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일이 이렇게 됐는데......누구 2인실 방 쓸 사람?"
여관으로 돌아온 에쉬는 일행을 모아놓고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긍정의 뜻을 보이지도 않았다.
하긴,누가 일행과 홀로 떨어져서 낯선 이와 한 방을 쓰고 싶겠는가?
[채드한테 가라 그래요,마스터.채드가 덩치가 제일 크니까.]
[오,그거 좋은데?]
라이의 말에 나는 살며시 손을 들었다.
그에 에쉬가 '님이 왠일?'이냐는 의문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어이!내가 가겠다는 게 아냐.
건의사항이 있다는 거지.
"지니 네가 가려고?"
"아니,채드를 추천하려고."
"뭣이?누구 맘대로!나는 반대!나는 지니를 추천합니다.!"
멍하니 얼을 빼고 있던 채드 녀석이 제 이름이 나오자 이를 드러내며 반항하듯 나를 추천했다.
하지만 질쏘냐!
"웃기지 마!채드로 해,채드로!저 녀석이 제일 덩치가 크잖아!저 비곗덩어리!"
"이건 근육이야!내 신성한 근육을 비계 따위로 모욕하지 마!"
"암튼 채드!채드라고 채드!자,찬성하는 사람 손 들어봐!"
자신들이 가기는 싫었는지 슬쩍 손을 드는 게일과 엔크.
하지만 요지부동인 에쉬와 로크스,위드리.
아앗!
이대 삼?
아니지,나까지 해서 삼대 삼!
그리고 라이!
나는 라이를 향해 눈을 빛냈다.
너도 참가하라는 뜻이다.
[에잉,저도 손 들라고요,마스터?]
[물론이지!]
[앞발?뒷발?]
[......맞고 들래?]
라이가 슬그머니 앞발을 들어 보였다.
이로써 '2인실에 채드를 보낸다'에 찬성하는 사람은 나와 게일,엔크,그리고 라이!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라이까지 네 명이니 과반수다.
내가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이자 채드가 손을 엑스자로 가로질러 보이며 말했다.
"개는 안 됨."
"뭐?왜 안 돼?라이도 엄연한 우리 동료야!"
"개잖아!"
정확히는 늑대야!
나도 가끔 헷갈리지만.
채드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그에 간단히 꺾일 내가 아니었다.
"아까 줄 서는 건 라이 시켰잖아!라이한테 그런 혹독한 일을 시켜놓고 정작 투표권은 안 주는 거냐?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그,그건 너도 수락 한 거잖아!"
"어쨌든!내 연약하고 완저 소중한 라이한테 사람이 하는 일을 시켰잖아.그러니까 사람이랑 똑같은 투표권을 줘야지!"
"웃기지 마!내 칼도 씹어 먹은 개가 뭐가 연약해?그리고 넌 그 완전 소중한 개의 수염을 허구한 날 뽑으려고 하잖아!"
그건 내 애정표시야!
나와 채드가 또 대립하자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에쉬와 로크스가 중재에 나섰다.
"제발 싸우지 좀 마!너희는 잊을 만하면 싸워?그만해,그만!"
"그래요,지니 씨.다른 일도 아니고 일주일이나 써야 될 방인데 조금 더 신중을 가하자고요."
"좋아,그러면 아직 손을 들지 않은 너희에게 묻지.반표를 채드에게 돌린다.찬성?반대?둘 중 하나만 대답해!"
우선 내 손가락이 가리킨 사람은 에쉬였다.
자,대답해봐!
"나는 으음......반대.조금 더 두고 보......"
"다음 로크스!찬성?반대?"
"저는 에쉬의 뜻을 따르......"
"그럼 위드리!너는?"
반대할 것 같은 사람 얘기는 들을 필요도 없었고,이로써 벌써 반대표가 두개였다.
채드는 당연히 반대니 세 개라도 봐도 무관하다.
이제 위드리의 대답이 찬성이냐 반대냐에 따라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채드를 몰아낼 수도 있었다.
위드리도 자신의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는 까닭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저,저는......그게......"
"빨리 대답해!반대?찬성?"
"그......아우야,게일님......"
위드리가 게일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지만 게일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정도는 너 혼자 생각해서 대답하란 말이야!
걔는 네 연인이지 네 아빠가 아니라고!
나는 한껏 성을 내며 위드리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빨리 말해!반대야?찬성이야?"
"그,그게......!"
"집에 돌아갈래요,위드리?"
"예?그,그런......으윽!찬,찬성합니다."
후후,이로써 패를 갈렸다.
라이를 빼더라도 사대 삼!
라이까지 하면 오대 삼!
크크큭.
채드를 떼어낸 나는 한껏 웃어젖혔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위드리는 일단 내 '종'이거든!
"오호호홋!"
"말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잘 가라,채드.
부디 성질 더럽고 까다로운 사람과 한 방을 쓰며 고생하기를 빌어주마!
역시 난 너무 착한 것 같아.
이기적이지만.크큭.
본래,정말 본래 내 바람은 잘 먹히지 않는 편이다.
열 번 빌면 두 번 정도 맞아떨어질까?
헌데 해괴하게도 이번에는 내 바람이 정통으로 먹혔는지 배에 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채드가 우거지상을 하고는 내 방으로 찾아왔다.
나와 위드리,엔크가 쓰는 방이었다.
커플들끼리 붙여놓을 수 없다는 로크스의 말에 따라 나와 위드리 엔크,에쉬 로크스,게일이 각각 3인실 방을 차지한 차였다.
"방 좀 바꿔주라.그런 인간이랑 일주일이나 같이 방을 썼다가는 살인을 저지를지도 몰라!"
"싫어."
[싫어!푸헤헤헷.]
채드가 오만상을 찡그리고 말하긴 했지만 들어줄 내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채드 본인이 잘 알 테다.
나의 가차 없는 대답에 라이도 한 술 거들었다.
"제발 좀 바꿔줘!제발!"
"왜?어떤 사람인데,채드?들어보고 괜찮으면 내가 바꿔줄게."
엔크가 호의를 베풀었다.
아마도 여자 둘과 한 방을 쓰는 게 제 딴에는 불편했나 보다.
얌마,미녀들에 둘러싸인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물론 둘 다 임자 있음이지만......
"미안하다,엔크.말은 고맙지만 너는 안 돼.꼭......여자여야 하거든."
"왜?동승인이 여자야?"
"응,그것도......어엄청 괴팍한 여자.지니보다 더해."
"흐음,그럼 위드리 보내.위드리는 괴팍한 여자의 '종'을 하는 게 수행과제라며?"
위드리는 자신의 스승님이 내준 후계자 숙제가 괴팍한 여자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그 스승이 티아트라젠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야 빤한 사실이었다.
내가 그런 눈치는 좀 된다.
채드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은 영 내키지 않지만 상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데 조금 마음을 바꿔 위드리에게 권해보았다.
그러자 위드리는 거의 경기하듯 몸을 팔짝이더니 말했다.
"꺄악!싫어요,싫어.저는 엄연히 금발에 푸른 눈,그리고 물의 정령사라는 제한이 있다구요!"
"흐음......채드,혹시 그 여자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물의 정령사는 아니지?"
"아,적발에 초록색 눈이던데.그리고 불의 정령사 같았어.이 엉덩이 그슬린 거 보이지?그 여자가 공격한 거라고!"
채드가 뒤로 휙 돌더니 자신의 엉덩이를 가리켜 보였다.
까맣게 그슬린 바지.
야!추하게 어딜 들이대?
"치워라,치워."
[물까요,마스터?]
[참아라,라이.]
근데......불의 정령사?
그거 제법 어려운 편인데.
정령 중 소환하기 난해한 순서는 바람,땅,불,물이다.
바람이 가장 소환이 쉽고 물이 제일 어렵다.
그리고 정령사의 숫자도 가장 많은 것이 바람이다.
둘째는 불,셋째가 물,넷째가 땅.
땅의 정령은 효율성과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많아 인간 중에는 계약하는 이가 거의 없다.
바람의 정령은 계약이 쉽고 효율성이 많기에 계약변도가 가장 높다.
멀리 볼 것 없이 대륙 최강의 정령사라는 티아트라젠이나 내 스승인 이엘,그리고 위드리만 봐도 다들 바람의 정령사이다.
불의 정령은 계약은 어렵지만 공격력이 최강인지라 계약자가 둘째로 많다.
불의 정령이 계약이 어려운 것에 비해 다루기 쉽다는 것도 불의 정령사가 많은 데 한몫한다.
물은 그 다음,소환은 제일 어렵지만 사용방법과 수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기에 조금이나마 있는 편이다.
땅의 정령은 거의 최하위다.
소환은 쉽게 이루어지지만 하급과 중급의 능력 차이가 워낙에 커서 넘어가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병점으로 작용한다.
"어때 위드리?나랑 바꿀래?조건도 비슷하잖아!여자고 정령사고 괴팍하고!"
"네에?싫어요!금발이 아니잖아욧!"
"염색시키면 되지!그러지 말고 바꾸......"
"싫어요!싫어!싫다구요!안 해!"
나보다 더 괴팍하다는 것이 걸린 걸까?
위드리는 강하게 거부했다.
조금 더 건드리면 울 태세다.
그러자 채드의 눈길이 닿은 것은 나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 콧방귀도 안 뀌었다.
"지,지니이......?"
"꺼져."
"제발 지니!사람 살리는 셈치고 은혜를 베풀라고.응?"
채드가 동승하는 여자가 얼마나 괴팍한지는 몰라도 채드가 이렇게 빌 정도면 제법 괴팍한 모양이다.
뭐,그래봤자 나만 하기야 하겠어?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괴팍한 이기주의자인데 말이야.
"글쎄.피카츄가 전기세 내면 생각해보지."
"피카츄가 뭐야?먹는 거냐?"
"먹어봐라.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너를 싫어하게 될걸,채드?"
[앗!그 피카츄가 대체 누구에요,마스터?라이벌?왠지 찌리 녀석의 향기가 느껴지는데요!]
사실 나도 피카츄가 뭔지 잘 기억 안 난다.
무슨 인기 만화 영화에 나오는 노란 전기 쥐였는데.
거참,20년 전 일이다 보니 가물가물하군.
찌리랑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지니!그러지 말고......나 좀 살려줘!난 그 여자가 무서워!"
"......무서워?나보다?"
"넌 적응이라도 됐지.넌 수상해서 무서웠고 그 여자는......뭐랄까,손대면 델 것 같은......"
"그래?암튼 잘해봐."
나는 마침 침대에 누운 차였기에 채드를 피해 돌아누웠다.
채드의 애달픈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뒤는 라이에게 맞기고 한숨 자련다.
"지이니이이......"
[저리가르르르르.]
"이 멍멍이가?너 계속 이빨 보이면 보신탕 해버린다!"
"크왕!왈왈왈!크헷,퉤!"
라이가 사납게 짖어댔다.
야야,여기 배 안이야.
진지 마.
나는 배게 삼아 베고 있던 라이의 꼬리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라이,조용해."
[크하!넵,마스터.]
아흐음.졸리다.
오늘 참 평화로운걸.
개가 짖는 것만 빼면 말이다.
라이벌 등장
아주 평화롭게,인어의 비늘이 엮인 목걸이의 은혜에 감사하며 정말이지 멀미 없는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약간은 짭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봄이 오는 탓에 몽글몽글한 구름들이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20일 만에 느끼는 한적한 시간이었다.
나는 한껏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제 이 배가 페밍턴에 정박하면 엘란의 수도까지 보름 정도면 충분하니까,그 가디언들의 시합......그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헤이오스의 저울질'이던가?
주신 중 유일한 여신인 헤이오스,행운의 여신.
혹은 운명의 여신이라고도 불린다.
세상의 모든 이로운 순리는 그녀가 조율한다고 전해진다.
즉,가디언들의 시합 승패는 헤이오스의 뜻이라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아.
황태자를 정하는 데 저울질을 하겠단 말이지?
아무리 여신의 저울이라지만 싸우는 건 가디언들인데 말이야.
그다지 신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내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었다.
여하튼 결론은 이제 '시험의 길'의 끝인 '헤이오스의 저울질'즉,가디언간의 결투가 코앞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제2황자 에쉬는 황태자 승격.
일단 최선을 다해,인 무슨 일이 있어도 에쉬를 승리로 밀어주겠지만 상대편 제 1황자의 가디언들이 어떤지 하나도 모르니 조금 찜찜했다.
"지니?어디 있어,지니?"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저 멀리서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단다.
몸을 일으켜 마침 갑판 위로 올라온 에쉬에게 다가갔다.
"여기야.왜 찾아?"
"아,그게......채드 얘긴데 말이야."
"기각!"
채드 이놈!
감히 에쉬를 끌어들여?
바로 3시간 전쯤에 거부했던 것 같은데.
내 간결한 대답에 에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말좀 들어봐,지니.그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서 감히 남자,그것도 상것이랑은 죽어도 방을 못 쓰겠다고 했나 봐."
"위드리 보내,위드리.그리고 지금은 나도 평민이거든?"
"말해봤는데......울더라.그래서 게일한테 혼났어."
"혼났어?위드리 울렸다고?"
게일에게 혼났다며 시무룩해진 에쉬를 보자니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채드나 게일이나 하나같이 에쉬가 착한 걸 이용해 마구 덤비는 모양인데,이것들 언제 한 번 날 잡자고.
"응,게일 무섭더라.전에는 안 그랬는데......"
"보통 남자들은 사랑보다 우정 아냐?그놈은 하여간 이상한 놈이라니까."
"저기......미안한데 말이야.나도 우정보단 사랑이야,지니."
으아아.소름 돋았어,소름.
아니 그보다 얼굴이 빨개지려고 해!
나는 황급히 얼굴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듬거리며 말이다.
"그,그런 건 대놓고 말하지 마!"
"아무튼 꼭 좀 부탁해,지니!나는 채드가 그 산만 한 덩치로 울먹이는 걸 또 보고 싶지는 않아.그 방에 다시 갔다가 뺨을 얻어맞았다고 화를 못 이겨 울먹이는데......아주 환장하겠어."
"으음,나 모르는 사람이랑 한 방 쓰는 거 싫은데......"
"채드가 울먹이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봐."
그건 그렇지.
채드가 울먹이는 모습이라......
밥맛 떨어지겠군.
에쉬가 이렇게나 말하는데 가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채드의 뺨을 때렸다?
왜?상것,그것도 남자 주제에 같은 방을 쓰려 한다는 이유로?
나도 채드 녀석 뺨은 못 때려봤는데.
그 여자 센 모양이지?
"에휴,사내 주제에 울먹였단 말이야?쯧쯧."
"상대가 귀족이라나 봐.그래서 맞고만 온 모양인데......꼭 좀 부탁할 게,지니."
"그럼 내가 가야지,뭐.하지만 채드를 위해서는 아냐!그 녀석 징징거리는 게 듣기 싫을 뿐이라고."
"고마워,지니!채드도 분명 이 은혜 잊지 않을 거야!"
글쎄,그 놈이 워낙에 배은망덕한 놈인지라 나는 감사인사 같은 건 기대도 안 했다.
단지 에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 역시 채드의 울먹이는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고.
아,더불어 그 불의 정령사라는 여자가 보고 싶기도 했다.
채드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이었지만 나는 결국 내 방으로 돌아와 방을 바꾸기 위해 짐을 꾸려야 했다.
어디 보자,풀어놓은 게 옷가지랑 책 몇 권 분이었으니......
잊은 건 없지?
"자,이거 들어,에쉬.채드 방으로 가자."
예의 그 커다란 가방을 에쉬에게 주고 2인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2인실이 마련된 복도에 들어서자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채드가 보였다.
으이그,저 찌질이......
"지니!와줬구나!"
"평생 가슴 깊이 감사하도록."
"그건 좀......여하튼 고맙다.자자,방에 들어가 봐.그 여자,조심하고."
흥,역시나 진한 감사인사 같은 건 없었다.
채드 녀석은 내가 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이미 표정이 비가 개듯 활짝 개어 있었다.
얄밉기는!
이제라도 그냥 내 방으로 갈까,하는 생각을 하는데 녀석에 제가 쪼그려 앉아 있던 방의 문을 활짝 열어 보였다.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죠?"
그리고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어디서 본 듯한 진홍빛 머리카락.
아앗,이 여자 어제 봤던 여잔데?
정령사였나?
여자가 사납게 한쪽 눈을 치켜뜨며 돌아보는데 아마도 머리를 빗질 중이었던 모양이다.
"방을 바꿔서요.이쪽의 덩치랑."
"흐음......"
어제 길에서 봤던 여자가 분명했다.
채드가 멋지다고 해서 돌아봤던 여자.
혈통 좋아 보이는 붉은 말을 타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어제는 얼핏 봐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불의 정령사였다.
그것도 중급.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후반일까?
나이에 비해 꽤나 좋은 실력이다.
그 여자와 나는 잠시 서로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나쁘지 않다'였다.
같은 직업을 가진 탓에 반감이 줄어든 탓일까?
"에쉬,짐을 옮겨줘.저기 침대 옆으로."
"아아,응......"
에쉬가 빈 침대 옆에 내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도 방으로 들어섰는데 확실히 3인실보다는 넓고 깨끗했다.
하긴 2인실이 비싼 이유가 다 거기 있지.
나는 방이 좋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쪽......정령사?물의?"
"맞아요.하급이지만.그쪽은 불이죠?"
"......알아보다니,제법이네요.흠,그럼 특별히 이 방에서 지내는 걸 허락해주죠."
아하,거참 감사하네요.
확실히 한 성격하는 여자 같기는 했다.
나는 에쉬와 채드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둘 다 황급히 사라졌다.
"흐음,하급 치고는 냄새가 강한데?"
"그래요?나는 모르겠는데."
당연히 강하지.
억누르고는 있어도 실상은 상급정령사거든요.
다시 여자를 훑어보았다.
불의 정령과만 계약을 한 듯했고 중급정령사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 싶었다.
길어야 1년 사이로군.
정령은 하급,중급,상급으로 건너가는 딜레이가 매우 길다.
정령술은 10세 직후에 시작했다는 것을 전제로,그중 가장 손쉽다는 바람의 정령을 예로 들어보자.
만약 15세쯤에 하급정령과 계약하고,보통 27살에서 28살 정도에 중급과 계약하면 매우 성공적이다.
아예 하급에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중급 정령사들 역시 대부분 평생을 중급정령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급정령 두엇과 계약한 채 끝이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타고난 친화력의 한계 때문이다.
정령을 계속 소환함으로써 친화력을 향상시킬 수야 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정령술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친화력을 타고 난 자들만의 특권이었다.
그 안에서도 또다시 친화력의 월등과 열등에 따라 갈린다.
죽기 전에 상급정령과 계약하면 아주 성공한 것이다.
현재 위세를 떨치는 대륙 유일의 상급 정령사 티아트라젠이 상급정령과 계약한 나이가 52살이라고 알려져 있다.
과거 상급 정령사들을 살펴보더라도 빠른 편이다.
하지만 내 스승인 이엘은 그보다 빠른 40줄에 계약해낼 테니 두고 보라고.
이엘스승까지 상급정령과 계약하면 근 5천 년 만에 한 세대에 세 명의 상급 정령사가 존재하게 되는 거다.
나와 스승님,그리고 티아트라젠!
물론 그 때까지 그 노인네가 살아 있다면 말이다.
정정하더군.
틀림없이 10년은 더 살겠어.
아,문뜩 떠오른 건데 고대 실록을 살펴보면 전설적인 정령사 라르베이크라는 사내는 고작 15살에,그러니까 내가 19살에 엔다이론과 계약했으니 그는 나보다 4년이나 일찍 상급정령과 계약했다고 한다.
그리고 203살에 죽었는데 그때까지 물의 정령을 제외한 불,바람,땅의 정령왕과 모두 계약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그는 인간이 아니다.
유희중인 드래곤일테지.
만약 그게 정말 인간이라면 나는 서러워진다.
"흐음,그런데......아까 그 둘 중 누구야?"
"뭐가요?"
그 둘?
채드와 에쉬를 가리키는 것은 알겠지만 뭐가 누구라는 건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야릇한 미소를 짓는 여자에게 나는 눈을 찡그려 보았다.
제발 주어 좀 말해줄래?
"아이참,그 둘 중......누가 연인이냐고?"
"하아?그게 그렇게......중요해요?'
"궁금하잖아.여자 둘이 모이면 할 얘기는 그게 최고인 걸."
아무래도 이 여자는 내가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 역시 그랬지만.
채드의 뺨을 때렸다는 것에 조금 발끈했으나 여자가 얼굴 값하는 모양이니 어쩔 수 없다.
나도 한 수 물러줘야겠다,싶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으니.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주 잘 아는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지 머리를 빗질하던 것도 멈춘 채 나를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 쪽이요."
"헤에,의외네?그런 얼굴을 하고 그런 심심한 이랑 사귀어?그 사람이 많이 부잔가 봐?"
"그게......중요한가요?그냥,좋을 뿐인데요."
"중요하지.남자란 무릇 능력이거든,후후."
그래?
나는 남자나 여자 둘 다 능력이 있어도 되겠지만 그게 안 되면 한쪽만 능력이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남자를 보는 면에서 펀트가 맞지 않았찌만 나는 이내 관심을 접고 침대에 걸터앉아 짐을 풀었다.
여자도 자신의 동승인이 여자로 바뀌었다는 데 만족했는지 이내 빗질에 전념했다.
그나저나 뭔가 허전......
박박박
"응?"
"이게 무슨 소리람?"
여자가 빗을 내려놓으며 눈을 빛냈다.
과연 중급정령사답게 예민했다.
하지만 그녀보다는 내 쪽이 더 예민했고 나는 그 소리가 들려온 쪽이 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