[마스터어,여기 계시죠?]

"아,라이!"

"누가 왔나?"

아참,라이는 쓸 만한 먹이가 있나 보고 온다며 오랜만에 사냥 갔었지.

내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모양이다.

나는 붉은 머리 여자의 눈치를 살짝 보며 문을 열었고 라이가 작게 열린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당장에 몸을 비비며 말했다.

[왜 여기 계세요,마스터?방에 가니까 마스터 침대에 곰탱이가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절 놓고 가시면 안 돼요!]

"개?그거 당신 개에요?"

[늑대야!]

"네,라이라고 하는데......개 싫어하세요?"

이를 드러내려는 라이의 머리를 적당히 매만져주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혹시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별로요.우리 저택에도 개가 다섯 마리나 있거든요.후훗,하나같이 훌륭한 태생의 족보 있는 아이들이죠.그 개는......무슨 종류죠?"

"믹스요."

"믹스?"

"똥개."

여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늑대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똥뱀에 이어 똥개......마스터 저는 금속의 정려이지 똥의 정령이 아닌데요.]

"또옹개?그런 걸 어떻게 키워요?털색이 제법 멋지기에 새로운 품종인가 했더니......"

그래,라이는 금속의 정령이었지.

그런데 똥의 정령도 있나?

그거 획기적인 사실인데?

어떤 의미로 최강일지도......

하지만 계약하고 싶지는 않네.

"똥개 자체가 다 새로운 품종 아닌가요?그래도 우리 라이는 똑똑하다구요."

"흐으음.글쎄요.저는 평민들의 생각은 이해가 안 돼서요.그리고 이름도 라이가 뭐에요?너무 짧다.우리 집 개는 이름이 가장 짧은 게 프랑소와이르제르트헤트인데."

뭐?프랑소와이르가......어쨌다고?

그리고 나도 일단 귀족가거든?

그것도 후작이라고.

뭐,후작 된 지 얼마 안 되었고,내 가 후작인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작은 돼!

드리케 아카데미 졸업생이니까.

"개 이름이 그렇게 길어서 어떻게 불러요?개 이름은 간단한 게 최고라고요."

"부를 땐 프랑소와!"

그럼 결국 그게 이름이네!

괜찮을 줄 알았더니 역시나 이런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괜찮았지만 역시나 불편한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잉,마스터.저도 긴 이름 가지고 싶어요!애칭이라도 좋아요!]

[뭐?이름이 길어지면 그건 애칭이 이미 아니잖아.]

[그래도요!좀 더 멋진 이름 하나 만들어주세요!저 여자가 똥개 같다고 하잖아요.]

[흐음,그럼.....라이스트로베리후르츠뿅뿅]

적당히 생각나는 귀여운 단어들을 합쳐봤는데 라이가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동그랗고 예쁜 눈을 죽은 동태 눈깔같이 만들더니 입을 해 벌리는 것이다.

싸늘한 게 아니라 죽은 표정인가?

마음에 안 드나?

난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다.

[으음,그 이름......찌리에게 양보할레요.]

[그럼......찌리스트로베로후르츠뿅뿅?아니면 아돌스트로베리후르츠뿅뿅?]

[찌리아돌스트로베리후르츠캔따먹어뿅뿅,어때요?]

라이는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는데 너무 길었다.

부르다 지칠 듯 했다.

하지만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아돌과 싸우기만 하던 라이가 아돌을 위해 마음 쓰다니,녀석도 이제 철이 드나 싶었다.

나중에 아돌에게 얘기해줘야겠다.

아돌은 항상 긴 이름이 가지고 싶다고 했으니까.

항해 사흘 째,여자와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 여자와 사흘을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은 이 여자의 일므이 바네서 크리디트라는 것이고 집은 헤이케의 백작가라는 것이다.

듣자 하니 정령사 가문이라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불과 바람의 중급정령을 각기 하나씩 둘이나 부린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그녀의 아버지나 그녀나 숫자 빼면 능력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같은 중급정령이라고 해도 소환자의 능력에 따라 정령이 발휘하는 힘의 차이는 족히 열 배까지 난다.

그것은 하급도 마찬가지다.

아,그리고 또 하나.

지금 페밍턴에는 연인을 만나러 가는 거라고 했다.

얼굴은 별로지만 돈이 많고 머리가 좋다나?

그 연인이 같이 엘란의 수도 네이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단다.

"그래서 방은 쓸 만하세요,지니님?"

"음,채드가 말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던데?제법 친절해.같은 정령사라 통하는 게 있어서 그런가?"

배의 식당 한구석에 모처럼 파티원들이 모두 모여 앉았다.

사흘이나 배를 타고 오면서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일행이 워낙에 비협조적이어서 말이다.

모일라치면 꼭 한두명씩 빠져서 딴 짓을 하곤 한다.

문득 채드가 비아냥거렬ㅆ다.

"흐음,그래?그 여자도 너처럼 찾으면 안 보이는 모양이지?"

물론 가장 비협조적인 것은 나다.

개인주의를 기본으로 최근 이기주의가 깊이 싹을 터서 말이다.

아니,이기주의가 원래 깔려 있다가 아카데미를 나오자 얼씨구나 하고 싹을 틔운 걸지도......

"내가 뭘?그냥 낚시 좀 했을 뿐이야!"

"웃기시네.그래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못 낚았냐?"

"못 낚은게 아냐!낚았어도 놔줬을 뿐이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낚은 것이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을 뿐이지 미끼를 안 걸었는 걸.

나는 혹여 또 물속에 굴러다닐지도 모르는 인어의 비늘을 찾는 거지 사실은 낚시를 하는 게 아니라서 말이다.

하지만 사흘이나 찾았는데도 나오지 않아 그냥 포기하련다.

"지니님이 낚시를 하시다니,의외에요.그리고 보니 독서도 좋아하시고.저는 지니님이라면 뭔가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특별한 취미?어떤 거?"

"음,몬스터 몰이라든가 책을 엮는 정도?"

책까지는 이해해주겠는데 몬스터 몰이는 뭐야?

난 그런 취미 없어!

아,딱 한 번 내가 열 살 때인가,'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렸을 때 몬스터를 몰아본 적이 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책을 엮는다고?어떤 책?"

"역시 협박모음집이라든가 사람들의 약점을 모은 약점모음집......으읍?"

"호오,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지,위드리?"

게일이 황급히 위드리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들을 것은 다 들은 상황이었다.

나는 나름 착하게 사는 것 같은데 왜 주위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잔인하게 만들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빵과 내 몫으로 나온 과일 중 어느 것을 위드리의 입에 콱 넣어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지니!위드리가 뭘 몰라서 그래.네가 이해해줘.응?"

"......"

"아,이거 먹을래?이것도 먹어."

"......내가 돼지냐?"

나에게 약한 부분을 대라면 에쉬 아니면 금속,혹은 먹을거리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게일이 제 앞에 있던 고기를 내밀었지만 그 정도에 풀릴쏘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이미 배가 불러서 그런 유혹에는 안 넘어가!

"아!그래!지니,이번 네 생일 선물로 초콜릿 어때?한 상자,아니 두 상자!"

"라이도 있고,운디네도 있고......"

"네,네 상자?"

"좋아!생일 기대할게,게일."

싱긋 웃어보였다.

여봐란 듯이.

까짓 웃어주지,뭐!

생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 주변관리를 잘 해야겠다.

시간은 순풍에 돛단 듯 빠르게 흘렀다.

어느 새 저 멀리 페밍턴이 보였다.

선원의 말에 따르면 항구까지 앞으로 두 시간.

나나 바네서 크리디트나 내릴 준비를 위해 각기 짐을 쌌다.

내 짐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녀의 짐에 비하면 감히 비할 것이 못 되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거뜬히 들어 올렸는데 듣자 하니 경령화 마법이 걸린 것이라고 했다.

나도 브라이트에게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하지만 아무리 가벼워도 저렇게 여행 가방으로 세 개나 들고 다닐 일은 없을 듯하다.

뭐가 저렇게 많아?

"크리디트 씨, 그 짐들은 대체 다 뭐에요?"

"별거 없어요.드레스랑 구두랑 모자랑 화장품 정도?"

"......먹을 건?"

"돈이랑 보석 있어요."

으음,나도 그렇지만 이 여자도 참 대책 없지 싶었다.

귀하게 자라서 그런가?

어디 산 넘어가다가 배고프면 그 보석 뜯어먹을텐가?

"웬만하면 그 돈으로 먹을 걸 좀 사서 가지고 다니세요.육포나 말린 과일요."

"에?싫어요.그럼 가방에 냄새 배잖아요."

그럼 마세요.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사랑하는 연인이 항구에서 기다린다니 그 연인이 알아서 해주겠지.

입을 다물고 내 짐을 싸는데 크리디트가 말을 걸었다.

"아참,그런데 지니 씨."

"네?"

"그 반지요.왼손 약지에 낀 반지.약혼반진가요?"

"뭐......비스무리한 거죠."

길게 얘기하기 싫어 적당히 돌려 말하자 그녀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특이한 보석인데......무슨 보석이에요?사파이어는 아니죠?"

"에,아쿠아......마린?"

"아하,그게 아쿠아마린이에요?그거 희귀한 것 치고는 별로 안 비싸던데."

"아하핫,그래요?"

딱히 생각나는 푸른 보석이 아쿠아마린이라 적당히 둘러댔는데 그녀의 말은 나를 화나게 했다.

왜 남의 반지를 보고 싸네,어쩌네야?

웃겨!

화는 났지만 마지막 날이니 적당히 좋게 웃어넘겼다.

"나도 그이를 만나면 반지나 사달랄까 봐.음,다이아는 아무나 다 하니까......아니지,그래도 다이아가 최고니까 조금 특이하게 물방울 다이아나 핑크 다이아가 좋겠죠?"

"그게 그거일 듯 싶네요."

"에이,엄연히 달라요!가격이!"

나는 걸어다니는 보석 제조기 라이가 있어서 관심 없수.

그리고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돼!

당신 그 예쁜 머리카락 홀랑 벗겨지고 싶은 거야?

내 뚱한 표정을 무시하고 그녀는 이 지루한 여행이 끝나 기쁜지 방실 웃고만 있었다.

[마스터,다이아 그거요.색은 달라도 맛은 그게 그거에요.]

[그래?근데 너 다이아 많이 먹었니,라이?]

[음,다이아만 1톤 전도 있어요.뱉어볼까요?]

[절대 안 돼.]

다이아만 1톤?

개념이 안 서는걸.

하긴,마기의 레어에서 먹은 보석들이 거의 작은 동산만 했으니 그 정도 수치야 나오겠지 싶었다.

나는 다 꾸려진 짐을 꽈악 매서 거기에 연결된 작은 줄을 라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엥?물고 가요?]

[그럼 목에 걸어줘?]

[쳇!]

쳇이라니,쳇이라니!

애완정령이 감히 주인님에게 불만을 다는 게냐?

한마디 하려다가 계량화 마법이 걸려있지 않은 터라 크고 무거운 내 짐을 생각해서 참았다.

대신 말없이 가방의 줄을 라이의 목에 걸어주었다.

역시 멍멍이에게는 목줄이 필수지!

배가 항구에 닿고 뭍으로 내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일행과는 밖에서 만나기로 한 터라 크리디트와 함께였다.

그녀는 연신 종알종알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이는 리더십도 있고 하는 행동거지로 봐서는 귀족이 분명해요.하지만 본인은 왠지 숨기던데.뭐,내 눈은 틀림없으니까!내가 고른 남자인걸요."

사실 여행객들 중에 귀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귀족들은 대게 자신의 전용 마차를 쓰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파티는 에쉬에,나에,아마도 로크스까지 귀족이 셋이나 되네?

나름 럭셔리 파티였다.

[마스터,이 인간이랑 언제 헤어져요?]

[응?이제 금방.왜?]

[이 인간 왠지 싫어요.기분 나쁜걸요.]

[흐음,나는 이 여자 괜찮던데.딱히 나한테는 피해준 게 없어서 말이야.]

사실 정령사라는 것은 반가웠지만 불의 정령사라는 점이 약간 꺼려졌었다.

과거 불에 타 죽은 전적이 있어서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생이었고 지금은 그 전생보다도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좋든 싫든 내겐 이쪽이 진짜가 된 것이다.

뭐,여전히 좁고 어둡고 긴 통로나 자욱한 연기는 싫지만.

"그리고 우리 그이......아,이름을 말해준 적 없죠?르네라고 하는데 분명 길고 멋진 본명을 가지고 있을......끼아악!"

"에?"

나는 '르네'라는 이름과 크리디트의 갑작스러운 비명소리에 바다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뒤로 돌렸다.

뒤에 줄을 서 있던 남자 하나가 그녀의 옷자락을 밟은 모양이다.

선명한 검은 발자국이었지만 소리칠 일은 아니었다.

거 호들갑은......그러게 그런 하늘하늘한 옷은 이런 데서 입으면 안 돼.

"아이고,아가씨.죄송......"

"이 천한 것이!"

짜악

크리디트가 대번에 손을 들어 그 남자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때,때릴 것 까지야.

뺨을 맞은 남자는 한눈에도 가난한 평민으로 보였는데 그는 크리디트에게 뺨을 맞고도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에잇!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옷을 어쩔 테냐!응?어쩔 테야!"

크리디트가 끼고 있던 장갑을 빼들더니 그것을 휘둘러 다시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많이 화가 난 듯 했다.

남자는 묵묵히 맞을 뿐이었고 주위에서 나서는 이도 없었다.

에휴......

"진정해요,크리디트 씨.옷은 아무데나 빈방에 가서 갈아입어요.네?"

"에잇!이 천한 것을 이대로 용서해줄 수는 없어요!반쯤 죽이......"

"나한테 남은 여행복이 있거든요?클린 마법이 걸린 건데,그걸 줄게요.저리 가요,크리디트 씨."

"크,클린 마법?"

요 며칠간 크리디트의 탐욕스러운 성격을 파악한 나는 그녀를 꼬드겨 근처의 빈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씩씩거리기는 했지만 내가 건네준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기분을 푸는 듯했다.

하긴,마법 아이템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어?

"그 색 괜찮죠?아니면 회색도 있어요."

여행 중에 산 여행복이 너덧 벌 되었고 나는 그중 가장 새것인 보라색 여행복을 내밀었다.

클린 마법이 걸린 것이라 돈도 꽤나 준 물건이었지만 사람 하나 살린 것에 비하면 싸지 싶었다.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그렇게 창피를 줄 건 뭐람?

개인적으로는 죽도록 창피를 줄 바에야 죽여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좋네요.마침 마법이 걸린 여행복이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요?앞으로 여행하려면 여행복은 필수니까 잘 챙기세요.나중에 네이칼에 가면 무늬가 들어간 것들도 팔아요."

"그래요?어머머,멋져라.꽃무늬 여행복이 가지고 싶어요!있겠죠?"

"이,있겠죠?없으면 주문해도 될 거구요."

꽃무늬?

나는 줘도 안 입으련다.

그런데 뭔가 귀를 번뜩했던 일 하나를 잊은 느낌인데.

뭐였지?

나는 뭔가 켕기는 느낌이었지만 크리디트의 옷을 갈아입는 동안 소비한 시간이 제법 길었기에 서둘러 방을 나섰다.

이제는 제법 여행자 티가 나는 크리디트.

내가 준 여행복 덕이 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영락없는 귀족 아가씨였는데.

나는 배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나기로 했던 데가......

"난 '바다 이야기'라는 식당에서 일행이랑 만나기로 했는데......크리디트씨는요?"

"아,나도 거기에요.그이가 그리로 오라고 했어요."

"그래요?같이 가죠,뭐."

[마스터,곰탱이는요?이 짐 빨리 줘버려요.털 눌린단 말이에요.]

웃기시네.

네 털이 눌리려면 그 가방을 백 년은 메고 다녀야 할걸.

나는 엄살을 부리는 라이를 뒤로 하고 크리디트와 '바다 이야기'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 이 여자와도 헤어지겠지만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식당에 들어서자 배에서 내린 듯한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배에 식당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주일이나 같은 밥을 먹게 되면 질리게 마련.

나는 주위를 훑어 에쉬를 찾았다.

어디 보자,에쉬가......

"지니!"

저기 있다!

에쉬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고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바로 가려다가 크리디트가 있음을 깨닫고 발을 멈췄다.

"일행이 없어요?"

"으음,아직 안 왔나 봐요.어쩌지?"

"......일단 우리 일행이 있는 쪽으로 가요.어차피 자리도 없으니까요."

"와아,좋아요!"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야.

크리디트를 끌고 일행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자 채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차,이 녀석.

크리디트에게 뺨을 맞았다고 했지?

"아,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누구......?"

에쉬나 위드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크리디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게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일은 이 여자를 처음 본 터였다.

"배에서 같은 방을 썼던 크리디트 씨야.위드리는 한 번 봤지?"

"네!불의 중급정령사시잖아요.존경스러워요."

"후훗,안녕들 하세요?바네사 크리디트에요.들어셔서 알겠지만 크리디트 백작가의 차녀랍니다."

여행복임에도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우아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크리디트.

채드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많이 아니꼬운 모양이다.

채드는 작게 혀를 찼다.

"쳇."

"어머?이 사람은 저번의 그 무례한 아니에요?감히 레이디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왔던......"

"......그 방은 내 방이기도 했어."

쉽게 져주지 않는 채드의 말에 크리디트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붉은빛 화장을 한 입술의 끝을 말라 올리며 검지를 치켜드는 크리디트.

그 손가락에는 붉은빛 반지가 껴져 있었는데 그것은 크리디트로서는 공격 표시였다.

"당신은 입이 짧군요?보아 하니 잘해야 평민인데 혀를 그렇게 놀려서야 되겠어요?혀를 지져 주......"

"잠깐,크리디......"

"바넷!어디 있나,바넷?......없나?"

다행히도 그녀의 일행이 온 모양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치켜 들었던 것은 잊은 듯 방긋 웃으며 몸을 틀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껴져 있는 붉은 반지는 '용암석'이라는 것인데 불의 정령사들이 애용하는 보조무기였다.

용암 속에서도 녹지 않은 암석 주위로 모여든 용암이 그대로 굳어서 만들어진다는 용암석은 불의 정령의 소환속도를 빠르게 해준다.

어디까지나 소환속도만 빠르게 해줄 뿐이지만 충분히 희귀한 것이라며 그녀가 내게 자랑하기도 했다.

자신의 것은 유달리 색이 잘 나온 것이라며 몇 번인가 빼서 보여주었다.

"채드,너 바보야?귀족 여자들에게는 덤비지 말라고.특히나 뭔가 배운 여자들은 잔인하단 말이야."

"큭,그래도 아니꼬운 걸 어떡해?"

엔크의 충고에 채드가 이를 갈았다.

확실히 크리디트가 사나운 면이 있기는 했다.

잔인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 뒤쪽에서 느껴지는 불의 기운에 황큽히 몸을 돌렸다.

크리디튼가?

명백한 공격성!

거의 반사적으로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

촤자작

"아아악!끄악!"

운디네를 불러 몸을 긴장시켰건만 그 공격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격한 사람은 크리디트가 분명했다.

문 족으로 가던 크리디트의 앞으로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가 자신의 팔을 부여잡은 채 뒹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코끝을 찌르는 독한 노린내.

그리고 크리디트의 손등 위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도마뱀.

그것은 불의 하급정령 셀레맨더였다.

"더럽게 감히!셀레맨더,반대쪽 손에도 파이어......"

"뭐하고 있어,바넷?"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리디트가 저 용병의 손이라도 태운 모양이었다.

내가 본래 남의 불행을 나서서 도화주는 사람이 아닌지라 다소 멍하니 서 잇는데 트리디트의 그이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섰다.

휴우,저 남자가 어떻게든 말려주겠지?

"아이참!말도 말아요,르네!이 남자가 갑자기 제 엉덩이를 쓰다듬지 뭐에요?죽여 버릴 거에요!"

"뭐어?이게?뭐 이런 버러지 같은 게 있어?쯧,고통스럽게 죽여 버려,바넷."

끄악!

그 이라는 작자도 똑같아!

식당 안이 술렁거렸다.

공포에 범벅된 사람들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무리 그런 짓을 했다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볼 수는 없는지라 나느 크리디트에게 다가갔다.

"잠시만요,크리디트!그 정도로 사람을 죽이는 건 좋지 않아요."

"좋지 않은 게 아니라 절대 안 됩니다!"

그새 따라온 에쉬가 성이 나서 외쳤다.

그리곤 용병 사내의 옆에 주그려 앉아 그를 진정시키나 싶더니 그의 손을 살폈다.

화끈하게 태워놨군.

나는 독한 노린내에 코를 막으며 운디네를 에쉬에게 보냈다.

"지니 씨,왜 말리죠?이런 지저분한 인간들은 죽여야 해요!"

"이미 한 손이 녹은 걸로 충분해요,크리디트.뭐,노예상 같은 건 죽여도 되겠지만."

"한 손으로는 안 돼요!적어도 양손은 태워버려야 직성이 풀린다고요!어디서 감히 이 몸을......"

"이런 일은 여행하다 보면 비일비재해요,크리디트.이자도 악의라기보다는 장난기가 반이었을 거라구요."

여행자는 대부분 용병들이다.

그리고 그 중 여자가 드물다 보니 자연 남자 용병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그렇다 보니 식당이나 주점같이 좁은 곳에서 지나가는 여자 여행자들을 가볍게 더듬는 정도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나야 라이가 막아주지만.

아마 나를 만지려다 손을 물린 사람들은 손으로 셀 수 있는 수는 넘었지 싶다.

"아뇨!나는 귀족이에요!당신 같은 평민이라면 모를까,나는 용서할 수 없어요!감히 내 몸을 만지다니!백 번 죽어 마땅하다구요!"

"긴말 말고 죽여,바넷.내가 도와줄까?"

르네라 불린 크리디트의 연인이 검을 빼들었다.

하지만 검을 빼드는 소리로 보건데 비싸기만 할 뿐 검술 실력은 별로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일단 귀족이거든?

나름 후작가......응?

잠깐,그런데......르네?

"안 됩니다.사람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어요!"

아까부터 켕기던 무엇인가가 떠오를 것 같은데 에쉬가 제 검을 검집 째 빼들어 르네라는 남자에게 대항했다.

예의 그 정의감이 불타오르는 모양이다.

그래,그래.

너는 싸워라.

나는 뭔가 떠오를락 말락......

주위가 소란스러웠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르네를 빤히 바라보았다.

심심한 얼굴.

그래,크리디트가 얼굴은 별로지만 돈이 많고 귀족일 것 같다고 했지.

회색 머리카락에 야비한 웃음,하지만 정말 개성 없는 얼굴.

마치 에쉬같은......에?

과하게 개성 없는 얼굴에 이름이 르네야?

남자의 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걸이!

목걸이가 왜 저렇게 많아?

남자가 뭘 그리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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