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71)

물방울이 터져나가고 채드가 맨땅 위로 털썩 떨어졌다.

꽤나 어지러웠는지 눈이 초점을 못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일어나려는 듯 손에 힘을 주기는 하는데 채 상체도 일으키지 못하고 금세 제풀에 넘어져버렸다.

하지만 우습게도 도끼는 꼬옥 쥐고 있었다.

다칠까 봐 무섭긴 했나 보다.

하긴,그걸 놓쳤다가는 지금쯤 덩어리가 떠다니는 토마토 주스가 되어 있을지도......

"흐이이,너,너어어~"

혀도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걸까?

어쨌든 나는 정신이 살짝 외출한 듯한 채드에게 다가갔다.

내가 곁에 와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채드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려 보았다.

아니,솔직히 말하면 '이때다' 싶은 마음에 있는 힘을 다해 발로 찼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대놓고 때려보겠는가.

꾸역꾸역 물을 뱉어내는 모습이라니.

그러게 까불지 말았어야지!

"졌지?응?졌지?크히히히."

"지,지니 양......"

"저 여자 마법사야?마법사는 괴팍하다더니 정말이네."

"우린 결투 안 할래.저 여자 무서워."

채드의 옆구리를 발려 차길 몇 차례.

별로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예 지끈지끈 밟고 있다 보니 본성이 살짝 나오고 말았다.

뜨끔하긴 했지만 채드의 등에서 발을 떼지는 않았다.

지금의 나는 지니 크로웰이 아니라 지니라는 다른 사람이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속 시원히 본성을 과시하겠는가.

"지니 씨......승!"

크게 치고 박지도 않고 얌전히 싸운 것 같은데 에쉬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내 승리를 선언했다.

나야 이겼으니 마냥 기분이 좋을 뿐이지만.

또다시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는 않았다.

"흥,들었냐?내가 이겼대.후훗,들었어?너는 졌다고.까불지 말란 말이야."

"지긴......누가......졌다고?이야아!흐어어어."

너무 자극했는지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선 채드가 용케 몸을 일으키나 했더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다시 고꾸라졌다.

그냥 넘어지기는 억울했는지 끝까지 손에 쥐고 있던 손도끼를 휙 하고 던졌는데 그 도끼는 마치 부메랑처럼 급박한 곡선을 그리며 저 멀리로 날아갔다.

저렇게 날아가다 보면 내가 날려 보낸 바스타드 소드와 만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어지러워도 그 남아도는 힘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뭐야?중심도 못 잡으면서 도끼는 뭐 하러 던지니?한참 멀리 날아 갔......히익!"

채드를 조금 더 놀려줄까 해서 다가가는 데 무언가가 귀 바로 밑으로 휘익하고 머리카락들을 흩으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끼악!마스터!]

"지니 씨!"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나를 놀라게 한 물건의 정체를 찾아 눈을 돌렸다.

마침 퍼벅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에 박혀드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기겁했다.

"뭐야?저게 왜 여기 있어?"

바로 방금 전에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갔던 채드의 손도끼였다.

어째 날아가는 모양이 수상하다 했더니 정말 되돌아 올 줄이야.

내가 미묘한 기척에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저 도끼는 저 나무가 아니라 자칫 내 목에 박혀 있을지도 몰랐다.

[마스터,마스터,괜찮으세요?]

"안 다쳤어요?"

멀찍이서 한창 구경하던 라이와 심판을 보던 에쉬가 놀라 다가왔다.

괜찮긴 하지만,나는 혹시 채드가 내 목을 노리고 고의적으로 도끼를 던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헤롱거리는 채드를 본 후에 녀석의 옆구리를 한 번 차주고는 생각을 접었다.

"이 바보가!졌으면 곱게 승복할 것이지 왜 발악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야?그렇지 않아요,에쉬 씨?"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다친 데가 없었기에 이내 부메랑 비행법을 보여준 도끼에 대한 관심을 접고 에쉬를 돌아보았다.

헌데 표정이 이상했다.

헤벌쭉이 벌어진 입은 닫힐 줄 몰랐고,크게 떠진 두 눈과 벌름 거리는 코까지.

평소 점잖은 체하는 것과 달리 매우 한심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왜 저러지?채드 옆구리 좀 찼다고 화난 건가?

"지,지......머,머리......흐아악."

머리가 어쨌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만져봤지만 딱히 이상은 없었다.

머리는 하나로 땋아서 적당히 뒤로 넘긴 채였는데 지극히 멀쩡했......

"아악?내,내 머리!"

문득 도끼가 훑고 지나간 것이 걸려 도끼가 지나간 오른쪽을 만져봤더니 내 오른쪽 머리카락은 정확히 귀 밑으로 잘려나가 있었다.

땋여 있었기에 잘려나간 밑의 머리는 반대쪽 땋은 머리와 엉켜 여전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반은 귀밑,반은 허리 밑.

이걸 어째?

머리카락을 자를 작정이긴 했지만 귀 밑은 아니란 말이다!

[마스터,그렇게 하니까 반은 촌년 같아요.푸히히히.]

귀 밑이라니,짧아도 너무 짧았다.

게다가 촌년이라고?

나는 갈등했다.

라이와 채드,어느 쪽을 먼저 먼지 나게 패줘야 할까?

늘어나는 추종자

이른 아침,코란과 엘란의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 다니즈의 동문으로 두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 중 보라색 머리와 다부진 체격을 가진 사내는 검사로 보였는데 짙고 긴 눈썹에 쌍커풀이 있는 호남형의 인물이었다.

그는 걷는 자세는 물론이고 눈빛에도 자신감이랄까 강한 자의 여유가 느껴졌고 길을 걸으며 휘파람을 부는 느긋함도 보여주었다.

그의 곁에 있는 푸른색 머리의 사내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등에는 두 개의 창을 메고 있었는데 그 창끝의 날만큼이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그의 눈은 여유,아니 빈틈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소 불만스러운 듯 연신 입매를 비틀고 있었다.

"호오,여기 축제 하는가 봐.엄청 북적이는 걸.우리도 즐겨볼까?"

"시끄럽고 소란스럽고......축제 따위 딱 질색이야."

보랏빛 머리의 사내가 막바지에 다다른 축제의 열기를 느낀 듯 놀아보자고 운을 뗐지만 되돌아온 것은 푸른 머리 사내의 짜증스러운 대답뿐이었다.

"그러니까 네놈이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축제는 무릇 즐겨줘야 하는 거라고."

"답답한 나는 상관 말고 시답잖은 네놈이나 즐기라고."

"흥,일단 광장으로 가자.에쉬가 남긴 메모가 있을 거야."

"음......"

다니즈의 중앙광장은 축제 기간답게 웬만한 대도시 못지않게 사람들로 들끓었다.

광장 한편에 마련된 게시판에는 각종 축제 관련 게시물과 여러 사람들이 남긴 메모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족히 백여 장은 되어 보이는 크고 작은 모양의 비슷한 메모들.

그중 두 사내가 필요로 하는 메모를 찾기란 다소 어려워 보였지만 보랏빛 머리 사내는 게시판 앞에 서기 무섭게 메모 하나를 단숨에 떼어냈다.

"오른쪽 맨 위,이거 맞지?"

그가 건네는 하얀 메모지를 받아든 푸른 머리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에쉬 이름이 적혀있잖아.요정 다리?이건 여관 이름같아."

미리 연락을 나눌 메모의 위치를 정해두었던 모양이다.

메모지를 뒤집어보니 여관으로 가는 길인 듯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따라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사람들에 치여 조금 헤매긴 했지만 여관이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둘은 어렵지 않게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여관의 간판이 매우 크고 화려해서 멀리서도 한눈에 보인 탓도 있었다.

"이봐,엔크.쪽지를 잘못 가져왔나?에쉬가 저런 여관을 잡을 리가 없는데."

"그렇군.에쉬라는 이름이 흔한 편이긴 하지.다시 돌아가 볼까?"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난 분명 오른쪽 맨 위의 메모를 가져 왔다고."

"네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았어,게일.나도 이 쪽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엔크와 게일.분명 에쉬의 나머지 일행의 이름이었다.

그들의 행색을 보나 대화내용을 보나 에쉬 일행이 기다리는 나머지 두 명의 동료가 분명한 듯 했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 에쉬가 있는 여관을 두고도 돌아서려 했다.

그들 눈앞에 있는 '요정 다리'는 그들이 평소 알고 있는 에쉬라면 대번에 손사래를 칠 만큼 고급 여관이었기 때문이다.

숙박료가 1,2실버인 보통 여관과 달리 이런 고급 여관은 최소 그 다섯 배인 5,6실버를 받는다.

"이상하네.어쨌든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 보자."

"음......"

보랏빛 머리의 게일과 푸른 머리의 엔크,둘은 여관의 화려한 외관에 대번에 메모를 잘못 가져왔다고 생각하고는 몸을 돌렸다.

바로 일행을 코앞에 두고 말이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들이 채 몇 걸음 가지 않아 둘을 불러 세우는 커다란 목소리가 있었다.

"어이!엔크,게일!"

귀에 익은 반가운 목소리.

걸쭉하니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둘은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도 단번에 알아챘다.

"채드!"

"채......응?"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둘은 인상을 구겼다.

그들이 알고 있는 채드와는 어딘가 달랐던 것이다.

성큼성큼,큼직한 걸음걸이로 금세 둘의 앞에 선 채드가 반가운 듯 한껏 웃으며 둘을 동시에 얼싸안았다.

"왔구나,너희들!그렇지 않아도 에쉬가 올 때가 됐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그래.딱 약속 날짜에 맞춰 왔지.그런데......푸훗!너는 머리가 그게 뭐냐?"

"설마 돈 주고 한 머리는 아니겠지?"

게일과 엔크가 하나같이 채드의 헤어스타일에 핀잔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풍성해서 꽁지머리로 묶이기도 했던 채드의 머리가 지금은 박박 밀려 잔털 하나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인상은 더욱 무시무시해 보였고 매끈한 머리에 햇빛이 반사되어서 말할 수 없을 만큼 가관이었다.

"그,그게 말이야......오늘 아침에......벌칙이랄까?일이 좀......"

"벌칙?그게 무슨 소리야?그러고 보니 칼은 다 어디다 놓고 못 보던 도끼 하나 달랑 메고 있는 거야?"

"그러게,그거 특수 제작한 거라고 엄청 아끼지 않았어?"

채드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바스타드 소드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용병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구입했다며 항시 옆구리에 차고 다니던 소검도 보이지 않았고.

게일과 엔크가 채드와 떨어져 있던 두 달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큭,말도 마!웬 악마 같은 녀석이 파티에 끼어들어서는......젠장,그 녀석을 만나고 나서부터 되는 일이 없다니까.이 도끼도 두 번째 거야.소검에 이어 소검 대신 산 손도끼랑 내 바스타드 소드가 그 녀석 손에 날아갔다고!"

평소 한 번 틀어지면 끝을 보는 채드는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지독히 치를 떠는 채드는 처음인지라 둘은 매우 의아해했다.

대머리가 된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어떤 녀석인데?그렇게 싫으면 결투신청이라도 해보지 그랬어."

"그래,너 결투 좋아하잖아."

"결투라면 벌써 했어!그런데......그만......어이없게 지고 말았다고.으윽,그놈의 물귀신 같은 공격만 아니었으면!이럴 줄 알았으면 잠수라도 배워두는 건데!으아악!"

분통 터진다는 듯 이를 갈며 말하던 채드가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지 돌연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길거리 한가운데라는 것을 잊었는지 괴성을 내질렀고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무 놀라 휘청거렸을 정도였다.

게일과 엔크는 익숙한 듯 귀를 틀어막았다.

"알았어.진정해,진정.그나저나 에쉬랑 로크스는?그렇지 않아도 여관을 잘못 찾아서 되돌아가려고 했어.널 만나서 잘 됐지 뭐야."

"일단 묵고 있는 여관이나 알려줘.그 다음에 그 악마 같은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줄게."

"응?아,여관이라면 바로 저긴데.그 쪽지 에쉬가 남긴 것 맞아.내가 무기점 가면서 꽃아 놓았는걸."

채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튼 둘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드가 가리킨 여관은 조금 전에 그들이 되돌아선 고급 여관 '요정 다리'였던 것이다.

"저기......방값이 최소 5실버는 될 것 같은 저 여관?"

"5실버가 뭐야?6실버는 될 것 같은데......"

"아니,우리가 묵는 방은 30실버든가?일단 들어가자.에쉬가 밑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정말 저기라고?"

채드는 게일과 엔크를 앞질러 여관으로 걸어갔다.

그런 채드를 바로 따라가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던 둘은 돌연 웃음을 토해냈다.

"그래,저기......"

"푸핫!"

"크흑!"

뒤를 돌아보며 대답하던 채드가 흡사 단단한 모서리에 발가락을 찐 듯한 표정으로 웃는 두 동려의 모습에 당황하며 걸음을 멈췄다.

"왜들 그래?뭐가 그렇게 웃겨?"

"푸하하핫!스,스마일......스마일!"

"크히히힉!그게,그게......뭐냐?"

손가락을 세워 자신을 가리키며 말도 못하고 웃으며 쓰러지는 게일과 엔크의 모습에 당황한 채드가 뒤통수를 긁적이는데 뭔가가 손가락에 잡혔다.

그것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분명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분명 박박 밀었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카락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몇 뭉치 남은 머리카락이 무언가 미지의 모양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드가 황급히 쓰러진 게일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뭐야?내 머리가 어떻게 됐는데?"

"스마일......끄흐흑!스마일~"

"채드......네,네 뒤통수에 스마일이 그려져 있어.크히히.머리털 스마일!벌칙 제대론데!"

채드가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무기점에 가서 도끼를 사서 나오는데 갑자기 무기점 주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길을 오는데도 종종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축제기간이라 즐거운 일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라고만 생각하며 적당히 넘겼다.

설마 자신의 뒤통수에 스마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진즉에 뒤통수를 만져 보지 않았을까!

평소와 달라진 머리 모양이 어색하지 않은 체하려고 일부로 건드리지 않은 게 문제였다.

지금에 와서 알아채면 뭘 하는가.

이미 거리를 한껏 활보한 뒤인 것을.

평소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하게 진지하고 거의 웃지 않는 엔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땅 위에 쓰러져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이,이게......!으아아악!"

채드가 고함을 지르며 황급히 여관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런 채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게일과 엔크는 더욱 크게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웃어댔을까?

너무 웃어 배가 아파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웃음을 멈춘 둘은 채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엔크,우리가 너무 웃었지?푸흐......"

"그러게.우리가 조금 심했어."

"엔간히 웃겼어야지.일단 들어가 보자.채드도 달래주고 배도 채워야지."

"저긴......식사도 비쌀 것 같은데."

둘이 조심스럽게 여관으로 들어섰다.

외관만큼이나 화려한 내관에 둘은 다시 당황해야 했고 이어 여관 안에 있는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혹여 자신들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주춤했다.

하지만 분명 여관으로 들어가는 채드를 보았기에 도로 나갈 수는 없었다.

"또 까불었단 봐라."

"지니 씨이~"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어딘가에 있을 익숙한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둘의 눈에 포착된 것은 쓰러져 있는 채드였다.

여관의 로비 옆으로 마련된 식당 한 가운데 흠뻑 젖은 채드가 죽은 듯 쓰러져 있었고 그 주위로 그들이 찾던 에쉬와 로크스가 서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집중된 여관 사람들의 시선.

게일과 엔크는 자신들이 느낀 술렁임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채드?에쉬,채드가 왜 쓰러져 있는 거야?"

"주,죽은 건 아니지?"

"아,왔으?죽진 않았을 거야.다만......다툼이 좀 있었어."

"게일 씨,엔크 씨!오셨군요.좋아 보이셔서 다행......참,인사하세요.이쪽은 지니 씨에요."

로크스가 몸을 돌리며 그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누군가를 소개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명의 금발 여성이었는데 가장 먼저 반짝이는 짧은 금발이 눈에 띄었고 이어 새치름한 눈매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한껏 웃음을 짓고 있는 입매가 눈에 띄는 미녀였다.

그녀의 옆으로는 덩치 큰 누런 개 한마리가 마치 그녀를 호위하듯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크흥,킁."

로크스의 소개에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미녀와 그 곁에서 콧방귀를 뀌는 누런 개.

흡사 개 주제에 사람을 비웃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게일과 엔크는 그에 울컥하기보다는 낯선 미녀의 등장에 얼굴을 붉혔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여자들을 봐왔고 그중 미녀들도 넘쳐났다.

하지만 눈 앞의 여성은 그냥 예쁘다가 아니라 어딘지 묘한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장난스러운 듯,이질적인.

지금은 여기 있지만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떠나버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여하튼,예쁘기는 했다.

예뻐도 너무 예뻤다.

특히 게일의 눈에 말이다.

"아,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엔크입니다."

"앗,저는 게일입니다!만나서 무지막지하게 반갑습니다."

"저는 지니에요.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엔크가 먼저 악수를 청했고 게일이 질 수 없다는 듯 저도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지니라고 소개한 여성은 흔쾌히 둘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다들 알겠지만 이 지니가 그 지니다.

현제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꽤나 즐기며 마음껏 더러운 성격을 과시하고 있는 지니 크로웰 말이다.

"하핫,저......그......아참,채드는 왜 이렇게 쓰러져 있는 거죠?방금 밖에서 만났을 때는 멀쩡했는데 말이에요."

분명 곁에 에쉬와 로크스가 있는데도 게일은 지니에게 물었다.

아마도 궁금했다기보다는 지니에게 뭔가 말을 걸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니가 모를 리 없었다.

"갑자기 덤비기에 혼쭐을 내줬죠."

"예?덤벼요?채드가 지니 씨에게 말입니까?"

"네,제게요.식사 중이었는데 갑자기 덤비지 뭐에요?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어요."

게일이 눈을 굴렸다.

흠뻑 젖은 채 눈을 뒤집고 기절해 있는 자신의 절친한 동료 채드.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했다고 말하는 흠 잡을 데 없는 의문의 미녀.

채드를 저렇게 만든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할까?

초면에 화를 내는 것도 실례가 아닐까?

그랬다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게일은 갈등했다.

화를 내기에는 너무 자신의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게일이 이내 마음을 굳혔는지 입을 열었다.

"그러시군요!잘하셨습니다.원래 채드가 상당히 다혈질이긴 하죠.탁월한 행동이셨습니다.아하핫!"

"역시 그렇죠?후훗.참,저 머리도 제가 민 건데 어때요?나름 귀엽죠?"

"아하하핫.예술적인 감각이 정말 뛰어나시네요."

"크흥."

여기 지니 추종자 하나 추가요.

드넓은 바다가 특유의 투명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이 최고급 유람선의 새하얀 몸체만큼이나 하얀 물거품이 파도에 밀려왔고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유람선 주위로 날아들었다.

갈매기가 날아왔다는 건 근처에 땅이 있다는 소리.

여기 그에 한껏 기뻐하는 이가 있다.

"갈매기다!드디어 육지다!이제 이 고통에서 해방......우욱!"

"혀,형님!죽을 것 같아요.우웨엑!"

난간을 붙잡고 아름다운 바다에 이물질을 게워내는 두 명의 남자.

둘은 꼭 닮아 있어서 형제로 보였는데 형제가 쌍으로 멀미를 하고 있었다.

멀미가 심한 것도 유전이라면 정말 비운의 유전자가 아닐 수 없다.

"데,데니카,조금만 더 버텨라.우리 집안이 원래 멀미에 일가견이 있잖니."

"아무리 그래도......웁!내장까지 나올 것 같아요,형님."

"거,걱정 마라,데니카!내가 많이 토해봐서 아는데 내장은 안 나오더라.우웨에엑.근데 위액은 나와."

데니카,분명 지니의 남동생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머지 한쪽은 지니의 오라비 제라스 크로웰일 터였다.

지니를 찾겠다며 가출한 두 형제가 헤이드리케로 향하는 유람선 위에 있었다.

심각한 구토증상을 호소하며.

그것도 지니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서 조금 불쌍했다.

"으윽,근데......정말 헤이케에 가면 누님이 있을까요?"

"아마도......헤이케에는 드래곤에 관한 신화가 많으니......우엑!최소한 드래곤에 대한 정보는 많을 거다.잘하면 우웁,지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가져온 보석도 떨어져 가는데......좋은 소식,푸훅!푸으읍.우웨에엑."

"우어억,나는 이제 위액도 안 나와.으윽."

헤이케,헤이드리케의 줄인 말로 종종 사용된다.

이 호화 유람선의 도착지이기도 한 헤이케는 해변이 아름답고 천연희귀동식물이 많아 관광을 주업으로 삼는 관광국가이자 크란시아 대륙 유일의 섬나라이기도 하다.

이 호화 유람선의 사용 목적 또한 대부분 관광이었다.

그렇다 보니 관광을 위해 유람선에 탑승한 다른 승객들의 눈에 연신 구토를 하는 크로웰 형제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을 망가뜨림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구토소리로 주변 이들의 귀를 괴롭게 했기에 두 형제의 반경 10미터 안은 텅 비어있었다.

"콜록,콜록!형님,다른 분들에게 너무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요."

"괜찮다.신경 꺼.어차피 계속 볼 사람들도 아니니 부담 갖지 말고 게워내라,데니카."

"호오,그렇군요.한 수 배웠습니다,형님!그럼......으웨에엑!"

제라스는 과연 지니의 오라비답게 두터운 안면 두께를 자랑했고 이제는 순진했던 데니카 마저 그에 물들고 있었다.

두 형제가 함께 지니의 흔적을 찾아 여행한 지 어느덧 석 달이 되어가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제는 위액마저 다 토해는 제라스가 헛구역질을 하던 중 문득 저 수평선 너머로 희끗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집중해보니 그것은 분명 두 형제의 목적지인 헤이드리케였다.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차였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에 제라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싶을 정도였다.

"데니카!저길 봐라,데니카!"

난간에 매달려 자신의 모든 것은 게워내던 데니카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제라스를 올려다보았다.

"끄에에엑.왜요,형님?"

"봐라,아우야!멀미와 싸운 지 무려 일주일.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어,어디요?앗!정말 헤이케......우욱,형님!"

"아우야!"

그랬다.

엘란에서 헤이드리케까지 가장 빠르고 편하다는 유람선으로도 무려 일주일을 먹고 게워내길 반복한 형제의 눈에 드디어 고생의 끝이 보이는 것이다.

멀미로 한층 다져진 우애를 과시하며 두 형제가 한껏 부둥켜 안았다.

이내 유람선이 항구에 정박했고 지상과 연결된 다리로 승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연 가장 먼저 땅을 밟은 것은 크로웰 형제였다.

그들은 땅에 발을 듣기 무섭게 텅 빈 배를 채워줄 음식을 찾아 식당으로 내달렸다.

멀미의 후유증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는 음식에 대한 집념으로 금세 회복했다.

"캬아,내가 요즘 이 맛에 산다!너도 마셔볼 테냐,데니카?"

"아뇨.저는 아직 미성년자인걸요,형님."

"그럼 우유라도 마실 테냐,데니카?"

"에이,제가 애도 아니고 우유가 뭡니까,형님?저는 과일주스요."

빈속에도 개의치 않고 시원한 맥주를 걸치며 중년의 대사를 읊는 제라스틑 올해 26살이었고 우유 대신 주를 마신다는 미성년자 데니카는 17살이었다.

우유나 주스나......

"그래,어이!여기 과일주스랑 오늘의 추천 요리 2인분,그리고 새끼돼지통구이 하나."

"에,알겠습니다.통구이는 30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아.식사나 빨리 줘."

"예!손님."

지나가던 종업원을 잡아 주문을 마친 제라스는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꿀꺽꿀꺽,족히 자신의 머리만 한 유리잔 가득했던 맥주를 비워낸 제라스가 살짝 취기가 도는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당 안은 손님으로 꽉 차 있었고 개중에는 유람선에서 몇번 스쳤던 얼굴도 있었다.

"아,형님.저기 저 사람요 .그때 그 마법사 맞죠?"

데니카가 홀로 식탁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갈색머리 사내를 가리켰다.

사내답지 않은 새하얀 피부가 유난히 눈에 띄는 자였는데 배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용벙 하나를 마법을 이용해 바다에 던져버린 데다가 그 용병 일행이 덤벼들자 '매직 미사일'이라는 마법을 난사해서 용병 셋을 곤죽으로 만들어놓은 일로 일약 유람선 안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마법사라는 직업 자체도 희귀한데다가 사람이 많은 갑판 위에서 일어났던 일이었기에 목격자가 많았다.

배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갑판,정확히는 그 곁의 난간에 매달려 살았던 두 형제는 당연히 그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그런 것 같구나.저 곱상한 얼굴은 분명 기억에 있지."

"마법사라니......대단해요.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자들이잖아요."

"흥!네 누이인 정령사는 더 희귀하다."

제라스의 목소리가 갈색머리 사내에게 들렸던 것일까?

그가 힐끔 제라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라스의 푸른 눈과 갈색머리 마법사의 보라색 눈이 딱 마주쳤다.

제라스는 생각했다.

'거 참 빵맛 없게 생겼네.'

그는 조금만 더 얼굴선이 고왔다면 여자라고 생각할 만큼 곱상했다.

제라스가 눈을 돌리려는데 상대 마법사가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법사의 일행으로 보이는 이가 다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는 잘 정돈된 청색 단발을 가지고 안경을 낀 샌님 타입의 남자였는데 역시나 곱상하게 생겨서 제라스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브라이트님!큰일 났어요!"

"뭐냐,쟈이맘?왜 그리 호들갑이야?"

"그,그게......본국에 연락을 해봤는데 놀라운 소식......"

"뭐야?내가 연락하지 말랬잖아!연락해봤자 빨리 오라는 영감탱이들 잔소리밖에 더들어?"

브라이트와 쟈이맘,이들 역시 헤이케에 와 있었다.

아마도 제라스와 데니카처럼 유난히 많은 드래곤 신화를 자랑하는 헤이드리케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솔직히 쟈이맘은 브라이트의 손에끌려왔을 뿐이지만.

본의 아니게 브라이트와 쟈이맘의 대화를 들은 제라스가 데니카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저 마법사 드미트리인 인것 같지 않니,데니카?말투가 드미트리의 것이야.그중에서도 영락없는 귀족의 말투 아니냐."

"그러게요,형님.하지만 우리나라 마법사들은 다 왕궁 안에 있는 것 아니었어요?그들은 매우 귀중한 존재라면서요?"

"내가 알기로도 그런데......아마 휴가로 관광이라도 온 모양이지."

"아하,그렇군요.마법사도 사람이니 휴가가 필요하겠죠?"

휴가 나온 것은 맞다.

다만 관광이 아니라 제라스와 같은 목적으로 지니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과 약속했던 휴가기간을 한달하고도 보름 넘게 넘기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런 게 아녜요,브라이트님!그냥 무사하다는 연락만 넣으려고 했는데 저,저,정말 놀라운 소식이......!"

"뭔데?지니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대?"

"네!바로,바,바로 그거에요!지니 님이 살아계시대요!아직 귀환하진 않으셨지만 무사하시다는 연락이......"

"뭐야?그게 정말......으왁!"

쿠당탕

콰광 쿵광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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