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9/71)

그래도 코이렌까지 들먹이며 거부하려 했기 때문인지 에쉬는 포기하고 물러선 듯 했다.

미안해,에쉬.

하지만 위에서 너를 도와 네 가디언이 되는 걸 허락해줄 리가 없어.

나는 나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본국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는걸.

싫을 정도로 말이야.

나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본국으로 연락을 취해야 했다.

미리 약속했던 날짜보다 조금만 늦게 연락을 해도 학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가 제때 연락을 하지 않으면 납치로 보고 군대까지 일으킨다는데 거의 협박 수준이었다.

"그럼......말입니다."

에쉬가 나를 마주보지 못하고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에쉬의 주먹이 살며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더 할말 있어?

포기한 것 아니었나?

"......?"

"혹시......10년......아니,정확히 9년 전에 노예상에서......만났던 흑발의 소년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지.너잖아.

응?설마......너 알고 있었던 거야,에쉬?

나는 눈을 찡그렸다.

혹시 녀석은 나를 알아봤지만,그 때 그 아이가 나라는 걸 진작 알아봤지만 자신이 변장 중이기 때문에 아는 척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와 똑같은 이유로?

하,그럼 그거 정말 바보 같은 일인걸.

[전 기억 안 나는데요,마스터.]

라이가 온 건 에쉬가 쓰러진 다음이었지?

기억 안 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에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되새기게 되니까.

"기억해요.제 은인이니까요."

"은인......입니까?어째서요?오히려 당신이 그를 도왔잖아요?"

"그가 아니라면 지금의 저는 없을걸요.그가 내 대신 검을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검을......앗!"

나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9년 전 의사가 말했다.

검이 손의 신경을 손상시켜서 손아귀 힘이 필요한 검술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그런데 지금의 에쉬는 멀쩡히 검을 쓰잖아.

그것도 꽤 수준급의 검술을 구사한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그러세요,지니 씨?"

[왜요,마스터?]

에쉬가 놀라 벌떡 일어난 내게 왜 그러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마침 상처가 나잇는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냉큼 낚아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본다고 내가 뭐 알겠는가.

"이 손......이 손,칼에 관통됐었잖아요?그런데 어떻게 검을 쥘 수 있죠?"

"네?그,그게......아,신관님에게 보여서......치유마법을......"

"신관?치유마법......"

하지만 신경을 다시 붙이려면 교황 정도는 되어야......

잠깐,황제의 아들인데 교황 정도는 부를 수......있겠구나.

나는 그만 허탈해졌다.

바보같이 고칠 수 없다는 의사 말만 듣고 상심했다가 손이 멀쩡하다는 것도 이제야 알고.

아무리 에쉬가 검을 잘 쓰지 않는다지만 내가 봐도 바보 같았다.

주제 넘게 황자님을 걱정했던 거로군.

하긴 잘린 다리도 붙이는 교황인데......정령으로 치면 최상급 정령이잖아?

"왜 그러세요?어디 아프십니까?"

"아뇨,그냥......조금 허탈해져서요.괜찮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에쉬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까 말씀드린......그 흑발의 소년 말입니다.그 아이가 저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면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그때의 만남을 기억해서라도요."

그냥 본인이라고 말해라,에쉬.

나는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

9년 전 얘기를 꺼내야 할 만큼 에쉬는 황태자가 되는 데 필사적인 걸까?

황제가 되면 뭘 하려고?

"......계속 도와달라고 말하는데,내게 뭘 도와달라는 거죠?구체적으로 말해줄래요?"

"저와 함께 여행을 해주세요.제 동료로서 저를 믿고 따라와 주셨으면 합니다.보수도 없고,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함께 가주신다면 정말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저와 함께한 시간이 헛되다고 느끼진 않으실 거에요."

"아핫,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어요?채드나 게일,그리고 엔크에게요."

"네?아,거의......비슷합니다."

바보 같기는......누가 그런 말을 듣고 '네!'그러고 쫓아가준단 말인가.

하지만 에쉬를 조금 겪어봤다면 따라줄지도 모른다.

너무 착해빠진 녀석이라서 말이다.

그 증거로 세 명의 동료를 모았지 않은가.

아직 두 명이 모자라지만.

"휴우,나라면 조금 더 터프하게 말할 텐데요.'네 인생은 내가 책임져줄 테니 한 번 따라와 봐!'정도?뭐 개인 취향이죠."

"그렇게 말하면......함께 가주실 겁니까?"

"음,그보다는 그 흑발 소년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솔직히 말해준다면 생각해 볼게요."

에쉬는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나나 믿어주지 않는 다른 사람이라면 턱도 없는 사실을 말이다.

"그 소년이 바로 접니다.그렇게 말하면......믿으시겠어요?"

머리색도 달라,눈 색도 달라,얼굴도 달라!

누가 그때의 흑발 미소년과 이 평범한 갈색 머리 청년을 동일인물로 봐주겠는가.

그래도......

"믿어요.왜냐면 눈빛이 똑같거든요."

"그럼 함께 가주시는 겁니까?이 배표를 받아주시겠어요?"

[와,그럼 가는거에요,마스터?저 아직 더 놀고 싶단 말이에요.]

놀러 가는 거 아니거든!

만약 정말 에쉬를 따라가려면 일이 복잡해진다.

국왕에게도 허락을 구해야 햇고 이엘 스승님에게도 다시 연락해야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국왕이 허락을 해주느냐이다.

우리나라가 엘란과 동맹국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지금도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상황인데 더 늦는다고 했다가는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아,잠깐.

내가 에쉬를 도와 에쉬가 황태자가 된다면,그리고 에쉬가 황제까지 오른다면.

호오,이거 남는 장사일지도?

아니,많이 남아!

"죄송하지만 아직 확실히 말할 순 없네요.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단 주군이 있는 몸이거든요.하지만 허락을 받는다면 잠시 도와줄 수는 있을지도 모르죠,아마도."

[마스터의 아마도는 헷갈려요.크흥.]

그새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걸렸던 건 에쉬를 돕고 싶어도 본국에서 허락해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는데,까짓 에쉬를 황제로 만들면 되는 거잖아?

대제국의 황제와 친분을 만드는 셈이니 그럼 우리나라도 좋고,에쉬도 좋고,나도 좋고.

에이니는 조금 걸리지만 이엘 스승님이 계시니까!

그래,에쉬를 황제로!

"저,정말요?그럼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조금 정도는요.후훗."

앗싸!

드래곤에,황제에 이거 레어 급 친구 세트인걸.

이젠 신이랑 친구 먹으면 끝나는 거군.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나는 페밍턴의 마탑으로 향했다.

역시 이래서 도시가 좋다니까!

마탑이 곳곳에 있잖아.

일단 마탑을 찾은 이상 학장과의 연결은 누워서 빵먹기였다.

[평소에는 항시 늦더니 오늘은 웬일인가?아침부터 통신을 넣고 말일세.]

"오늘은 학장님과 의논할 일이 있어서요."

[의논할 일?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전에 이엘 선생이 자네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다네.자네가 보낸 아이가 너무 뛰어나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더군.그 덕에 자기가 수련할 시간이 없다며 한참을 불만을 토하고 갔다네.]

하하핫.이엘 스승님도 참.

그 녀석 뛰어나기도 하지만 말 안 듣기도 보통이 아니라 고생 좀 하고 계실 터였다.

그 고생이 앞으로 몇 달 더 추가될 것 같으니 봉봉을 많이 사가야겠다.

"그보다 학장님,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다니까요.혹시 주위에 다른사람이 있다면 물려주세요.비밀스러운 일이거든요."

[지금 나는 혼자 있다네.왜?혹여 벌써 타국 사람들이 자네를 찾아갔나?]

"그건 아니에요.거의 후드를 쓰고 다니는 데다가 벗어도 머리가 짧기 때문에 다들 저를 귀족아가씨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그리고 제가 살아 있다는 소문 자체가 그다지 퍼지지 않았어요."

귀족 여성들은 대개 긴 머리를 고수한다.

머리가 길수록 관리가 힘들기 때문에 길고 윤기 나는 머리는 부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긴 머리는 귀족 여성이라면 꼭 지녀야 할 조건 중 하나인 것이다.

내가 머리를 자르고 처음 통신했을 때 내 모습을 본 학장이 그만 혈압이 올라 기절할 뻔했으니 말 다했다.

[그럼,대체 무슨 일인가?]

"학장님,이건 정말 기회일지도 몰라요!"

[기회?대체 뭐기에 자네가 그리도 뜸을 들이는 건가?어서 말해보게.]

뭐든지 뜸이 중요하다.

내가 대뜸 '아는 황자 하나 만났는데 같이 여행 좀 하다 갈게요.'하고 조르면 될 일도 안 된다.

적당히 우연을 가장하면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학장님,'시험의 길'이라는 것 알고 계시죠?엘란의 황태자 선별 방법이요!"

[물론 알고 있네.헌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지금 제가 함께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시험의 길'에 오른 황자인 것 같아요.아니 절대 확실해요,학장님!"

[뭐,뭣이?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시험 중인 황자는 철저히 정체를 숨긴다던데.]

지가 아무리 숨겨봤자,날고 기어 봤자 이 지니 크로웰님 손바닥 안 아니겠는가?

나는 씨익,웃으며 말했다.

"그가 수행원과 몰래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어요.현재 좋은 가디언을 찾지 못해 고생 중인 것 같더군요."

[오오,자네는 정말 매일같이 나를 놀라게 하는군.그래,그렇다면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무언가?그 황자에게 스파이라도 보낼까?]

"스파이 따위보다는 제가 직접 그 가디언 후보가 돼볼까 하는데......어떠세요?정체를 숨긴다 하더라도 물의 정렁사인 저 정도면 훌륭한 적합자 아니겠어요?"

[오오,그거 좋군.하지만 굳이 자네가 할 필요가 있을까?누가 황자인지만 안다면 쓸 만한 인재야 얼마든지 보낼 수 있다네.]

아이,정말.

내가 한다고 내가!

이 영감탱이가 꼭 태클을 걸어요.

하지만 학장의 반응으로 보건대 조금만 더 구슬리면 될 것 같았다.

"아뇨,신중을 가해야 하는 만큼 제가 직접 나서고 싶어요.학작님,마침 저와 조금이지만 친분을 쌓은 터기도 하고요.그리고 생각해보세요!스파이 따위로 할 것이 아니라 황태자 후보......아니 황제 후보와 진정으로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아니에요."

[그야 그렇지만......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한둘이 아닐세.그리고 자네는 한창 몸을 보호해야 할 시기라네.자칫 외국에 자네 정체가 알려진다면......]

"보아 하니 '시험의 길'은 이제 넉 달 정도 남은 것 같아요.짧은 시간이니 그 정도 시간을 함께하고 대제국 엘란의 황자와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요!"

[흐음,나 혼자 독단으로 허락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네.일단 확실히 해둘 것은 그 황자가 제 1황자냐 제 2황자냐일세.]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직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나으려나?

그랬다가는 시간만 더 걸릴 테고,사실대로 2황자라고 했다가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쩌지?

우리나라에서 지지하는 황자는 누구더라?

나는 빠르게 내가 아는 1황자의 정보와 2황자 에쉬의 정보를 비교했다.

제 1황자 에론 드 폰 글로리스르네,통칭 르네 황자.

황후를 모친으로 두고 있으며 황후의 외가인 베일란의 강력한 지지와 정통후계자라는 이름으로 중앙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없은 잔인한 성격의 책략가.

제 2황자 에론 드 폰 에피로스.통칭 로스 황자.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모친의 출신이 천하다는 이유로 황자 자리에 조차 못 오를 뻔한 인물.

뛰어난 검술과 선한 인품으로 엘란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뻔하군.

우리와는 천적인 베일란과 연관된 1황자는 당연히 열외.

그렇다면......

"제 2황자입니다.그는 현재 외국에 마땅한 지지세력이 없는편이니 우리가 그의 뒤에 서준다면,후일 그도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그리고 저는 그를 황태자 자리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습니다,학장님."

[흐음,자네의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가디언들의 싸움은 대대로 매우 치열했다네.아무리 자네가 중급정령사라고 해도 자칫 크게 다칠 수있으이.굳이 시험에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대 황자의 암습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네.상대의 가디언을 죽이는 것 또한 시험의 요지중 하나로 묵인되고 있다고 들었으니 말이야.지금 자네는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데......나는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

첫,늙으면 걱정이 는다는 건 맞는 말인가 보다.

예전의 학장은 좀 더 화통했는데 말이야.

아니,내 존재가 너무 커진 탓일까?

"걱정 마세요,학장님.제겐......아,드래곤이 선물해준 비장의 무기가 있거든요."

[드,드래곤이?호오,그게 무엇인가?]

"왜 제가 뱀을 한 마리 키우고 있다는 것 알고 계시죠?드래곤에게 잡혀갓을 때 그 뱀이 함께였는데 드래곤은 제 뱀에게 놀라운 능력을 부여해줬답니다.그 어떤 공격에도 상하지 않는 비늘과 영특한 머리,그리고 놀랍게도 개......아니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까지요!"

순전히 허락을 얻기 위한 뻥이다.

비늘이야 원래 단단했고 머리도 원래 좋았다.

변신 능력이야 예외지만 언젠가 변신 장면을 들킬 때에 대비해 이 정도 뻥은 괜찮겠지 싶었다.

드래곤이 했다는데 누가 감히 뭘 따지겠는가!후훗.

[그런......그렇다면 그건 마법생명체가 아닌가?고대에 존재했다는 키메라와 흡사하군.]

"네!게다가 소드 유저 정도는 가볍게 제압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든든한 수호자가 있는 것 같아요.사실 드래곤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학장님에게만 특별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도 뻥쟁이가 다 됐다.

국왕에게는 쓰면 수명이 줄어드는 '금기의 정령술'을 특별히 알려줬고 학장에게는 드래곤이 선물한 '변신 키메라'를 턱별히 알려줬으니 말이다.

마치 엄마한테 놀러 갈 때 쓸 돈을 학습지 산다고 하고 꿍칠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들킬 염려는 전혀 없으니,들키지만 않으면 뻥이 아니잖아.

[호오,그렇다면 그 동물은 어디 있나?내게 보여주게나!]

"지금은 늑대로 변신 중이어서 통신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통신방 안에는 동물 출입금지니까요.하지만 학장님께서 국왕전하께 제 이야기를 전해주시고 허락을 구해주신다면 뱀으로 변신시켜서 몰래 보여드릴 용의가 있답니다."

[그,그렇다면 당장 말씀 올리겠네!모레,아니 내일!내일 점심때쯤 다시 통신을 주게나!허락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잘 말씀드려보겠네.]

학장도 학자는 학자였다.

탐구열에 불타는 학자.

그렇다 보니 미지의 생물의 등장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그런 학장을 바라보며 쾌재를 불렀다.

나이스!

시간을 빨리 가게 하는 방법?

간단하다.빨리 자.

[마스터,마스터,일어나세요.점심이에요.]

무언가 매끈거리는 것이 연신 내 볼을 간질였다.

아마도 라이의 혓바닥이 아닐까 싶었다.

이놈아,혓바닥이라는 건 말이야 원래 좀 까칠까칠해야 하는 거라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녀석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으음......"

[일어나~일어나~마스터,일어나~]

"콰악!이게 어디서 감히?"

[끄악!]

늘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라이의 수염을 잡아 늘였다.

이 녀석이 감히 주인님에게 일어나?일어나?

"이게 누구 입이니?응?'일어나세요'해야지.두 글자가 빠졌잖아,두 글자가."

[끄아아,마스터.수염,수염......]

"까불면 네 수염 뽑아서 엿 바꿔먹을 테야!알았어?]

[크힝,마스터는 만날 인간들을 그렇게 깨우셨잖아요?]

새벽에 명상을 해야 하는 나는 항상 일행 중 가장 먼저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야영 중에 일행을 깨우는 것은 당연히 내 담당이었다.

아,채드는 내가 깨우지 않는다.

내버려두면 누군가가 깨우니 말이다.

"너는 안돼,너는......주인님 깨울 대는 공경을 담으라고 했지?"

[니에에.그보다 벌써 점심이에요.마스터,마스터가 점심때가 되면 깨우라고 했잖아요.]

아참,그제야 창밖으로 떠있는 해가 중천에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서둘로 나갈 준비를 했다.

새벽에 일어나 명상을 하긴 했지만 그걸 빼더라도 거의 하루를 꼬박 잤기 때문인지 기운은 남아 돌았다.

라이를 뱀으로 변신시켜 어깨에 걸치고 밑으로 내려와 보니 마침 식사중인 에쉬 일행이 보였다.

에쉬가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지니 씨,지금 일어나신 거에요?"

"네,그렇지 않아도 야영하느라 피곤이 쌓여 있어서 푹 잤네요."

"이번에 가면......확실히 결과가 나오는 건가요?"

"음......아마도요."

나보다는 에쉬가 더 초조해 보였는데 초조하기는 뒤의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채드만이 불만스러운 듯 심통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쭈,채드.

너 싫은 티 너무 팍팍 내는 것 아냐?

"힘든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그리고 믿어주셔서 감사해요.그동안 모른 척한 것 다시 사과드릴게요."

"후훗,그 사과 받아줄게요.계속 고마워하라고요."

"응?지니 씨!에쉬!무슨 말들 하시는 거에요?"

뒤에 있던 로크스가 자신이 모르는 내용이 나오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로크스는 모르는 이야기겠군.

그젯밤에 에쉬가 밤늦게 찾아온 것도 로크스의 눈을 피해서인 것 같았다.

로크스는 수행자임과 동시에 에쉬를 감시하는 감시자의 역할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나와 에쉬의 관계는 참으로 미묘했다.

에쉬는 내가 자신을 그때 그 아이라고만 알고 있지 황자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불어 내가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지니 크로웰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듯 했다.

다만 그대와는 머리색도 눈 색도 얼굴도 다른 자신을 그때 그 아이라는 것을 믿어준다는데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아무튼 저는 위에 한 번 더 연락을 해보고 올게요.좋은 소식 기대해줘요."

"지니 양!꼭 함께 여행하고 싶습니다.잘 되길 혼신의 힘을 다해 빌게요!"

"난 별로......"

게일이 반짝이는 눈으로 응원을 건네는 것과는 반대로 채드는 오히려 내가 함께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오기로라도 함께 가주마,흥!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여관을 나섰다.

마탐으로 가려는데 에쉬가 조용히 따라 나왔다.

"왜요?더 할 말 있어요?"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요?"

황자라는 거?그건 1급 비밀이니 아닐 테고.

뭘까?

나는 굳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에쉬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얼핏,에쉬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들어만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쑥스럽지만......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친구는 당신이에요.멋대로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서 죄송해요.하지만 어린 제게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고 당신은 최초로 만난 또래였기 때문에......흐흠,첫눈에 못 알아본 게 이상할 정도로 지니 씨는 계속 제 기억에 남아 있었어요.지금은 이렇게 도움을 구하지만......다음에는 제가 당신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당신에게 도움을 받는 받지 못하든 언젠가 서로 진실을 말하고 진정한 친구가 되었으면 합니다.아니,되어주십시오!"

"......푸웁!뭐에요,그게?분위기는 꽉 잡아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친구가 되어주세요?"

나는 웃어버렸다.

뭘 그리 심각하게 말하나 했더니 사랑 고백도 아니고 친구 고백이다.

하긴 나와 에쉬의 만남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나야 에쉬가 황자라는 사실을 그때부터 알았지만 에쉬는 달랐다.

황궁 안에 들어가기 무섭게 '침묵의 궁'에 갇혀야 했으니 아무도 내 얘기를 전해주지 않았을 테고 고작 내 이름이나 기억해주고 있으면 다행일 터였다.

하지만 에쉬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고 나를 알아보았다.

진작 아는 체를 하지 않은 건 괘씸하지만,용서해주지.

"죄,죄송합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만......"

"그런 말은 필요 없어요.왜냐면 나는 진즉에 에쉬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허락을 구할 것도 없이 지금쯤 홀로 집으로 향하고 있겠죠.안 그래요?"

"친구......입니까?지금도?"

"물론이죠.그때부터 쭈욱이요.우린 서로에게 은인이잖아요."

조금만 기다려 에쉬,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줄게.

나의 은혜갚기는 스케일이 크거든.후훗.

[자네에 대한 국왕 전하의 신임이 참으로 두터우시더군.]

"그게 무슨 소리죠,학장님?"

[나는 자네가 '가디언'이 되고나면 혹여 엘란으로 마음을 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염려했지만 국왕 전하는 오히려 나를 나무라시더군.자네를 단단히 믿고 계시는 모양이야.]

내가 원래 믿음직하잖아.호홋.

그걸 빼더라도 내가 평소 국왕 정하에게 깔아놓은 밑밥이 한둘이던가?

마기가 준 검도 에이니 편으로 보냈고 왕의 목숨도 구해줬다.

왕의 신뢰를 얻을 정도는 충분히 되는 것이다.

헌데 그렇다는 건 허락이 떨어졌다는 얘기?

"그럼......"

[전하의 허락이 떨어졌네.충실히 제 2황자를 보필하라는 엄명이네.]

"꺄호!우웅,학장님,쮸우......"

[으악!자네 무슨 짓인가?통신구슬 망가져!건드리지 말게나!]

나보다 통신구슬이 중요하단 말이지?삐뚤어질까 보다.

"쳇,너무하세요!"

[너무하긴 자네가 너무하지.그 흉한 주둥이나 집어넣게나.쯔쯧,이제 스물이면 시집 가고도 남았을 나이인데 자네는 왜 그리 방정맞은 겐가?]

"헉스!"

내가 이래뵈도 제법 미인 소리 듣는다고요!

빽!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통신방 안이라 참았다.

체체체쳇.진정 삐뚤어질 테다.

[그보다 그......뭐시기 그시 그것 좀 보여주게나.]

"그시가 뭐에요?학장님 라트로스 출신이셨어요?왠 사투리를......"

라트로스.

구수한 사투리를 자랑하는 드미트리의 지방도시다.

학장이 그곳 출신이던가?

[에잇!키메라 말일세,키메라!]

[히끅!]

"아아,라이요?정확히는 키메라가 아니지만......그냥 그런 셈 치죠.이리 나와 봐,라이."

키메라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몸을 크게 움찔거린 라이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내 손에 끌려나왔다.

마기가 다음에 만나면 변신 항목에 키메라를 섞어준다고 했던 것에 한이 맺힌 모양이다.

[호오!그게 예의 그 키메라인가?어디 변신시켜보게나.]

[이,이 영감탱이 뭐에요,마스터?왜 저를 키메라라고 해요?]

바들바들 떠는 라이가 조금 불쌍했지만 일단은 변신!

얼른 보여주고 에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러 가야겠다.

"늑대로 변신해봐."

[크힝.]

흐물흐물 내 무릎 위에서 라이가 몸을 바꿨다.

점점 부피가 늘어나더니 이내 복슬복슬한 털을 자랑하는 늑대로 변신했고 통신구슬 안에서 학장이 턱이 빠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우오오오.훌륭해!]

[......이 사람 혹시 이루제의 할아버지 아니에요?]

라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글쎄,둘이 혈연관계는 없지 않을까 싶어.

다만 공통점은 지식인 특유의 탐구열이랄까?

나는 새삼 라이의 최대 적이 이루제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 괴짜 아가씨는 잘 있으려나?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게 더 늦어질 것 같으니 배를 타기 전에 이루제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미아에게도 말이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사람이 많아 라이를 타고 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쥐꼬리,아니 그보다는 많지만 어쨌든 바닥을 기는 체력으로 바쁘게 발을 놀렸다.

'빨리빨리'를 속으로 외치며 뛰기를 몇 분,마침네 묵고 있는 여관이 보였고 그 앞에 초조하게 서 있는 에쉬와 로크스,게일,엔크,심지어 채드까지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에쉬!"

"지니 씨!"

내가 한껏 웃고 있기 때문일까?

나를 발견한 에쉬도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열 걸음 정도 남았을까?

나는 참지 못하고 한껏 소리쳐버렸다.

"됐어요!우리 같이 가요!"

"됐다아!"

"와아!축하드려......아니 잘 됐다,에쉬!"

"이젠 진짜 동료네?"

"흥!"

쾌재를 부르는 게일과 다소 멍해 있는 에쉬에게 축하를 건네는 로크스,그리고 마주 웃는 엔크에 심통 부리는 채드까지.

귀여운 자식들!

내가 앞으로 마음껏 예뻐해주마,후훗.

일행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가벼운 장난을 걸어왔고 나도 기분이 좋았기에 마주 받아주었다.

그러다 아직 멍해 있는 에쉬의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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