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벌떡 일어나던 브라이트가 제풀에 발이 걸려 의자와 함께 넘어졌다.
"큭!아야야."
"아앗!괜찮으세요,브라이트님?"
브라이트는 저 아픈 것에 정신이 팔려서,쟈이맘은 그런 브라이트 챙기느라 의자 넘어지는 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넘어진 의자는 총 두 개였는데 나머지 하나는 제라스의 것이었다.
넘어진 의자와 테이블 사이에 몸이 끼인 제라스가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운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데니카에게 물었다.
"지,지금 저 말 너도 들었느냐,데니카?"
"네!네,형님!저도 들었어요!저거 누님 얘기 아닌가요?"
"진정하자.아직 확실한 게 아니니.지니라는 이름이야 비교적 흔하지 않느냐."
제라스는 순간 크게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우연히 들려온 대화였고 그게 정말 자신의 누이 지니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라스는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브라이트와 쟈이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이에요!통신을 걸었는데 안면 있는 마법사라더라구요.그가 말해준 사실이니 틀림 없습니다!지니 님이 정말 드래곤의 손에서 살아 나오신 거라고요!"
"오,맙소사!감사합니다.아기오티타님,프로피티아님,에이오스님,아나이스님,하느님,부처님,알라님!"
주신들 셋과 최근 많은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희생의 여신 아나이스님까지는 알겠는데 뒤의 셋은 누구지,하는 의문을 잠깐 떠올린 제라스가 황급히 브라이트에게 다가갔다.
드래곤 얘기까지 나왔는데 무슨 의심을 더 하겠는가.
자라스가 다가가자 한창 신들에게 감사기도 중이던 브라이트가 기척을 느꼈는지 제라스를 돌아보았다.
브라이트의 눈은 붉은 기가 서려 있었고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이보쇼.방금 당신들이 한 얘기 내게도 좀 해주지 않겠소?"
"누구요,당신?남의 얘끼를 엿듣다니 무례......"
"난 방금 댁들이 얘기했던 지니의 친오라비요!그러니 내게도 얘기를 들려주시오."
"......지니의 친오라비?"
브라이트가 눈물을 지워냈다.
그리고는 제라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니와 닮은 구석이 있나 살피는 듯 했다.
하지만 닮은 구석 이래 봐야 눈색 정도였고,겨우 그 정도로 낯선 이의 말을 믿을 만큼 브라이트의 성격이 좋지는 않았다.
브라이트가 친절하게 구는 사람은 지니 뿐이었다.
평소 마탑 안에서 그의 별명이 '까칠 개차반'이었다는 사실만 강조하겠다.
"정말이오!이쪽은 내 동생이자 지니의 동생 데니카요.나보다는 지니와 닮지 않았소?"
"흥,무슨 속셈으로 아는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댁의 말을 믿을 수 없......헉!"
콧방귀를 뀌는 브라이트의 눈앞으로 종이 한 장이 좌르륵 펼쳐졌다.
그것은 지니의 어릴 적 초상화였는데 초상화 속의 어린 지니는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풋풋하고 생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풍성한 금발에 초승달처럼 웃음 짓는 눈 사이로 얼핏 보이는 푸른 눈동자.
발그레한 뺨까지.
그림이기는 하지만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가 내가 찾는 지니요.어릴 적 모습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찾는 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가지고 있소.이 정도면 증거가 되지 않겠소?"
"정말이에요!제 이름은 데니카 크로웰이고 형님 이름은 제라스 크로웰.우리가 그런 것을 속여서 뭐하겠어요?단지 누님의 소식을 듣고 싶을 뿐이에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이 나섰다.
지니와 꼭 닮은 코와 입.
고양이 눈매는 아니었지만 오라비라고 소개한 쪽보다는 닮아 있었다.
게다가 한눈에도 지니가 분명한 어린 소녀의 초상화.
이 소년의 말대로 자신을 속여서 나올 것은 없었다.
브라이트가 바쁘게 머리를 굴려 계산에 들어갔고 과연 마법사답게 답은 순식간에 나왔다.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나는 올해 스물여섯이오."
"저는 열일곱인데요?"
"......형님!처남!"
와락
브라이트는 안면몰수하고 친한 척에 들어갔다.
별안간 자신을 껴안는 낯선 사내를 함께 껴안아줄 남자는 극히 드물다.
제라스는 우연히 지니의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한층 더 기겁하며 브라이트를 밀어냈다.
"무,무슨 짓이오?이러지 마세요!아니,마시오!"
"히익!형님?처남?"
움찔
소심한 데니카는 혹여 낯선 남자가 자신도 껴안을 것을 염려 했는지 한걸음 물러섰다.
멀어지는 데니카를 바라보는 브라이트의 두 손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 부들부들 떨렸다.
"이,이보시오,처남!"
"처,처남?"
"내가,아니 쟈이맘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공유할 테니......그,그거 내게 주면 안 되겠소?"
브라이트가 떨리는 손으로 갈망하는 것의 정체는 데니카가 들고 있던 지니의 어릴 적 초상화였다.
초상화는 본인을 마주하고 최소 7,8시간에서 만 하루를 전부 소모해야 겨우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보니 친인척이 아니면 가지고 있기 힘들다.
잠깐 스친 정도로는 아무리 날고 긴다 하는 화가들도 초상화를 그려낼 수는 없었다.
"누,누님의 초상화 말입니까?"
"그래요,그거!제발 내게 주시오.그렇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소."
"잠깐,당신 뭐요?왜 난데없이 초상화를 달라는 겁니까?보아하니 지니와 안면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무슨 사이요?"
지니의 초상화가 등장한 순간 상황은 역전되었다.
브라이트는 초상화에 목을 멨고 제라스는 돌연 친한 척하는 브라이트를 경계했다.
데니카는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저는 지니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입니다.지니와는 거의 10년을 알고 지냈고 꽤 친한 사이라고 자부합니다.그렇지,쟈이맘?"
"네?물론......이죠.브라이트님과 저는 드리케 아카데미 출신이고 지니님보다는 6년 선배입니다."
"......초상화는 왜 달라는 거요?"
"그,그야......방에 걸어놓고 매일매일 보려고......"
브라이트는 제가 말하면서도 조금 찔렸는지 제라스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귀한 동생에게 사심을 품었다고 불같이 화를 낼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이내 제라스의 표정이 바뀌기는 했다.
어떻게?환하게.
"으하하핫!우리 지니가 좀 예뻐야 말이지.뭐 내 동생이 한 인기 하는거야 당연한 사실 아니겠소?"
"그,그럼요.지니의 인기야 제가 알아줍니다!그럼......초상화는 제게 주시는 거죠?"
"뭐 어차피 복사본이니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그전에,쟈이맘이라고 했소?내 누이 소식 좀 알려주시오.아는 대로 몽땅!"
"맞다!그래,쟈이맘.지니가 어떻게 됐다고?들은 것을 모두 털어놔봐!"
지니의 팔불출 오라비 제라스와 지니의 열혈 추종자 브라이트가 만났다.
그들은 쟈이맘이 가져온 지니의 희생 소식에 금세 죽이 맞아 축하의 술잔을 기울였고 그 곁에서 데니카와 쟈이맘이 주스를 홀짝였다.
아,그리고 지니가 알면 큰일 나겠지만 브라이트의 가방 안에는 고이 접힌 지니의 초상화가 추가 되었다.
"푸하하하!역시 내 동생......무사할 줄 알았지!자,부어라!마셔라!"
"그럼요!지니가 저를 놓고 먼저 갈 리가 없죠!형님,한 잔 더 받으시지요."
이들은 진정 몰랐다.
그들이 지니의 희생소식에 한창 축하주를 걸치고 있을 때 지니가 그들이 배를 탔던 엘란의 항구도시 페밍턴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페밍턴에 도착한 우리는 일단 여관을 잡은 뒤 짐을 풀고 역할을 나눠 두 팀으로 헤어졌다.
나와 로크스 그리고 게일은 그동안 타고 왔던 말들을 마시장에 팔기로 했고 에쉬와 채드,엔크는 헤이케 행 배표를 구하러 항구로 갔다.
"다 왔어요.저기가 마시장이에요."
"마시장은 이렇게 생겼......냄새 엄청 독하네."
마시장이 가까워지는 만큼 냄새도 독해졌다.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구기면서도 마시장을 살폈는데 일반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품이 모두 말이라는 점과 여자 손님이 거의 안 보인다는 점을 빼고는 말이다.
[오오,마스터.저 말은 블론디랑 닮았어요.]
[정말 그러네.그래도 블론디가 더 예쁘다고.]
라이가 가리킨 말은 새하얀 털과 금색 갈기를 가지고 있어서 정말 블론디와 닮아 있었다.
다만 블론디 쪽이 조금 더 깨끗하고 눈이 예쁘다는 점이 다를까?
"로크스,마리당 얼마에 팔려고?"
"음,구입 당시 마리당 1골드 정도 줬으니 적어도 80실버에는 팔았으면 좋겠네요."
"그래?그럼 한 번에 다 팔기는 어려우니 나눌까?"
"그래야죠.제가 두 마리를 맡고,게일 씨도 두 마리,지니양도 한 마리 드려볼까요?"
우리가 팔려는 말은 총 다섯 마리다.
일행은 모두 6명이지만 나는 라이를 타고 다녔기에 말이 필요 없었다.
로크스가 말고삐 하나를 내밀었고 나는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게일이 나섰다.
"무슨 소리?지니 양 같이 연약한 숙녀 분은 쉬고 계세요.제가 세 마리를 맡을 테니까요."
"와!고마워요,게일."
"연약?지니 양이 우리 파티 중 제일 강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익히 내 악행을 보아온 로크스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다만 싱긋 웃어 보였을 뿐이다.
[마스터,입이 안 웃는뎁쇼.게다가 명백히 살기가 어렸어요.]
어머,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나는 마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로크스와 게일을 마중하고는 마시장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휴우......"
[웬 한숨이세요,마스터?]
"응?아니......이제 에쉬네랑 헤어질 생각하니까 조금 심난하네."
그랬다.
에쉬네 파티에 멋대로 끼어든 지 벌써 한 달이 넘었고 어느새 나는 페밍턴에 도착해 있었다.
에쉬네는 헤이케로 간다고 했으니 여기부터는 배를 타야 했고 나는 드미트리로 돌아가기 위해 엘란을 가로질러 올라가야 했다.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왜,심난해요?]
"이대로 헤어지자니 너무 싱겁잖아.에쉬는 내가 그때 그 아이인지 아직도 모른다고!둔탱이 같으니라고."
[흐음,어차피 이제 헤어질 건데 말해주지 그래요.]
"싫어,자존심 상하잖아."
천하의 지니 크로웰의 자존심이 있지 내 입으로 내가 그때 그 아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야 '언젠가 알아보겠지'하고 생각했지만 한 달을 옆에 있었는데도 못 알아보는 것을 보니 직접 말해주기 전에는 절대 눈치 못 챌 것 같았다.
바보 에쉬,어쩌면 그렇게 모를 수 있지?
[그게 왜 자존심 상할 일이에요?상대가 기억 못하니까 기억나게 해주는 거잖아요.]
"말은 쉽지!내가 먼저 아는 척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잖아.녀석은 변장까지 하고 시험 중인데 내가 먼저 아는 척하면 일이 꼬인단 말이야."
[그렇군요.하긴 녀석은 뭔가 대단한 시험 중이랬죠?그럼 그냥 계속 쌩까요,마스터.]
"쳇,결국은 이대로 헤어져야 되나?어렵게 에쉬를 만났는데 말이야.이대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답답할 뿐이었다.
내가 에쉬에게 붙어다닌 이유는 순전히 녀석에게 은혜를 갚을까 해서였는데 녀석은 내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간혹 산적이나 몬스터 떼를 물리치기는 했지만 에쉬는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질책할 뿐이었다.
그 쓸데 없이 평화적인 사상이라도 바꿔주려고 했지만 녀석의 고집은 나보다 더 셌고 '시험의 길' 에 나선 지 1년 8개월이 됐는데도 동료가 세 명밖에 안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동료를 모아주려 했지만 성에 차는 녀석이 없었다.
오히려 전에는 불만스럽던 채드가 기특해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4개월인데,에쉬는 어쩔 셈이지?
그 시간 안에 두 명을 더 모을 수 있을까?
생각은 많은데 답이 없었다.
이렇게 답답할때는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다져줘야 하는데......
[왜,왜 그런 눈으로 보새요,마스터?]
지금의 라이는 딱히 잘못한 일이 없기에 괴롭힐 수도 없었다.
어디 만만한 북어 한 마리 안 걸리나.
"어이!거기 예쁜 언니,우리랑 놀지 않을래?흐흐."
"보아 하니 혼자 같은데......조용히 따라오지 않으면 다칠지도 몰라."
어머나!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나는 내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두 마리 사냥감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땡큐,하느님!
"라이,물어!"
지니의 은혜 갚기
불일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각자 할일을 하느라 바빴다.
로크스는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는 듯 했고 게일은 가볍게 검을 휘두르고 온다며 뒷마당으로 갔다.
나는 더위에 늘어지는 몸을 식히기 위해 얼음물을 들이켰다.
내가 제일 바쁘군,흐흠.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고 있는데 여관으로 에쉬가 들어왔다.
에쉬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스트레스 제대로 풀고 왔는데 말이야.
"왜 그런 표정이에요,에쉬?배가 없데요?"
"예,배가 없답니다.오늘 아침에 배가 떠나서 다음 배는 사흘은 기다려야 들어온다기에 일단 배표만 끊어뒀습니다."
"그래요?아,얼음물 드실래요?제가 쏠게요.채드는 빼고."
그냥 얼음물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얼음이 들어간 순간 보통 물이 아니니 말이다.
특히 요즘 같은 무더위에 나오는 얼음들은 모두 마법을 이용한 것이라 최하 1실버는 나간다.
겨울에 얼린 얼음을 보존해놓는 보존마법이나,아니면 새로 얼음을 얼리는 냉동마법,어느 쪽이든 비싸긴 마찬가지다.
"흥!또 나만 빼고냐?준대도 더럽고 치사해서 안 먹어!"
"먹지 마라. 넌 안준다니까!"
네놈에게 쓸 1실버는 없어!
채드가 콧방귀를 뀌며 2층으로 올라갔고 엔크는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습니다."
"에쉬는요?"
"저도 괜찮습니다.저기......지니 씨?"
"왜요?"
다들 얼음물을 사양하네.내가 만날 쏘는 것도 아니고 이제 헤어져야 해서 쏘는 건데 말이다.
내가 이래뵈도 남한테 돈 쓰는 데 조금 짜다.
나한테는 관대하지만.
"저어......음, 아닙니다.쉬세요."
에쉬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다가 돌아섰다.
이런 에쉬는 처음이었다.
항상 내가 조금만 험한 짓을 해도 대놓고 질책하던 에쉬가 아닌가?
계단을 올라가는 에쉬의 뒷모습은 매우 지쳐 보였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좋지 못했지.
겨우 배가 없다는 정도에 그렇게 인상을 구길 녀석이 아닌데.
[쟤 왜 저래?]
[글쎄요.더위 먹은 것 아닐까요?]
[......그건 아니라고 봐,라이.]
나는 일인실 방을 썼는데 막 침대에 누우려는 찰나 에쉬가 찾아왔다.
예의 차리길 좋아하는 녀석이라 이 시간에 찾아왔다는 게 의외였지만 다른 녀석도 아니고 에쉬라 일단 방에 들였다.
잠든 뒤에 왔다면 무시했겠지만.
"여기 앉아요."
"예,감사합니다.그리고......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뇨,마침 심심해서 잠이나 잘까 하던 차였으니까요."
에쉬를 의자에 앉히고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나 길고 심각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간단한 용건이라면 의자에 앉을 필요 없이 서서 얘기하겠다고 했을 테니 말이다.
[......전 나가 있을까요,마스터?푸힛.]
[닥치고 앉아 있어.]
라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아마도 에쉬의 '사랑의 고백타임' 정도를 떠올리고 있을 테지.
하지만 지금 우리 두 사람의 분위기에서 핑크빛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요?혹시 알아요?두근두근 서바이벌 스펙터클 판타스틱한 사랑 고백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대체 그 고백의 장르가 뭐니?내가 이상한 거 주워듣고 써먹지 말랬지?종라 맞는 수가 있다.]
라이의 머릿속은 내 예상보다 복잡했고 내가 라이와 티격태격하는 동안에도 에쉬는 말없이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길 몇 십초가 지나고 이내 결심한 듯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에쉬가 그것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지니 씨,부디......이것을 받아주세요."
[오오,마스터.러브레터 아니에요?제 말이 맞죠?]
푸른 빛이 도는 봉투였다.
뭐야,설마 정말 사랑 고백인 거야?
나는 설마 하며 에쉬가 내민 봉투를 집어 들어 천천히 열어보았다.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야,나 제법 인기 많......이 아니구나.
"배표?"
[에잉?]
에쉬가 내민 것은 헤이드리케 행 배표였다.
정확히 사흘 뒤에 떠나는 배의 배표에는 내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지니'라고 말이다.
아아,이건가?
함께 가줬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기는 했었지.
"지니 씨,부탁입니다.함께 가주세요."
"하아,에쉬!분명 말했었죠.엘란까지만 함께 가고 싶다고.제멋대로 당신네 파티에 끼어들었지만 대신 헤어질 때는 정해뒀었잖아요."
[전 가고 싶어요,마스터.아카데미 안은 심심하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아카데미 안은 심심해.하지만......]
한숨을 내쉬며 에쉬가 준 배표를 다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나도 도와주고야 싶지.
하지만 내가 홀몸이 아니란다.
아니,그건 좀 그렇군.
어쨌든 내게는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 외에도 왕과 친구들,스승님과 제자 한 명까지.
더군다나 본의 아니게 대륙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에 섣불리 독단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위에서 허락해주지 않을 거야.]
한 달여 를 여행해본 결과 나,아니 황제와 국왕을 위해 드래곤에게 한 몸 희생한 지니 크로웰의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피부로 느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나를 주제로 한 노래며 시가 가득했고 심지어 나를 신격화 시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학장의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은 모자란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로서도 부담스러울 만큼 내 존재는 크게 부풀려져 버렸고,그런 나에게 본국에서는 최대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었기에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저도 처음에는 잠시 여행할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거리를 두기 위해 말을 낮추지 않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죠.저는 당신을 동료로 인정했지만 그 전에 '레이디'로 대했습니다."
"알아요.나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말을 낮추지 않은 거에요.기껏 해봤자......그래,이름 뒤에 '씨'를 안 붙인다는 정도일까요?우린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헤어질 것에 대비해서요.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같이 가자고 해도......곤란할 뿐이에요."
더 친해지고자 하면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로 거리를 두었다.
채드 녀석이야 불가피하게 반말을 쓰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존댓말을 썼고,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친해질수록 헤어질 대는 슬플테니까 말이다.
"염치 없다는 건 알지만......제발 부탁입니다.함께 가주세요,지니 씨!저는 당신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함께 여행하면서 내가 도울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오히려 모두가 나를 도와줬죠.왜?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겠죠?에쉬가 말했던 것처럼 동료이기 전에......'레이디'니까.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내개 도와달라고 해도......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요.레이디는 레이디답게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있는게 제격이죠.제가 오래 여행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윗사람들의 꾸중뿐이니걸요."
"제......인생이 달린 일입니다.제가 꼭 이루고자 하는 일에 지니 씨의 힘이 필요해요.당신이 무언가 숨기고 싶어하다는 걸 알아요.계속 숨겨도 좋고,언젠가 사실을 말해줘도 좋아요.그래도 안 되는 겁니까?"
"......설령 내가 코이렌 연합국의 사람이어도?그래도 좋아요?"
에쉬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나는 알고 있어,에쉬.
네가 단 하나,동료를 모을 때 지켜야 하는 사항을 말이야.
코이렌 연합국 소속이 아닐 것.
엘란 연합국과는 천년 원수로 불리는 코이렌 연합국.정말 최악의 상대 아니겠어?
"그 말......사실입니까?"
"훗,물론 농담이죠.조금 정도가 심한 농담이기는 했지만.나는 순수한 드미트리인이에요.하지만 사실은 상인의 딸이 아니라 모셔야 할 주군이 있는 신하죠.그렇기 때문에 주군을 모시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해요.제겐 더 이상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요."
"하,하핫.그 정도는......예상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코이렌을 들먹이는 것은 조심하세요.자칫 당신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네,네.조심하죠."
[들먹여?코이렌이 뭔데요,마스터?먹는 거에요?]
[못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