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드!"
"......고의 는 아냐.그렇지 채드?"
"이 괴팍......극악무......도!"
"한 대 더 맞을래?"
채드는 죽겠다는 표정을 한 주제에 입은 잘 놀렸다.
누가 극악무도야 극악무도가?
나는 나름 착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야.
이거 왜 이러셔!
갑작스레(?)쓰러진 채드 덕에 우리 일행 사이에는 난리가 났건만,눈치가 없는지 자주색 머리의 정령사 여자가 방방 뛰면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호!찾았다!찾았어!기뻐해주세요,스승님!대륙 최강으로 괴팍한 사람을 찾았......"
"......그거 내 얘기?"
내 눈매가 괜히 뾰족한 게 아냐.
하도 이 사람 저 사람 노려봤더니 다듬어지기라도 했는지 아주 날카롭다.
내 못마땅한 째림에 만세를 부르던 여자가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넉살이 참 좋은 여자다,싶었다.
"시중들 사람 필요하지 않으세요?제가 종이 되어드릴게요."
"필요 없음."
[채드만으로 충분하죠,마스터?]
[그 놈은 없느니만 못하고.]
최근 여행을 하면서 내가 제일 많이 바뀐 구석은 역시 말투가 아닐까 싶다.
전에는 그래도 꼬박꼬박 '요'자를 붙이고 예의 차리기를 즐겼건만,어느 샌가 사나운 말투가 되어버렸지 뭔가.
오랜 여행 탓일까?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말투를 고쳐야지 싶다.
"아이,그러지 마시고 몇 달만 써주세요.금전적 대가는 전혀 필요 없으니까,제발요.네?"
"사양하죠."
"에이,너무하시네요.하지만 이 예길 들으시면 마음이 바뀌실걸요."
"......뭔데요?"
갑작스레 내 종이 되겠다며 나서는 여자에게 나를 포함한 일행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멀쩡하게 생겨서 자신의 그림 솜씨만큼이나 해괴한 소리를 하니 신기,아니 괴상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종이 되어 들리게요'라고 한다고 '네 그러세요'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전......바람의 정령사에요!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부릴 수 있다고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예?저,정령사라니까요!놀랍지 않아요?여행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나요?종은 물론이고 가벼운 호위도 할 수 있다고요!"
"나도 정령사인데요."
내 시큰둥한 반응에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물의 정령사라서 완벽하니,어쩌니 해놓고는 까먹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왜 그런 조건을 붙이면서 종이 되어준다고 하는 거지?
그리고 하필이면 따악 나를 겨냥하는 듯한 특징이었다.
사실 금발을 가진 정령사를 찾는 것만 해도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아닌가?
금발 자체도 드물고 정령사는 더더욱 드무니 말이다.
"에엑,그러지 마시고 저 좀 써주세요.뭐든지 할게요!그냥,그냥 두 달 뒤에 저희 스승님만 한 번 만나주시면 돼요."
"스승님?"
"네!제 스승님은 바로 대륙 최고의......참,이건 비밀인데.아무튼,제가 두 달 동안 종이 되어드릴 테니 마음껏 부려먹으시다가 나중에 제 스승님만 한 번 만나주세요.꼭 부탁드릴게요!"
수상해,아주 수상해.
나는 여자가 뿌리던 전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여자,거기에 물의 정령사?
얼씨구 나이 제한까지?
22세 미만이라.
검은 지팡이 애용자?
이건 또 뭐람?
검은 지팡이만 뺀다면 세상에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나뿐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세하고 어려운 조건들이다.
내가 거부하고 나면 이 조건에 맞는 사람 구하기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일!
결코 내키는 구석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저는 별로 안 내키......"
"같이 가,같이 가!괜찮아,괜찮아!그렇지,에쉬?"
"응?갑자기 물어보면......"
무턱대고 여자를 끌어들이려는 채드.
잠자코 구경 중이던 에쉬가 자기에게 화살이 돌아가자 말을 흐리긴 했지만 표정이 빤히 '나 난처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안 돼!이런 수상한 여자랑 어떻게 같이 가!"
"웃기시네.너보단 덜 수상하거든?"
이,이 자식이?
화는 났지만 맞는 소리였기에 나는 볼을 부풀릴 뿐이었다.
채드 녀석,지가 종노릇 하기 싫으니까 이 여자를 데려가려고......
솔직히 내 종이랍시고 제가 하는 거라고는 짐가방 드는 정도가 전부면서 말이다.
얼굴을 찡그리는데 라이가 발을 세워 내 다리를 박박 긁었다.
저 좀 봐 달라는 뜻이다.
슬쩍 돌아보니 바지 끝자락에 흙먼지가 한 무더기 묻어 있다.
[너 또 발도 안 털고 건드리지?]
[아,맞다.깜빡했어요,마스터.]
[......근데 왜?]
[인간 한 명 필요하시다면서요?그......시험의 길인가 뭔가 때문에.그러니까 저 인간 여자를 데려가 보시면 어때요?]
호오,그것 괜찮겠네.
종은 필요 없지만 동료는 필요하다.
마침 이 여자 능력도 쓸 만하다.
게다가 시간은 촉박하고 동료는 급히 필요했다.
종으로도 따라온다는 사람이니 동행하는 데야 문제 없겠지만,문제는 이 여자가 수상하다는 것이다.
왜 종을 자처하는지만 알아도 데려가볼 텐데.
여자가 라이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어머,귀여운 강아지네?저 강아지랑도 잘 놀아야.개들이 절 좋아하거든요!보실레요?으흠,안녕?멍멍아,착하......끼야악!"
[크앙!감히 어딜 만져르르!턱도 없으르르르~]
애완견으로 보이는 라이에게 친근감을 표함으로써 점수를 딸 생각인 듯했는데 턱도 없었다.
여자의 손이 제 머리에 닿으려 하자 라이가 거칠게 털어내며 이를 드러냈다.
여자가 1초만 더 늦게 손을 치웠다면 물렸을지도 모른다.
개가 주인 닮아서 좀 까칠해.
라이가 접촉을 허락하는 것은 나 정도일까?
내가 명령하지 않는 이상 라이는 누군가 제 털끝만 건드려도 이를 드러내곤 한다.
"머,멍멍아!왜 화를 내니?그래,간식 줄까?이거 먹을래?"
[너나 먹으르르.]
털을 세우는 라이와 울상을 짓는 여자.
슬쩍 여자가 가방에서 육포를 꺼내 보였지만 그에 혹할 라이가 아니었다.
여자는 맹해서 그렇지 착해 보이긴 했다.
으음,뭐라고 했더라?
두 달 동안 종이 될 테니 그 뒤에 자신의 스승님을 만나달라고 했었지?
응?정령사의 스승이면......정령사일 테고,아까 자신의 스승이 대륙 최고의......뭐라고 말하려다 숨겼던 것을 떠올렸다.
결국 조합해 보면 이 여자의 스승은 대륙 최고의 정령사라는 얘기가 되는데.
그쯤 더듬더듬 조합해보자니 자동으로 나오는 답은 이 여자가 어제 나와 맞닥뜨린 리드라트 티아트라젠의 제자라는 것이었다.
대륙 최고의 정령사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노인네뿐이니.
아,그렇다면 여기에 써져 있는 검은 지팡이라는 것은 라이를 가리키는 거려나?
어제 마나를 끌어오느라 라이를 쥐고 있었던 것이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아항,대충......감이 잡히는군."
[뭐가요,마스터?]
"뭐가,지니?"
"저 이 멍멍이랑도 금방 친해질 수 있어요.그러니 저 좀 데려가주세요.네?제발요.제가 이래뵈도 잡일을 잘해요.시켜만 주시면 정말 뭐든 다 할게요!"
나를 겨냥한 듯한 인상착의를 부리며 찾더니 쫓아오겠다고 하는 티아트라젠의 제자.
그 노인네가 뭔가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적어도 몇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하나는 그 노인네가 제자를 이용해 나를 찾고 있다는 것,둘째는 제자로 하여금 나를 자신에게 끌고 오도록 시켰다는 것,셋째는 이 여자는 내가 어제 왕궁에 침입했던 범인이라는 것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얼굴 보면 딱 나오지.
근데 왜 바로 데려오라고 하지 않고 두 달이라는 기간을 준 거지?
이렇게 바로 맞닥뜨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걸까?
"이 여자 데려가자,에쉬!정령사라잖아.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쁘진 않지만 갑자기 정하기엔 조금......그리고 다른 일행의 의견도 들어봐야 해,채드."
내가 반응이 없자 채드는 에쉬에게 화살을 돌렸다.
에쉬도 동료가 한 명 더 필요한 처지다 보니 고민하는 듯 했다.
나 또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제자를 푼 것으로 봐선 나를 조용히 찾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헤이케의 왕에게는 뭐라고 보고한 거지?
내 신상을 달리 보고한 건가?
그럴 확률은 충분하지 싶었다.
제자보다도 어린 여자에게 당했다고 말하기에는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일 테니.
그렇다면 이 여자는 어쩌지?
티아트라젠의 제자라는 것만 보면 실이었지만 바람의 하급정령사라는 것만 보면 득이었다.
물론 내가 아닌 에쉬에게.
어차피 별로 위협도 안 될 것 같고,시험의 길을 막바진데 동료는 모자라니......어쩐다?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에요!네?제 숙식비는 제가 다 낼테니 제발 데려가주세요.잡일도 다 할게요!"
잡일이라......요리를 잘하면 좋겠는데.
로크스도 충분히 잘했지만 요리사가 두 명이면 요리의 질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은근 식탐이 넘쳐서 말이다.
나는 슬쩍 안달복달하는 여자에게 운을 떼었다.
"뭘 할 줄 아는데요?"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것 빼고 전부요!비커 닦기나 서책정리는 정말 잘해요!고대어 해석도 조금 하구요.일단 단순무식한 막일을 잘해요."
그게 뭐야?
여행하는데 비커 닦기나 서책정리 잘해서 어따 써!
고대어 해석을 조금?
나는 술술 해!
그리고 정령사가 단순무식 막일을 왜 해!
같은 정령사로서 조금 화가 났다.
"당신 정령사 아녜요?그런데 단순무식한 막일을 왜 해요!정령사는 고급 인력이라구요!"
"에,하지만 손을 쓰는 것은 다 서툴러요.머리 굴리는 것에도 약해서......"
"정령사 망신은 다 시키는 군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가 정령사가 된 이유를 떠올려보면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찾다보니 나온 것이 정령사였다.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고 내가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올챙이와 개구리는 엄연해 다르다.
올챙이는 물 안에서만 꼬물거리지만 개구리는 물 밖까지 나가 깡충깡충 튀어다닌다.
진화 했으니 옛날의 미숙한 자신을 잊은 것은 당연지사.
나 또한 그런 바,뭣 모를 때는 편할 거라고만 생각하고 정령사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과 달랐다.
마법사 못지 않게 머리를 굴려야 했고 기사만큼이야 아니겠지만 체력이 없으면 정령을 소환하는데 불이익이 생긴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 없었던 것이다.
힘들었던 만큼 내 자신이 정령사라는 것에,이 능력에 애착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지니!말이 심하잖아."
"심하긴?난 할 말을 하는 것뿐이야."
에쉬가 질책했지만 그에 굴할쏘냐.
나는 할 말은 하는 성미였다.
게다가 상대가 다른 직업도 아니고 정령사니 더더욱 그랬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체로도 내게는 한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가깝다고 느껴지는 사람일수록 까칠하고 엄하게 대한다는 사실.
그 덕에 제일 손해 보는 것이 라이였고.
"아,전 괜찮아요.오히려 이렇게 괴팍한 분이셔서 만족스러운걸요!"
"......성격은 됐고.어때,에쉬?너만 좋다면 데려가 볼까 하는데......"
"나야 상관 없지만 로크스나 게일,엔크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잖아."
의견이라......
채드야 진작붜 데려가자 조르는 터였고 나야 일단 이 여자를 이용해볼 심산이었다.
두 달이면 충분히 에쉬의 시험을 치를 수 있으니.
"그래?그럼 로크스,게일,엔크 중에 불만 있는 사람 이리 와서 라이를 쓰다듬어봐."
"어우우.저는 적극 찬성입니다."
"나는 지니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찬성."
"난......어찌 되든 상관없어."
라이를 쓰다듬어라.
그것은 반항하면 라이에게 물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반대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로크스야 환영하는 눈치고.
하긴,답답한 에쉬 녀석을 수행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지.
동료 모을 생각은 안 하고 산적한테 돈이나 퍼주려고 해,남 일 참견하는 걸 좋아해,쓸데없이 정의감만 넘쳐.
으휴,내 친구지만 참 답답이였다.
"그럼 결정!종은 아니지만 일단 동행하기로 하죠.아,이름도 안 물어봤네?당신 이름이 뭐에요?"
"아,감사합니다!정말 감사해요.제 이름은 위드리.꼭 도움이 될게요!"
그럼,그래야지.
안 그러면 데려갈 이유가 없는걸.
나는 성문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인원은 채웠고,남은 건 시합인가?
여기서 베이키스까지 한 달,거기서 엘란의 항구도시 페밍턴까지 배로 일주일 정도,페밍턴에서 수도 네이칼까지 다시 보름 정도.
모두 합쳐도 두 달 정도면 충분히 닿고 남을 거리다.
서두르면 한 달하고 보름이면 된다.
그 정도 시간이면 이 여자에게 에쉬의 가디언 시합을 치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바로 두 달 뒤가 에쉬의 운명의 날.
'시험의 길'을 끝내고 '가디언'들의 결투가 치러지는 날이다.
검문이라는 것은 보통 성을 들어갈 때만 한다.
나갈 때는 잘 하지 않는 것이다.
헌데 오늘은 달랐다.
문지기들이 신분패는 물론이고 가방 속까지 뒤적거렸다.
내 가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짐은 이것뿐이십니까?"
"네,그것과 애견 한 마리가 전부에요."
"흐음......"
문지기의 시선이 커트에서 단발로 자라난 금발에 머물렀다.
검문이 엄해진 이유는 짐작이 갔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어쩐지 검문이 엄격하네요."
"아아,별 것 아닙니다.그보다 귀 좀 보여주시겠어요?"
"귀요?"
나는 의문을 표하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보였다.
아마도 간밤에 왕성에 들었던 침입자를 찾는 모양이었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문지기의 눈이 나를 깊이 주시하지는 않았기에 태연한 척 했다.
"네,통과하셔도 좋습니다.안전히 여행되시길 빌죠."
"네,감사합니다."
역시 수배지의 내용이 내 신상과 다른 모양이다.
후훗,티아트라젠 그 작자,내게 밀린 것이 어지간히 민밍했던 모양이지?
불안한 마음을 지워내기는 했지만 뒤가 켕겼다.
나는 성문이 깨알만 하게 보일 때 쯤 라이에게 말했다.
[라이,너는 조용히 돌아가서 문지기가 들고 있던 종이를 확인하고 와.뭐라고 적혀 있는지 말이야.]
[종이 말씀이시죠,마스터?]
[그래.아마도 어제 침입자에 대한 수배내용일 거야.문지기의 반응으로 봐서는 나완 먼 내용이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일단 확인해봐.]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니,알아두는 편이 몸을 사리는 데 편했다.
[네,마스터.]
[참,그러고 가지 마,늑대는 안 돼.]
[네?그럼요?뱀?]
[아니,더 작은 것으로.]
나는 작게 웃었다.
그에 라이가 늑대 주제에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벌써 내가 무었을 말하는지 눈치 챈 모양이다.
[서,설마 그것은......!]
[딩동댕.줄무늬 다람쥐로 출동.]
[끄앙!왜요?왜 하필 쥐새끼에요?]
[그 산만 한 모습으로 염탐하고 올래?눈에 너무 띄잖아!그게 정 싫으면 변신목록 8호로 하든가.]
8호,그것이 무엇이던가.
마기가 별 생각 없이 넣었던 변신 몸체로 곤충과에 속하는 것.
여러 개의 발이 달려있으며 날개도 있다.
새까맣고 둥그런 몸체가 유난히 혐오스러운 그것!
바로 바퀴벌레였다.
[그냥 줄무늬 쥐새끼할래요.마스터,제가 쥐 좋아한다고 말씀 드렸던가요?]
[아니,못 들었는데?좋아하면 앞으로 그것만 하던가.]
[아니되르르]
나도 시러르르르.
다람쥐야 걸려도 옆 산에서 내려왔나보다 하고 넘길 테니 충분했다.
바퀴벌레는 내가 더 싫었다.
바퀴벌레가 더듬이를 쫑긋거리며 '마스터,칭찬해주세요!'하고 달려올 걸 생각하면 벌써 소름이 끼치는걸.
서둘러 움직인 결과 11일 만에 도착한 미젤란과 베이키스의 중간 도시 멘덴.
항구도시와 수도의 사이다 보니 자연스레 교역이 많아 사람이 붐비는 것을 빼면 평범했다.
본래라면 보름을 걸렸을 거리를 나흘이나 단축한 힘은 이틀 꼬박 자지도 않고 말을 달린 결과였다.
빨리 가서 이른 배를 타야 페밍턴에서 네이칼로 가는 길이 편할 거라는 에쉬의 말에 마땅한 불만도 내뱉지 못했다.
"방은 두 개 잡았어.2인실 하나와 5인실 하나.2인실을 여자들이 쓰면 될 거야."
"끄응,피곤해."
"지니 열쇠 안 받아?"
방호수가 적힌 나무판이 달린 열쇠를 내미는 에쉬.
하지만 지금은 열쇠를 받을 기운도 없었다.
당연히 방으로 올라갈 힘도 없었다.
왜?이런 강행군은 처음이란 말이다!
"위드리?열쇠 받아줄래요?채드는 내 짐 좀 방에 올려줘."
"내가 왜?"
"넌 종이잖아.그 정도는 해야지."
"이 여자 시켜!"
채드가 험악한 표정으로 에쉬에게 열쇠를 받아드는 위드리를 가리켰다.
야,네 눈에는 제 비실거리는 거 안 보이냐?
위드리는 정령사치고 유난히 체력이 약했다.
정령사들은 본래 일반인보다는 약간 체력이 좋은 편인데 말이다.
하긴,일반인도 나가 떨어질 만큼 달리긴 했지.
"열쇠 받는 거 시켰잖아.그러니 너는 짐 올려."
"그게 일이냐?너 왜 사람 차별해?같은 종인데 왜 나만 힘든 거 시켜!"
"이게 어디서 앙탈이야?닥치고 안 올라가?"
[앗,마스터,마스터.앙탈은 제 건데요.마스터,듣고 계세요?]
안 들려,안 들려.
피곤하단 말이야!
채드에게 짜증을 부리는 나를 일행이 슬금슬금 피해갔다.
내 히스테리는 피로도에 비례하니 말이다.
에쉬와 로크스는 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했는지 채드에게 매달려 있었고 엔크는 진작 소리 없이 사라졌다.
평소라면 함께 사라졌을 게일이 오늘은 안절부절 못하는 위드리를 질질 끌고 뒤늦게 피신 중이었다.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다시 스마일 그릴래 그럼?"
"젠장,올리면 될 것 아냐,올리면!"
쿵쾅거리며 계단을 부숴버릴 태세로 올라가는 채드,그리고 이내 나머지 일행도 하나 둘 방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도통 기운이 나질 않아 식당 한 구석을 차지하고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일단 이러고 있다가 일행이 내려오면 배를 채울 요량이었다.
방에 들어가면 나오기가 싫어지니.
밀려오는 피로에 눈을 살짝 감으니 자연스레 주변의 소리가 들려왔다.
음식을 먹는 소리,그릇이나 포크를 달그락거리는 소리,쨍하는 건배소리,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
"이봐 자네,그 소문 들었는가?"
"소문?어떤 소문 말하는 거야?베이키스의 영주가 인어에게 홀려 자살시도를 했다는 그 소문?"
"아니!그 소문은 이미 한 물 갔지,이 사람아.자네 귀가 어둡군 그래?"
"그럼 지니 크로웰님이 살아돌아왔다는 소문 말인가?"
문득 귀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베이키스의 영주라면 이름도 기억났다.
앨버트 베이키스,그리고 그의 부인.
인어족의 안나로이.
소문이 저렇게 났구나.
인어에게 홀려 자살기도라......
비극적인 걸.
뭐,실제 이야기도 비극이지만 말이다.
"에이!이 사람......그걸 어찌 소문이라고 하나?전설이라고 해야지."
"하지만 지니 크로웰님은 살아 있는 걸.전설은 아니지."
"어쨌든!그 이야긴 아니야.그리고 아무리 영웅이라지만 남자도 아니고 더욱이 어린 여잔데 '님'을 붙이는 건 좀......뭐,그쯤 되는 사람이니 괜찮으려나.드래곤의 친구에 왕을 구한 영웅이니까."
"그럼!되고말고.그보다 그게 아니라면 자네가 말하려던 소문은 뭔가?내가 모르는 소문이라니 용납할 수 없네."
여관이라 그런지 별에별 소문이 다 도는 모양이다.
관심을 끄고 귀를 닫아버릴 요량이었는데 이어서 나오는 단어에 오히려 귀를 크게 열어야 했다.
"그럼 잘 듣게!열흘 전 쯤에 일어난 일인데 말이야,왕성에 도둑이 든 모양이야!"
"왕성에?어느왕성?우리나라 말인가?어찌 한낱 도둑이 왕성에 침입을 하나?"
"그래!이 헤이드리케에 말이야.잘은 몰라도 그 도둑이 인간이 아니래.소문에 의하면......엘프래!"
"에,엘프?그 조화의 종족이라는 엘프 말인가?어찌 엘프가 도둑질을 하는가?"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과연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다더니.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 우리 일행보다 소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역시 원인은 통신 마법인가?
전보?
겨우 소문 때문에 그걸 쓸까?
하여간 소문의 신비였다.
"그래!그 엘프,여하튼 조금 실망이지 뭔가.조화의 종족이라는 엘프가 조화의 나라라는 우리 왕국의 왕성에 침입할 줄이야.대체 왜지?"
"도둑이라며?뭘 훔치려 그런 것 아닌가?"
"아니,소문은 그런데 뭘 훔쳤는지는 정확하지 않아.아예 훔친 것이 없다는 얘기도 있고,뭘 훔쳤는지 모른다는 소문도 있고."
"그럼 도둑이 아니지!"
그래!그거거든.
난 훔친 게 없어!
그냥 도서관 구경 좀 한 것 뿐이야!
책장을 몇 장 찢긴 했지만.
으흠,그 정도야 진짜 도둑에 비하면 애교지,애교!
양심에 많이 찔리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