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님?"
"일단 자고,2부는 내일......아니다.그냥 앞으로 댁들 연애사에 내가 끼지 않게만 해줘요.그럼 2부는 없을 테니까!알간?"
"아,알간!"
자야겠다.
눈을 꾸욱 감는데 왼손 약지에 낀 반지의 감각이 선명했다.
그냥 오늘 하루가 전부 꿈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꿈이었으면......
역시 내 꿈이 너무 컸나?
그게 꿈이었을 리는 없었고 다음날 아침 식사자리는 정말이지 썰렁하다 못해 한기가 몰아쳤다.
굳이 나와 에쉬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나더라도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지 모르는 게일과 위드리 탓도 있었다.
상반된 두 커플이 만들어낸 이 분위기는 흡사 폭풍전야랄까?
여하튼 게일과 위드리가 만들어내는 익숙지 않은 풍경에 입맛이 다 달아나버렸다.
그것은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저것들 언제부터 저런 사이가 된 거야?"
"그러게."
아니꼽다는 채드의 중얼거림에 익히 주변에 관심이라곤 쥐털만큼도 없는 엔크조차 반응을 보였다.
엔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빵을 꾸역꾸역 먹고 있었는데 지금 이 식탁 위에서 홀로 식사중이셨다.
넌 저 닭살들 보고 그게 넘어가냐?
"뭐 축하할 일 아니겠어요?그렇지 에쉬?"
"......뭐?"
"축하할 일 아니냐고.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아?그,그럼 벌써 이만큼 왔으니 축하해야지.아무렴."
분위기를 풀어볼 요량으로 로크스가 기분 좋게 운을 뗐지만 에쉬는 그것을 받아주지 못했다.
헛소리하고 있는 꼴하고는.
순간,한 층 더 싸해지는 분위기.
이럴 때는 내가 분위기에 민감한 것이 싫어진다.
"에쉬......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무슨 생각?"
"응?그,그게......"
에쉬가 슬쩍 내게 시선을 맞췄다.
어쩌지,라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보였는데 아마도 어젯밤의 일을 말해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된다고 하기도 그렇다고 안 된다고 하기도 그랬다.
말하자니 창피하기도 할 뿐 더러 로크스가 분명 뭐라 잔소리할 것이 분명했다.
로크스의 입장에서는 귀한 황자 전하께서 길에서 만난 수상한 여자와 사귀겠다고 하는 것이니 뜯어 말릴 일이었다.
에쉬도 그걸 알기에 망설이는 것 같았다.
"으흠......"
나는 슬쩍 에쉬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에쉬의 빤한 시선에 왼손을들어 눈가를 가렸다.
난 몰라,알아서 하라고.
맞는 말만 하는 에쉬의 잔소리도 싫지만 로크스의 논리정연한 잔소리는 더 싫은걸!
수업 듣는 기분이란 말이야!
"어머,지니님.반지가......"
"지니 반지가 왜?"
"아이참!잘 보세요,게일님!지니님의 반지가 오른손에서 왼손 약지로 바뀌었잖아요."
"헉!"
위드리의 지적에 나는 왼손을 식탁 밑으로 잽싸게 내렸다.
하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듯했고 특히나 열렬한 것은 로크스의 눈빛이었다.
무슨 뜻이냐는 듯,두 눈을 갸름하게 뜨며 물어왔다.
"지니님,그 반지......에쉬가 준 것 아녜요?그런데 그걸 왜 왼손에 끼세......앗!어디가,에쉬?에쉬이이이!"
[앗,에쉬 도망갔다.마스터,제가 잡아올까요?네?네?]
위드리의 활약(?)으로 밝혀진 반지의 위치이동.
그와 동시에 슬그머니 사라지는 에쉬에 그를 잡아온다고 꼬리를 빙빙 돌리는 라이.
그리고 에쉬의 뒤를 쫓아가는 로크스까지.
아이쿠,에쉬.
명복을 빌어주마.
부디 잘 극복해내길.
"아앗!게일님,저도 반지 사줘요,반지!저도 반지 가지고 싶어요!"
"바,반지?지금 말이야,위드리?"
"너희들까지!으악!이것들이 나 몰래 두 쌍이나 살림을 차려버려?"
"그러게."
내 반지가 부러운 듯 게일을 조르기 시작하는 위드리.
이건 에쉬가 사준게 아냐!
내 보석을 에쉬가 반지에 달아 왔을 뿐이라고!
그리고 채드 너!
살림은 무슨 살림!
그리고 몰래가 아니라 네놈 허락이 필요 없었을 뿐이라고!
엔크 네 놈은 뭐든 '그러게'로 일관하지 좀 마!
"니들 언제부터냐?응?역시 결혼식은 네이칼에서?"
"꺄아!멋져라.그럼 지니님,저희랑 합동결혼식해요!어때요,게일님?"
"오호,그거 좋은데?합동 결혼식!"
"난 결혼식은 뷔페식이 좋아."
여러 의미가 섞인 일행의 질문와 눈길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잠깐,누구 맘대로 결혼식까지 진도를 나가버리는 거야?
그것도 합동?뷔페?
웃기고 있네!당장에 입을 열고 소리쳤다.
"시끄러!반지는 그냥 반지라고!누구 멋대로 결혼......"
나름 화났다는 표시로 벌떡 일어나며 말했지만 일행은 그에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말을 잘라먹더니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기세를 몰아붙였다.
지금 내가 에쉬 명복이나 빌어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내가 위기에 처한 기분이니 말이다.
이것들이 왜 이렇게 눈을 빛내는 거야?
"뭐라고 하면서 껴주디?응?그 순둥이가 용케 이런 짓을 했군."
"아이참!왼손이잖아요!그것도 약지!그건 남편이 있다는 뜻이라고요!그냥이 아녜요.에쉬님은 지니님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신 거리구요!"
"그래!에쉬가 아주 큰맘 먹은 게 틀림없어!"
"왼손의 반지는......십중팔구 유부녀를 뜻하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쏟아지는 말들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왜 남의 연애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아?
익숙지 않은 주제인 탓인지 더욱 마땅한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라이가 물어왔다.
[오호,마스터.반지를 왼손에 끼면 살림 차린 거에요?]
[......아냐!]
라이는 일행에 지지 않고 한술 더 떴다.
아직 사귀는 것도 보류상태건만 무슨 놈의 살림?
물론 약간 그런 의미가 없잖아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누누이 강조한다.
아직 결혼 안 해!못 해!
[아녜요?정말?]
[그럼,아니고 말고.내가 살림 차린다는 건 피카츄 전기세 낸다는 소리만큼 허무맹랑한 거야!]
[피,피카츄?그건 또 뭐하는 놈이래요,마스터?새로운 라이벌?]
"아니라니까......"
젠장,반지 좀 왼손에 꼈다고 이 모양이니 진짜 결혼이라도 한다면 난리가 나겠군.
물론 언제가 될지는 기약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할 수 있는 건 언제가 됐든 결혼을 한다면 상대는 에쉬였으면 하는 거다.
그걸 티내지는 않겠지만.
아니라는 내 말에 일행은 다시 한 번 술렁였다.
"아니긴 뭐가 아냐!그럼 결혼 안 해?에쉬가 싫어?하긴 그놈이 얼굴이 허무하긴 해."
"그렇긴 하죠.에쉬님은 얼굴이 심심해요."
"성격 좋은 거 빼면 시체지."
"너무 착해서 가끔 바보 같지."
이것들이......죽으려고?
누구 앞에서 누굴 험담하는 게야!
험담이 기분 나쁜 걸 보니 나도 에쉬를 퍽이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긴,그러니까 고백을 받아줬겠지만.
일행의 대화 주제가 에쉬 험담하기로 넘어가자 라이도 동참했다.
[하긴,마스터 좋다고 하는 거 보면 에쉬가 어딘가 모자라지......않습죠!]
[......내가 뭐 어쨌다고?]
[에헤헷.결혼 축하드린다고요,마스터.]
[아니랬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이러다 정말 결혼하는 거 아냐?
분위기가 그렇잖아!
이봐 신!
나 아직 결혼 생각 없거든?
하고 싶으면 너나 해!
내가 원망할 데라고는 신 뿐이었다.
커플 두 쌍,솔로 셋,늑대의 탈을 뒤집어쓴 정령 한 마리라는 특이한 파티가 결혼을 하네,마네 하면서도 갈 길은 잘 갔다.
왠지 나를 결혼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은 채드와 게일.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나를 못마땅히 바라보는 로크스.
간혹 눈이 마주치면 실실 웃는 에쉬까지.
어째 전보다 더 산만해진 기분이다.
"앗,저기 봐,에쉬!멋지지 않아?굉장한 미녀야."
막 베이키스에 들어섰을 때였다.
배가 뜨는 날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터라 안도의 숨을 내쉰 찰나 채드가 한 말에 에쉬보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나였다.
누군지 따로 찾을 것도 없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은 여자가 있었는데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화려한 외모와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로베닌의 머리카 어두운 붉은색이라 피 같다면 저 여자는......
음,정말 불길을 보는 듯한 진홍색이었다.
보석에 비유하자면 루비 정도에 빗댈 수 있는 미녀였다.
하지만 에쉬는 그 여자보다는 그 여자가 타고 있는 붉은 빛 말 쪽에 더 흥미를 보였다.
"응?아아,멋지네.근육 밸런스가 좋은 걸.눈도 빛나는 게 혈통이 좋은 모양이야."
"아니,아니!그 말 말고 그 말에 탄 여자!"
"여자?글쎄,나는 말 쪽이 더 멋진 것 같은데."
"으윽,하여튼 이 녀석 여자 보는 눈이 없다니까.하긴,지니를 고른 걸 보면 뻔하지만."
채드가 흘리듯 작게 말했지만 내가 못 들었을 리 없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으므로 반박은 하지 않았다.
예쁜 여자 쪽보다 혈통 좋은 말에 흥미가 있는 예비 연인이라......
이건 이거대로 문제군.
"지니가 뭐 어때서?"
"몰라서 물어?성격에 문제가 있잖아,성격에!"
"내 성격이 뭐?이번엔 해바라기로 밀어줄까?"
"크악!봐!이게 사람이 할 소리야?크흐흑,사람 머리에 해바라기라니......"
어머머,해바라기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 험악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라고 마음써주는 거라고,나는.
아아,나는 정말이지 착한 사람 같다.
음흉한 눈길로 조금 자라난 채드의 머리를 바라보는데 라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스터,해바라기는 어렵지 않을까요?전 스마일이 더 좋아요.]
[그래?그럼 간단하게 스마일로 갈까?]
[오호!그럼 이번엔 제가 밀게요,마스터.]
[그건 안 돼.그리고 다시 밀어주려면 결투를 해서 이겨야 하는 걸.]
채드 녀석은 내게 결투에서 진 후 머리가 밀린 충격 탓인지 고분고분해졌었다.
하지만 그 약발이 다했는지 최근 들어 다시 기어오르는 차였다.
나는 다시 채드에게 충격요법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말이 '종'이지 하는 일이라고는 짐을 드는 정도에다가 어찌나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지......
걸리기만 해봐라!
그땐 스마일이 도래할 것이다!크흐흐.
"크크크."
"지니,좀 여성스럽게 웃을래?나 무섭거든?"
"오호홋."
어쩌다 웃음이 샜는지,그리고 그것을 들었는지 에쉬가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고 나 또한 내 웃음이 얼마나 음흉한지 아는지라 슬쩍 웃음소리를 바꿨다.
아,거참.
미안하게 됐수다.
"에휴,일단 배표를 끊으러 가자.당장 내일이 출항일이라 서둘러야 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에쉬.
잠자코 듣자니 기분이 나빴다.
얌마,너 그 한숨 뭐야?
배표를 끊기 위해 선착장에 왔는데 줄이 어찌나 긴지 보는 것 만으로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긴 출항일이 코앞이니 급하기도 할 터였다.
엘란과 헤이케를 잇는 항로는 이것 하나뿐이라 매번 배표가 부족했다.
게다가 배 시간이 일정치 않은지라 배표는 출항일의 이틀 전 부터 판매되었다.
그러니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두 세시간은 서 있어야 할 법한 길고 긴 줄을 보며 에쉬가 중얼거렸다.
저도 막막한 모양이다.
"줄은 누가 서지?"
"멍멍이."
"똥개."
"누렁이."
라이거든?
일행의 시선이 단번에 라이에게 집중되었다.
라이가 똑똑하다는 것쯤이야 지난 날 동안 질리도록 봐왔으니 그들은 이 귀찮은 일을 라이에게 넘기고 싶은 모양이다.
그에 라이가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어림 없으르르르.]
"라이 네가 서야겠다."
라이라면 충분히 줄 정도는 선다.
평소라면 채드 녀석에게 떠넘기겠지만 지금 나는 물론이고 모든 일행이 열흘간의 강행군으로 체력이 바닥을 기었기에 무한 체력을 자랑하는 라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라이를 잘 구슬려서 세워두고 여관이나 잡고 오면 될 것 같았다.
[크항?]
"우리 중에 라이가 제일 똑똑하니까 라이가 서줘,응?그리고 대신에 누가 새치기 하면 물어도 돼."
[......정말 물어도 돼요?]
"그럼,죽이지만 마."
협상은 손쉽게 끝났다.
라이를 줄에 세워놓은 우리는 빈 여관을 찾아 몸을 돌렸다.
막 여관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채드 녀석이 불렀다.
"야,지니."
"왜?"
"저 멍멍이가 제일 똑똑하다는 건......우린 저 개보다 멍청하다는 거냐?"
"적어도 너는 확실히."
뭘 그리 곰곰히 생각하나 했더니 그거였냐?
일행이 먼저 라이에게 줄을 세워놓자고 할 정도면 말 다했다.
라이는 평소 불침번을 도맡는 것은 물론이고 개 주제에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는,하지만 말이 안 통하면 친히 발로 바닥에 그림까지 그려 보이는,그래도 말이 안 통하면 물어버리는,획기적인 지능을 선보였으니 말이다.
아아,내 정령이지만 정말 기특하다니까.
이렇게나 다용도 정령도 드물 것 같았다.
방을 잡고도 시간이 남아 간단히 식사를 한 수,라이에게 갔다.
뺀질거리는 채드나 체력미달로 인해 피곤해 죽겠다는 로크스,한창 사랑의 대화를 나누느라 바쁜 위드리와 게일을 빼놓은 나와 에쉬,엔크 셋이 말이다.
문득 엔크가 물었다.
평소 말이 없던 녀석의 질문이라 귀를 기울였다.
"......너희가 이상한 거야?아니면 게일이랑 그 여자가 이상한 거야?"
"뭐가?"
에쉬는 엔크가 한 질문의 뜻을 포착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여기서 너희라 함은 나와 에쉬를 가리키는 것일 테고 그 여자는 위드리를 말하는 것일 터.
이 두 커플의 공통점은 하나다.
연인사이라는 것.
물론 나와 에쉬는 정확히는 보류상태지만 말이다.
"나랑 에쉬가 이상한 것일걸."
"그래?게일 녀석,그 여자랑 친해진 다음부터 왠지 이상해져서.그 여자 탓인가?"
"뭐야,엔크?너 질투해?푸훗,위드리한테?"
"그건 아니야.다만......내가 그 여자보다 뒷전인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나는 거의 2년을 알아왔고 그 여자는 이제 한 달도 안 됐는데,솔직히 너무하잖아."
아니긴 뭐가 아냐.
그게 질투야!
어째 엔크 녀석이 전보다 한층 음침해졌다 했더니,외로워서 그랬구나.
하긴 내가 봐도 위드리와 게일이 유난히 친밀하긴 하지.
아무리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이라지만 나랑 에쉬와는 너무도 차이가 났다.
내가 피식 비웃는 것과 달리 에쉬는 엔크를 위로했다.
"그런 말하지 마,엔크.게일한테는 너도 분명 소중한 동료니까!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라고!얼마든지 들어줄게!"
"넌......지니가 상대 안 해줘서 그런 거지?"
"......에?"
"너도 지니가 상대해주면 분명 나 같은 건 뒷전으로 밀어버릴 거야.에휴우,우정이란 참 부질없는 거야."
공허해,엔크의 눈동자가 공허해!
이 자식 왜 이렇게 어두워진겨?
커플 사이에 낀 탓일까?
나랑 에쉬는 딱히 연인 티를 내지도 않았는데?
여자를 소개시켜줘야 하나?
하지만 아는 여자가 없는데?
에이니 어때,에이니?
"그,그렇지 않아,엔크!나는 네 편이라니까."
"거짓말.그럼 나랑 지니랑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거야?"
"레,레이디 퍼스트랄까?"
우중충한 엔크의 질문에 에쉬는 요행을 발휘할 생각은 못하고 곧이곧대로 말했다.
이 바보야!
차라리 대답을 하지 말아야지!
"역시......너도 우정보다 사랑이냐?에쉬,그렇게 믿었건만......"
"이봐,엔크!믿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그리고 나는 물의 정령사라서 물에 빠져선 안 죽어!질문을 좀 논리적으로 하란 말이야!"
"그럼 너는......나랑 에쉬랑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래?"
당연히 에쉬지.
같은 질문이 내게도 돌아왔다.
답은 나왔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인간은 분명 더 우중충해질 테다.
그래도 동료를 어둠의 자식으로 만들 수는 없는지라 나는 대답을 피했다.
"나는 둘 다 구할 수 있어!왜냐면 운디네가 있거든."
"그냥 일반인이야.정령이 없어.어쩔래?"
"에쉬는 수영 잘 해."
"에쉬도 수영 못한다면 어쩔래?"
이,이 자식이?
나는 고민했다.
어쩐다?
슬쩍 에쉬를 쳐다보니 녀석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다.
에쉬라고 말하자니 엔크가 불쌍하고,엔크라고 말하자니 에쉬가 불쌍하다.
그냥 에쉬라고 할까?
하지만 그건 우정보다 사랑이라는 뜻이 되잖아!
그건 쑥스러운데.
"그냥 둘 다 죽어.난 나만 살면 돼."
"어쩜 너는 인간이 그렇게 이기적이냐?"
"내가 이기적인 데 보태준 것 있수?"
"없수."
그럼 말 마!
왠지 에쉬가 입을 삐죽이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미안 에쉬.
내 입으로는 죽어도 너를 고를 수가 없었단다.
내가 사랑이란 단어만 나와도 온 몸에 소름이 돋거든.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라이를 찾아 줄을 더듬더듬 올라갔다.
그리고 거의 맨 앞에 있는 라이를 발견했다.
오호,때를 잘 맞춰 온 모양이다.
왠지 라이의 앞 뒤로 유난히 빈 공간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라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입을 한껏 벌리며 웃어보엿다.
개,아니 늑대도 웃는구나.
[마스터!]
"기특하다,라이.줄 잘 지키고 있었네?"
한달음에 달려가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 얼굴 두꺼운 게 하루 이틀인가?
다른 일행은 그렇지 않은 듯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지만 말이다.
라이가 모처럼의 내 칭찬에 한껏 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헤헷.제가요,마스터.줄도 잘 지키고요.인간들이 딴 짓하느라고 앞으로 안 가면 왕 짖었어요.그리고 왠 인간들이 새치기하려고 해서 콰작 물어줬어요.잘 했죠?]
[......어딜 물었니?]
[궁뎅이!]
[잘했어!]
궁뎅이 물려서 죽은 사람 못 봤으니 됐다.
다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어느 새 우리 차례가 되어 있었다.
매표소 직원이 물었다.
"몇 명이시죠?"
"일곱 명이요.그리고 개 한마리.될 수 있으면 방으로 잡고 싶은데요."
방을 못 잡으면 그냥 맨바닥에서 이불 하나 깔고 자랴 하기에 방은 매우 중요했다.
일주일이나 배를 타야 하니까.
물론 방을 잡지 않는 편이 표값이 싸지만 우리 일행은 대체로 부유한 터라 방 잡을 여유는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황자가 대장인 걸.
조금은 짠돌이지만.
"지금 남은 방은 3인실 두 개에 2인실 방 하나가 전부입니다.어떻게 해드릴까요?"
"아,그렇다면......3인실 방 모두 주시고요.2인실 방은 반표로 부탁합니다."
반표라 함은 2인실 방의 반을 빌리는 것을 말한다.
2인실은 침대가 두 개니 그중 침대 하나,즉 1인분의 공간 말이다.
1인실 하나를 빌리는 것보다는 싸게 먹히지만 단점은 누구와 한 방을 쓰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표를 끊고 나온 에쉬의 표정이 묘했다.
우리 일행은 총 일곱 명이다.
헌데 겨우 잡은 방은 3인실 두개와 2인실 하나.
인단 일행 중 여섯은 3인실 방에 끼리끼리 모일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외로이 모르는 사람과 방을 써야 하는 2인실 반 표는 누구에게 떠넘길 것인가?
새롭게 떠오른 과제였다.
첫째,황자로서 '시험의 길'에 오른 에쉬,대장이다.
둘째,그런 에쉬를 수행하는 로크스,회계다.
그리고 셋째,에쉬가 가장 먼저 포섭했다는,남는 게 힘인 채드,멍청이다.
넷째와 다섯째,엔크와 게일.
함께 용병 일을 하던 녀석들을 에쉬가 구슬렸단다.
최근 게일의 연애행각으로 위기가 닥쳤지만 나름 단짝이다.
여섯째,위드리.
바람의 정령사이자 내 '종'이 되겠다고 자처한,최근 내 천적으로 간주된 티아트라젠의 수제자이자 게일의 연인,깍두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째,바로 지니 크로웰이다.
지금은 정체를 숨긴 채 과거 은인이었던 에쉬를 돕겠다며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행 중인,그리고 얼결에 장래를 약속한,에쉬의 '시험의 길' 사정을 빤히 알지만 모르는 척 연기중인 바로 나다.
에쉬는 내가 지니 크로웰이라는 것은 알지만 내가 녀석이 황자라는 걸 안다는 사실은 모른다.
아차,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결론은 누가 반표를 쓸 테냐?
난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