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인!"
[네,주인님!]
"나를 태워줘,운다인!연두색 머리 인어랑 운디네를 찾아야 해!"
서둘러 운다인의 등에 올라탔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에쉬도 운다인의 위로 끌어올렸다.
내 뒤에 에쉬를 앉히고 위로 올라가는데 에쉬가 물었다.
"지,지니,이거 운디네가 아니잖아?"
"운다인이야!물의 중급정령.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줄게,에쉬."
운다인은 금세 상공으로 떠올랐다.
가장 먼저 바다가 보였고 영주성이 눈에 들어왔다.
안나는 어디 있지?
너무 높기에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운다인이라면 운디네를 찾아내리라.
[아,저기요.저 절벽에 운디네가 있어요,주인님.그리고 인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두색 머리 인간도 있어요.]
"정말?그쪽으로 가줘,운다인!서둘러!"
"으악!"
운다인이 움직이자 에쉬가 비명을 지르며 내 허리를 쥐었다.
야!역할이 바뀌었잖아!
바다와 가까운 절벽이 보였고 그 위에 연두색 머리를 휘날리는 안나가 서 있었다.
주위에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비를 막는 운디네의 마법인 것 같았다.
아침부터 마나가 더 빠져나간 건 저것 때문인가?
보오막 안에서는 운디네와 안나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얼른 내려줘!에쉬,너는 운다인이랑 가서 영주님을 찾아와!"
"아,알았어!"
바닥에 내려선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바다에 다가가고 있는 안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이었는데 다행히도 운디네 덕에 비를 맞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를 발견한 운디네가 내 품으로 뛰어들며 울먹였지만 다독여줄 여유는 없었다.
[주인님!히잉,인어님이 죽으려고 해요!어떡해요?흐아앙.]
"안나 씨!왜 그래요?물에 닿으면 죽는다면서요!"
"놔줘요.바다로 가야 해요.바다로......어머니가 나를 부르고 있어요!"
안나는 울고 있었다.
어제 나와 헤어질 때보다도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죽어 있었다.
뭐가 이다지도 그녀를 몰아붙이는 걸까?
"갑자기 왜 이래요?영주님을,영주님을 사랑한다면서요?그런데 이렇게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안 돼요.사랑하기 때문에......그렇기 때문에 가야 해요.내가 가지 않으면 어머니가 그의 성을 삼켜버릴 거라구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안 돼요,안나 씨!가지 말아요!"
있는 힘을 다해 안나를 말렸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죽어가던 인어가 기운이 장난이 이니었다.
그녀는 점점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당신은 바다에 빠지면 죽는다고!그만해!가지 마!
"어머니,잘못했어요!제가 잘못했어요!모두 다 제 잘못이에요!흐아아아."
"안나 씨이!가면......당신이 가버리면 영주님이 슬퍼할 거에요!가지 말아요!"
"......아아,앨버트!"
영주를 들먹이자 안나가 몸을 멈췄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더니 털썩 땅 위로 주저 앉았다.
운디네의 힘 덕분에 그녀에게 내리는 비는 막았지만 그녀가 주저앉은 땅에 고여 있던 웅덩이의 물은 막지 못했다.
그녀가 주저앉은 자리의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보였다.
"히익!일어나요,안나 씨!안나 씨!"
"......이 물에 녹아 없어지면,어머니는 화를 가라앉히실 거에요.내가 사라지면,비겁하게 어머니의 벌을 피하지 않고 달게 받았따면 어머니도 저렇게 화를 내진 않으셨겠죠?"
"왜 그래요?지금까지는 그래도 영주님의 곁에서 잘 버텨왔잖아요!저런 태풍 따위 금방 지나갈 거에요.진정해요,안나 씨."
"아뇨,어머니는 제가 어머니의 벌을 달게 받지 않은 것도 모자라 약은 수로 기운 차리려는 것에 더 화가 나셨어요.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물의 정령을 찾은 제 잘못이에요!어머니가......소리치고 있어요.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라고요.법칙에 따라 사라지라고 재촉하고 계셔요!"
아악!그딴 말 씹어버리라니까?
나는 그녀의 다리가 녹아 없어지기 전에 그녀를 물웅덩이 밖으로 끌어냈다.
하필 웅덩이 위에 주저앉을 건 뭐람?
그리고 물웅덩이에서 건져낸 그녀의 다리는 흡사 녹은 것처럼 얇아져 있었고 새하얀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아,안나 씨 다리가!"
"지니 씨,저 가야겠어요.앨버트를 사랑하지만,그를 슬프게 하기는 싫지만 성이 사라지면 그는 제가 사라지는 것보다 더욱 슬퍼할 거에요.어머니가 그의 성을......아니,그와 성을 통째로 바다로 끌어들이기 전에 돌아오래요.벌을 받고,죄를 뉘우치라고......"
내 어깨를 잡고 일어선 그녀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얇아진 다리로 발을 움직였다.
운디네와 함께 그녀를 말리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나와 운디네까지 끌고 점점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라이!라이가 있었다면!
그제랴 라이를 떠올린 나는 큰 소리로 라이를 불렀다.
염원이든 소리든 좋으니까 빨리 듣고 와 줘!
"라이!라이이이!"
젠장,나는 또다시 후회했다.
괜찮겠지,하는 마음에 놓고 온 건데.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가 오는 날이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다.
저번 달에는 에이니가 사라지자 비가 왔다.
지금은 비가 오자 안나가 사라지려 하고 말이다.
땅에 박힌 돌에 발을 대고 그녀를 말리는데 그녀가 나를 돌아보더니 작게 웃었다.
"지니 씨......당신이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알아요.당신이 그만큼 물을 아끼기 때문이에요.당신이 그만큼 물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거겠죠?하지만 저를 놔줘요.그게 물의 법이고 물의 순리......"
"안나!안나아!"
"지니!"
영주와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운다인의 등에 탄 채 날아오고 있었다.
영주가 온다면,그라면 그녀를 말릴 수 있으리라.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데 손등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물었어?
"아얏!"
자칫 그녀의 옷깃에서 손을 뗄 뻔했지만 가까스로 다시 붙잡았다.
내 손등을 문 것은 안나였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바다에 뛰어들 심산인 것 같았다.
그 점을 알기에 더욱 손을 놓을 수 가 없었다.
"놔줘요,제발.지금 산다고 해도 결국은 그와 나 모두 죽게 될 거에요.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안 돼요!내가,내가 도울게요!아무도 죽지 않게 도울......안나 씨!"
그녀가 끝내 입고 있던 슬립을 벗어버렸다.
벼랑까지는 고작 몇 걸음이 남은 상황이었기에 놀라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고마웠어요.지니 씨......이 은혜는 꼭 보답할게요."
아직 그녀에게 보호막을 씌우고 있는 운디네가 보였다.
말을 마친 그녀가 벼랑에서 곧바로 바다에 몸을 던졌고,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운디네!안나 씨를 지켜줘!그녀에게 바닷물이 닿지 않도록!제발......!"
"안나!안나아......대체 왜?어째서?"
그제야 도착한 영주가 안나가 떨어진 벼랑으로 다가갔다.
그는 허망하게 벼랑 위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운디네가 있으니 괜찮을 거야.
운디네가 반드시 막아줄 거야.
나는 얼이 빠져 작게 중얼 거려야 했다.
"운디네,운디네가......"
"지니!정신 차려,지니!"
에쉬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흔들었다.
에쉬의 어깨를 잡고 휘청거리며 벼랑으로 다가섰다.
울고 있는 영주,괜찮을 거라고 위로를 건네려는데 운디네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운디네는 혼자였다.
"운디네!왜,왜 혼자야?안나 씨는?"
[죄송해요.히잉,분명 마법을 썼는데......바다에 들어간 순간 갑자기 마법이 사라져버렸어요!흐아앙.죄송해요!인어니임~]
맙소사.
그래도 혹시 했는데......설마 했는데......
물의 어머니의 벌이라는 것은 운디네의 마법 같은 것은 가볍게 무시한 모양이었다.
내가 영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혼이 빠진 듯 공허해진 눈의 영주가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안나,같이 가자.날 혼자......두지 마."
영주의 중얼거림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안나와 똑같이 몸을 던진 뒤였다.
안 돼,당신까지 죽으면 그녀가 더욱 슬퍼할 거야!죽지 마!
"운디네!가서 영주를 구해!영주까지 놓칠 수는 없어."
[네,네!주인님.]
안나 씨......그렇게 가야 했어요?
왜요?
이렇게 가버리면 너무 슬프잖아요.
영주가 불쌍해!
주륵,눈물이 흘렀다.
이게 얼마만의 눈물이지?
"안나 씨......영주님은 성이 사라지는 것보다 당신이 사라진 것을 더 슬퍼했어요.당신을 따라 물에 뛰어들었잖아요.그렇죠?"
대답은 없었다.
뚝......하고 내 눈에서 흐른 눈물이 바다로 떨어졌다.
잠시 뒤 운디네가 축 늘어진 영주를 건져왔다.
그는 물을 조금 먹기는 했지만 다행히 멀쩡했다.
에쉬가 영주를 부축해 업었다.
"가자,지니."
나도 진이 잔뜩 빠져 있었기에 에쉬에게 기대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운디네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내가 귀에 달고 있는 것과 같은 물방울 같은 보석이었다.
내가 떨어뜨렸나?
귀를 만져봤지만 두 개 다 붙어있었다.
"이게......뭐야?"
[주인님,저어......이거 아까 안나 씨가 주신 거에요.물거품이 될 때 주인님에게 주라고 했어요.소원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데요.대신 이걸 받아달래요.저 보고 좋은 주인님이 있어서 좋겠다고 했어요.흐윽......]
"하,이런 거......만들 힘 있으면 조금 더 살았어야지.단순히 죽는 게 아니라 영혼이 조각난다는 인어가 뭣 하러 이런 걸 남겨?이런 거......필요 없어!"
운디네가 내미는 '인어의 눈물'을 던져버렸다.
안나,당신이 내게 입은 은혜가 뭐가 있어?
나는 당신을 놓쳤고,당신은 사라졌어.
그걸로 끝이라고.
안나를 만나고,그녀에게 귀고리를 받고,그녀가 사라지고,영주가 자살기도를 하고......
고작 한나절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에쉬는 영주를 성으로 데려다준다며 휭하니 가버렸고,나는 멍하니 여관으로 홀로 돌아와야 했다.
[마스터,왜 그러시는 건데요?늦게 가서 화나셨어요?]
"......아니."
[너무 먼데다가 비가 와서 헷갈렸단 말이에요.마스터,화내지 마세요.네?기운내세요,마스터.]
"그거 때문이 아니랬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부로 머릿속을 비우고 멍하니 있어 봤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앞으로 비오는 날이 싫어질 것 같아.
배개에 머리를 박고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에쉬에요,마스터.]
나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못 들은 척 다른 배개를 이용해 머리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는데도 에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어......지니?"
"나가,화내기 전에."
"저기......잠깐이면......"
"나가,에쉬!너 내가 진짜 화내는 거 보고 싶어?"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던 나는 배개 하나를 문 쪽으로 던져버렸다.
그 배개는 에쉬의 가슴께에 맞고 떨어졌는데 에쉬는 일부로 맞아준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는 거뜬히 피할 수 있으면서.
"미안해,기분이 안 좋은 건 알지만......"
"제발......나가줘."
"......알았어."
에쉬가 나가고 나자 방 안은 더 횡해졌다.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잊자,나쁜 일은 다 잊어버리는 거야.
그런데......그게 나쁜 일이었나?
꿈 속에서 인어 하나를 만났다.
그 인어는 연두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 앞에서 꺄르르 하고 웃더니 퐁하고 터지면서 사라지길 반복했다.
헌데 그중 몇번인가는 웃지 않고 나를 울면서 빤히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내가 '인어의 눈물'을 버려서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
다음날도 멍하니 보냈다.
그 다음날도......
에쉬는 신전에 다녀온다면서 함께 가겠냐고 물어본 뒤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친구가 상심중인데 무심도 하지.
쳇,안나가 사라진 벼랑에 가서 던져버린 '인어의 눈물'을 찾아볼까 아는 고민으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찾으러 가기에는 그것을 받을 염치가 없었다.
운디네를 빌려준 대가는 받았다.
마지막에 나는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했다.
나는 받을 자격이 없었고.
그 보석이 나와 인연이 된다면 어떻게든 내게 돌아오겠지,하는 생각을 떠올릴 때쯤 에쉬가 신전에 다녀왔다면서 내 방에 들어오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은 상자였다.
"뭐야?"
"저기......네 거야,지니."
"내 거?"
조잡한 나무상자를 받아 열어보니 은반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반지를 장식한 푸른 보석은 익숙한 것이었는데 내 귀고리와 같은 것이었다.
"저번에 던져버렸잖아.근데......뭔가 중요한 것 같아서 버리지 말라고 액세서리로 만들어 봤어."
"......근데 왜 반지야?"
"아니,목걸이도 있고 귀고리도 있고 해서......그리고 반지는 금방 된다고 해서!별 뜻은 없어,지니!"
반지는 제법 매끈하게 빠져 있었다.
새끼손가락에 껴봤지만 많이 컸다.
중지에는 작았다.
결국......약지인가?
약지에는 너무도 꼭 맞아서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하핫.아무튼 고마워,에쉬.역시......너밖에 없다."
"벼,별말을 다......"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낀 나는 라이에게도 반지를 보여주었다.
라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요?먹으라고요?]
[뒤질랜드?]
[안뒤질랜드.]
반지가 예쁘기도 하고 신경 써준 에쉬에게 정말 고마웠다.
문득 에쉬에게는 사실을 말해줘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에쉬의 비밀을 알고 있기는 조금 미안하지까 말이다.
"에쉬,너 그거 알아?"
"응?뭐?"
"내 이름이 지니 크로웰인 거."
내 말에 에쉬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어쭈,안 놀라?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아,다른 일행은 모를걸?나도 며칠 전에 그 운다인이라는 정령을 보고 생각한 거거든."
"쳇!아,그럼 이건 어때?에이니 기억하지?"
"응?아아,물론이지.걔가 왜?"
"내 딸이야.아빠는 드래곤."
에쉬는 한센과 비슷한 성격이었다.
남을 잘 믿는 순진한 녀석.
그렇다 보니 내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에쉬는 내게 여태껏 보여주었던 그 어떤 얼굴보다 변형된 표정을 선사했다.
"꺼헉?"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씨이익
(5권에서 계속)
금발의 정령사 5권
살금살금
항구도시 베이키스에 도착하고 나서도 거의 한 달에 걸쳐 도착한 헤이드리케의 수도 미젤란은 과연 자칭 '조화의 나라'라는 헤이드리케의 수도답게 놀랄 만큼 아름답고 멋들어진 전경을 자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선명한 녹음과 그에 어우러진 하얀 건물들.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하냥 벽에 푸른 지붕을 가진 건물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하게 늘어져 있었다.
구석에 위치한 작은 빵 가게까지 어김없이 새하얀 벽에 푸른 지붕을 가지고 있어서 역시 관광국가라는 탄성을 자아냈다.
"굉장해.10쿠퍼가 전혀 아깝지 않은걸."
"캬아!내가 이 맛에 여행한다니까?"
이 통일성이 관광수단의 하나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도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외국인은 10쿠퍼라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성문에 매표소가 달린 도시라니......
놀이동산에라도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우스운 감이 있었지만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나 외에도 에쉬나 게일이 만족스러워 하는 것과 달리 일행 중 돈에 민감한 엔크나 채드는 아까워하는 듯 했다.
"나는 마음에 안 들어.세상에 입장료 받는 도시는 아마 여기 뿐일걸."
"아마가 아니라 확실히 여기뿐이야."
"내 피 같은 돈."
"외국인인 것도 죄냐?쳇!"
나는 마음에 드는데.
10쿠퍼면 천 원 정도일까?
이런 도시를 마주하는 데는 결코 아깝지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지 않는 두 명의 남정네들은 연신 툴툴거렸고 그에 로크스가 나섰다.
"에이,그러지들 마세요.미젤란은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관광지로도 꼽히는 곳이잖아요.관광하는 데 10쿠퍼 정도면 굉장히 저렴한 거에요."
"나도 이 도시가 그 정도 값은 한다고 생각해.특히 저 왕성이."
나도 로크스를 거들었다.
그러면서 도시에 들어섰을 때부터 보이던 헤이케의 왕성을 가리켰다.
내 고향인 드미트리의 왕성이 한껏 격식을 차린 딱딱하고 규칙적인 남성적인 모습이라면 헤이케의 왕성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유순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지극히 여성적이었다.
한 눈에도 화려한 외관이라 동화 속에나 나올 법 했다.
"흥!왕성은 모름지기 드미트리의 것처럼 날카롭고 위엄이 있어야지!저런 계집애 같은 궁은 줘도 안 살아."
"채드 네놈에게 줄 성도 없지만 역시 성하면 우리 대제국 엘란 것이 최고지!그 끝이 보이지 않는 웅장함!그쯤 되어야 위엄있는 궁이라고 할 수 있는 거라고."
채드는 드미트리인 답게 여성적인 헤이케의 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엘란의 수도 네이칼 출신인 게일의 눈에는 엘란의 황성에 비하면 단출한 헤이케의 왕성이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얌마,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황성이랑 왕성을 비교하냐?
"성이 그게 그거 아니야?"
어쭈,엔크 녀석은 한술 더 떴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코란 출신이었는데 코란에는 왕성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왕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명목뿐이었고 그 왕의 자리마저도 코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6부족의 대표들이 5년씩 돌아가면서 맡는다고 한다.
왕국이라기보다는 공화국에 가까운 것이다.
"그건 아니지.나라마다 성의 특성이 있는 법이거든.그전에 도시 자체에도 특성이 있고 말이야.그리고 최고는 우리 드미트리라고!그렇지,게일?"
"응?그,그게 말이야,아!그래,왕국 중에는 드미트리가 최고지."
"왕국 중에는?"
씰룩
나는 한껏 눈가와 입가를 비틀어 보였다.
너,대답 잘해야 된다.
"......대륙 최고지.암 그렇고 말고."
게일에게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게일은 자신이 대제국 엘란의 출신이라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 애국심과 고집 쪽이 더 세지 않을까 싶다.
"호홋,알면 됐어."
"지니!너는 왜 항상 남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는 거야?"
곁에 있던 에쉬가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대화의 주제가 엘란이기도 했고 내가 자신의 사상을 뜯어 고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내 맘이야."
"너어......네 나이가 대체 몇인 줄 알아?열아홉이잖아!나이를 생각해서라도 조금 더 진중하게......"
"아참,그러고 보니까 다음 달이 내 생일이다.선물은 금속이 좋겠어.아주아주 희귀한 걸로 말이야."
"사람이 말하면 좀 끝까지 들어!"
에쉬가 버럭 화를 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19살이라고 꼭 그 나이답게 살라는 법 있어?
나는 굳이 따지자면 17살이었다.
전생에 기억이 17살에 끊겼기 때문에 그 뒤로 환생하고 나서 완전히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3살 무렵부터 나는 내가 17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십 수년을 살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
19살이지만 그 전에 나는 17살이었고 조금 더 가보자면 17플러스19......
으악!
이건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나한테 나이 얘기 하지말아줄래?
민감하거든.
이왕이면 젊은 게 좋다고 나는 17살이고 싶어!
이팔청춘 플러스 일!
방을 잡고,짐을 풀고,식사를 하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일상이었다.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이번에도 안 갈 거야,지니?"
"당연하지."
"오늘 가는 신전은 희생의 여신 아나이스님의 신전이야.그래도?"
"당연하지."
"아나이스님에게 기도 올리고 싶지 않아?"
"당연하지."
일행 중 유일하게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에쉬는 내가 '아나이스님의 사자'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떠올린 듯 했지만 나는 희생의 여신인지 화생방의 여신인지 관심 없었다.
나는 몇 달 전까지,정확히는 마기를 만나고 마기의 마더 아덜레이드에게 내가 '신급의 제재'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무신론자였던 사람이란 말이다.
"그놈의 당연하지는......알았어,알았다고.그럼 우리끼리 다녀올게."
"당연히......그래,잘 생각했어.나는 그냥 도시 구경이나 다니려고.책도 좀 사고 싶고."
에쉬는 유난히 신전이나 마탑에 많이 들렸다.
지나온 거의 모든 도시들의 신전들을 전전했는데 다른 일행은 에쉬가 독실한 신자라 그런 줄 아는 모양이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아니,나와 로크스는 알고 있다.
에쉬가 들르는 신전들이 '시험의 길'에서 정해준 순례지라는 걸 말이다.
"그럼 있다가 보자고."
"있다 봐,지니.선물 사 올게!"
"저도 책을 사고 싶은데......좋은 서점 있으면 나중에 알려주세요,지니 씨."
"그래,나만 믿으라고!잘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