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셔,바로 사흘 전에 불렀거든?네 기억력은 원숭이만도 못 하냐?
[......불러준 걸 고맙게 알라고!그보다 이쪽으로 와봐.]
[뭔가?그거 태우라고?]
[죽을래?이 책에 끄트머리라도 건드렸단 봐!물속에 담가버릴 줄 알아.]
[치이익!주인이라고 하나 있는 인간이 너무하는 군,그래.]
아돌이 다가오니 주변이 금세 환해졌다.
아돌은 자체발광 정령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돌이 이름을 잘못 지었네.
난 아돌의 정령진을 만든 사람 이름이 아도르인 줄 알고 아도르라고 지어줬는데 낮에 읽은 책에 의하면 그 사람의 이름은 아도르가 아니라 아르도였다.
뭐,내 이름 아니니까 상관없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려 낮에 읽던 부분의 다음 장을 찾아 책장을 넘겼다.
이쯤일까?빙고!여기다.
정령석으로 만들지 않고 팔찌로 만들어냈다.
정확히는 정령진을 수정에 새겨 그 수정을 팔찌에 박아 만들었는데 정령진을 새겼을 뿐 이로운 능력은 전혀 없는 단순한 팔찌다.
차라리 정령석으로 만들어 박으라고 했지만 베무림은 그 정도로 만족한다고 했다.
소환 능령은 없는 평범한 팔찌로 만든 걸 보아 정령진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파기하지 않고 팔찌로나마 남겼으니 공개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녀석의 속은 도통 모르겠다.
팔찌로 만들었다고?
이 고서가 써진 것은 거의 8천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 팔찌가 남아 있을 확률도 극히 적었다.
차라리 정령석이라면 마나가 깃들어 있어서 오래 가겠지만 겨우 수정이라면 아주 보관을 잘하지 않은 이상 힘들었다.
형태나 보존하고 있으면 다행일까?
매우 아쉬웠지만 아직 네 개의 정령진이 남아 있었기에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체엣!하나 버렸곤.]
[이보게 주인,나 쥐날 것 같네만......]
[코에 침 세 번 발라서 말려.]
[나는 코가 없는데?]
코도 없는 게 무슨 쥐가 난다고.
아돌을 외면하고 다시 책을 읽어 내렸다.
하지만 더 속을 모르겠는 녀석은 바로 르넹 가게나일이다.
그 녀석은 비명의 정령과 수호의 정령진을 가져갔다.
수호의 정령은 몰라도 비명의 정령은 하등 쓸모가 없는데 애초에 왜 계약을 하고 굳이 정령진으로 만들었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녀석은 수호의 정령보다 비명의 정령을 더 마음에 들어 했고 심지어 비명의 정령을 자신의 연인이라고까지 하니 정말 괴짜다.
내 눈에는 까마귀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하여튼 그 녀석은 정령진을 자신의 집에 새긴다고 했다.
자세히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수호의 정령은 복도에,비명의 정령진은 자신의 방바닥에 새긴다고 했다.
차라리 나처럼 깔끔하게 가문의 문장으로 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가져온 계약진은 공간의 정령과 행운의 정령이다.
역시 내 정령들이 최고다.
공간의 정령만 있으면 마법사들의 워프나 텔레포트에 기댈 필요도 없고 행운의 정령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행운이 깃들게 해준다.
행운의 정령이 운을 높여주면 칼에 열 번 맞을 것도 한 번만 맞을 수 있으니 어떤 의미로 신변보호의 역할도 해준다.
두 개의 계약진을 겹쳐서 만들어 낸 복잡한 그림을 이번에 내가 새로 만든 귀족위의 문장으로 삼았다.
내 이전의 이름은 세르게노 마르쵸.
지금의 새로운 이름은 세르게노 테트란,마르쵸같이 이상한 성 따위 형에게 넘기고 나는 새로이 가문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지은 성이다.
테트란,신들의 휴양지를 등에 지고 날아다닌다는 전설 속 대조의 이름.
내 이름은 세르게노 테트란,이 시대 최후의 공간의 정령사다.
"푸하!"
책을 쭈욱 읽어낸 나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이 책에 나오는 다섯 명의 정령사들은 각기 자신이 계약한 정령들의 전속 정령진을 만들어 낸 모양이다.
게다가 테트란,분명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귀족계보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 같은데......
신들의 휴양지,전설의 대조,분명 기억에 있는 대목이다.
아아,뭐였더라?
[마스터!사람이 들어와요.]
[뭐어?아직 다 못 봤는데?]
나는 손에 들린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남은 뒤쪽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다.
하지만 뒤의 내용은 온통 세르게노 테드란이라는 녀석의 자서전으로 꾸며져 있었고 대충 둘러보 나는 서둘러 책을 덮어 다시 책장에 꽂았다.
황급히 사다리로 다가가 오르려는데 문득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다시 책을 뽑아낸 나는 가운데 위치한 어둠의 정령과 비원소 정령들의 행방이 미약하게라도 적힌 부분을 찢어냈다.
누군가 이미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읽을 사람들을 대비해서 말이다.
찌지직 찌익
[읽기만 하신다면서요?]
[몇 장만 찢을 거니까 괜찮을 거야,아마도.]
대여점에서 책을 대여하면 간혹 사람들이 중요한 대목을 찢어가잖아?
그런 거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들이 매우 양심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어차피 남 몰래 숨어든 마당에 그 정도 양심이야 더 깎아내릴 수 있었다.
황급히 찢은 책 조각을 품 속에 구겨 넣는데 번쩍이는 빛 덩이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주인,나는 뭐하나?놀러 가도 되나?]
[아,네가 있었지?오늘은 이만 돌아가.]
[뭣이?그런 게 어딨......]
아돌을 강제 역소환하고 사다리로 올라가는데 내게도 사람의 기척이 잡혔따.
점점 내가 있는 고서란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 여자나 아이 같았다.
살금살금 책장 위로 올라가 몸을 납작하게 눕히고 숨을 죽였다.
한 명인 줄 알았는데 막상 근처에 온 걸 보니 두 명이었다.
1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성인 하나였다.
누구야,대체?
이 늦은 시각에 도서관을 찾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게다가 몰래 들어온 모양인데 신고해버릴까보다.
[......마스터,지금 저 사람들 보고 예의 없다고 생각하셨죠?]
[엉?어떻게 알았어?]
[아카데미 뱀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요.]
뱀 주제에 문자 쓰냐?
그리고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속담 쓰지 마!
[그게 내 속을 아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상황에 맞지도 않는 속담 쓰지 말라고.]
[음,안 맞나?아!이건 맞을걸요,마스터.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
[그거......내 욕이지?]
[아뇨.칭찬이에요,마스터.마스터는 몰래 들어와서 책까지 찢어가면서 다른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고 예의 없다고 하시는 그 뻔뻔함을 저는 숭배하걸랑요.아무렴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욕으로 들리는데?
지금 네놈이 욕을 돌려서 한 거지?
이게 갈 수록 능글맞아 진단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한껏 괴롭혀주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참는다.
나는 잠자코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을 하는 두 명의 불청객을 내려다보았다.
아,그러고 보니 정말 나도 불청객이네.
"음,이쯤에서 꺼냈으니 이 근처에 있을 거야!얼른 책을 찾아 봐,모기."
"네,공주님.책 제목이 '왕족 계보 특집'이었죠?"
"그래 그거야!당장 내일이 그 책에 대한 시험을 보는 날인데 네가 반납해버려서 꼴이 이게 뭐니?"
뭐야?공주?
나는 슬쩍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공주라 불린 소녀를 자세히 살폈다.
음,별거 없어 보이는데.
왕이나 황제를 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차라리 시종으로 보이는 여자 쪽이 더 흥미로웠다.
시종 주제에 굉장히 가벼운 걸음을 하고 있어서 아마도 체술 쪽의 실력자가 아닐까 싶다.
"저는 공주님이 책을 반납해두라고 하시기에......"
"어머!그건 선반 위에 둔 책을 말한 거고.'왕족 계보 특집'은 내가 따로 잘 놔두었잖아!"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데요?"
"그게 잘 놔둔 거지!모기,너 지금 내게 말대꾸하는 거니?"
침대 위에 중요한 물건을 올려놓는 습성은 나와 비슷하군.
그런 버릇을 가진 게 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에 쓸데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모기라는 다소 우스운 이름을 가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시종 차림이었는데 공주의 호위를 겸해 뭔가 훈련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네 이름이 모기면 혹시 동생 이름은 파리냐?
물론 윙윙거리며 피를 빠는 모기를 뜻하는 이름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우스웠다.
"아뇨,제가 어찌 공주님에게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하겠어요?오해십니다."
"흥!또 까불었다간 네 동생 풍뎅이부터 쫓아낼 테야!그럼 너희 가족은 모두 굶어 죽을걸!"
앗,예상이 빚나갔네.
파리가 아니었어!
작은 충격에 몸을 떠는데(웃겨서) 그 기척을 느꼈는지 모기라는 여성이 내 쪽으로 퍼뜩 고개를 돌렸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머리를 숨겼지만 이미 봐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눈이 마주쳤거든.
[마스터,모기가 여길 쳐다봐요.]
[쳇,들킨 것 같아?]
[저는 모르겠어요.아,다른 데로 가려는 모양인데요?]
내 귀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복작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아직 자리에 꽃아놓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서기관 자리로 가보시는 게 어떠세요?"
"그럴까?서기관은 책 쌓아놓기를 좋아하니까 그럴 지도 모르겠네.가보자."
그래,가라,가!
얼른 가!
들켰을 지도 모르지만 저 여자가 자리를 피해줄 때 서둘러 도망가야겠다.
여자와 공주가 멀어지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고 근처에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들어왔던 창으로 나가려 했는데 창들이 내 키보다 1미터는 높이 있어서 여의 치 않았다.
[라이,이리 와.개로 변신해!]
[끄앙,마스터까지 그러시는 거에요?개가 아니라 늑대에요!]
[개나 늑대나!그게 그거지!얼른 나가야 하니까 빨리 변신해!]
[체체쳇.]
라이의 등을 밟고 올라 창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라이를 다시 뱀으로 변신시켜 어깨에 두르고는 운다인을 소환했다.
물론,운다인에게 투명화를 거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다.
투명화를 걸지 않으면 푸르스름하게 빛날 테고,그러면 한눈에 띌 것은 자명했다.
나는 나름 은밀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문제는 방금 그 모기라는 여자가 나를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일까?
[운다인,아까처럼 조심히 성을 나가줘.]
[네,주인님.]
번쩍이는 금발을 가린 검은 두건을 더욱 단단히 쓰고 그 위에 한 번 더 쓴 후드가 혹여 벗겨질까 싶어 끈을 꼭 맸다.
그 외에도 전신을 새까만 옷으로 가리고 장갑에 마스크까지,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눈동자 정도였다.
때문에 조심만 한다면 몰래 들어온 것이 들켰다고 해도 나를 찾지는 못할 터였다.
어둠에 녹아들어 공중으로 도망가는데 저희가 무슨 수로 날 찾겠는가!크흐흐.
[앗,마스터!전방 10미터 앞에 방어막......]
[뭐?그게......]
텅!
삐이이이
뜬금없는 라이의 말에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는 무언가에 이마부터 시작해서 얼굴과 몸을 연달아 박아야 했다.
그와 동시에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보음!방어막인가?
"끄악!"
그 방어막이라는 거싱 바람이나 비 같은 것은 통과시키고 유생물의 출입만을 막는 용도의 것인지 운다인은 자연스레 방어막을 통과해갔다.
그 결과 운다인의 등에 올라타 있던 나만 방어막에 부딪치고 이어 운다인의 몸에서 떨어질 위기를 맞아야 했다.
가까스로 운다인의 지느러미를 잡았지만 연신 귀를 때리는 경보음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젠장!
삐이이이
[저는 분명히 말했어요,마스터.]
[웃기지 마!전방 10미터도 경고로 쳐주냐?이따가 나가서 죽여줄 테니까 일단 잔말 말고 나나 끌어올려!]
[에잉!하지만 마스터,방어막이 갑자기 나타났단 말이에요.전 죄 없어요!]
안 하느니만 못한 경고를 날려준 라이의 꼬리 힘을 빌려 다시 한 번 어깨 힘을 있는 대로 쓴 뒤에야 겨우 운다인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들어올 때는 방어막은 커녁 경비들이 하늘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방어막에 어느새 모여든 경비 대 여섯 명이 방어막 바로 밖에서 웅성거리며 내 쪽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어디다 손가락질이야?뽀샤버릴라!
[라이,방어막이 없는 곳을 찾아봐!]
[으음,없어요.반구 형태 방어막이라 제대로 잡혔는데요.]
내가 왕궁을 너무 우습게 본 걸까?
젠장99.9프로의 확률로 확신하는데 아까 그 모기라는 여자가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나를 보고도 선선히 물러가더라니!
혹시 있을 위험에 대비해 공주를 피신시킨 것뿐이었나 보다.
운다인을 이용해 반구를 따라 도서관 주위를 한 바퀴 빙 둘러 보았지만 뚫린 데라고는 전혀 없었다.
왕궁이다 보니 긴급사태 같은 것이 발동된 모양이다.
좀도둑,아니 훔친 것도 없으니 그것도 과했다.
어쨌든 나같이 죄 없는 침입자 하나에 왕궁도 참 치사하게 나왔다.
방어막 바깥에 모인 경비병들이 혹시 있을 틈을 찾아 방어막 안을 맴도는 나를 따라 졸졸졸 움직였다.
"뭐 구경났냐?꺼져!이 미키마우스 의치 같은 것들아!"
그야말로 어항에 갇힌 관상어 꼴이었다.
잘 풀리는 줄 알았던 일이 꼬여버리자 화가 난 나는 내가 아는 험한 말을 동원해 위협을 가해봤지만 밖에서는 들리지도 않는듯 했다.
슬쩍 방어막을 다시 건드려 보았다.
콩콩
삐이이이
단단한 듯 하지만 그보다는 약간 탄력이 있는 느낌이다.
굳이 따지자면 금속보다는 단단한 고무와 같았다.
물이나 바람 같은 무생물은 통과시키고 유생물의 출입은 막는 방어막이라 이런 느낌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런 것이 깨기 제일 골치 아픈데.
이런 유의 방어막은 강한 충격보다는 날카로운 것으로 째는 편이 손쉽다.
라이를 날카로운 검으로 만들어 찢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나 같은 정령사에게는 식칼을 쥐어주나 보검을 쥐어주나 그게 그거다.
들 수는 있어도 검을 휘둘러 방어막을 찢어낼 기술이 없는 것이다.
[마스터,이거 제가 깰 수 있어요.]
[어떻게?]
[미노타우르스로 변신하면요.]
[으음......]
나는 고민했다.
미노타우르스라......
라이의 변신 목록 중 가장 큰 파괴력을 자랑하는 모습이다.
물론 그만큼 덩치도 커다랗다.
당시 미노타우르스를 넣기 위해 만들었던 솥의 크기기 마기의방 하나를 독차지 했을 정도였다.
소의 머리를 가진 5미터에 다다르는 거대 몬스터 미노타우르스.
소문에 의하면 오우거보다 한 수 위의 괴력을 지닌 몬스터란다.
오우거보다 스피드는 떨어지지만.
어쨌든 오우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숲의 지배자,상급 몬스터 중 하나다.
마기의 말에 따르면 오우거 고기가 맛은 최고라고 한다.
뭐,개인적으로 오우거와 미노타우르스 중 한쪽을 먹으라면 나는 미노타우르스다.
그나마 쇠고기 맛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하세요,마스터?변신해도 돼요?하는 김에 저 인간들도 밟아버리면 재미있잖아요!]
내가 사람을 좀 막 죽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노예상에 한해서였고,그 외에는 될 수 있으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따라 죽일 수 도 있겠지만 밟아 죽이는 건 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살인에도 취향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내 취향은 '피 튀지 않고 깔끔하게,자신있게'정도 되시겠다.
[아니,아돌을 부르는 게 낫겠어.]
[앗,마스터 저는요?]
[네가 변신하는 걸 보여줄 만큼 상황이 궁하지 않잖아.넌 최후의 보루거든,라이.]
라이를 나서게 하려면 적어도 드래곤 정도는 나와줘야 했다.
고작 방어막 안에 갇혔다고 라이를 꺼내들 순 없지.
[호오,그거 좋은 겁니까?]
[그럼!최고 한가하고 최고 멋진 거지.운다인,좀 뒤로 물러서줄래?좀 많이.]
[네,주인님.]
후진 하나에도 미려한 자태를 뽐내는 운다인.
아직 운다인의 꼬리지느러미를 감상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아도르!"
[캬캬캬,캬하하.응?무슨 일인가,주인?이 몸이 데이트 중이셨는데 말이야.]
웃기시네.
정령도 데이트 하냐?
너흰 무성이잖아!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아돌이 소환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데이트 중에 '캬캬캬'하고 웃는다는 점.
"......김밥 옆차기 하는 소리 하고 있네.데이트 중에 캬캬캬 하고 웃으면 너 차인다."
[흥!이 몸이 차일 일은 정령 역사상 없을 거라네.천둥의 정령은 나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거든!캬캬캬.]
천둥의 정령과 전기의 정령의 차이를 모르겠는 나지만 정령이라는 것이 워낙 심오한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됐고,정면에 선더 스톰!"
[보통?]
"보통."
선더 스톰.
일정한 자리에 강력하게 압축된 버개를 연이어 떨어지게 한다.
강한 단일개체를 공격하기에 알맞다.
나와 라이가 정한 강도로는 사람으로 치면 '죽진 않지만 후유증이 남을'4볼트에 해당하는 마법으로 마법사들이 쓰는 5서클 마법이기도 하다.
물이나 바람 공격이 아닌 전기 공격이라면 이 방어막도 통과 시키진 못할 터였다.
방어막이 통과시키는 건 무생물 중에서도 공격성이 없는 것이니 말이다.
콰치지직
저들끼리 엉켜 스파크를 일으키며 방어막을 향해 내리치는 선더 스톰.
위력 면에서는 오우거도 한 방에 잡을 정도니 충분할 터였다.
첫 한 방이 떨어지자 방어막에 미약하게 금이 갔다.
한 번 더 떨어지자 금이 점점 커지면서 거미집 같은 모양을 만들어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는 있지만 선더 스톰은 아직 두 방이나 남아 있었고 세번째 선더 스톰에 방어막은 맥을 못추리고 부서져버렷다.
삐이익 삐이이이
갈 곳을 잃은 네 번째 선더 스톰이 그대로 날아가 작은 건물 외관에 부딪쳤다.
그 강력한 파괴력에 터지듯 깨져버리는 건물의 상층부.앗뜨!
"......야,멈췄어야지!이러면 기물 파손죄가 생기잖아!"
[음?주인이 멈추라고 하지 않았으니 안 멈춘 거네만.나는 죄 없네.]
"웃기 시......운다인!워터 실드!"
[마스터!화살......]
후와앙
텅!터텅!텅!
실드가 만들어지기 무섭게 뚫린 구멍을 통해 빗발치는 화살들.
밑을 내려다보니 그새 경비들의 수는 다섯 배로 불어나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기사들이나 마법사가 쫓아올 수순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떠야 했다.
"운다인!빨리 여길 나가 줘.아돌 너는 이만 돌아가!"
[그래,그래.아참!이보게 주인,다음 주 수요일에는 부르지 말게나.나 데이트......]
뚝
아돌에게 가는 마나를 끊어버렸다.
데이트가 있는 수요일따위 신경써주고 싶지도 않았고 애초에 이곳과 정령계인 그곳은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고!
에잇,볼일 없어도 일부러 부를 테다!
구멍 난 방어막 틈으로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화살이 쏟아졌지만 실드에 막혀 전혀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적당히 경비 녀석들을 따돌리고 빠르게 날아 성을 나가려던 나는 얼마 날지 못하고 다시 멈춰야 했다.
눈앞을 가로막는 미묘한 기척의 차이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마스터,여기도 방어막......]
"알아,젠장!방어막이 하나가 아니었어?"
[이 건너편에도 최소 서너 개는 있는 것 같아요,마스터.]
얻은 것이 많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위기도 맞아야 했다.
방어막으로 다가가 방어의 성질을 알아볼 겸 아까처럼 두들겨보려다 손을 뗐다.
건드렸다가는 경보음이 울릴 테고 경비들이 쫓아올 것을 염려한 탓이다.
물론 이것이 보통 방어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도 있다.
아마도 정령마법으로 이루어진 방어진.
손대는 것만으로도 손 끝을 갈기갈기 찢어낼 것이 분명한 단순한 방어용이 아닌 경계용이었다.
가까이서 본 방어막은 미세한 바람줄기들이 사납게 엉켜 소용돌이 치고 있는 듯했다.
"바람......?"
[그것도 공격 성향이 짙은 방어마법이에요,마스터.]
"나도 알아.이렇게 기분 나쁜 방어막은 처음이야.건드렸다가는 손끝이 다져지고 말겠는걸."
[푸히히.전 안다져지는데요,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