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의 괴력을 익히 아는 일행의 반발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불안하긴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게일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럼 우리도 따라갈래요!우리도 데려가요!"
"죄송합니다.그건 좀......아,한 분만이라면 따라오셔도 좋습니다."
"제가 갈래요,제가!"
게일이 제가 간다며 손까지 들어 보였다.
위험하진 않겠지만 자칫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에쉬를 불렀다.
만약 정체를 들킨다면 차라리 에쉬가 아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에쉬!같이 가.네가 함께 가줘."
"내가?"
"그래,너."
게일에게는 미안하지만 게일보다는 에쉬가 먼저였다.
사병들의 손에 이끌려간 곳은 항구도시 베이키스의 본성으로 영주가 사는 성이었다.
단순히 성에 간 것이 아니라 성 안으로 들어갔고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와 에쉬를 이끄는 사병의 수는 줄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정도였지만 위험해 보이진 않았기에 일단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다.
"왜 성 안으로 데려온 걸까요?"
"1실버 달아놓을게,에쉬."
"이,이런 상황에서도?"
우린 점점 성의 외진 구석으로 들어갔다.
드문드문 보이는 장식품들이 공포감까지 조성할 정도로 으슥하고 조용한 복도가 나왔고 주위가 어두워지자 나도 절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에쉬가 불안한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걸었지만 나는 주위를 경계하느라 제대로 대답해주지는 못했다.
"맙소사.저건 뭐야?까마귀 박제?지니 씨,당신......아니 너 어두운 곳 싫어한다며?괜찮아?"
"응?아,나 까마귀 싫어해."
"까마귀?무슨 소리야,지니?불안해서 그래?"
"어어,나 불도 싫어해."
사병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우릴 끌고 갈 뿐이었다.
나는 에쉬의 말은 한 귀로 적당히 흘려버렸다.
아까부터 뭔가가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흡사 물의 정령과 비슷한,하지만 그보다는 죽어 있는 느낌이 전신을 따끔따끔 자극했다.
[킁,크흥.마스터,뭔가 좋은 금속 냄새가 나요.]
[어디서?]
라이는 다른 냄새는 몰라도 금속 냄새,정확히 말하면 냄새는 아니지만 희귀한 금속 하나는 귀신같이 찾아냈다.
[이 복도의 끝에서요.마치......운디네를 뭉쳐놓은 느낌이에요.]
[운디네를 뭉쳐?그게 뭐야?]
인상을 팍 찡그리고 라이가 말하는 복도의 끝으로 신경을 집중시켰다.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지니,무슨 비린내 나지 않아?"
"아아,나 비린내 안 좋아해.어라,비린내?정말 이게 무슨 냄새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병들이 우리를 복도의 끝에 있던 방으로 안내했다.
사병 하나가 문을 두드리더니 문을 열마 우리를 안으로 들였다.
"들어가십시오.이 안에 연주님과 영부인이 계십니다."
영주만 있다면 모를까,영부인?
전생의 나라에서 영부인은 퍼스트 레이디,대통령의 부인을 뜻했지만 이곳의 영부인은 달랐다.
귀부인,혹은 귀족위가 잇는 사람의 정식 부인을 의미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서서히 열린 문 안에 있는 것은 영주로 보이는 귀한 차림새의 사내 한 명과 말라 병들어 있는 인어 한 마리였다.
아니,한 마리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영주가 인어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서려 있었고,그렇다면 저 인어는 이 사병들이 말하는 영부인이었으니까.
인어 이야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와 에쉬는 동시에 신음을 삼켰다.
비린내의 정체가 저 인어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맙소사!인어?"
"이게 대체......"
[인어네.]
문득 목에 인어비늘을 걸고 있던 나는 한 손을 들어 그것을 꼭 쥐었다.
혹여 저 인어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빼앗길 것을 염려한 탓도 조금 있었다.
"어서 오세요.제가 이성의 주인,베이키스의 영주 앨버트 베이키스입니다.그리고 이쪽은......저의 아내 안나로이입니다.보시는 바와 같이 인어족의 여인입니다."
다소 태연하다면 태연한,어찌 보면 차분한 영주의 소개에 나는 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왜 나를 여기로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작자가 저 인어를 멋대로 잡아두고 있는 거라면,그 덕에 저 인어가 저렇게 말라 있는 거라면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에쉬라고 합니다.이쪽은 제 동료 지니고요."
"반가워요.여자분 쪽이 정령사로군요?......그녀에게선 정말 그리운 향기가 나네요.흠뻑 젖은......물 향기가요."
인어는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홀릴 정도라고 했는데 눈앞의 인어는 그렇지 않았다.
듣기 거북한 긁는 듯한 음성.
상냥하기는 하지만 결코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먋은 슬립을 걸치고 있지만 슬립의 밑으로 뻗은 것은 분명한 인어의 하반신이었고 슬립 옆으로 드러난 어깨며 목이 나를 안쓰럽게 했다.
과거엔 부드러웠을 피부가 지금은 삐쩍 말라 부분적으로 갈라져있었다.
심지어 어깨며 꼬리에 있어야 할 지느러미가 뿌리만 남기고 바스러져 형태가 없었다.
꼬리지느러미의 끝은 흡사 뜯어 먹힌 듯 흉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퍼석퍼석해진 연두색 머리카락.
이게 다 뭔가?
인어를 생으로 말린 꼴이 아닌가?
"지니라고요?당신을 부른 건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무슨?"
"제 아내 안나는 현재 물에 닿을 수 없도록 저주를 받은 상태입니다.그래서 이렇게 마르고,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거죠."
[그럼 안 씻겠네.아니 못 씻는 거죠,마스터?]
물에 닿을 수 없는 저주?
그건 인간에게 공기를 빼앗는 꼴이 아닌가?
인어가 귀족 남성의 부인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인어가 물에 닿을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
헌데 그게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게 무얼 바라시는 거죠?저는 마법사가 아니라 정령사에요.저주를 풀 능력 같은 것은 없어요."
"아뇨,제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저주를 풀 마법사라면 여러 차례 데려와 봤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고,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안나를 편하게 해줄 물의 정령입니다."
그제야 나는 의문이 풀렸다.
갑자기 나타나 나를 억지로 데려온 것,그 전에 선원이 내게 영주 운운하며 도와달라고 했던 것,내 정체가 탄로 나서가 아니라 이 인어가 물의 정령을 필요로 해서였나 보다.
"......제 정령이 어떻게 그녀를 도울 수 있다는 거죠?"
"그냥 물의 정령을 소환해 그녀 곁에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안나가 조금이라도 안식을 가질 수 있게요."
"어렵지는 않지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영주님은......왜 바다의 권속인 인어를 지상으로 데려온 거죠?그녀가 괴로워 할 것을 뻔히 알면서,왜요?혹시 그녀를 납치해온 것 아닌가요?"
정말 납치라면,난 영주를 도울 수 없었다.
그럴 바에야 정체가 탄로 나는 한이 있어도 이 인어를 바다로 되돌려줘야 했다.
내가 왜 이 안나라는 인어에게 이토록 신경을 쓰는 걸까?
마치 뭔가에 홀린 듯했지만 나는 그녀를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싸였다.
"지니!그런 것을 묻다니......실례야!"
"아뇨,괜찮습니다.안나가 미리 말해주더군요.정말 진정한 물의 정령사라면 저에게 따지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을 구하려 들 거라고요.그것이 물의 어머니가 물의 정령사들에게 준 혜택이자 속박이라고 했습니다.그녀의 반응은 바람직한 거에요."
혼란스러웠다.
물의 어머니?
그게 누구지?
물의 정령사인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 상관관계가 있단 말이야?
혼란스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녀가,안나가 작게 입을 열었다.
"앨버트......저 정령사 분과 둘이 있고 싶어요.그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니......잠시만 나가 있어 줄래요?"
"그래?알았어.내가 필요하면 이 끈을 잡아당겨,안나.할 수 있지?"
"물론요.아직 그럴 힘은 남아 있는걸요.그러니 어서,어서 나가요."
[엥?나는 마스터 곁에 남을......마스터!마스터~]
영주는 물론이고 에쉬의 손에 라이까지 끌려나갔다.
남은 건 나와 안나뿐이었다.
그녀는 작게 싱긋 웃더니 내게 손짓했다.
그 손짓에 따라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본래 영주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안나는 커다란 나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괜스레 안쓰러웠다.
내가 원래 이런 심성이 아닌데......왜 이러지?
"내가......내가 이상해요.당신을 마주한 순간 안타깝고......그리운,뭔가 조종당하는 듯한 느낌이에요.당신이 내게 뭔가를 한 건가요?"
"후훗, 아니요.그건 당신이 물과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래요.아,인간들은 친화력이라고 하던가요?"
나와 똑같이 후훗하고 웃었는데 어찌 이다지도 느낌이 다를까.
근데 친화력 때문에 이 인어를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친화력은 단지 정령을 소환하고 다루기 쉽게 해주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런 능력도 있지만 그보다는 물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는 역할을 하죠.왜냐면 물의 친화력이란 기본적으로 물이 사랑하는 마음이니까요.그러니까......아,물이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에게 힘을 주는 거에요.그리고 당신은 물에게 사랑 받는 만큼 물을 아끼게 되죠.모든 것은 물의 어머니의 뜻이랍니다."
"물의 어머니?물의 정령왕 엘라임 같은 건가요?"
"으음,그완 달라요.물의 정령왕도 결국 물의 어머니의 자식인걸요.엘라임께서는 '물'그 자체가 되어 물을 조종하시지만 물의 어머니는 '물'을 만들어내시는 분이에요.의지가 있지만 없고,없지만 있는......"
엘라임도 물을 조종하잖아.
뭐가 다르다는 거야?
간혹 라이가 늘어놓는 설명만큼이나 나를 골치 아프게 했다.
아아,설명 듣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결론은......내가 친화력이 높아서 당신을 애틋하게 생각한다는 거죠?"
"네,그거에요.저는 물의 권속이기에 친화력이 높은,그러니까 물을 아끼는 마음이 강한 당신이 물과 같은 제게 과한 감정을 느끼게 된 거죠.그리고 저도 당신이 곁에 있음으로써 편해지고요.보세요.아까보단 건강해 보이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기운 없는지 연신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지금은 또박또박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피부가 까칠한 것은 여전하지만.
"그러네요.친화력이 높은 내가 곁에 있음으로 이 정도라면 물의 정령을 불러주면 더 좋아지는 거겠군요?"
"네,그래서 당신을 찾은 거랍니다."
마음 같아서는 불러주고 싶지 않지만 저 까칠한 피부를 봐서라도 불러줘야겠다.
물이 꼭 필요한 인어가 물을 가까이 할 수 없으니 대신 물의 기운이 강한 물의 정령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인어는 물의 요정이라고도 하니까 정령과는 비슷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막무가내로 끌려오는 바람에 조금 화가 났지만 당신을 봐서 용서할게요.운디네!"
[네,주인님.]
"운디네,저 인어 분이 해달라는 대로 해드려."
"어머,건강한 아이네?이리 오렴,얘야."
안나는 운디네를 흡사 자신의 아기인 듯 소중히 품에 안았다.
운디네 또한 그녀의 품에서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굉장히 편해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가 운디네를 꼬옥 안는 순간 푸른 무언가가 물컹물컹 안나를 감싸 안았다.
그것은 그녀의 바스러진 피부에 점점 생기를 주는 듯했고 이내 그녀의 피부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끈해졌다.
"굉장하네요."
"이 아이가 물의 기운을 나눠줬어요.직접 물에 닿으면 더 좋겠지만......어머니의 벌이 사라지지 않는 한 힘들 거에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왜 인어면서 인간과 살고 있죠?그 벌이라는 건 뭔가요?아까 말하셨던 저주?"
"네,제게는 당연한 벌이지만 앨버트에게는 저주로 보이는 모양이에요,이건 인어로서의 약속을 제가 어겼기 때문에 내려진 벌이랍니다.우리 인어에게는 어겨서는 안 될 조항 7가지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인간을 사랑하지 말 것이에요.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됐나요?"
그럼,그 영주를 사랑해서 여기 있는 거란 말이야?
그 꼴을 하고?
나는 그녀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인어는 인어를 사랑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듯 말이다.
괜히 그것을 어긴 결과를 그녀는 몸소 느끼고 있지 않은가.
"왜 그 조항을 어긴 거죠?인어로서......물에 닿지 말라는 건 우리 인간에게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같아요.그런 벌을 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해야 했어요?"
"숨을 쉬지 못해도,물이 저를 저주해도,그를 사랑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요.그의 곁에 있는 것만이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표현이었어요."
"저는......모르겠네요.이렇게 병들어가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나라면 안 그럴 텐데."
절대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다.
나라면 말이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부담스러운 내게 안나의 사랑은 너무 깊기 때문인지 거부감이 들 뿐이었다.
"후훗,본래......인어의 사랑은 강하고 굉장히 독선적이죠.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그 인간을 물속으로 끌어들여 어떻게는 인어의 마을로 데려가요.그 인간이 숨이 막혀 죽든 말든요.그 인간을 사랑할수록 물거품이 될 걸 알면서도 우리는 꼬리가 사라지면 손으로,손이 사라지면 몸과 머리카락으로라도 마지막까지 죽은 인간을 끌어안고 함게 죽어가요."
"그건......제가 아는 동화만큼 아름답지 못하네요.그리고 당신은 그러지 않았잖아요.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것 아니에요?"
"저도......그러고 싶었지만 그 본능보다 더욱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바다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제가 육지로 올라온 거죠.그리고 정확히 말씀 드리자면......제가 받은 벌은 물에 닿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물에 닿아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물에 닿는 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릴걸요."
내가 아는 동화랑은 너무 다르잖아!
하지만 그쪽보다는 이쪽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본인에게 듣는 이야기니 말이다.
그 물의 어머니라는 건 물의 신과 같은 걸까?
잘은 몰라도 정말 너무하지 싶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단순히 서로 사랑하겠다는데 왜 방해한단 말인가?
"그 물의 어머니가 저주를 내리는 거랬죠?사랑하면 어때서 그런 저주를 내리는 거죠?그리고 인어는 한 둘이 아니고 인간도 한 둘이 아니잖아요!수 많은 인어 중 하나고 더 많은 인간 중 하나가 만날 뿐인데 너무 잔인한 처사에요.물거품이 되면 죽는 거잖아요."
"아뇨,우리에게 물의 어머니가 하나뿐이듯,어머니에게는 저도 하나에요.모든 인어의 어머니고 아무리 닮은 아이들이 많아도 저는 결국 하나인 걸요.그리고 차라리 죽는다면 저도 이렇게 두렵진 않을 거에요.물거품이 된다는 건 죽는 것이 아니라......영혼의 조각으로 화해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것이거든요.물의 망령이 되어버리는 것.우리 인어같이 오랜 수명을 가진 존재들에게는 최고의 벌이죠."
차라리 죽으면 환생이라도 하겠지만 영혼이 바다를 떠돌면 환생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어들은 인간을 사랑한 죄로 다음 생마저 빼앗긴단 말인가?
그 어머니라는 존재가 미워질 것 같았다.
"......왜 인간과 인어가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그게 그렇게 엄청난 벌을 받을 만큼 큰 죄인가요?"
"저는 몰라요.다만 어머니가 정한 규칙이고 법이죠.우린 그것을 지켜야 할 어머니의 권속들이고요.그리고 저는 그 법을 어긴 죄인이지만......지금 이렇게 어머니의 눈을 피해 숨어 있죠.물거품이 되기 싫어서요.아직은 그와 함께 있고 싶은걸요."
"......모르겠네요.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지만 이런 얘기는 제 전공이 아니라서요.아,운디네를 내일까지 빌려드릴까요?소환 상태라면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나름 선심을 썼다.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 구경이 어디 쉽겠는가?
그리고 결속력 때문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머,정말요?고마워요.하루 정도 물의 기운을 가까이 하면 변신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돌아올 거에요.오랜만에 앨버트에게 가봐야겠어요!"
"변신?뭐로요?"
"아,인간으로요.인어들은 저마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물고기로 변신할 수 있어요.어린 인어들은 물고기로만 변신할 수 있지만 성년의 인어들은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죠."
"......굉장하네요.기운이 모자라면 변신할 수 없는 모양이죠?"
으윽,앞으로 생선 먹을 때 물어보고 먹어야 겠다.
'혹시 인어세요?'
대답할 리 없나?
그래도 생선 먹기가 조심스러워 질 것 같다.
"그래요.우린 마나 대신 물의 기운으로 힘을 쓰거든요.물을 조종하거나 변신하거나요.혹은 소원을 들어주거나,신세를 지었거나 은혜를 입은 상대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우리 인어들의 의무거든요.당신처럼 도움을 받는 분에게 말이에요."
"앗,그럼 제 소원도 들어주시는 거에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어쩐지 도와주고 싶더라!
소원으로 희귀한 금속을 모두 달라고 할까?
아니 가볍게 우주 정복?
아니다.
정복한 뒤가 귀찮으니 관두련다.
"아뇨,지금의 저는 소원을 이루어드릴 만큼의 기운이 없어요.대신 이것을 드릴께요."
"귀고리?무슨 보석이죠?"
안나가 소원 대신 건넨 것은 자신이 하고 있던 귀고리 한 쌍이었다.
마치 물방울 같은 색과 모양을 가진 것이었다.
새끼손톱 반 정도의 크기.
인어가 하고 있던 것이니만큼 뭔가 희귀한 금속일까?
난 귀 안뚫었는데.
전에 파티에서 쓰던 것은 집게 같이 집는 형식의 귀고리였기에 가능했지만 이것을 쓰려면 귀를 뚫어야 할 듯했다.
"인간들이 흔히 인어의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에요.어떤 이들은 그게 인어가 흘린 눈물이 굳어 진주가 되는 거라고도 하지만 다 틀렸죠.정확히는 인어의 혼이 담긴 물의 기운의 집합체 같은 거에요."
"인어의 혼?이게요?그럼 두개니까 혼도 두개인 건......?"
"물론 두 개에요.하나는 제 친어머니의 혼이,하나는 제 친아버지의 혼이 담겨 있죠."
귀고리를 쥔 오른손에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맙소사,인어 귀신?
나 귀신 안 좋아해!
"이,이런......중요한 것을......제게 주어도 되는 거에요?"
"물론이죠.그걸 드리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은 걸요.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건 아니에요.우리 인어들에게는 '인어의 눈물'은 유품 같은 것이니까요.왜,인간들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죠?저희 인어는 이 보석을 남겨요.혼의 일부가 담겨져 있을 뿐 대부분은 살아생전 가지고 있던 물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피부에 가까이 가지고 있으면 당신에게 힘을 줄 거에요.의식 같은 것은 영혼과 함께 하늘로 갔으니 걱정 마세요.혼이라고 해봤자 극히 일부라니까요.정말이에요."
내 얼굴이 파랗게 질린 탓인지 안나가 설명을 늘어놨지만 그래도 무섭긴 마차가지였다.
흐이이.
귀신 싫어,인어 귀신 더 싫어.
이게 라이가 말했던 희귀한 금속?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는......"
"가지고 있으면 친화력이 대폭 상승할 걸요.정령을 소환하고 다루기도 훨씬 편해질 거교요.고대 물의 정령사들은 그걸 찾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대요!"
"캄싸합니다."
그렇다면 받아야지,뭐.
그렇지 않아도 아돌에 페인에 타잔에 치타에 정령이 너무 많아서 버겁던 차니 말이다.
귀신이라고 생각지 말고 수호령쯤으로 생각해야겠다.
그리고 이 귀고리를 남긴 인어들은 이미 환생했을 거야.
암,그렇고 말고!
안나도 말하잖아,혼의 일부만 남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는 귀고리 두 개를 받아들고 방에서 나왔다.
내일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하며.
운디네를 유지하느라 마나가 빠져나가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 이 정도의 마나는 일주일도 감당할 수있으니 여유로웠다.
미안했다면서 영주가 직접 여관을 잡아주었다.
나에게는 성에 방을 마련해준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뭐였던 거에?왜 불려간 거야?나쁜 일은 아닌 것 같던데?"
"응?아니,내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나 봐.그렇지,에쉬?"
"아,으응.지니가......아는 사람인 줄 알았대.별일 아니었어."
영주는 우리에게 안나의 이야기를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베이키스 백성들 사이에는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외부에는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고 있단다.
실제로 말해줘도 믿어줄지 의문인 이야기였다.
이 성의 영부인이 인어인데 물에 닿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물의 정령만이 치료약이다.
하,다른 사람들은 동화의 한 구절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일단 나는 서둘러 내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라이에게 안나에게서 받은 귀고리를 내밀었다.
"라이!이거,똑같은 거 만들어낼 수 있어?네가 말했던 좋은 냄새가 이거 맞지?"
[그게 이건 맞지만......킁킁,이거 흡수할 수는 있어도 똑같이는 못 만들어요,마스터.모양만이라면 되겠지만 뭔가......제 권한 밖의 것이 섞여 있어요.]
"역시 안 되는군.치잇!"
나는 귓불을 만져보았다.
그럼 이 두개 밖에 없다던데,정말 귀를 뚫어야 하나?뭐로 뚫지?
[이게 뭔데요?이거 보석은 보석이지만 그보다는 살아 있는 것에 가까워요.옛날에 비슷한 걸 본 것 같기도 한데.]
"인어의 혼이 섞여있대.그 인어가 준 거야.이게 물의 친화력을 높여준댔어."
[호오,귀고리네요?마스터가 쓰시려면 귀를 뚫어야 하잖아요.제 털 하나 드릴까요?]
네 털이랑 내 귀 뚫는 거랑 무슨 상관이니?
나는 라이의 털을 내려다보았다.
풍성하고 하늘거리는 황금빛 털.
나더러 이 털로 귀라도 뚫으라는 거냐?
"네 털로 귀를 뚫으라고?"
[네,이 정도로 얇으니까 단단하게만 만들면 귀도 뚫을 수 있을걸요.]
그,그건 그러네.
나는 라이의 수북한 털 중 하나를 뽑아들었다.
내 중지보다도 긴 그것은 점점 빳빳해지나 싶더니 이내 바늘같이 단단해졌다.
내가 내 귀를 뚫자니 잘못 뚫을 확률이 높았고 라이에게 시키자니 그건 더욱 잘못될 확률이 높았다.
늑대한테 귀 뚫어달라 그러면 나는 진짜 미친x이 될 거다.
귀가 아니라 머리에 구멍이 뚫릴지도......
"라이,가서 에쉬 데려와."
[엥?왜요?제가 뚫어볼래요.저 시켜주세요,마스터.]
"아무리 급해도 늑대 손은 안 빌려.가서 사람......아니,에쉬 데려와!"
[쳇,마스터.애정이 식으신 거죠?크흥.]
너한테 내 귀를 맡길 애정은 없어,라이.
그 고양이 같은 손으로 감히 주인님 귀를 뚫겠다고?
어림 없다.
"맞고 갈래,그냥 갈래?"
라이가 구시렁거리며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에쉬와 함께 나타났다.
라이가 에쉬의 엉덩이를 머리로 밀면서 데려오고 있었는데 물지 않고 데려오는 게 기특했다.
"왜 그래,누렁아?이봐,누렁......아,지니?"
[누렁이 아니야!크앙!]
"들어와,에쉬!내가 라이 보고 널 데려오라고 그랬어."
열린 문 밖에 엉거주춤 서 있던 에쉬가 방으로 들어왔다.
에쉬는 불안한지 연신 눈을 굴렸다.
이 녀석은 감이 은근히 좋단 말이지.
최근 내가 자주 괴롭힌 탓인지 내가 부르면 불안해하는 녀석이다.
"왜,왜에?뭘 시키려고?"
"별건 아니야.이걸로 내 귀 좀 뚫어줄래?"
라이에게서 뽑은 전생(?)라이의 털을 에쉬에게 건넸다.
휘둥그레지는 에쉬의 눈.
뭘 그리 놀라?
칼도 쓰는 놈이 바늘 같은 것 하나에 말이야.
"이,이게 별 일이 아냐?"
"뭐가 큰일이라고?귀 뚫는 것,하나도 안 아프대.한 번에 푹!잘 뚫으면 말이야.그러니까......너만 믿는다,에쉬."
오른손으로는 바늘을 내밀었고 왼손으로는 에쉬의 어깨를 짚었다.
뭐 별거 있겠니?
그냥 검술 하듯 찌르는 거야!
싫다고 반항하는 에쉬와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 정확히 3분 뒤 결국 나는 에쉬의 손에 바늘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3초 뒤 나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아아악!"
"끄으아아악!"
아프잖아!
누구야?귀 뚫는 게 주사보다 안 아프다고 한 게?
나는 바늘이 걸린 한쪽 귀를 쥐고는 에쉬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나보다 두 배가량의 비명을 질러놓고도 뭐가 그리도 무서운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야,귀 뚫은 건 나거든?
"......한 번 더."
내키지는 않지만 귀는 두 개고 귀고리도 두 개였다.
나는 다시 라이의 털 하나를 뽑아서 에쉬에게 내밀었다.
"맙소사!개털이었어?"
[난 개가 아니란 말이야!크아앙!]
아참,객관적으로는 개털이었지?
에쉬는 당장이라도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할 것 같았다.
다음 날 성으로 가기 위해 여관을 나오니 엄청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항구는 갑작스러운 태풍주의보로 모든 선박이 운항을 중지했다.
파도가 매우 높아서 항구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피난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고작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이라는데 나에게는 남이야기 같을 뿐이었다.
지금은 단지 겨우겨우 귀에 달게 된 이 귀고리를 안나에게 보여주겠다는 작은 소망에 빗속에서도 발걸음이 가벼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 무렵부터 마나가 더 빠져나가고 있는데,운디네가 무언가 하고 있는 걸까?
"후드를 하나 더 쓰는 게 낫지 않아,지니?"
"아니,이거면 돼.그리고 더 쓸 후드도 없잖아."
"내 거 써.나는 남자잖아.비 정도는 괜찮아."
"어허!레이디 취급해줄 필요 없거든요?"
영주는 나와 함께 에쉬도 초대했다.
그 덕에 에쉬와 함께 빗속을 걷고 있었는데 비가 오는 관계로 라이는 여관에 두고 왔다.
안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라이가 함께 가면 또 쓸데없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비가 많이 내리기는 했다.
점점 심해지는 빗줄기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성문에 다다르자 문지기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지니 양과 에쉬 씨,맞으시죠?큰일 났습니다.영부인이 사라지셨어요!"
"에엑!어디로요?비도 오는데?물에 닿으면 안 된다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지니?"
"그,그게 오늘 아침에 갑자기 사라지셔서 영주님과 사병들이 모두 찾으러 갔지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맙소사,찾으러 갔다는 건 성 밖으로 나갔다는 거잖아?
비 맞으면 물거품이 된다며?
나는 일단 비가 잔뜩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찾아야 해!
결속력인지 뭔지가 나로 하여금 그녀를 찾으라고 부추겼다.
왜 나는 항상 뭔가를 찾아다니게 되는 거야?
"우리도 찾으러 갈게요!가자,에쉬."
"응?아,물론이지!"
나는 생각할 시간도 모자랐다.
그녀가 어디로 갔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앨버튼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그렇게 기뻐했는데.
대체 어디로?아,그래.운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