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긴 누구야?댁이지.우리 동료도 아니면서 가는 길마다 졸졸 따라다니잖아."
"왜 이러셔?에쉬는 분명 나를 동료라고 했다고."
"뭐시?정말이냐,에쉬?"
"물론이지.지니 씨는 우리와 함께 미엘타에서부터 쭉 여행을 해왔잖아.당연히 동료지.너도 그렇게 생각하지,로크스?"
돌연 질문을 받은 로크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가장 먼저 에쉬에게 약간 원망 섞인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바르르 떨었다.
이어서 채드에게 건너간 눈빛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길 몇 차례.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갈등하는 모양이다.
대답 잘해야 할걸,로크스?
내가 눈을 부라리자 로크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그러니까......아,산적도 잡아주셨고......우릴 위해 닭꼬치도 사다주셨고......음,그러니까 동료......맞지 않을까요?"
그래!그거거든.
내가 가디언 한다는 게 아니야.
그냥 잠깐 동료로 쳐주면 되는 거거든.
근데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디?
하긴 내가 해준 게 그것뿐이긴 하다.
"흥!삱거이야 제가 언짢으니까 나선 거고,그마저 인계는 우리가 했지.꼬치는 나한테는 돈을 받으려고 사주고 말이야!"
"넌 동료로 안 쳐주니까 그렇지.내가 동료로 쳐 주는 건 에쉬와 로크스 뿐이야."
"누가 할 소릴!"
갈수록 채드 녀석이랑은 사이가 나빠지는 것 같다.
한시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이게 되니 말이다.
켄타랑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화해할 마음은 없었다.
대부분의 시비는 채드가 먼저 걸어오니.
그렇지 않아도 여관이 잡히지 않아 나나 채드나 짜증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기에 우리의 말싸움은 평소보다 길어졌다.
"또 싸우는 겁니까?그만 싸워요,그만!"
"시비는 항상 이 녀석이 먼저 걸어온다고요!"
"웃기시네!네가 원인을 제공하잖아.뺀질거리다가 가끔 나서서 명령이나 하려고 들고!멋대로 남의 파티에 끼어들 때부터 알아봤다고!"
[마스터,길게 말할 것 없이 선빵!선빵!]
내가 뺀질 거린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할 일이 없었기 때문도 있다.
본래 게으르기도 하지만 뭣 좀 할라 치면 에쉬와 로크스가 대신 나섰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 두레게는 레이디 퍼스트라는 개념이 몸에 밴 탓이리라.
하지만 그와 반대로 전형적인 무인성격의 채드는 그렇지 않았다.
남이 노는 꼴을 못 보는 것이다.
에쉬와 로크스가 예의 차리길 좋아하고 점잔빼는 기사라면 채드는 신경질적이고 호전력이 용병에 비유할 수 있겠다.
"대신 내가 밤마다 불침번 섰잖아.그리고 멋대로 끼긴 했지만 내가 뭐 피해 끼친 것 있어?동행 좀 한 것 가지고 쪼잔하기는!에쉬는 동료라고도 하잖아!"
"그건 네가 선 게 아니라 네 개가 선 거잖아!너는 불침번 선다고 해놓고는 개 꼬리나 베고 자더만!"
"라이는 내 거니까,라이가 서는 게 내가 서는 거지!네놈은 남자가 왜 이리 쫑알쫑알 시끄러운 거얏?"
"뭐야?놈?지금 욕했어?"
그것도 욕이냐?
자기는 멀쩡한 사람을 미친년 취급했으면서!
커질대로 커진 목소리에 축제를 즐기던 인파들은 슬금슬금 나와 채드를 피해갔다.
"그게 무슨 욕이야?너는 나더러 수상한데다가 살짝 광기까지 있는 여자라며!그게 더 심한 욕 아냐?"
"맞는 말이잖아!뭐 틀려?개한테 말을 걸질 않나 정체도 분명하지 않고!숨기는 것도 많고!속아주니까 사람을 바보로 알아?그리고 에이니는 어디다 빼돌린 거야?"
그래,에쉬 일행이 내 말에 적당히 속아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내가 한 거짓말은 완전히 믿었을 리는 없으니.
그리고 라이에게 말 거는 것은 신경 쓴다고 썼는데도 눈에 띄었나 보다.젠장.
"여행이 길어질 것 같아서 집으로 보냈다니까!왜?설마 내가 어디 갔다 버렸을까 봐 그러냐?"
"그래!어디 이상한 데 애를 버렸을까 봐 그런다!"
"그만!대체 애도 아니고 왜들 이러는 거야?"
"그,그래요.두 분 다 진정들 하세요."
에쉬와 로크스가 나와 채드 사이를 가로막으며 중재를 하려는 듯 했지만 이번 싸움은 내가 봐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에이니를 버려?웃기지 마!에이니를 버리느니 너를 토막내버리는 편이 낫겠다!"
"뭐,뭐라고?이 여자가 말이면 단 줄 알아?누구한테 막말이야!"
"이 이자,이 여자 하는데 나도 이름 있거든.그리고 막말은 네가 먼저 했잖아!사람을 뭐로 보고 애를 버렸다는 둥 미쳤다는 둥......내가 그렇게 우습냐?"
[와훙!마스터,갈겨요,갈겨!제가 대신 할까요?]
사실 내가 말싸움에서 주로 사용하는 대답은 '근데?'내지는 '어쩌라고?'되시겠다.
매우 간단하면서 누구나 사용 가능하지만 그것은 싸움의 끝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에 지금처럼 끝을 봐야겠다 싶을 때는 잘 쓰지 않는다.
"이익,시끄러워!길게 말할 것 없이 결투다!그리고 네가 지면 더 이상 우릴 쫓아오지 않는 거다.네 갈길 혼자 가라고!어때?"
"결투?호오,자신만만한데?그럼 체드,네놈이 지먼 어쩔 테냐?"
"그땐 나도 뭐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결투라......
오랜만에 들어본 말이 아닐까 싶다.
결투를 하면서까지 나를 떼어놓고 싶었다 이거지,체드?
내가 지금은 잠자코 있어서 그렇지 나름 대륙에 이름 날리는 유명한 분이시다 이거야!
나도 실감은 안 나지만 말이다.
그리고 '뭐든지'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쓰는 게 아니라고.
"내가......죽으라면,죽을 테냐?"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걸.너 때문에 죽기에는 내 목숨이 너무 아까우니 말이야."
"그럼'뭐든지'가 아니잖아?"
"죽으라는 것과 나더러 이 파티에서 나가라는 것만 아니면 다 좋다는 거지."
짜식,까다롭기는?
나는 파티에서 나가라면서 지는 안 나가신다?
절로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감히 나를 쫓으려 들다니.
그래,엘란까지 앞으로 적어도 한 달은 동행할 생각인데 두고두고 네 놈이랑 싸울 수는 없으니 이 참에 결판을 내주마!
"좋아,덤벼!아주 아작을 내주지.나랑 싸우는 걸 영광으로 알라고!"
"저,정말 싸우시려고요?안 돼요!진정들 하세요.제발 좀 말려봐,에쉬!"
내가 결투를 받아들이자 사색이 된 로크스가 온몸으로 나와 채드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나와 채드 둘 다 그에 개의치 않았다.
이미 서로를 지글지글한 눈으로 노려보느라 로크스는 뒷전이었다.
"좋다!지금 당장 결판을 내자고.일단 성 밖으로 나가......"
"잠깐!둘 다 잠시 멈춰봐."
"말리지 마,에쉬!지금 당장 이 여자랑 결판을 내지 않으면 오늘 밤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
"그게 아니라......저길 봐."
어째 그답지 않게 싸움을 말리지 않고 잠자코 있던 에쉬가 옆 쪽에 있는 여관을 가리켰다.
다른 여관들에 비해 매우 화려하고 커다란 그 여관은 척 보기에도 고급이었다.
마침 여간에서는 일행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나왔는데 내가 집중한 것은 그 뒤에서 공손히 인사하는 여관 종업원이었다.
인사를 받으며 나오는 걸 보니 쫓겨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시간에 식사를 하고 나오는 것은 아닐 테니,확률은 적지만 방을 빼고 나오는 거라면......
"침대!"
"방이다!"
[잉?마스터,결투는요?]
나와 채드는 싸움도 싸움이지만 일단 방을 잡기 위해 서둘러 여관으로 달렸다.
방을 잡지 못하고 헤매던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기에 다른 파티의 사람들이 따라붙었지만 단연 제일 먼저 여간 프런트 앞에 선 것은 나였다.
마침 가장 가까이 있었고 침대라는 장대한 목표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아!방,방 있어요?"
"예,마침 예약기한을 다 채우지 않고 중도에 캔슬하신 손님이 있으셔서 방이 딱 하나 있습니다."
"예스!방 있대요!방!이리 와요,에쉬!"
나는 쾌재를 부르며 에쉬에게 손짓했다.
나와 에쉬 사이에 서서 인상을 찡그리는 두 명의 사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처럼 방을 잡으려고 온 모양인데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흥.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방이 있다니 정말입니까?어떤 방이죠?"
"예,5인실 방으로 1박에 30실버 입니다."
"헉,30실버나......?"
기함을 하는 에쉬.아무리 5인실에 축제 기간이라 성수기라고 해도 방 하나에 30실버는 과해도 너무 과했다.
비싼 방값에 에쉬가 주춤하자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다가왔다.
"이보쇼,우린 30실버를 주고라도 방을 잡아야겠으니,돈이 없거든 비키쇼."
"무슨 소리?댁보다는 내가 먼저야!나는 두 번째 였단 말이야.댁은 세 번째잖아."
"이봐요!우리가 먼저 왔는데 이 무슨 무례죠?우린 이 방을 빌릴 거에요.그리니 관심 끄고 다른 여관에나 가 봐요!"
돌연 끼어든 사내들에게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내가 한마디 했다.
그러자 에쉬가 당황한 얼굴로 귓속말을 해왔다.
"지,지니 씨......30실버는 우리에게 너무 큰돈이에요.여관에 쓸 수 있는 돈은 10실버 정도입니다."
"걱정 마요.나 돈 많아요."
나는 품속에서 산적들을 인계하고 받은 상금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채드도 여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상당히 매우 울트라 캡숑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 나는 침대가 필요했다.
내가 제법 고급이라서 말이지.
"하지만 그건 지니 씨 돈 아닙니까?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잠시지만 동료로 지낼 텐데요,뭐.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요.이봐요,여기 1골드에요.방값에 식대까지 삼일 치 선불."
돈주머니를 프론트 위에 올려놓자 그새 곁으로 다가온 채드기 이죽거렸다.
"돈 쓰는 거야 상관 없지만 이제 곧 동료가 아니게 될 텐데?나와의 결투가 남아 있으니 말이야!"
"흥,내가 질리는 절대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 마시지.익사하기 싫거든 잠수연습이나 해두라고!"
"그럴 필요 없을 걸.방도 잡았으니 시간 끌 것 없이 당장 가볼까?"
"좋아!오늘 지니 크......크후후후.아무튼 각오하라고!"
[빨리 가요,마스터!재미있겠다.푸히히히.]
순간 지니 크로웰이라는 본명을 말한 뻔 했지만 적당히 넘겼다.
이런......
채드 녀석 혼쭐을 내줄 생각에 너무 흥분한 모양이다.
빨리 결투를 치를 생각에 여관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두 무리의 사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양쪽 무리에는 방금 방을 놓친 사내들이 한 명씩 섞여 있었다.
그중 돈이 없으면 비키라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상당히 건방진 표정으로 말이다.
"이보쇼.우린 한 달이나 노숙을 해서 피로가 극에 달했소.그러니 방을 양보해주쇼.돈은 더 얹어주겠소."
"어허!이봐,우린 한 달하고도 보름을 야영만 했어!저 무시무시한 드래고니아 산맥을 건너와서 지금 죽을 맛이란 말이야.그러니 우리에게 방을 양보해!"
결국 두 무리가 하고 싶은 말은 방을 저희들에게 내달라는 것이었다.
한 명은 표정이 건방지고 한 명은 말투가 건방지군.
둘 다 즐이다.
"싫은데요?"
"맞아,싫어."
"크릉!"
나나 채드나 한 싸가지 하는 인간들이기에 당연히 그들의 뻔뻔한 제의 따위는 가볍게 거절했다.
그리고 나와 채드의 싸움을 꽤나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라이가 앞을 가로마가는 사내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목을 울렸다.
"큭,보아 하니 며칠 여행한 것 같지도 않은 듯한데 양보해주면 안 되겠소?방값보다 돈을 더 주겠다지 않소?"
"싫다니까 그러네.일단 비켜.나는 지금 이 여자와 중요한 결투가 있다고."
"결투?그럼 우리도 그 결투에 끼워주쇼.그리괴 우리가 이기면 방을 넘기고 말이오."
저것들이 미쳤나?
채드 녀석이랑 한판 붙는 것도 귀찮아 죽겠고만.
큰 맘 먹고 싸우는 거란 말이다!
"웃기고 있으시군요.안 되거든요?비켜주시죠."
"난 상관 없는데?"
용병단이나 여행객들 사이에 방은 물론이고 심지어 의자 하나를 놓고도 결투가 벌어진다고는 하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공격주의이긴 하지만 더불어 심각한 귀차니즘 환자였던 것이다.
"난 상관 있어!나는 너랑 붙는 걸로 충분하거든?그리고 댁들도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여관 알아보시죠.저는 전혀 양보할 의향이 없으니 말이에요."
"이봐!그러지 말고 얘기 좀......"
안 들려,안 들려.
그들과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귀를 막고 적당히 사내들을 피해 여관을 나섰다.
나를 세우려고 손을 뻗는 듯했지만 그에 가만있을 라이가 아니다.
"크르르.크와앙!"
"우왁!뭐야,이 똥개는?"
[누가 똥개냐?크아앙!]
라이는 늑대 소리는 커녕 누렁이 소리나 들으면 다행이었다.
덩치만 크지 늑대 특유의 카리스마나 야생성 같은 구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털색도 전체적으로 빼곡한 금색이어서 더욱 멍멍이 같았다.
그나마 이빨을 드러내면 제법 사나워 보이는 것이 다행이었다.
여관을 빠져나온 나는 빨리 싸움을 끝내고 침대에 누울 생각으로 성문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사람이 드물고 싸우기 알맞은 장소는 성 밖뿐이 없었다.
성과 성 사이의 길은 나라의 관할이지 도시 관할이 아니어서 살인죄만 아니면 치안대가 쫓아오지 않으니 더욱 안성맟춤이었다.
마침 축제 기간이라 밤새 성문도 내리지 않을 테니 잘 되었다.
"어이!같이 가!"
방도 잡았겠다,남은 건 채드의 기를 꺾어주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뜸 반말을 하질 않나 '새댁'이라는 망발을 하질 않나.
물론 그때는 에이니가 같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새댁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란 말이다.
내가 그렇게 삭았나?
얼굴을 만져봤지만 나름 탱탱했다.
[마스터,채드 녀석이 다른 인간들이랑 같이 오는데요?]
뭣이?
뒤를 돌아보자 채드의 뒤로 결투에 끼어달라고 징징거리던 두 무리가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저 웬수!
왜 귀찮은 일을 사서 하려 드는 건지......
오늘 그 버릇 단단히 고쳐주지.
성문 밖으로 나오는 데 재재는 없었다.
성을 나와 대략 1분쯤 길을 거슬러 오르자 주변이 한적해졌다.
결투를 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에쉬가 걱정된 듯 따라왔고 결투에 끼어달라던 두 무리의 사내들까지,구경꾼들은 대략 10명 정도였다.
심판은 에쉬에게 맡겼다.
처음에는 기겁을 하고 말리더니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제는 주의사항을 한가득 늘어놓고 있었다.
"아셨죠?상대가 기권을 선언하면 승패는 정해지는 겁니다.그렇지 않으면 제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쪽을 패자로 판정할 겁니다.그때는 무조건 제 판정에 따르셔야 합니다.그리고 이건 보통의 결투입니다.살인은 절대,절대 안됩니다.피를 과다하게 흘리면 출혈이 심한 쪽을 진 것으로 판정해드릴 테니 제발 죽이지 마세요."
알았어,알았으니까 날 보고 말하지 마.
에쉬의 마지막 경고는 순전히 나를 향해 하는 것 같았다.
이봐,싸움을 건 것은 채드쪽이었다고!
나보다 채드에게 더 주의를 줘야 하는 것 아냐?
"걱정 마,걱정 마.순식간에 끝내줄 테니 말이야."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채드가 등에 지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꽤나 보기 드문 종류의 검으로 바스타드 소드라 불린다.
날이 길고 두꺼워 베기보다는 부수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사용되는 검.
한 손으로도 쓸 수 있고 두 손으로도 쓸 수 있어서 공격 범위는 넓은 편이라던가?
롱 소드와 투 핸디 소드의 중간 형태라고 주로 묘사되는 검이었다.
방어와 공격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고 기술이 없다면 이도저도 안 되는 검.
그렇다는 건 채드가 기술이 있다는 건가?
어쨌든 채드의 검은 날 길이만 해도 내 가슴께까지 오고도 남았다.
"순식간에 끝나는 건 너야,채드.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러고 보니 처음 채드를 만났을 때 라이가 녀석의 검을 하나 깨먹었다.
그래,말 그대로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었다.
그 검은 옆구리에 걸린 가벼운 보조용 검이었고 지금 등에서 꺼내든 것은 순전히 전투용이었다.
그리고 그 깨진 보조용 검 대신 지금은 작은 사냥용 손도끼하나가 걸려있었다.
"흥,긴 말할 것 없이 시작하자고."
"운디네!"
[네,주인님.]
솔직히 말하면 저 무식하게 커다란 검이 부담스럽기는 하다.
검을 쓰는 상대와 일대일로 싸워보기는 9년 만이니 더욱 그랬다.
차라리 노예상단의 녀석들처럼 바글바글하게 있었다면 손 쓰기 쉽겠지만 지금은 거리도 가까운데다가 상대도 하나.
다수를 상대하기 알맞은 정령술로는 귀찮은 상황이다.
"자,그럼 시작합니다.셋,둘,하나,시작!"
에쉬의 카운트보다 조금 빨리,엄밀히 말하면 둘쯤에 챛드가 그 무식하게 커다란 검으로 횡을 그으며 달려들었다.
'너 둘에 움직였어!'하고 따질 겨를 따윈 없을 만큼 채드 녀석은 빨랐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빨랐던 과거의 로베닌 만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로베닌은 그때보다 더욱 빠르겠지?
내가 감히 눈으로 쫓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를 낼지도 모른다.
"운디네,잡아!"
하지만 성장한 건 로베닌 뿐이 아니다.
운디네도 성장했고 당연히 움직임도 그때보다 배는 빨라졌다.
그렇다보니 과거 로베닌의 속도를 보여주는 채드를 운디네는 손쉽게 붙잡았고,이내 커다란 물방울이 채드의 몸을 잠식해갔다.
일단 잡히면 반은 끝난 거지.
이것 봐,채드 정도야 가뿐하다고.
씨익,하고 웃음을 짓는데......
"어림 없지!"
거의 턱밑까지 물이 찼을 때쯤 채드가 그 커다란 검을 물 속에서 한껒 휘저었다.
긴 검은 물 밖까지 날을 내밀었고 검에는 미약하나마 검기가 서려 있었다.
채드가 소드 유저?
의외인걸.하긴 제법 실력이 좋으니 에쉬가 동료료 삼았을 테지!
[끼악!히잉,주인님~]
물방울이 터지면서 채드가 당장에 달려들 태세였기에 나는 급히 다른 마법을 써야 했다.
"쳇!운디네,콜드 빔."
운디네의 앞으로 작은 물 입자가 모여듦과 동시에 빠르게 얼어갔다.
그리고 이내 사람 주먹만 한 얼음덩어리가 완성되었고 그것은 채드에게 곧바로 날아갔다.
기본적으로 얼음마법은 물 마법에서 파생되었다.
어떤 마법사는 수계마법과 빙계마법을 하나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물의 정령이 얼음마법을 쓰는 것은 치율마법을 쓰는 것만큼이나 난해하고 집중력을 요한다.
그런 만큼 보통의 물 마법에 비해 공격력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정령계에도 얼음 쪽으로 특화된 얼음의 정령 페인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얼음과 물은 근원은 같되 결국 다른 것이다.
티킹
채드는 검을 들어 손쉽게 콜드 빔을 막았다.
당연히 빠르게 쏘기 위해 대충 만들어 날린 콜드 빔은 산산히 부서졌다.
바스러지는 얼음 조각들을 보며 머릿속으로 번뜩,쓸 만한 기술이 떠올랐다.
내 공격을 두 번이나 파훼했다는 게 만족스러운지 채드가 의기양양햐게 소리쳤다.
"흥,겨우 이 정도냐?"
"아니,방금 좋은 생각이 났으니 기대하시라!운디네,다연발 콜드 빔."
이번엔 조금 신경을 기울여서 4개의 콜드 빔을 만들어냈다.
목표는?채드의 커다란 검!
어차피 검이 목표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채드가 검을 들어 콜드 빔을 막아냈다.
그리고 이번에 쏘아진 콜드 빔은 부서져나가지 않고 검과 맞부딪치는 순간 검에 빠르게 엉겨 붙었다.
하나라면 모르지만 여러 개의 콜드 빔을 쏘아냈기 때문에 얼음 조각은 저희들끼리 검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얼ㄹ음 조각은 이내 검의 손잡이까지 얼려갔다.
자신의 손까지 얼음이 다다르자 놀란 듯 채드의 손이 움찔 검에서 떨어졌다.
"뭐,뭐야?"
순간적으로 묵직해진 검은 느슨해진 채드의 손아귀에서 옆으로 기울었다.
이때다!
"운디네!검!"
[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운디네와는 충분히 뜻이 통했다.
운디네가 만들어낸 물줄기는 채드가 놀라 검을 놓치려는 순간 빠르게 낚아챘고 그 검은 물과 뒤엉켜 하늘 위로 날아갔다.
아마 숲 저편 어딘가에 떨어질 테지.
적어도 채드가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으로 말이다.
"으악!내 거~엄!"
"푸훗,검도 없이 어쩌시려나?얌전히 잠수할 준비나 하시지."
검이 없으면 검기도 발현하지 못할 테지 물에 가두면 말짱 끝이지.
얼결에 검을 잃은 채드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아,아깝네.
아이들 결투라면 무기를 잃은 순간 패배인데 말이야.
"너,너어!저 검이 어떤 검인 줄 알아?"
"왜?가보라도 돼?"
"저 검은 특별 제작한 거라고!무려 7골드나 주고도 2년이나 기다려서 겨우 손에 쥔 검이란 말이야!"
검이 사라진 허공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채드.
눈물이라도 글썽일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 검은,정확히 검기는 내게 있어 최대의 걸림돌이니 어쩔 수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가보라는 검도 깨먹은 적 있는 내게 특별 제작한 검이야 별 것 아니었다.
어쨌든 한 가지 느낀 점은 검사와 싸울 때는 상대의 검을 먼저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상대가 검기를 쓸 수 있다면 더더욱.
"어쩌라고?찾으러 가든가!흥."
"이게......!"
채드가 옆구리에 걸고 있던 사냥용 도끼를 집어들었다.
어쭈,던지려고?
너 그거 던지면 살인미수야!
이건 결투라고.
살인은 안 돼,살인은.
화가 난 채드는 도끼를 던질 태세였고 나는 운디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운디네,언 워터 브리딩."
역시 마무리는 이거지.
눈 깜짝할 사이에 물방울 안에 갇힌 채드가 도끼를 휘두르며 발악했지만 검기도 씌워지지 않은 도끼에 꿈쩍하면 언 브리딩이 아니다.
흐흠,검기라는 게 검에는 입힐 수 있지만 도끼에는 안 되네.
차이가 뭘까?
역시 손잡이일까?
소끼의 손잡이는 나무니 말이다.
검기는 요주의 대상이니 짬이 나면 자세히 공부해봐야겠다.
"콰라아악!쿠르악!"
"뭐래?크큭,그보다 지금부터 흔들어줄 테니까 승객께서는 다치지 않도록 도끼를 꽈악 잡아주세요."
"크롸락?"
"도끼 꽉 쥐라고.운디네,흔들어!"
채드 녀석이 물방울 안에서 발악하자 물방울이 크게 일렁였다.
나는 녀석이 물방울을 깨기 전에 진을 빼놓을 셈으로 물방울을 흔들었다.
동그란 물바웅ㄹ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듯 좌우로 사납게 흔들렸다.
"끄으악!끄익,흐아악!"
겉에서 보기에도 정신이 없으니 안에 있는 채드는 더할 터였다.
물방울 안에서 채드가 신음을 흘리며 그 커다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해롱거렸다.
이야,내가 그 고통 알지.
내가 멀미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워프 울렁증이라고 들어봤나 모르겠네?
이내 물방울 안으로 하얀 물거품이 회오리쳤고,채드 녀석이 눈을 허옇게 뒤집는 것이 보였다.
"이쯤 할까?운디네,언 브리딩을 풀어줘."
[네,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