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71)

이래서야 아무리 강한 공격을 해도 소용 없었다.

공격 속도가 빠른 만큼 방어 속도도 빨랐던 것이다.

차라리 비라도 와주었으면 엔다이론이 조금 더 실력을......

아하,물이 있으면 되겠구나!

이왕이면 잔뜩!

[엄머?왜 이러세요?마스터,제 갸냘픈 허리를 그러게 우악스럽게 쥐시면......후아아악!]

당장에 라이를 꺼내들고 공중에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그래,내게 유리한 배경을 만들면 되는 거지?

좋아,이봐 티아트라젠 씨!댁의 수영 솜씨 좀 보자고.

[엔다이론!씨 블라스트!]

발광 중이던 엔다이론의 꼬리가 땅을 내려치자 부글부글 물이 끓더니 이내 높이 솟아올라 커다란 해일을 만들었다.

그것은 그대로 실라이론에게 밀려갔는데 별 공격이 되지는 못했다.

본래 있던 윈드 실드에 가볍게 막힌 것이다.

실라이론의 실드를 놓고 물살이 양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씨 블라스트는 해일을 일으키는 주문이다.

다수의 잔챙이를 상대로 하기에는 괜찮아도 막강한 한 명을 상대로는 별 효과가 없는 마법.

"으하핫.이것도 공격이라고 하는 건가?마나가 다 된 모양이지,금발의 침입자?"

[엔다이론!안 번 더,아니 주변이 온통 바다가 될 때까지!마나는 많으니까,있는 힘껏 물을 끌어와서 네 무대를 만드는거다.할수 있겠지?]

[재밌겠군.해보지!]

엔다이론이 연신 꼬리로 사방의 맨땅을 내려쳤다.

점점 물이 불어나더니 어느새 엔다이론의 꼬리가 맨땅이 아닌 물 위를 치고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물을 소환하는 정도야 가뿐한 것이다.

양이 엄청나긴 했지만.

라이를 쥐고 있는 내 손은 검은 빛으로 빛났다.

지금의 라이가 검은 색을 하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라이에게마나를 빨아들이는 족족 물을 만들어내는 데 썼다.

그리고 이내 만족으러운 양이 되었을 때 엔다이론은 그것들을 잘 쌓아올렸다.

소환되어 나온 물들이 땅 속으로 스며들다 말고 엔다이론의 몸짓에 따라 일순 허공을 장악한 것이다.

"흥!발악을 하는군.실라이론!윈드 체......아니?"

[야호,라이.이것 어때?'바다화'정도로 이름 지을 까?참,엔다이론!실라이론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컴프렉션!]

땅위를 조금 채우나 싶던 물들이 한데 모여 엔다이론의 몸을 채울 만큼의 높이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마치 거대한 어항의 형상을 만들어냈는데 얼핏,특대 언 브리딩과 비슷했다.

하지만 언 브리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했고 짙은 빛을 가지고 있었다.

흐흥,이봐.

바닷물 속에 갇힌 기분이 어떠신지?

나는 공중에 떠올라 물속에 잠긴 티아트라젠과 실라이론은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았다.

윈드 실드가 제법 보호작용을 하고 있었지만 곧 공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에잇!실라이론.여기서 빠져나가!어서!"

윙윙

실라이론 주변의 물들이 거세게 일렁이며 폭발할 듯 요동쳤지만 물속에서 그 힘을 쉽게 발휘되지 않았다.

누군가 서술했었지,바람의 정령에게 한계란 없다고.

공기가 있는 한 그 힘은 끝없이 발휘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봐!맥을 못 추리잖아?

지금의 실라이론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 꼴이었다.

아니,끈끈이에 걸린 파리가 나을까?

제아무리 날고 기는 실라이론이라고 해도 바람이 없는 곳에서는 그 힘이 제값을 못해주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실라이론의 무대였다면 지금은 엔다이론의 무대였다.

물 속에 갇힌 순간 주도권은 내게 넘어온 거라고!

공기가 없는 물속에서의 실라이론은 인간으로 치면 물속에 빠져 숨이 막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실라이론에게 허락된 권능은 다량의 바람을 조종하는 것뿐이니 말이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조차도 바람이 없는 곳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정령들에게 허락된 것은 '만들어진 것을 조종,조율,조화'시키는 것이다.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신의 몫.

그래,인어 안나씨가 말했던 물의 어머니 같은 것이 물을 만들어내는 존재일 터다.

바람은......바람의 어머니가 있으려나?

[운다인,저 물속으로 내 말을 전해.]

[네,주인님.]

[항복할 텐가,죽을 텐가?]

-항복할 텐가,죽을 텐가?

여전히 엘프를 가장하는 내 물음에 티아트라젠이 기가 차다는 듯 입을 쩍 벌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흥!노려보면 어쩔 건데?

댁은 이미 덫에 걸린 파리라 이거야!

화산지대에 소환된 물의 정령이 힘을 잃고,바다 위로 소환된 땅의 정령이 맥을 못 쓰듯,물속에 갇힌 바람의 정령 역시 시들해지고 만다.

그것이 자연의 진리고 섭리다.

티아드라젠,당신은 그걸 모르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 소......으콰르롸악!"

때마침 윈드 실드가 무너지자 티아트라젠은 그대로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실라이론이 힘을 잃은 탓이다.

사실 실라이론은 본인의 형상을 유지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몸을 만들어줄 공기가 없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컴프렉션이 걸려 있는 탓에 티아드라젠은 거대한 물덩이 한가운데서 옴작달싹도 하지 못했다.

보통의 물이라면 수면 위로 몸이 떠오르겠지만 그건 압축 됐걸랑.

[그럼 죽든가.]

-그럼 죽든가.

"우그르르륵!"

아아,난 이소리가 정말 좋더라.

물 속에 빠진 사람이 꼬르륵거리는 이 소리가.

수영을 못하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손과 발을 허우적 거리는 티아트라젠.

그 모습은 흡사 물속에 빠진 한 마리 파리 같아서 하찮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 멋지고 아름답던 실라이론은 겨우 의식을 유지하는 정도 같았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위태한 바람의 기척.

으음,제대로 싸워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포기해야겠다.

정말 승부를 걸어보려면 조금 더 훈련을 쌓아야 할 것 같았다.

시전 속도가 비교가 안 되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상황을 모면하는 수밖에.

[자,항복해라.감히 인간의 힘으로 이만큼의 물을 소환하고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자,항복해라.감히 인간의 힘으로 이만큼의 물을 소환하고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물론 난 인간이지,마나를 공급해주고 있는 라이가 인간이 아닐 뿐.

후훗,티아트라젠은 긴가민가 한 듯 했다.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재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인간인 내가 장담하는데 인간이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이만큼의 물을 소환하고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나도 라이가 없다면 시도도 못 해볼 일인 것이다.

그야말로......마나발!

[인정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이미 네가 친 결계는 부실해졌으니까.]

-인정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이미 네가 친 결계는 부실해졌으니까.

실라이론이 흐물흐물해지자 약해지기 시작한 결계를 돌아보았다.

티아트라젠과 실라이론의 계약으로 인해 만들어진 정령진.

고로 실라이론이 힘을 잃고 강제 역소환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방어막은 사라질 터였다.

나는 뜨끈거리는 라이를 더욱 꼭 말아쥐었다.

다른 마법을 쓸 것 없이 이대로 실라이론이 사라지기만 기다리면,이 방어진은 물론이고 저 너머의 마법진들도 사라질 터!

[아,마스터.저 노인네가 순간이동......]

슁!

"끼악!"

뭐야?방금 이게 뭐야?

얼결에 피하긴 했지만 바람 속성의 공격이 분명하다.

쓰고 있던 후드 옆 자락이 날카로운 것에 잘려 나갔다.

놀라 물속을 들여다보니 티아트라젠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더불어 실라이론의 기척도 사라졌다.

그새 역소환 된 모양이다.

아직 방어막이 멀쩡한 것을 봐선 강제 역소환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익,대체 어디로 간 거야!

쉬잉

"운다인!"

다시 날아오는 공격을 운다인이  막아냈다.

이 마법은......윈드 커터!

공격이 가해진 쪽을 돌아보았다.

티아트라젠이 흠뻑 젖은 채 나보다 높은 허공에 떠 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떻게 저 물속에서 빠져나갔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기운 하나가 내 감각에 포착된 것이다.

이건......혹시?

"역시 인간이었군!그것도 어린 계집!내 따악 목소리를 들으면 알지."

"쳇,티아트라젠!당신 설마......공간의 정령과 계약한 건......?"

"아닛?그,그걸 네가 어떻게......"

당황하는 티아트라젠.

하지만 나는 더 당황했다.

으악!

내 정령 돌려줘.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젠장,어쩐지 쉽게 발견했다 싶었다.

자신의 자손들에게도 비 원소 정령에 대한 힌트를 남긴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행운의 정령도?

"행운의 정령은?그것도?"

"아니 그건 부서져......가 아니라!내가 왜 그런걸 네게 말해야 하나?에잇!네 정체나 밝혀라,침입자!"

어머나 띠바,행운의 정령까지 끝난 건가?

그렇다면 더 이상의 볼 일은 없었다.

"싫다!메롱!이판사판이다.엔다이론!몽땅 부숴버려!"

[뿌셔뿌셔!마스터,저는요?]

"넌 가만히 있어.마나 보충해줘야지."

[히잉......]

쌓아올렸던 물들을 일순 폭발시켜버렸다.

'펑!'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내려쳐지는 물결은 거의 태풍이 몰아칠 때 이는 파도 같은 파괴력을 보였다.

그에 치안대들이 우르르 물에 쏠려갔다.

"엔다이론!방어막에 아이시클 란스!"

[쿠화!]

다시 한번 엔다이론의 입에서 빠져나온 거대한 얼음조각이 무섭도록 빠르게 회전하며 방어막으로 쏘아졌다.

얼핏,얼음조각들이 방어막에서 튕겨 나오는 것을 보고 시도해본 것이었는데 역시나!

이 방어막은 아이시클 란스를 고이 통과시키지 않았다.

좋아,통과가 안 된다 이거지?그럼 부숴야지!

"한 번 더!"

뚫릴 듯 말듯 방어막에 막혀 부서지려는 아이시클 란스 위로 새로운 얼음조각을 쏘아냈다.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 본래 있던 아이시클 란스의 뒤로 명중시키자 그 힘에 원래의 마법이 조각나기는 했지만 방어막에도 미약하게 균열이 갔다.

그리고 그 균열된 방어막 위로 방금 아이시클 란스 하나를 부순 새로운 아이시클 란스가 드드듣,소리를 내며 틀어박혔다.

"도망치려는 게냐?내가 그냥 둘 것 같아?실라페!윈드 커터 삼연발!"

"막아,라이!"

깡 까앙 까깡

엔다이론이 큰 마법을 쓰고 있는데다가 운다인을 타고 있었기에 다른 정령을 소환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라이.

급한 대로 목을 까닥이자 라이가 가뿐하게 날아가서는 꼬리를 이용해 윈드 커터들을 차차착 쳐냈다.

이 녀석,제법이라니까.

[끄앙!기스 났어,기스!마스터,어떡해요?꼬리에 기스으으!]

방금 한 생각 취소,취소.아니,보류!

나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약한 상처를 내 눈앞에 들이미는 라이를 외면했다.

만 살이나 먹은 게 하는 짓은 에이니와 동급이었다.

아니,에이니보다야 훨씬 낫지 아무렴!

"침 발라.엔다이론,다시 한 번 아이시클 란스!"

이대로 있다가는 잡히기 십상이었기에 나는 서둘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기사단이 방어막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러다 마법사들까지 몰려들면......최악이군!

비록 두건을 썼다고는 하지만 상대에게 머리색을 보여 인간 여자라는 것까지 들켜버렸다.

마지막까지 엘프인 척해보려고 했는데......

역시 연기력이 부족한 탓일까?

앞으로 연기력을 길러야겠다.

"실라페,붐 디 윈드!"

"이크,엔다이론!더스트 칩!"

이미 들켰지만 재차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강한 바람에 날아가려는 후드를 꽉 고정 시켰다.

그리고 바람이 약해지는 순간 더스트 칩 다시 한 번 수많은 얼음바늘이 사방으로 쏟아져 갔다.

일순 눈앞을 하얗게 잠식할 만큼 많은 얼음바늘.

하지만 대부분 방어막에 막혀 튕겨버렸다.

"아악!"

아잉?

타이밍이 잘 맞았는지 어쨌는지 공격을 허용하고 만 듯 티아트리젠이 고통을 호소했다.

힐끔 보니 그의 어깻죽지에 바늘 두어 개가 반짝였다.

아싸,이틈에 나가야지!

"엔다이론,특대 아이시클 란스!"

끼이이익

방어막에 반쯤 박혀 있는 아이시클 란스 뒤로 한 배 반 정도 커다래진 아이시클 란스를 명중시켰다.

왠지 망치질 하는 기분인걸.

어쨌든 효과는 있었는지 특대 아이시클 란스의 합세에 예의 고막을 긁는 소음과 함께 진로를 방해하던 방어막이 터져나갔다.

그에 따라 다시 한 번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

후드를 찍어 누르며 빠르게 엔다이론을 역소환했다.

"돌아가,엔다이론!"

"이럴 순......커흑!쿠웨에엑!"

방어막이 깨지자 울컥 피를 토하며 무너지는 티아트라젠.

미안혀,쬐끔!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깨진 방어막 밖으로 빠져나갔다.

지금 내가 뚫은 바람의 정령 방어막 같은 것은 정령이 정령계에 있어도 유지,발동되도록 하기 위해 피의 계약이라는 것을 한다.

그 피의 계약은 정령계와 중간계를 넘어 마법을 이어지게 해주지만 계약하기도 어렵고 정령사가 타격을 입으면 자동으로 사라진다.

지금처럼 방어진이 부서지면 정령사와 정령 모두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피의 계약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심하면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뭐,실제로는 목숨을 반쯤 거러야 한다고도 하는데 직접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저런 위험한 정령과 계약할 마음도 없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티아트라젠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긴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어찌어찌 누르긴 했지만 라이의 마나를 가져다쓴 대다가 얍삽하게 아니,얍삽한 것도 실력이지!

[마스터,기스......]

"알아서 고쳐!그 정도는 스스로 하란 말이야,스스로!알아서 척척척 몰라?"

가뜩이나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어 죽겠는데 라이가 칭얼대자 나는 그야말로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화를 냈다.

[히잉,너무해요,마스터.아......방어막!]

"힉!운다인,멈춰!"

[......이 없어졌네.앞에 있던 방어막들이 없어졌어요,마스터.]

"......너 내릴래?"

이것이......

나는 머리가 떨어져라 설레설레 흔드는 라이를 몇 번 휘돌려주었다.

놀랬잖아,짜샤!

다중으로 나를 막고 있던 방어막이 디아트라젠의 계약에 의한 것이었는지 한 번에 사라졌다.

나이도 많은 노인넨데 혹여 타격이 커서 죽는 것 아냐,하는 생각이 들자 양심이 쪼금 찔렸다.

하지만 어쩌리오.

내 실력이 더 월등했다면 가뿐히 제압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나는 남의 건강을 돌볼 처지가 아니었단 말이다.

나 도주하기도 바빴따.

[누군가 쫓아오는데요,주인님?]

"아참!계속 가,운다인!"

참참참,지금 도주 중이었지?

나는 내가 잠자코 서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곤 놀라 운다인을 출발시켰다.

아직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지.

이 성을 무사히 나가 여관에 있는 내 침대 위에 눕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륙 최고의 정령사라는 티아트라젠의 패배.

방어막 너머에서 남의 일인 양 구경하고 있던 치안대들이 놀라 술렁였고 그 틈에 섞여 있던 티아트라젠의 제자들이 황급히 스승에게 다가갔다.

이미 출동해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 역시 의외의 결과에 술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승님!괜찮으세요?"

"이런......어서 신관에게 가시죠,스승님."

"크흐,이럴 수가.내가,내가......지다니!"

줄줄이 핏물을 쏟아내는 티아트라젠을 양쪽에서 부축하는 두명의 제자.

둘다 20대 초반 정도였는데 한 명은 사내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스승의 안위를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두 제자가 겨우 스승을 일으켜 세웠을 때 기사단장이 성난 걸음으로 티아트라젠에게 다가왔다.

그는 험하고 짙은 눈썹을 가졌는데 그 눈썹만큼이나 성격이 대쪽 같았다.

"티아트라젠 백작!당신 미쳤소?침입자를 놓치다니!국왕 전하께서 아시면 진노하실 겁니다!우리가 도착했을 때 당신이 이 방어막을 풀기만 했어도 우리 기사단이 당장에 잡았을 것을 말입니다!"

그의 질책에 티아트라젠이 고개를 숙였고 곁에서 그를 부축하던 베이지색 머리의 남자 제자가 흥분해 소리쳤다.

자신의 스승을 욕보이는데 잠자코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단장님?만약 방어막을 풀었다면 그 침입자는 냉큼 도망갔을 거라구요!하늘을 나는 상대를 기사단이 어찌 잡습니까?그나마 스승님이 잡고 계셨던 게지요!"

"맞습니다!그리고 우리 스승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또한 상대가......상대가 엄청 나지 않았습니까!상급정령사......그것도 물의 상급 정령사인 데다가 마나를 물 쓰듯 쓰는데 어찌 당해냅니까!그건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응?스승님,혹시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까?"

"그,그래.그거야.그는 인간이 아니었어!엘프였다."

고개 숙인 티아트라젠이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말했다.

그는 방어막 안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밖에는 들리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천하의 자신이 한낱 계집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엘프요?그게 무슨 말입니까?상황으로 모면하려 거짓말하는 것 아닙니까,백작?"

"지,진짜요!그가 소환했던 물의 양을 봤소?족히 호수 하나를 만들고도 남을 물이오!인간이 어찌 그런 일을 벌이겠소!그리고 그는 내게 말했소,클라......라?그래,클라라님의 명을 받고 무언가를 찾는다고 말이오."

"......클라라?그게 대체 뭐요?"

"그,글쎄.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아님은 분명하오.댁도 분명 보지 않았소!그 엄청난 양의 물이며 상급정령으로 한 번 쓰기도 힘든 기술을 더섯 번은 쓰더군!나는 놀라 턱이 빠질 뻔했소이다!"

단장은 자신이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다 보지는 못했지만 불투명한 방어막에 박힌 얼음덩어리와 그 얼음덩어리 위를 또다시 내려치던 비슷한 얼음덩어리.

그 크기가 어찌나 커다란지 원만한 집 크기는 넘어 보였다.

기사단장인 그를 움찔 뒷걸음 치게 만들 만큼 엄청난 위압감을 보이던 파란 생물까지.

분명 그 생물이 그 얼음덩어리를 뱉어 내고 있었다.

"그게 그거요?그......옆에 있던 파란 씨써팬트가 물의 상급정려이란 말이오?"

"그렇소!바로 그게 엔다이......콜록!커흑,커흑!그게 엔다이론......쿠허억!"

살짝 흥분한다 싶던 티아트라젠이 다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걱정스러운 듯 안절부절 못했다.

눈앞에서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그것도 백작이라는 자가 피를 토하는 모습에 단장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알았소.이 밤의 침입자가 엘프였고,그 엘프가 상급 물의 정령사였다는 것.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국왕 전하께 그대로 전하리다."

"그렇소.그거요,그거.난 인간에게 진 것이 아니오.엘프,엘프였소!금발의 엘프!"

"금발?좋소.도시에 수배령을 내려야 하니 기억나는 인상착의나 말해보시오."

티아트라젠이 줄줄이 흐르는 핏물을 자신의 옷자락으로 훔치며 그 인간 계집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분명 금발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던 파란 눈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그 계집이 잡히기라도 하면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니 말이다.

"그,금발에......갈색 눈을 가진......남자 엘프였소.그래,틀림없어.금발에 남자 엘프!갈색 눈일세!"

"금발에 갈색 눈,남자?키는 어느 정도 였소?"

"그것까지는......잘 모르겠소이다.워낙 멀리 있던 데다가 후드를 쓰고 있던 터라."

"흐음,내가 얼핏 본 것으로는 키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던데.후드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보통 체격의 남자일 것 같소.하지만 엘프 남자라니 조금 갸냘프겠군.그럼 거기에 참고하여 수배령을 내리겠소.그리고 백작은......근신 준비나 하셔야겠군요."

단장은 딱히 악의로 한 말은 아니었다.

상대가 엘프였다고 해도 대륙에서 강자로 손꼽히는 그가 왕궁에 침입한 불청객을 놓치고 패하기까지 했으니 근신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삐뚤게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티아트라젠의 입장이었다.

그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그것은 자신의 임시거처인 수정관으로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왕궁 수석마법사나 수석 정령사가 머무는 실험실 같은 곳이었는데 성 밖에 자신의 집이 있는 티아트라젠은 잘 쓰지 않았다.

마침 오늘 실험이 있어서 들렸는데 그때 침입자가 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실라이론과 한 피의 계약을 쓸 일이 없던 차에 냉큼 방어진을 올리고 한달음에 침입자에게 날아갔다.

그 침입자를 잡아다 국왕 전하의 치하를 받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헌데 이럴 수가!

상대가 상급정령사,그것도 자칭 엘프.

기겁한 것은 물론이고 끝내 져버렸다.

해괴한 방법으로 자신과 실라이론을 물속에 가두더니 죽이려 들었다.

"으으......"

티아트라젠이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침입자가 어린 계집이었다는 사실까지 소문났다가는 그는 두 번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엘프로 위장시켜놓았는데 이대로 덮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스승님,여기 속을 달랠 약을 가져왔습니다.드셔보세요."

"끄응,고맙구나."

"어휴,저는 깜짝 놀랐습니다,스승님!갑자기 웬 해일이 몰아치더니 그것이 스승님을 가두는데......어흐흐."

"저도요,스승님.그것이 무슨 마법입니까?처음 보는 것이었는데요.마치 바다를 한 조각 잘라다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똑 닮은 말투,똑 닮은 성품.

둘 다 그의 제자였지만 너무 비슷했다.

다른 점은 재능과 출생일까?

한 명은 금전적 원조를 해오는 귀족 집안이었고 한 멍은 그가 길에서 주워온 아이였다.

별 생각 없이 소환했던 실프를 한 눈에 보고 이것이 무어냐 물었던 아이.

그 재능에 놀라 제자로 삼기는 했지만 너무 뛰어난 아이라 혹여 자신을 치고 올라올까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부러 둘의 재능 차이를 알면서도 비슷한 실력으로 만들어놓았다.

"흐흠,그것은 엘프의 마법이라 나도 모른다.엘프들은 본래 희귀한 정령마법을 쓰거든."

"호오!그렇군요.역시 정령의 종주라 불리는 엘프......아,헌데 스승님.그 물속에서 어찌 빠져나오신 겁니까?그건 이동 마법 아닙니까?"

"저도 보았습니다.스승님께서 물속에서 못 나오시는 줄 알고 기겁을 하는데 갑자기 물 밖에 나와 계시지 않겠어요?"

티아트라젠이 뭐라 둘러대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사실대로 공간의 정령을 소환해서 나왔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공간의 정령은 그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비밀 중 하나였다.

이 둘 중 하나가 자신의 정식 후계자가 된다면 알려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흐흠,그것은......그래,매직아이템이 있었다.워프마법을 쓸 수 있는."

"와아,그것 굉장히 비싸지 않습니까?역시 스승님이세요!"

"저도 부모님께 부탁해서 하나 정도 준비해놓을래요.그럼 그런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 명은 돈이 많아 그를 후덕하게 해 줄 것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재능이 뛰어나니 후일 그의 명성을 드높여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다 뭐라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돈이 많은 제자가 꼭 그에게 돈을 쥐어 주리란 보장도 없었고 재능이 뛰어난 제자가 자신을 앞지르면 기분이 상할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평소 그의 습성을 보자면 돈이 많은 제자 쪽을 골라야겠지만 명색의 단 한 번 있는 후계자 선택이라 쉽지 않았다.

"후계자라......"

"응?스승님,후계자?후계자라 하셨지요?드디어 저희 중 후계자를 고르시는 겁니까?"

"저,정말입니까,스승님?후계자 시험을 치르나요?언제요?"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제자 둘이 들뜬 듯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오른팔에 메달리는 자주색 머리의 여자가 재능 있는 쪽,위드리.

그가 지어준 이름으로 잡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왼팔에 메달리는 남자가 재능은 그럭저럭이나 돈이 많은 쪽 그레이스 길기.

헤이드리케의 길기 남작가의 차남이다.

그는 양쪽에서 매달리는 말만 한 제자들의 호들갑에 인상을 구기다가 퍼득 꾀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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