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71)

"에이,이 사람!지금 도둑이 문제가 아니라네.더 큰 문제는 그 도둑에게......아니 엘프에게 티아트라젠님이 대패했다는 거야!"

"에잉,설마!그 분이 어떤 분인데......소드 마스터와도 맞먹는다는 상급......그 뭐시냐,정령사 아니신가!"

"그래!그런데 지셨다는 거야!소문에 의하면......그 엘프가 물의 상급정령사여서 바다를 소환했다더군!결국 거기에 티아트라젠님이 무릎 꿇으셨다는구먼."

"......바다를?바다를 어찌 소환하나?"

잠깐,바다를 소환한 건 아냐.

그냥 바닷물을 소환한 건데.

그리고 그 노인네는 대패하지 않았어!

나도 대승하지 않았고!

그 노인네가 진즉 공간의 정령을 사용했다면 졌을 거라고.

쳇,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에 홀로 투덜거렸다.

"모르지.여하튼 그렇다네.그래서 왕국에서 지금 그 엘프를 잡느라 난리가 났다네."

"흐음,하지만 바다를 소환할 정도면 잡힐 리가 없잖나.진즉 자기네 숲으로 돌아갔겠지."

"그렇겠지.하지만 혹시 모르지!인간인 척 이 식당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어허,이 사람.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여기 있습니다,있고요.

인간인 척이 아니라 원래 인간입니다요.

그 소문이 잘못 된 거라고.

그래도 티아트라젠이 장한 일을 했지 뭔가.

푸른 눈에 인간 여자를 갈색 눈의 남자 엘프로 둔갑시켰으니 말이다.

그때 라이가 알아온 수배지의 내용에 의하면 뭐라더라?

금발에 갈색 눈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 엘프라고 되어 있었던가?

어쨌든 금발만 빼면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그 덕에 안심하긴 했지.

내가 자수라도 하지 않는 이상 잡힐 일이 없으니.

아,물의 정령사라는 것도 겹치지만 그쪽은 상급이고 나는 대외용으로 지금 하급정령사라서 말이야.

[마스터,인간들이 와요.]

"지니님,뭐하고 계세요?식사는 시키셨어요?"

"응?아뇨,이제 시켜야죠."

한창 구시렁대는데 위드리가 게일과 함께 내려왔다.

아직 위드리와는 말을 놓지 않아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깐 지 오래라 그다지 같이 다니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근데 어째 이 인간들 최근 들어 유난히 붙어다니는 것 같은데.

내 미심쩍은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게일이 말했다.

"에쉬는 한숨 자고 내려온대.채드도."

"그래?엔크랑 로크스는?"

"엔크는 슬슬 내려올 것 같고,로크스는 읽을 책이 있다나 봐."

"그럼 일단 4인분만 시켜.나 배고파."

식탁 위로 늘어뜨렸던 몸을 일으켜 의자에 기댔다.

아이고,삭신이야.

내가 이 짓을 또 해야 된단 말이지.

에쉬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베이키스까지 또 급히 말을 달린다고 했다.

그래야 출항 시간에 맞춰 도착한다나?

다음 배가 하루 이틀 뒤에 있으면 그냥 늑장을 부리겠지만 이 곳은 배가 사흘에서 열흘에 한번,매우 불규칙적으로 있었다.

비행기 같은 것 없냐,비행기?

비행기라면 한 두시간만에 바다도 건너갈 텐데,쳇.

[마스터,왜 그렇게 인상을 쓰세요?배 많이 고파요?]

[으음,그냥 비행기가 있으면 좋을 걸 하고 생각해봤어.]

[비행기가 뭔데요?]

[하늘을 나는......배?]

기계 덩어리가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비행기라......

그런 건 이 세계에 안 어울리는걸.

이곳은 이곳 나름의 이동수단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 하늘에서 땅으로 우웨에엑?]

[아냐,헛소리 좀 해본 거야.신경 끄려무나,라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곳의 인간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시켜온 것이었기에 내가 손댈 수는 없었다.

사실 마음먹으면 전생에 쓰던 간단한 기계 정도야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이 이곳에는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테지만,그건 건방진 짓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나는 이곳의 사람들이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낼 때까지 침묵하련다.

"헤에,게일님의 고향은 네이칼이로군요.대단해요!"

"별로 대단치 않아.사람이 많고 건물이 많을 뿐인 걸."

"하지만 네이칼에는 그 동물이 있잖아요!뭐더라 그......검은 점박이가 있는 곰이요."

"아아,팬더?"

잠시 생각에 빠져든 사이 게일과 위드리는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역시 이것들 수상해.

게일 녀석 얼마 전까지 나한테 좋아좋아 광선을 쏘아보내더니 최근에는 그런 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내 지랄 맞은 성격을 몸소 경험했으니 있던 애정도 식었을 테지.

"팬더?그렇게 부르나요?헌데 저는 상상이 안 가요.검은 무늬의 곰이라......어떻게 생긴 거죠?"

"으음,하얀 바탕에 검은색이 귀와 몸에 있고 굉장히 귀여워.그리고 그......뭐더라?이상한 나무에서 열리는 잎만 먹어."

"이상한 나무요?"

"응,가늘고 기다란 나문데......소문에 의하면 미지의 대륙이라는 아벨라스에서 건너온 나무라나 봐."

대나무야 그거.

이쪽에서는 뭔가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았지만 아벨라스,미지의 대륙.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을 정도로 온갖 신화와 전설에 싸인 땅.

그곳에는 신이 창조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모여 있으며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신성한 생명체와 이 크란시아 대륙에서는 멸종도딘 여러 이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벨라스 주변에는 커다란 파도와 짙은 소용돌이가 끝없이 치고 있어서 대륙의 존재 유무만 겨우 확인할 뿐 감히 다가가지 못해서 신의 땅이라고도 불렸다.

마치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한 미지의 땅.

그곳에 가는 데만도 반년이 걸리는 곳이라던가?

여하튼 소문은 그러했다.

"와아,아벨라스?정말 그곳에서 온 나무에요?"

"확실하지는 않아.다만 이곳에서 자라는 나무치고 그 생김새가 너무도 특이해서 그곳에서나 자랄 법하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해."

"그렇구나,팬더......보고 싶네요.귀엽겠죠?어떻게 생겼을까?궁금해라."

"보고 싶어?내가 그려줄까?"

얼씨구,이것들이 저들끼리 좋아 죽는구만.

혹시......사귀나?

내 못마땅한 눈길을 무시하는 건지 게일은 수첩을 꺼내들어 능숙한 솜씨로 팬더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받아든 위드리가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긴 위드리의 그림 솜씨가 좀......아니,상당히 최악이라서 말이다.

"와아!정말 이렇게 생겼어요?인형 같아요.그보다 게일님은 어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세요?존경스러워요."

"그,그래?과찬인걸.나 정도 그리는 사람은 많아."

"아녜요!얼마 전에 제 서클릿도 고쳐주셨잖아요!분면 손재주가 남다르신 거에요."

"하,하하하.그으래?그렇게 생각해주니 괜히 으쓱히지는걸."

염병,눈꼴시게 감히 내 눈앞에서 연애질이야?죽을라고?

게일이야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 위드리와 사귀든 채드와 사귀든 상관 없다.

다만,문제는 내가 솔로라는 거야!

아니꼬운 나머지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식사가 나왔다.

"식사 나왔습니다.맛있게 드세요!"

나는 한마디 하려던 것을 잠시 보류했다.

식사다!

일단 주린 배 채우기에 돌입했다.

그러는 동안에 저희끼리 먹여주네 안 먹네,먹어보네,마네 하며 알랑거리는 두 인간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야야,너희 때문에 소화가 안 되잖아!작작해!작작!

"게일님!이거 드셔보세요.정말 맛있어요."

"아니야,위드리 먼저 먹어.나는 충분해."

"아이참,게일님이 먼저 드셔야 제가 속 편히 먹......"

쾅!

"알아서들 쳐먹지?"

들고 있던 잔을 힘껏 내려놓고는 멍한 표정의 둘에게 경고를 날렸다.

니들만 있냐?

나도 있어!

참,라이도.

내 무릎 위로 턱을 괸 채 넋을 놓고 있던 라이가 쾅 소리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귀를 쫑긋거렸다.

[깜딱이야!]

"죄,죄송해요,지니님."

"댁들 사귀어?그렇지?언제부터 사귀는 거야?좀 조용히 사귀어!"

"어,어머머.아니에요,지니님!사귀다뇨!그,그런......"

비아냥거릴 셈으로 한 말이었는데 위드리가 과하게 거부를 표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게일의 표정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고놈 쌤통이네.

녀석이 울상을 지으며 위드리를 쳐다보았다.

호홍,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사랑싸움이라던가?

개인적으로 불구경은 안 좋아하지만.

나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빵 하나를 입에 물었다.

"위드리......"

"게일님......그,그게......저는요......"

"내가 그렇게 싫은 거야?"

"아뇨,그런 건......아니지만."

이 세계에서 사귄다는 계념은 단순히 연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곳에서 사귄다는 것은 당연히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그것온 평민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 개념이 미약한 편이다.

하지만 사귄다,곧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는 개념은 확실하다.

그런 만큼 쉽게 사귀는 커플은 없었다.

나는 강 건너 싸움 구경이나 하는 심정이었는데 돌연 게일이 결연한 표정으로 위드리에게 말했다.

"위드리!그럼 정식으로 고백할게!나랑 사귀어줘!"

"게,게일님......"

[애들 뭐함?]

어이,니들 만난 지 이제 겨우 열흘이거든?

사귀자는 말은 거의 결혼하자는 말과 동급......이보셔!꺄악!위드리 당신은 당연히 거부해야지!

왜 얼굴을 붉혀?

내가 다 민망하다,야.

꿀꺽!

빵을 먹은 탓인지 마른 침을 겨우 넘겼다.

어,어떻게 되려나?

"사랑해 위드리!"

"저,저는......저는 아직 모르겠어요.게일님.우리,우리 조금만 더 시간을 가져요,흑!"

돌연 위드리가 눈물을 머금으며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뛰쳐나갔다.

야야,신파 찍냐?

밥 먹다 말고 이게 뭔 일이래?

조금 멍해 있는데 위드리를 따라 저도 식당을 뛰쳐나가버리는 게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4인분의 식사가 펼쳐진 식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엄청 식탐이 넘치는 줄 알겠네.

[......방금 쟤들 뭐한 거에요,마스터?왠지 소름 끼치던데.]

[나는 닭살 돋았어.]

그래도 잘 되기를 기원해주지.

참,쟤들이 싸운 것,내 탓이 아냐.

나는 죄 없어!

그럭저럭 배를 채우고 남은 식사를 뒤늦게 내려온 엔크에게 모조리 떠밀어버린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휴식 방법인 낮잠에 돌입하기 위해 라이를 불렀다.

"라이,이리 온."

[네이!]

노숙할 때마다 라이의 꼬리를 베고 잤더니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라이의 꼬리를 베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 습관이 아카데미 가서도 이어지면 곤란한데.

하지만 라이의 꼬리가 너무 푹신푹신해서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라이의 꼬리를 베고 눈을 감자 곧 잠이 쏟아졌다.

으음,좋아......

한참 단잠에 빠져 있는데 문득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에 내 의식이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쾅쾅

"봐......리......좀......"

끄응,언놈이......이렇게 떠드는......거야?

콰앙

"위드리!"

이 목소린,게일?

결국 감고 있던 눈을 떠버렸다.

왜 저러지?

눈을 돌리니 옆 침대 위에 쪼그려 앉은 위드리가 보였다.

야,너 부르잖아.

"으응,위드리?게일이 불러어......요."

"......"

"위드리,내 말 안 들려요?"

"......"

잠자코 쪼그려 앉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위드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세히 쳐다보니 위드리의 자주색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귀를 막은 귀마개가 보였다.

야!너는 귀마개 끼고,자는 사람은 그냥 두냐?

치미는 화에 당장 위드리의 귀를 막고있는 귀마개를 빼냈다.

"위드리!게일이 부른다구요!"

"......에?지니님......"

"귀마개를 하고 있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울지 마요!"

"흐,흐윽. 어떻게 해요,지니님?게일님이,게일님이......흐으윽."

젠장, 왜 우는 거야 정말?

나는 우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에이니를 떼어놓은 지 얼마나 됐다고.

괴롭다는 듯 얼굴을 구긴 채 우는 위드리와 연신 방문을 두들기는 게일 덕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위드리,당신 22살이잖아요!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울어요?어른이 이러면 안 돼요!"

"하,하지만......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요.너무 혼란스러워요."

"게일에게 말해요.싫으면 싫다,좋으면 좋다!"

"좋아요.게일님을 좋아는 하지만......우린 너무 다른걸요."

좋은데 뭐가 그리 힘들어?

좋으면 그냥 사귀어.

나는 슬쩍 게일이 혹시 귀족이었나,하고 되새겨보았다.

아닌데.

그냥 평민인데.

위드리도 평민.

그런 둘 사이에 장애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뭐가 달라요?둘 다 평민이고......나이도 비슷하잖아요."

"저는......저는 전쟁고아에요.부모가 없어요.만약 스승님이 거두어주지 않으셨다면 지금 쯤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저는 태생도 알 수 없는......사람인걸요."

"그건......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사람은 사람인걸요.부모가 있든 없든 똑같아요."

"안 돼요.저 같은게 게일님과 사귀었다간......분명 게일님의 누가 될 거에요!"

부모가 없다.

그래서 사람을 사귀지 못한다?

나로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본인들이 좋으면 사귀는 거지,왜 그걸 부모까지 따져?

나야 좋든 싫든 귀족이니 부모의 의견이 필요할 테고 부모님이 없으면 결혼하는데 곤란하겠지만 댁들은 평민이잖아.

권력이 없는 대신에 자유가 있잖아.

"괜찮을 거에요.그러니 게일에게 그걸 말해봐요.분명 상관 없다고......"

"아뇨!안 돼요!제가 고아라는 걸 알면 게일님은 분명 절 싫어하실 거에요.제발 말하지 말아주세요.흐흑,끄흑!흑......패앵!"

[앗,마스터 옷에다......]

한창 울어젖히던 위드리가 콧물이 흐르는지 마침 손에 잡히는 천을 들어 코를 풀었는데 불행히도 그것은 내 옷깃이었다.

니미......

"알았어요.알았으니까 그만 울어요,위드리."

"흑,지니님......게일님 보고 나중에,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말해주세요."

"......내가?"

"부탁드려요,제발!"

이봐,내 종이 되겠다고 했던 것은 당신이야.

종까지도 안 바라!

짐이 안 될 거라며,도움이 되겠다며?

그런데 이런 일을 내게 떠넘기다니.

쳇,나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스터?]

"게일에게 다녀오죠.나중에 옷이나 빨아줘요."

"흑......네,그럴게요."

방문으로 다가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원,곤히 자다가 지금 뭐하고 있는 짓인지.

그렇다고 모른 척 하자니 아까 내가 찌른 것이 내심 걸렸다.

쾅쾅

"위드리이!내 말좀......지니?"

"워워,뒤로 가.들어오지 말고."

혹여 게일의 주먹에 맞을세라 조심스레 문을 열고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을 닫으려는데 그 틈으로 잽싸게 라이가 빠져나왔다.

[같이 가요,마스터.]

[그래,그래.얌전히 있어.]

"지니,위드리가 뭐라고 해?"

"......일단 복도에서 이러지 말고 다른 데로 가자."

복도가 한창 시끄러운데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문을 두들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밖을 보니 한잔씩 거하게 걸칠 시간이었다.

"아,그럼 우리 방으로 가자.다들 지금 밑에서 술 마시느라고 당분간은 안 올라올 거야."

"전부?에쉬도?"

"전부 갔어."

에쉬는 술을 잘 안 마시는데......

로크스가 의외로 술을 즐가고 말이다.

게일을 따라 위층에 있는 5인실 방으로 갔다.

나와 위드리가 묵는 방의 두 배쯤 되었는데 게일의 말대로 다들 주점에 간 듯 텅 비어 있었다.

적당히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 내 다리 밑으로 라이가 드러누웠다.

얘기가 제법 길어질 거라는 걸 눈치 챈 듯했다.

뭐라고 말한다.

그냥 가라고 하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들어오긴 했는데.

"에휴......이봐,게일."

"응!말해봐!위드리가 뭐래?"

"으음,그건 말하기 그렇고.나는 묻고 싶은 게......음......아,넌 위드리의 어디가 좋아?만난 지 이제 겨우 열흘 되었는데."

"어디가......좋냐고?으음,많은데.그림 못 그리는 것도 좋고,웃는 얼굴이 예쁜 것도 좋아,착한 성격도 좋고,항상 겸손해서 좋아.얘기도 잘 들어주고.위드리는 좋은 여자야.항상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걸."

나랑은 반대네.

그게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상인가?

난 그림 꽤 그리고 웃는 얼굴은 비웃는 것 같고 성격도 더럽고 잘난 척에 남의 얘기 무시하는게 특기고!

남의 눈은 보고 말하나?

상대가 무슨 생각하는지 유추하려고 관찰하기는 하지.

"많기도 하다.그렇다고 열흘 만에 고백은......좀 이르지 않아?위드리가 놀라잖아."

"그,그렇지만 위드리가 두 달만 있으면 돌아간다고 해서......"

"그것도 그러네.하지만 성급했어.나 같으면 당장에 싸대기를 날렸을걸."

"......그,그 정도야?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뭐,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그렇다는 거지.

만난 지 열흘 된 사람이 좋다고 고백하면 말이야.

솔직히 어이 없잖아.

내가 이상한가?

"으음......나도 장담은 못해."

"왜?지니 너는 남자 친구 많았을 것 아냐!"

"......아니거든!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아,아냐?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게 익숙하기에......"

이 자식,전에 라이랑 뽀뽀하게 한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나는 이제 조금만 있으면 20년째 솔로다,이 자식아!

그러고 보니 내 스무 번째 생일이 일주일 남았네.

다들 잊은 듯하지만 말이야.

"전혀 아니야.내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흥!"

"......그럼 나는 어쩌지?위드리가 이대로 계속 나를 피하면 어떻게 해?"

"글쎄,나중에 말하자고 전해달라고 했으니까......계속 피하진 않을 것 같아."

"저,정말?위드리가 그랬어?"

반색하는 게일.

쳇,열흘 전까지 내 말이라면 껌뻑 죽었는데 이제 글렀군.

왠지 브라이트 느낌이 난다고 했는데 달랐던 모양이다.

게일은 자신의 이상을 찾았으니.

"그래,나중에 얘기하고 싶다고 했어.위드리는 뭔가 겁을 내고 있거든."

"겁?무엇에?나한테?"

"......비슷해.네 반응이 어떨지 무서운가 봐."

"뭔데?응?말해봐,지니!"

솔직히 속 시원히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야."

"사,살짝 말해주면 안 될까?응?"

게일이 제 귀를 가져다 대며 부탁했지만 그에 흔들릴 내가 아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녀석의 귀를 슬쩍 밀어내려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지니?"

깜딱이야.

누군가 들어올 때면 라이가 미리 말해주는 것에 습관을 들인 탓인지 갑작스러운 에쉬의 등장에 나는 놀라버렸다.

마침 내게 귀를 대고 있던 게일이 튕기듯 허리를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위드리 얘기를 하던 것이 민망했는지 말을 흐렸다.

"에,에쉬이?너 언제......"

"게일?너희들......여기서......대체......"

왠지 에쉬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고 느껴졌다.

더불어 그의 눈동자 역시 바르르 떨렸는데 술 때문인 것 같았다.

많이 마셨나?

[앗,에쉬네.죄송해요,마스터.걸음이 휘청거리기에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라이의 말대로 에쉬는 꽤나 거하게 취해 있었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빤히 노려보다가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털썩 문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뭐야?

얼마나 마셨기에 저래?

소드 유저라는 녀석이......

아니,내가 보기에는 이제 소드 익스퍼트를 바라보는 녀석이 말이다.

"왜 그래,에쉬?"

녀석에게 다가갔다.

일으켜는 줘야겠는데 어디를 잡아야 할 지 몰라 멈칫하는 순간,내밀어진 내 손을 에쉬가 찰싹 소리 나게 쳐냈다.

뭐야?

밀쳐진 손이 무안해 말아 쥐는데 에쉬가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를 노려보며.

무언가 원망스러운 눈빛이었다.

"손대지......말아줘."

"에쉬,너 왜 그래?"

"넌......"

"......?"

의아하기만 한 에쉬의 태도에 고개를 기울이는데 뭔가 말하려던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취한 주제에 어쩜 저리도 빠른지......

쟤가 왜 저러나 싶어 우두커니 서서 텅 빈 복도를 바라보는데 게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에쉬는......"

"에쉬는 뭐?아니,그보다 쟤 왜 저래?"

"몰라서 묻는 거야,지니?에쉬는......너를......좋아해."

지금 뭐라고?

나는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라이가 확인시켜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엥?그 인간이 마스터를 좋아한다고요?아까 그 닭살 돋는 거 말하는 거에요,마스터?]

"농담이지?"

"전에는 혹시 했었지만 지금은 확신해,지니.에쉬는 너를 좋아하고 있어!"

맙소사.

나는 다시 에쉬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잠깐,그럼 내가 에쉬를 쫓아가야 하나?

쫓아가면 뭐할 건데?

어떻게 해야 하지?

도대체 정신이 없었다.

뭐가 이렇게 어려워?

그리고 도망가는 건 여자 역할 아냐?

쌍 커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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