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71)

"너희에게 숙제를 내마.그리고 이것을 먼저 푸는 자가 내 후계자다."

"아아!드디어,드디어 시험인가요?어떤 숙제죠,스승님?"

"저도 궁금해요,스승님!어떤 숙제죠?역시 어렵겠죠?"

티아트라젠이 씨익 웃었다.

이대로 놔주기 아까운 그 침입자의 행방을 쫓음과 동시에 노년기에 들어 지친 마음을 달랠 겸 제자들도 떼어낼 기가 막힌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쉽다.자,잘 듣거라.금발에 푸른 눈,그리고......물의 정령사인 계집을 찾아와라.너희와 또래일게다."

"......그게 무슨 시험입니까?사람 찾기요?"

"금발에......푸른 눈......?물의 정령사?그거 최근 대륙에 떠도는 지니 크로웰의 신상 명세가 아닙니까,스승님?드래곤의 손아귀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희대의 행운아!그분을 모셔오라는 말씀이십니까?"

"호오!그 지니 크로웰님을?그런 깊은 뜻이 있는 건가요,스승님?"

이잉?

생각지도 않은 이름이 나오자 티아트라젠이 기겁을 했다.

현재 대륙에 그 이름을 가장 크게 날리고 있는 자를 꼽으라면 열이면 열,지니 크로웰을 꼽을 것이다.

황제와 국왕들을 위해 드래곤 앞에 자신을 희생했기에 희생의 여신 아나이스의 사자라 불렸다가,죽기는 커녕 드래곤과 친분을 맺고 대륙에 나와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의 주인공.

그녀가 살아 있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티아트라젠은 냉큼 반대의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다,아니야.지금 지니 크로웰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전쟁이 나는데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느냐.물론 비슷한 것 같기는 하지만 다르다.내가 말한 그 사람은 아직 이 나라에 있을 게다.이 섬나라 헤이드리케 안에 말이다.진짜 지니 크로웰이라면 이 나라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아아,그렇군요.사실 그분을 한 번 뵙고 싶었는데요.굉장히 아름답고 선한 분이라지 않습니까?"

"하긴......저도 만나 뵙고는 싶지만 지금 그분을 찾기 위해 각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다지 않습니까?그런데도 안 나오시는 분을 저희가 어찌 찾겠습니까?"

불과 한 시간도 전에 스쳤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몰랐다.

그 자칭 엘프가 지니 크로웰일 거라고는 말이다.

자기가 그 특징을 말해놓고도 정말 지니 크로웰과 너무 흡사해서 기겁을 한 티아트라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구.안 되지,안 돼.

소문의 지니 크로웰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온갖 비난의 화살이 나에게 날아올 테니.

"그럼,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이 후계자 시험일 리가 없지 않느냐.너희는 그저 이 도시에 있는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여자를 찾아서 내게 데려오면 되는 것이다.정령사라는 것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외모에 중점을......아차!내가 너희 스승이라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

"......그게 무슨 뜻이 있는 것입니까,스승님?금발의 여자를 찾아 데려오라구요?많을수록 좋은 겁니까?"

"그러게요.저흰 따로 움직이는 거죠,스승님?헌데 둘 다 금발의 여자를 데려오면 둘 다 이기는 것입니까?"

티아트라젠이 다시 머리를 굴렸다.

그가 내기는 했지만 시험에 허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본인이 발 벗고 나서고 싶지만 직책상 쉽지 않았다.

왕궁 수성정령사의 자리는 오랫동안 비울 수 없는 것이었다.

"흐음,이렇게 하자꾸나.각자 금발의 물의 정령사를 한 명씩 찾아서 일단 그 여자를 쫓아가는 게다.그리고 그 여자가 뭘 하는 사람인지,어느 나라 소속인지,약점은 무언지,모두 알아오는 게야.그리고 데려오는 것은 그 여자의 정체를 모두 파헤친 뒤에 하는 게지!할 수 있겠지?"

"그야......할 수는 있지만 대체 그 시험의 요지가 뭐냔 말입니다,스승님."

"맞습니다.그 시험이 저희에게 주는 교훈이 뭐죠?"

자신이 제자들을 너무 똘똘하게 키웠나 싶어 티아트라젠이 콧잔등을 구겼다.

가라면 냉큼 갈 것이지 뭘 따지고 드누.

쯔쯔쯧.

그는 혀를 찼다.

"뭐긴 뭐야?사람 쫓아다니는 법을 배우는 게지!그 사람이 아무리 괴팍하고 모질게 굴어도 악착같이 쫓아가서 정체를 캐란 말이다.아마도 너희보다 어린 계집일 테지만 그래도 설설 기란 말이다!그리고 정체를 캐와!"

"오오,사람 상대하는 법을 배우라 이 말씀이시지요?역시 스승님!그런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니......그저 존경스러울 뿐입니다,스승님."

"호!그렇다면 보다 괴팍하고 이상한 사람을 데려오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겠군요."

"그,그렇지!바로......그거거든."

잉?

티아트라젠은 속으로 일이 묘하게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냥 사실대로 자신을 쓰러뜨리고 간 녀석을 찾아오라고 시킬까?

아니지,아니야.

그럼 대륙 최고의 정령사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티아트라젠은 자신의 머리를 부르르르 털어냈다.

금발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눈 색에 성별까지 비슷하면 찾아올 테지,하고 넘겨 버렸다.

설마 이 도시에 이런 특징을 가진 여자가 열이나 되겠는가?

적으면 하나,많아야 둘,그리고 모두 자신의 제자들에게 걸리면 둘 중 하나가 범인일 확률은 충분히 있었다.

"맡겨두세요!아무리 괴팍한 사람이어도 잘 모셔보겠습니다."

"저도요,스승님!언제 출발하죠?내일 당장 날이 밝는 대로 갈까요?"

"그래,그리고 여자는 한 달......아니,두 달 안에 찾아 오거라.명심해라.금발에 푸른 눈,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아직 이 나라 안에......아,한 가지 더.검은 스태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1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검은 스태프 말이다.꼭 뱀처럼 생긴 스태프다."

"옛설!"

두 제자가 동시에 씨익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찾아질까나?

"......안 됨 말고."

누군가에게 말하듯 티아트라젠이 작게 중얼거렸다.

제자들이 찾아온 여자 중에 없으면 그만인 게지 뭐.

하지만 확률은 충분했다.

그로서는 나름의 도박이었다.

혹시 있을 추격자를 염려해 산을 돌아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 입구를 통해 들어가다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골치 아프니 조용히 내 방 창문으로 들어왔다.

"후우......원래 색으로 돌아와,라이."

[늑대로 변해도 돼요?]

"그래.아우으,피곤해."

머리에 쓴 두건과 후드를 벗어던지고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이고,이 밤에 내가 미쳤지.

까닥하다가는 잡힐 뻔했지 뭔가.

기사 몇몇이 악착같이 쫓아오기에 언 브리딩을 걸어주려다가 그것이 내 고유의 기술인지라 혹여 정체를 들킬 것을 염려해 그냥 도망만 다녔다.

으으,분해!

이로 이불보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젠장,모처럼 만난 상급 정령사인데!

아니,생에 처음으로 만난 나 이외의 상급 정령사인데!

솔직히 결국 이겨내긴 했지만 초반에 밀린 것은 사실이었다.

얼결에 쓴 그 '바다화'가 없었다면 졌을 지도 모른다.

졌다면 지금 쯤 내 방이 아니라 감옥에 들어가 있을지도......

아니지,내겐 라이가 있으니 그 정도까진 안 갔겠군.

라이가 예의 복슬복슬한 누렁이로 변신해 내 앞으로 총총 걸어왔다.

[마스터,마스터!제가 어깨 두드려드릴까요?]

"......그 손으로?"

[네,두드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흐음,좀 당기기는 하지만 사양할래.개한테 안마받기는 좀......"

미관 상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무게가 내게 쏠려서 더 무겁지 않을까 싶었다.

[크앙?마스터,저는 개가 아니라 늑대란 말에요,늑대!그러니까 안마 할래요.시켜주세요.네?저 잘할 수 있어요,마스터.]

"개나 늑대나 그게 그거거든?차이점이라면 야생이냐 가축이냐......"

[응?이거 떨어졌어요,마스터.]

옷이나 갈아입을 겸 일어나는데 뭔가가 품에서 떨어졌다.

내가 왕궁도서관에서 찢어온 책장이었다.

라이가 덥석,한 입에 물어 건넸는데 실제 짐승이 아닌지라 침이 묻지 않았다.

"아......이거,이거!속상하게 됐지 뭐야."

[이게 왜요?]

"여기 적혀 있는 정령 중에 두 개는 포기해야 될 것 같아.아니,세 개."

수정으로 만들었다는 환상의 정령은 이미 남아 있지 않을 테고 희망을 가졌던 공간의 정령과 행운의 정령은 티아트라젠 가문에서 이미 사용하는 모양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 중 행운의 정령은 부서졌다고 했지?

공간의 정령은 티아트라젠이 이미 계약한 것 같으니......

패스.다른 사람이 가진 정령은 왠지 소유욕이 안 생기는걸.

[우호!그거 잘 됐네요,마스터!]

"잘 돼?뭐가 잘 돼?비 원소 정령은 셋이나 버리는 건데?"

[미래의 라이벌이 셋이나 줄었잖아요.]

......내가 너랑 말을 말아야지.

으윽,속이 쓰리는구나.

잘하면 내 정령이 됐을지도 모를 정령 셋을 한 번에 홀랑 잃어버렸으니......

몰랐다면 모를까 알아버린 이상에야 배가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비 원소 정령진의 존재를 나만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령사라면 발 벗고 찾아볼 만한 존재니 말이다.

"남은 건 비명과......수호의 정령인가?"

둘 중 그나마 끌리는 것이 비명의 정령이다.

수호라면 방어인데,나한테는 막강 방어력을 자랑하는 라이가 있는걸.

이 책장에 의하면 비명의 정령은 까마귀 같이 생겼다고 했지?

.....귀여울 지도.

하긴 라이에 비하면 무엇이 안 귀여울까?

라이가 안 귀엽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소문과 진실

"오늘 떠난다고?"

"으응,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해서 말이야.이해 좀 해줘,지니."

어제 도착했는데 오늘 떠난단다.

평소의 나라면 온갖 짜증을 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달랐다.

어제 그런 사건을 저지르고 온 터라 이 도시에 있기가 아주 거북했던 것이다.

에쉬네 일행만 없었다면 진즉에 홀로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반색하며 말했다.

"아냐,아냐.난 신경 쓰지 말고 당장 가자.나야 너희가 가자면 가야지.안 그래?"

나답지 않게 반기며 말하자 에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에 착해빠진 녀석이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눈빛에 포함된 '애가 미쳤나?'정도의 기색을 충분히 읽었다.

"그,그래 뭐.그렇게 말해준다면야......"

"우후훗.너랑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줄 몰랐어,에쉬.우리 다음 행선지는 엘란이랬지?"

이야호,늴리리맘보.예!

역시 하늘에 가끔씩 나를 돕는다니까?

일을 저지를 다음날 냉큼 떠난다니 잘 됐지 뭔가.

엘란은 마지막 행선지이기도 했다.

아직은 엘란이 마지막 행선지라고 밝힐 수 없는 에쉬가 양심에 찔리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으응,엘란의 수도......네이칼이야."

"그럼 빨리 출발해야겠네?언제 출발하지?아예 지금 당장 나갈까?"

"아침 먹고......갈까 하는데,어때?"

"콜!"

이제 이 짧은 여행도 끝이 다가왔다.

아니,길다면 긴 여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두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길었던 여행이니 말이다.

어젯밤 머리색을 보인 것이 제법 불안요소가 되었는지 아침을 먹는 내내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대단치는 않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떠난다니 조금은 안심이었다.

[마스터,그럼 다시 배 타러 가요?]

[그렇겠지?]

[호오,그 '우웨엑'하는 거 말이죠?]

[......그게 다는 아냐.멋진 것도 있었는데 왜 너는 그런 것만 기억해?]

라이는 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커다란 덩어리가 물  위를 떠다니는 게 신기하다나?

만년이나 살면서 배를 탈 기회가 없었나?

아,그런 커다란 배가 나온 건 몇 백 년 전이니까 라이는 모를 법도 했다.

[멋진 것?]

[그래,바다나 파도나......으음,그리고 바다 위에서 즐기는 식사!]

[그 식사를 먹고 다시 게워내면 그게 바다랑 파도에 퍼지......]

[닥쳐.]

자식이 주인님 식사하시는데 더럽게!

라이는 항해 중 인상적이었던 것이 멀미하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야야,네가 멀미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 속이 뒤집히는 고통은......

으음,내상이랑 맞먹지 않을까 싶어.

나야 인어의 비늘 덕에 극복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쾅!

"야아아!지니이!지니!"

"푸흡!......뭐,뭐야,너!깜짝 놀랐잖아,이 바보 똥개야!"

갑작스런 채드의 등장.

칼날을 간다나 뭘 한다나 하며 아침 일찍 여관을 나섰던 녀석이 참 무식하게도 등장했다.

발로 차기라도 했는지 여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는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것이다.

표정은 한 술 더 떴다.

당장 빠질 듯 부릅 떠진 눈에 벌름거리는 콧구멍,거기에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큼직한 입,저 입에 라이를 쑤셔 넣을까?

"이거 봐!이거!"

뭔가를 부스럭거리며 내게 펴 보이는 녀석.

그것은 누런 빛의 종이였는데 순간 바싹 긴장이 되었다.

설마 수배령?

벌써?

겨우 금발이라는 단서 하나 가지고 침입자 잡기에 돌입한 건가?

들고 있던 빵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당장 토껴......잉?

"......이게 뭐야?"

"잘 봐,잘!"

채드가 내 눈앞에 펼친 잔뜩 구겨진 종이 위에는 노란 털을 가지고 파란 짝짝이 눈을 가진 정체불명의 짐승이 그려져 있었다.

파란 눈 옆에 뭔가 속눈썹인 듯 삐죽 튀어나온 걸 봐선......

암컷인가?아니,그보다 발로 그린 건가?

어쨌든 다행이도 그것은 간밤의 범인을 찾는 수배령이 아니었고 나는 안심과 동시에 울컥 치솟는 분노에 애꿏게 터져버린 빵을 채드의 얼굴에 냅다 던져버렸다.

"놀랐잖아,짜샤!"

"푸힉!뭐,뭐야!왜 화를 내고 그래?좋은 소식 아냐?"

[이게 뭐에요,마스터?신종 몬스터?에......괴팍할수록 환영.종이 되어드립니다?이게 무슨 뜻이죠,마스터?]

스프를 그릇째로 던지려다 차마 아까워서 그러지 못하고 씨근덕거리고 있던 나는 라이의 말에 채드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이게 뭐야?

금발 한정,푸른 눈의 여성 한정,22살 미만 한정,괴팍할 수록 환영,검은 지팡이 애용자 환영,물의 정령사 환영,위의 조건에 해당하시는 분의 종이 되어드립니다.

해괴한 그림 밑으로 늘어진 해괴한 글줄을 읽은 나는 다시 종이를 구겨 채드에게 던졌다.

사실은 머리에 맞출 생각이었지만 순순히 맞아줄 녀석이 아닌지라 공중에서 가볍게 휙 종이를 낚아챘다.

그리곤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때?이거 딱 네 얘기 아냐?"

"별로......이런 쓸데없는 얘기에 혹하는 바보는 너 뿐일걸."

"쓸데없다니!종이 되어준다잖아,종이!"

녀석이 '종'이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구는 이유야 빤했다.

약 두 달 전,나는 녀석과 결투를 한 적이 있었다.

지면 나는 파티에서 나가기로,녀석은 뭐든 내가 시키는 것을 한다는 조건을 걸고.

그때 녀석은 내게 졌고 나는 그에 대한 벌칙으로 채드의 머리를 박박 밀어버렸다.

아,박박은 아니다.

스마일은 남겨뒀으니.

머리를 밀던 나조차도 웃음이 나올 정도니 본인은 오죽했을까?

결국 녀석은 울먹이며 내게 부탁했다.

제발 마저 밀어달라고.

하지만 그냥 밀어주면 지니 크로웰이 아니다.

나는 '내가 이 파티에 있는 동안 내 종이 되면'이라는 조건을 달았고 녀석은 끝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 종이 되어야 했다.

매우 까칠하고 말 안 듣는 종이.

왜 이 좋은 것을 이해 못하냐는 듯 구겨진 종이를 펴서 다시 내 눈 앞에 들이미는 녀석.

그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난 관심 없어.말이 좋아 종이지 솔직히 짐 덩이 아냐?"

"아니지!종은 많을수록 좋은 거라고!종의 수는 부의 상징이라잖아!너 부잣집 아가씨라며?종이 부족하지 않아?응?전문 시종 말이야."

웃기셔.저를 부려먹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 빤히 보였고 당연히 녀석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횅하니 고개를 돌리곤 새로운 빵을 집어 들었다.

말할 가치가 없으니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채드가 발광하는 것을 씹어 넘기려는데 라이가 코로 쿡쿡 내 허리를 찔렀다.

[왜?]

[마스터,마스터.이거 정말 마스터 닮았어요.]

"......어디가?"

[요기......짝짝이 눈이요.]

들고 있던 빵을 얌전히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는 라이의 머리를 고정시키고 한 순으로는 라이의 왼쪽 수염을 잡아당겼다.

아까 이 그림을 보고 신종 몬스터냐고 했던 게 분명 이 입이렸다?

"네 수염부터 짝짝이로 만들어주지!"

[끄악!안 돼요,마스터.고정하시와요.흑흑흑.]

마음 같아서는 뜯고도 남았지만 워낙에 단단한 녀석인지라 수염은 백 년 묵은 나무의 뿌리인 듯 뽑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한숨 쉬는 녀석이 있었으니......

"지니,제발 부탁이니 개랑 대화하지 말아줘."

"으흠,이 녀석이 화나게 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가끔 그 개가 진짜 말을 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묘하다고."

다름 아닌 에쉬였다.

자제하려고는 하지만 간혹 화가 나면 말이 입밖으로 나오곤 하는데 에쉬는 그것을 무서워했다.

주변의 시선도 좋지 않았고.

그리고 라이는 진짜 말해!내가 이상한게 아니란 말이야!

쳇,기회가 되면 대화가 가능한 생물을 넣어볼까?

진지하게 고려해봐야겠다.

내 가방 속에는 제법 많은 물건이 들어 있다.

여행 중에 구입한 신간 몇 권과 여러 도시와 마을들에서 기념 삼아 사 모은 기념품,거본 생활 잡화 등이 그득했다.

그리고 그것을 드는 것은 채드다.

왜?종이거든.

"으윽,무거워!대체 네 가방 속에는 뭐가 들은 거야?갈수록 무거워지잖아!"

"응?얼마 없어.책 13권 정도랑......아차,이제 14권이다.그리고 중형 프래이팬이랑 조미료 세트,육포 한 상자,그 외 각종 기념품이 8개 정도......"

"육포 배곤 죄다 쓸모 없는 거잖아!좀 버려!"

"싫어,왜 쓸모가 없어!내 돈 주고 산 걸 왜 네가 버려라 말아야!"

웬만한 성인 남자의 몸집만 한 내 가방을 채드가 들게 되자 제일 신이 난 것은 라이였다.

자신을 말 취급하는 것을 꽤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를 등에 태우는 것은 별로 싫어하지 않았기에 나도 사양 않고 말 대용으로 쓰고는 한다.

물론 마을안에서는 자제한다.

보는 눈이 한 둘이 아니니 말이다.

[마스터!저기 봐요,저기!]

짐을 꾸려 여관에서 나온 지 10분 쯤 되었을까?

이제는 슬슬 성문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보무도 당당히,뉘 집 누렁이 같은 모양새로 꼬리를 흔들며 걷던 라이가 한층 바삐 꼬리를 흔들며 앞발로 뭔가를 가리켰다.

야야,그건 발이야.손이 아니라.

"라이가......뭐하는 거야?"

"응?글쎄,저길 보라는데.아,저건가 보다."

개답지 않은 포즈를 취하는 라이가 에쉬는 무서운 모양이다.

한걸음 물러서며 내게 물었고 나는 라이가 뭘 가리키는지 발견했다.

종이를 나눠주고 있는 자주색 머리 여자였다.

처음에는 전단지라도 나눠주는 건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종이는 채드가 가져왔던 그 정이 같았다.

종이 되어드립니다,어쩌고 하던 것 말이다.

왜 스스로 종이 된다고 하는 거지?

[마스터,저 인간......킁킁,킁!그거네요.바람......]

"......바람?아,정말?"

바람?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나 했지만 이내 그것이 바람 속성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자 정말 그 여자에게서는 바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주 진한 게 잘하면 중급정령사일지도 모르겠다.

어째 최근 들어 평생에 만날 정령사를 몰아서 만나는 기분이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드래곤에 황자도 만나는 판에 정령사야......

"응?어때!관심이 생겼어?저 여자가 바로 그 여자야!종이 되어 드립니다!"

"흐음,'종'은 별로지만 약간 관심이 가는데?"

"가볼래?응?"

흑심이 가득한 눈을 번들거리는 채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볼까?

뭐하는 여자기에 정령사면 저런 전단지를 뿌리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급에서 중급 사이,이 정도면 이 조화의 왕국이라는 헤이드리케에서도 왕궁 보조 정령사 정도는 될 텐데.

못 되어도 영주 소속?

정령사 자체가 희귀해서 몸값이 비싸니 말이다.

"흐음,에쉬!나 잠시 저 여자한테 다녀올게."

"나도 갔다 온다,에쉬!"

"에?어디 가,너희들?어이!"

일단 팀의 대장인 에쉬에게 짧게 용건을 말하고 몸을 돌리자 채드가 따라왔다.

그리고 걱정 되는지 뒤를 따르는 에쉬.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자동이었다.

로크스에,게일에,엔크를 줄줄이 달고 의문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한창 전단지를 나눠주던 여자는 내가 다가갈수록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는데 마지막에는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오,우오오!금발!푸른 눈!여자!어려!게다가 이 기운은......물의 정령사?완벽해!"

"감사......"

완벽하다니 감사는 하다.

하지만 이 그림에 있는 해괴한 것과 닮았다고 하는 거라면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이야.당신!당신 성격 어때요?괴팍하면 좋겠는데!"

"괴팍해,괴팍해.세계 최강일지도 몰라.윽!"

채드는 내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잊었는지 감히 망발을 지껄였고 나는 사양 않고 팔꿈치를 뒤로 움직여 녀석의 허리께를 있는 힘껏 찔러 버렸다.

근육이 단단한지라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으리라.

이 녀석이 아직 내 성격을 파악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머리가 나빠서 잊었거나.

[앗!곰탱이 2호가 죽어가요,마스터.]

"크허허..사,사람 살려어,꺼어어억!"

"앗,제대로 맞았나 보네.미안해라."

털썩 무릎을 꿇더니 제 옆구리를 부여잡고 뒤집어지는 채드를 보며 나는 슬며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조금 미안하다.

에쉬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에 나는 슬쩍 채드를 부축하는 척해야 했다.

에쉬 화나면 무서운 걸.

잔소리를 한 시간은 족히 이어낼 테니 몸을 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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