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71)

"그럼 난 어떻게 해?"

"어쩌긴?쫓아가 봐!"

"왜?"

"에쉬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오해?뭔 오해?

나는 에쉬가 들어온 직후의 상황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니까......

그냥 게일이랑 대화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특이한 점이라면 게일이 귀를 가져다대기에 밀어내려고 게일의 얼굴에 손을 대고 있었다는 정도인데......

"설마......너랑 나랑......"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겠지."

"말도 안 돼!왜 내가 너랑?"

"각도가 그랬다는 거지,각도가!"

젠장,입술을 깨물다가 손을 들어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니까,내가 의자에 앉아 문쪽을 보고 있었고 게일이 내게 귀를 들이대느라 문을 등지고 있었는데 그 문으로 에쉬가 들어 왔으니까,미묘해 보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필이면 이놈이랑!

"아악!어쩔 거야,너?"

"내 잘못이 아냐!나한테 화를 낼 게 아니라 에쉬를 따라가 보라니까."

"따,따라가서......뭐라 그래?"

[푸흥,제가 잡아올까요,마스터?]

잡아오면?

잡아오면 어쩔 건데?

이렇게나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정말 싫다.

에쉬가 나를 좋아한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하물며 그 상대가 에쉬라니.

마땅한 대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가 브라이트라면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들어온 덕에 한 귀르 듣고 한 귀로 흘릴 테지만,이건 어쩐다냐?

"네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겠지.지니 넌......에쉬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그런 건......생각도 못해봤는걸!"

"지금부터 해야지,그럼!에쉬의 마음은 빤히 보이잖아."

"난......모르겠어."

에쉬가 나를 좋아한다.

솔직히 썩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다.

그냥 모른 척 하거나,그 마음을 받아들이거나,혹은 거부하거나.

내 마음은 어떻지?

에쉬가 진심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당황스럽다는 마음이 가득해서 다른 것은 떠올릴 수 없었다.

"난 알 것 같아,지니."

"뭘?나도 모르겠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여전히 에쉬가 사라진 복도에서 눈을 못 뗀 채였는데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알 것 같다는 게일의 말에 조금은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응,너 아까 화냈잖아.나한테."

"......무슨 화?"

"에쉬가 오해했다고 하니까 화냈잖아.어쩔 거냐고 말이야.에쉬한테 오해를 산 게 화가 났던 것 아냐?전혀 마음이 없었다면 네가 나한테 화낼 이유가 없잖아."

그것도 그러네.

에쉬에게 오해를 샀다고 생각한 순간의 감정을 떠올렸다.

괜스레 게일이 원망스러웠다.

그럼 나는 에쉬를 좋아하는 건가?

정말 그래?

혼란스럽긴 했지만 적어도 에쉬가 이대로 오해하고 있게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손가락을 입에서 떼고 걸음을 옮겼다.

쫓아가봐야겠어.

"가볼래.에쉬한테.직접 확인해봐야겠어."

[앗,저도요.마스터!]

당장에 복도를 뛰어 계단을 내려갔다.

식당으로 꾸며진 1층에 다다라 혹시 에쉬가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1층은 텅 빈 테이블만 가득했다.

혹시 주점에 있나?

여관을 나서서 바로 앞에 위치한 주점으로 향했다.

성큼 들어가려다가 담배연기가 진득한 것에 뒷걸음질 쳤다.

대신 주점 입구에 서서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에쉬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서려는데 뿌연 담배연기 사이로 로크스가 다가왔다.

"지니 씨,왠일이세요?술은 싫어하신다고......"

"에쉬 어디 있어?"

"에쉬요?아까 피곤하다고 여관에......"

에쉬의 행방을 모른다니 볼일은 없었다.

휑하니 몸을 돌려 어둑해진 거리로 뛰어들었다.

마침 초승달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길은 유난히 어두웠다.

여관과 주점 주변을 바삐 돌아다니자니 그새 숨이 찬다.

도통 보이지 않는 에쉬에게 화가 났다.

멋대로 오해하고 달아나다니!

원래 이렇게 찾아다니는 건 남자 역할 아니냐고!

멀리 볼 것 없이 위드리랑 게일만 봐도 그렇잖아!

밀려오는 답답함에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에쉬,이 바보 녀석!대체 어디 있는 거야?"

[마스터,에쉬 쪼오기 있어요.]

"뭐?어디?왜 이제 말해?"

[방금 기척을 잡은걸요.긴가민가해서 가만히 있었는데......녀석이 맞는 것 같아요.근데 아닐 수도 있어요.저쪽에......]

쫄래쫄래 곁을 따라오던 라이의 말에 나는 더 화낼 생각도 못하고 일단 뛰었다.

라이가 가리킨 골목으로.

어두운 골목을 지나니 제법 큰 하천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저 돌다리 위어서 넋 놓고 있는 바보는 바로 에쉬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한다고 생각할 만큼 음침한 분위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야!너 때문에 귀신 나올 것 같은 분위기잖아!

"에쉬!"

"......히끅."

내 신경질적인 부름에 에쉬가 몸을 흠칫 떨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죄인이 치안대라도 발견한 표정이었다.

슬금슬금 녀석이 움직이려는 기색이 보였다.

"도망치기만 해봐!"

내 으름장에 녀석은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술기운을 몰아낸 듯 정신은 또렷해 보였다.

하긴,마음만 먹으면 마나를 이용해 애초에 취기를 차단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좀 전같이 자세히만 봤으면 오해할 일이 없는 상황을 굳이 오해한 것은 술기운 탓도 있을 거다.

"지니......아,아까는 말이야,내가......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그 정도야 진즉에 알아챘다.

유난히 취하고 싶을 때가 있지.

내가 술은 안 마셔도 그 마음은 이해해.

헌데 문제는 네가 나와 게일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 덕에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긴가민가한 사실을 들은 차라 지금 정신이 없다고!

[마스터,저 떨려용.]

[네가 왜 떨려?]

[두근두근하는뎁쇼.이제 전에 못다 했던 두근두근 서바이벌 스펙터클 판타스틱한 사랑고백을 이어......푸힙!]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신경 거슬리는 소리만 하는 라이의 주둥이를 꽉 잡아버렸다.

사실 이런다고 말을 못할 녀석이 아니지만 원체 설정여기가 특기인 녀석이라 금세 입을 다물었다.

단번에 에쉬 앞에 서서 녀석을 올려보았다.

"말해봐,에쉬!"

"뭐,뭐얼?"

"너 나 좋아해?"

"......뜨학?"

뭐가 뜨학이야?

내가 더 뜨학이다!

내 마음은 몰라도 적어도 에쉬의 마음이라도 속 시원히 확인하지 않으면 내가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더욱 에쉬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대답해봐.너......나 좋아해?아니면......내가 착각하는 거야,에쉬?",

"잠깐만,지니.그게 말이야......내가 하려는 말은......그,그게......그러니까......"

"우선 내가 한마디 해줄까?나랑 게일은 아무사이도 아냐.아까도 네가 오해한 것뿐이고.우린 그냥 대화중이었어!"

"그게......정말이야?"

재차 확인하듯 되물으며 구겨졌던 표정을 펴는 에쉬를 보는데 왜 내가 쑥스러워지는지.

괜스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내가 왜 게일 얘기를 했지?

아,그래.

그냥 에쉬가 오해하는 게 싫어서,아니 싫을 이유는 또 뭐람?

게일이 내게 했던 말 탓인지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걸까?

나는 더듬더듬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으음,정말이긴......한데 말이야.내,내가 그 얘기를 하는 건 그냥 오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랬구나.다행이다."

그 흔해 빠진 얼굴로 웃는데,왜 내 심장이 뛰는지.

에쉬가 다행이라고 말해주는데 왜 내가 다행스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다행이라고?

내가 게일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거야?

"우,웃지 마.모,모,모......"

[모?]

"모?"

웃지마,못생겨 가지고,라고 비아냥거릴 생각이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못 생기지는 않았잖아?

실제 자기 얼굴도 아니고.

지금 얼굴도 평범한 정도는 되는데.

나,나름 귀여워!

"모,모기네?"

"......응?그,그러네!"

내가 슬쩍 말을 돌리자 에쉬 녀석이 따라 말을 돌렸다.

야!내가 나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그건 대답 안 해?

왠지 다시 묻기가 어색해져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에쉬와 둘이 다리위에 서서 달이나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어색한 것이 싫어서 억지로 입을 때려니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어쩐다?

눈을 굴리는데 라이가 말했다.

[마스터,저요 이 인가니 마스터를 '졸라 좋아한다'에 운디네랑 찌리랑 걸 수 있어요.]

[......졸라란 말 쓰지마.그리고 왜 내 정령을 네가 멋대로 걸어?]

[얄미우니까요.으음,걔네가 안 되면 1000골덴 걸게요.]

[그 1000골덴도 결국 내 돈이거든?]

으이그,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놈이나!

하여간 이놈의 놈놈놈!

답답해 죽겠다.

이놈은 라이였으며 저 놈은 에쉬다.

그놈은?

지금 쯤 여관에 홀로 멍히니 있을 게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놈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다.

"에쉬!역시 확실히 해야겠어.난 답답한 건 딱 질색이니까."

"내가......널 좋아하냐고 물었던 것......말하는 거지?"

"그래,그거!"

"좋아해.아직 고백할 생각은 없었지만......난 네가 좋아,지니."

끼악!직구야!

좀 돌려 말하란 말이야!

하긴,나도 대놓고 물었으니.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쑥스러워서다.

돌다리의 난간을 꽉 움켜쥐며 곁에 서 있는 에쉬에게 힐끔 눈길을 돌렸다.

마침 나를 내려다보던 에쉬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고 나는 눈을 빙글 돌리다가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내 어디가?"

"전부......그냥 다."

그것 참,구체적이지 않은 걸.

나는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에쉬의 반대쪽으로 틀었다.

게일처럼 뭔가 콕 집어주길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전부란다.

이거 좋아해야 하나?

아니,솔직히 좋긴 하다.

브라이트 덕에 나름 이런 것에는 면역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왜 이리 심장이 거세게 뛰고 긴장이 되는지.

괜스레 발끝에 힘을 꾸우욱 주는데 라이가 내 다리에 제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말했다.

[마스터,마스터!저도 마스터를 그냥 전부 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좋아요.]

[아,그거 참 고맙네.]

왜 같은 말인데,아니 한 층 업그레이드 됐는데 라이의 말은 시큰둥하게 들릴까?

역시 내가 에쉬를 좋아해서?

뭔가 특별한 감정을 지녔기 때문일까?

[마스터는요?마스터도 제가 좋아요?]

[......그걸 지금 꼭 들어야겠니?]

[넵!]

라이가 달빛에 반사되어 어슴푸레 빛나는 제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힐끔,라이의 그 빤짝이는 황금빛 눈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고개를 돌려 반대편에 서 있는 에쉬의 갈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라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래의 에쉬도 금색 눈인데.

그래,대답을 들었으니 나도 대답을 해야지.

"......나도 좋아해,제법."

슬쩍,라이의 질문을 핑계 삼아 말을 입 밖으로 냈다.

작게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에쉬나 라이나 못 들을 위인들이 아니었다.

"......응?"

[푸헤헤헷.그럴 줄 알았습죠,마스터!역시 마스터는 이 라이를 총애하시......]

"지니?지금 내 고백에......화답해준 거야?나 대답을 들을 줄은......!"

[아냐!나한테 한 말이야!크앙!]

갑작스레 자신에게 덤벼드는 라이를 피해 껑충 난간 위로 가볍게 올라서는 에쉬.

그런 에쉬를 따라 난간에 뛰어오르려는 라이의 갈기를 잡아챘다.

"워워.진정해 라이."

[끄앙?하,하지만 저 인간이 자기한테 한 말이라잖아요!제게 한 말인데!마스터의 총애를 채가려......]

[그것도 맞고,에쉬한테 한 것도 맞아.]

[아하,그럼 됐어요.]

라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에서 발을 뗐다.

에고,라이야,라이야.

우리 귀여운 라이야.

너도 그렇고 에쉬도 그렇고 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

내가 봐도 괴팍하구만.

그래도 좋아해주니 고맙군.

"후우,깜짝 놀랐네.라이는 가끔 개 같지가 않다니까?지금도 나한테 마치 '우리 주인님한테 접근하지 마!'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 뭐야?"

"반쯤은 맞을걸."

[엥?틀려요,마스터.저는 주인님이라고 안 하는데.저는 마스터라고 해요!그리고 '접근하지 마'가 아니라 '마스터의 총애를 채가지 마!'였다구요.]

그게 그거지.

난간 위로 올라선 덕에 더욱 높아진 에쉬를 한껏 올려다보았다.

뭐가 그리 좋아서 비시비실 웃고 그래?

"아핫,지니.나 이렇게 기분 좋은 건 굉장히 오랜만이야.그냥 확인만 하고 네가 외면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니다,뭐......"

사실 그러려고 했지.

라이가 묻지 않았다면 넘어갔을지도......

슬쩍 에쉬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에쉬가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대로 난간 위에 앉았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아 올려 오른손 약지에 껴 있던 반지를 빼냈다.

달빛에 반지에 달린 푸른 보석 '인어의 눈물'이 아련하게 빛났다.

인어 안나 씨가 보답이라며 줬던 것.

내가 한 번 버렸지만 에쉬가 되찾아 반지로 만들어다 줬던 것.

뜬금없이 내 반지를 빼드는 에쉬를 의문스러운 눈으로 마주보았다.

"지니!"

"응?"

"지금은 내가......진짜 내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 내가 될 수 있을 때까지 사귀어달라는 말은 보류할게.대신 이 반지를 내가 진짜 고백할 때까지......이 손에 끼어줘."

오른손 약지에서 왼손 약지로 옮겨지는 반지.

나는 대답 대신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였다.

에쉬라는 이름이 무얼 뜻하는지는 잘 안다.

대제국 엘란의 제 2황자 에피로스를 뜻하는 것일 테다.

이 말은 시험이 끝나고,정체를 밝힌 뒤에 정식으로 사귀자는 건가?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황자,아니 내 계획에 의하면 황태자가 되어 있을 에쉬니 나는 황태자비 후보가 되는 건가?

나중에는 황비?

내 직위로 그게 가능한가?

나는 백작가......아니,이제 후작가의 외딸.

그리고 자화자찬 같지만 더 나아가서는 현재 대륙에 한창 이름을 날리는 지니 크로웰이다.

내가 봐도 황태자비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거 너무 거창한 것 아냐?

이거 벌써부터 부담 만땅인데?

"나 아직......결혼 생각은......"

"나도 그래.다만 때가 되면 정식으로 나와 사귀어달라는 거야,지니."

황태자랑 사귀었다가 혼삿길 막힐 일 있어?

황가의 남자를 사귀는 것만으로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아준다.

결혼을 하든 말든 영원히 말이다.

내게는 딱히 나쁜 일이 아니지만.

난......결혼 생각 없다니까.

황자랑 사귀면 당연히 한시라도 빨리 결혼하라고 난리일 텐데?

아니,내가 너무 앞서가는 걸까?

그래,그런 거야!

그리고 아직,아직 두 달이나?

아악! 두 달밖에 안 남았잖아!

터덜터덜 여관으로 돌아왔다.

에쉬는 같이 오기 민망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주점으로 달아났고.

계단을 오르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되면 지금 나랑 에쉬의 관계는 뭐지?

일단 사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왼손 약지에 반지가 껴있기는 하다.

그리고 훗날을 기약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 이상 연인 이하 정도 되시겠군.

정당히 편하면서 적당히 부담되는 관계다.

나로서는 마음에 드는 적정선인 것이다.

하지만 이 상태로 보건데 두 달 안에 정식으로 사귀게 생겼잖아?

어쩐다?어쩌지?

이제 와서 무르면 에쉬가 화내겠지?

그리고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잖아!

그 어느 때보다 바삐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며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바닥을 파닥였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생각하자.

끼이익

[오잉?]

"앗,죄송......"

탁!

분명 내 방인 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왠 남녀가 한창 뜨거운 키스신을 연출중이셨다.

엄마야!

내 얼굴이 더 화끈 달아올랐다.

거 참 방해해서 죄송......

"......이 아니라!야아!니들 죽을래?누구 방에서 연애질이야!"

콰앙!

문득 예의 남녀가 자주색 머리와 보라색 머리를 가진,잘 되짚어보니 익숙한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내 방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게일!위드리이!

이것들이 감히!

니들 현장검거야!

아니,검거할 필요는 없겠지.

"엄마야!"

"허억!지,지니!내 말좀 들어봐!"

"너!당장 안 꺼져?딴데도 아니고 감히 내 방에서!"

문을 여닫은 짧은 찰나 상황 정리를 끝낸 둘은 내가 조금만 더 다그치면 창문으로 뛰어나갔을 태세였다.

위드리는 바들바들 떨며 엄마를 불렀고 게일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익해 내 앞에서 이런 유의 연애행각을 보이다가 물벼락 맞은 커플을 숟하게 본 탓이리라.

공공장소에서 연애행각은 금지거든!

근데 여관이 공공장소던가?

미묘한데?

내가 쓸데 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게일이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하여간 저 놈은!

[얼레리꼴라리.푸헤헤헷!]

[너는 왜 웃어?]

[끄히히힉.꽁지가 빠져라 도망가잖아요.마스터는 안 웃기세요?]

[안 웃겨!]

너 같으면 사람을 괴물 보듯 하고는 도망가는데 웃기겠냐?

더 화나지!

나는 감히 내 신성한(?)취침장소에서 연애행각을 저지르다 현장에서 발각된 위드리에게 다가갔다.

큰 죄라도 지은 듯,아니 큰 죄를 졌지.

감히 나를 닭살 돋게 만들었으니.

모르는 사람들의 연애행각도 민망한데 하물며 아는 녀석들이 내 눈앞에서 진한 뽀뽀를 하시다 걸렸다.

그것은 곧 나의 삐뚤어진 애정 표현도 받아야 된다는 뜻이다.

내 삐뚤어진 애정의 산 증인이 바로 라이지.

"지,지니니임,그게요오오......"

"뭐야!바로 반시간 전까지 엉엉 울더니?이게 뭐하자는 시추에이션이지?"

"게일님께서......지니님께 다 들었다고......자긴 괜찮다고 하는데 그만 감동해서......"

거기서 내가 왜 나와?

나한테 뭘 들었다는......아앗!

게일 이 노옴!

혹시 내 이름을 팔아서 위드리를 떠본 건가?

으윽,혹시가 아니라 분명하군.

고놈,고놈 분명 나를 홀랑 보내놓고 아이고 좋아라,하며 위드리에게 와서는 갖은 감언이설과 내 이름을 팔아가며 위드리를 꼬여낸 게 틀림없었다.

"끄으응."

"게일님께서 고아라는 건 전혀 신경 쓸 게 못 된다고 하시면서 게일님의 부모님을 친부모라고 생각하고 모셔달라......히끅."

[잉?마스터,얼굴이 터질 것 같아요.아,터진다!]

[안 터져!]

이것들이 사람을 가지고 노네?

사귀는가 싶더니 싸우고,싸우는가 싶더니 그새 부모님 얘기가 나와?

내 심기가 언짢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게일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위드리.

그런 위드리를 보는 내 얼굴은 당연히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 내 얼굴을 향해 폭발경고를 날려주는 라이.

야!사람 얼구링 터지는 것 봤어?

자폭기능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니!

"자,잘못했어요오오.흐이익."

"후우,이봐요.위드리!내게 사과하는 이유가 뭐죠?"

"그,그야......지니님도 묵으시는 방에서 게일님과 기......이,입맞춤을 해서......"

"......그건 둘째고!첫째는 왜 댁들 싸우는 데 나를 휘말리게 했냐 이거잖아!이럴 거면 애초에 싸우지를 말든가!"

니들 싸움에 휘말렸다가 졸지에 황자비 후보가 되어버렸단 말이야!

이걸 어쩔 거야?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실상 그게 화낼 일인지도 헷갈렸다.

으윽,남들은 하지 못해 안달일 걸.

하지만 결혼은 싫은걸.

하긴 할 거지만 적어도 그건 한참 나중의 예긴데.

그렇다고 거부하면 에쉬가 상처받을 거 아녀.

에고,피곤해라.

더 생각했다가는 라이의 말대로 정말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위드리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고 침대 위로 몸을 쓰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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