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71)

울기 시작하는 에이니를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어것만 아니면 어떻게 데리고 다녀 보겠는데.

그리고 하필이면 엄마를 찾고 그러니?

아넬 언니한테 미안하게 말이야.

결국 나는 에이니를 달랠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만 울어,에이니!너 아넬 언니와 약속한 것 또 잊었니?안 울겠다고 했잖아!그리고 말이야,사실 이건 네가 딴 생각할까 봐 말 안 해주려고 했는데......"

"흐,흐응?"

"드미트리가 기사의 나라라는 말은 해줬지?그러니 당연 그 드미트리의 왕립 아카데미 드리케 아카데미에는 뛰어난 기사와 검사가 넘친단다.아마 네 마음에도 들걸."

"뛰어난......기사?검사?"

그래,그래.

종합반이 될 너는 만날 일이 없겠지만,그건 진짜 비밀이다.

에이니가 관심을 보이자 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주 뛰어난 기사와 검사들이 발에 채일 만큼 많다니까.아넬 언니 정도 되는 기사도 많아!그리고 무엇보다 드미트리에는 소드 마스터가 두 명이나 있다고!"

"소,소드 마스터?정말이요?히야아!"

"그뿐이니?뛰어난 무기 장인들이 얼마나 많은데!그중에서도 제일인 왕궁 전용 대장간에는......드워프가 있단다!"

물론 그 드워프는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 났지만.

드워프가 다 그런 것 아니겠어?

이해하라고.

"히야아아~"

언제 울었냐는 듯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에이니의 표정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미안하다,에이니.나느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을 뿐이지.

"갈 거지,에이니?"

"......정말 금방 오시는 거죠?그리고......저어......그 새로운 스승님은 정말......만만해요?"

"물론~굉장히 착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고 에이니는 잠시 나를 마주보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드미트리가 있을 남쪽을 향해 작게 기도했다.

이엘 스승님,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그의 이름은 이엘 로에닌,드미트리의 왕궁 소속 정령사다.

중급 바람의 정령사인 그는 올해로 37살을 맞이하며 올해야말로 상급 바람의 정령 실라이론과 계약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다지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주위에서도 그가 40줄을 넘기기 전에 그 포부를 이뤄낼 거라는 평이 자자하다.

그만큼 그는 노력가였고 재능 있는 이였다.

그 재능이 그의 제자이자 현대 대륙에 그 넘치는 희생정신으로 명성을 날리는 지니 크로웰에게는 못 미친다는 평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의 제자를 자랑스러워하는 인격자였다.

물론 그런 인격자인 그가 처음 지니 크로웰의 희생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럴 애가 아닌데......'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의 사람 좋은 인격으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만큼 그가 알고 있는 지니 크로웰은 남을 위해 희생할 인물도 아니었거니와 결코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일로부터 두 달을 채 채우지 못한 어느 날,그의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그 의문의 소녀는 그에게 편지를 건네줬는데 편지의 발신자는 죽었다고 알려진 그의 하나뿐인 제자,지니 크로웰이었다.

"그럼 그렇지."

소녀가 전해준 제자의 희생소식에 이엘은 놀라기보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더불어 소녀에 대한 그의 관심은 왜 이런 어린 소녀를 시켜서 편지를 전하게 했을까,하는 가벼운 의문 뿐이었다.

편지를 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친애하는 이엘 스승님께.

                                                  우아

스승님 안녕하세요?저 스승님의 하나뿐인 사랑스럽고 ====한 제자 지니 크로웰이랍니다.

듣자 하니 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흉흉한 모양인데 정말 슬픈 일이에요.

저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말이에요.

스승님도 제가 무사해서 기쁘시죠?

그리고 제가 무사하다는 아주 기쁜 소식에 덤으로 한 가지 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려고요.

이 편지를 전하는 에이니라는 소녀의 이야기에요.

제가 정글 속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스카우트한 아인데요,정확히는 제 제자로 삼았죠.

그리고 제 과거 은인의 따님이기도 해요.

스승님이 보시기에도 정말 재능 넘치는 아이 아닌가요?

그래서 말인데 저의 제자는 곧 스승님의 제자 아니겠어요?

그러니 제가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까지 스승님이 좀 맡아 가르쳐주셨으면 해요.

저는 워프를 이용할 수 없으니 육로를 이용해야 하기 때무에 아이 먼저 보내는 거랍니다.

저는 돌아가는 데 석 달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그 정도 시간이면 에이니도 기본은 배우겠죠?

역시 기본이 충실해야 하는데 저보다는 스승님이 훨씬 잘 가르치시니까 안심이에요.

역시 중요한 건 기초탄탄이잖아요.

그리고 스승님은 아이들을 좋아하시니까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에이니 잘 부탁드려요.

아참,에이니는 검술을 하던 아이라 단전에 마나를 조금 모았지만......

스승님이라면 잘 극복시켜주시리라 믿어요.

그리고 스승님,상급정령과의 계약은 진전이 있으시나요?

수련에 에이니가 방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래뵈도 저는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답니다.

그럼 친애하는 이엘 로에닌 스승님,에이니 잘 부탁드리고요.

돌아갈 때 선물 사갈게요!

역시 선물은 스승님이 잘 드시는 '봉봉'이 좋겠죠?

                                  룬력 922년 5월 10일

                             스승님의 하나뿐인 제자,지니 크로웰 올림.

선물?봉봉?물론 이엘은 봉봉을 좋아한다.

그 봉봉이란 것은 포도알을 벌굴에 저려 말린 것으로 조금 단가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아주 즐기는 기호식품이었다.

문제는 그 음식이 '샤란 특산물'이라는 것.

석 달이나 여행한다면서 샤란에 사는 사람에게 샤란 특산물을 선물하겠다고?

어이가 없었다.

편지를 다 읽은 이엘은 절로 입을 쩌억 벌려야 했고 잠시 자신의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소녀를 바라봐야 했다.

상급정령과의 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그러면서 이런 중요한 때에 자기 제자를 떠넘기다니.

그 두꺼운 얼굴이 어디 갈까마는 지니가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와버린 아이,저 멀리 타국에 있는 지니,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이엘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니 야아아앙!"

이엘의 반응은 지니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건 순 뻥

미엘타를 빠져나온 나는 우선 에쉬를 따라 움직였다.

에쉬일행이 가는 다음 목적지는 헤이드리케라고 했는데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햇다.

헤이드리케는 크란시아 대륙의 유일한 섬나라였던 것이다.

그들은 헤이드리케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 엘란으로 간다고 했다.

헤이드리케는 엘란과 매우 가까웠다.

그리고 헤이드리케까지 갈 만한 배가 운항되는 곳도 엘란 뿐이었다.

일단 중간까지는 목적지가 같았기에 나는 그들의 일행에 합류했다.

무단으로 말이다.

"이봐,왜 계속 따라오는 거야?"

"내가 언제?따라가는 게 아냐,길이 같을 뿐이지."

"웃기지 마!그럼 대체 왜 우리 식사를 멋대로 먹고 있는건데?"

"내가 달라고 안했는걸.로크스 씨가 내게 먹으라고 준 거지."

연신 타박을 구시렁거리는 채드는 에쉬 일행 중 유일하게 나와 야자를 든 상대이기도 하다.

딱히 트자고는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야자를 트니 나도 따라 트는 수밖에.

"채드 씨,지니 씨 그만 싸우세요.하루 종일 같은 내용으로 싸우고 계시잖아요."

"아니!이 여자가 하루를 꼬박 멋대로 쫓아와 놓고도 너무 뻔뻔하게 굴잖아!"

"글쎄,쫓아온 게 아니라 길이 같을 뿐이라니까.나도 엘란으로 가고,그쪽 일행도 엘란으로 가고.그러니까 당연히 길이 같잖아."

"아니!우리가 걸어가면 몰라.말을 타고 가는데도 똑같으니까 그런 것 아냐!"

그렇다.

에쉬 일행은 말을 타고 움직였고 나는 라이를 타고 움직였다.

사실 라이는 얼마든지 말을 추월할 수 있지만 내가 일부로 그들과 속도를 맞추고 있다.

왜?

"음,스프가 굉장히 맛있어요,로크스 씨."

"그래요?감사합니다.더 드릴까요?"

"네!가득이요."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로크스는 요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육포만 뜯기는 싫은걸.

물론 이대로 에쉬와 헤어진다는 게 조금 아쉬운 탓도 있지만 그는 시험 중이었기에 섣불리 아는 체를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정체를 숨겨야 했기에 에쉬가 스스로 눈치 채지 않는 이상 나와 에쉬는 단순히 며칠 전에 만난 여행객일 뿐이었다.

저 녀석도 참 눈치가 없다니까?

그때 그라크를 보고도 눈치 못 채다니 말이야.

그렇게 귀 없고 코 없는 노예상도 드문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때 그라크의 귀를 떼어냈던 사실을 잊은 걸까?

그도 아니면 그때 쓰러져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일까?

하도 오래전 일이라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뚱한 마음에 식사중인 에쉬를 노려보자니 에쉬와 눈이 마주쳤다.

이크.

"저어......지니 씨?"

"네?"

"계속 묻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뭐,뭔데요?"

에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기억난 걸까?

조금 기대를 해보았다.

"지니 씨,드미트리의 크로웰 영지 출신이랬죠?"

"네,그런데요?"

"혹시 지니 씨는......크로웰 가 사람......아닙니까?"

[어라,마스터.그거 비밀이라면서요.]

이크,이름이 지니고 크로웰 가 출신이면 지니 크로웰이라는 게 너무 티나잖아!

나는 뜨끔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에이,아니에요.크로웰 가는 귀족가문이잖아요?저는 평민인걸요."

"하지만 에이니를 데려간 남자가 분명 당신을 아가씨라고......"

"아아,평민이긴 하지만 집이 상단을 운영하거든요.그러니까 워프를 이용해 에이니를 보냈죠.그거 비싸잖아요.요즘은 개나 소나 아가씨인걸요."

적당히 둘러대고는 있지만 나는 에쉬가 너무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의심받지 않도록 적당히 부유한 상인의 딸 정도로 위장을 해야겠다.

"그 남자 분명 기사 같던데,아닙니까?"

"기사였었죠.자유기사로 대륙을 떠돌다가 지금은 아버지의 사병으로 일하고 있어요.저희 집안에서 꽤 오래 있으셨는걸요."

"그렇군요.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투가 기사 같기에......아,지니 씨는 대체 왜 산에 계셨던 거죠?그것도 어린아이와요."

"아아,숲 속에 잘 아는 부족이 있거든요.정령술 훈련할 겸 친화력 상승을 도모할 겸 그곳에서 한 달 정도 수련했어요.그 아이도 같이요.숲이 정령사에겐 최상의 수련 장소거든요."

그만 좀 물어봐라!

나는 대답을 마치고는 슬쩍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가 지나친 질문은 실례였기에 에쉬도 조금 물러섰다.

아니,물러서려다 다시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이었다.

"그렇......습니까?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정령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지니 크로웰이라는 분에게요.드리케 아카데미에 다니시는 천재 아가씨죠.크로웰 가가 저희 집안이랑 친분이 있거든요.굉자하죠?무려 백작가라고요.호홋,그리고 저랑 크로웰 영애는 또래여서 제법 친하답니다.이름도 같아서 더욱 친했어요."

[마스터,괜히 고생하시네요.그러게 그냥 우리끼리 가자니까요.]

나는 차라리 지니 크로웰이라는 이름을 꺼내버렸다.

국왕은 한 달 정도는 지나야 세간에 나의 희생소식이 전해질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에쉬는 지니 크로웰이 죽은 인물인 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떠보는 이유는 이름이 같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내가 수상한 구석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라이,이런 질문 공세에 시달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따로 갔다.

"친했다고요?"

"네!그분이 드리케 아카데미 정령술반이시거든요.저에게도 재능이 있다고 정령술을 가르쳐주셨어요.제 스승이기도 하시죠.하지만 근래에는 못 만났네요.제가 수련에 들어간 데다 아가씨도 아카데미 일이 바쁘니까요."

"당신......모르고 있군요.지니 크로웰,그녀는 죽었습니다.명예롭게요."

여기 살아 있는데?

속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겉으로는 의아함을 가장했다.

지금은 연기가 필요하니 말이다.

내가 하는 거짓말의 반만 믿어줘도 본전이지 뭐.

"네?그게 무슨 소리에요?아가씨가 죽다니......그럴 리가 없는데?그렇다고 해도 그걸 에쉬 씨가 어떻게 아시죠?그런 농담은 좋지 않아요."

"정말입니다.그녀는 죽었어요.아마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당신뿐일 겁니다."

"에?거짓말......말도 안 돼요!제가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그런 거짓말을 함부로 하시다니,실망이네요!"

나는 인상을 팍 구기며 불쾌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곁에서 잠자코 듣던 로크스가 나섰다.

"정말이에요,지니 양.지금 지니 크로웰 양은 희생의 정신 아나이스의 사자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유명인입니다.왜냐하면......그녀는 드래곤에게서 황제와 많은 왕족들을 지켜냈기 때문이죠."

"드래곤?그게 무슨 소리에요?"

"소문에 의하면 드래곤이 엘란의 개국 천주년 파티에 난입했다고 합니다.그리고는 많은 보석을 요구했고 황제 폐하께서 용감히 '우리 백성들의 피와 땀이 모인 것입니다.결코 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그러자 화가 난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었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지니 크로웰 양이 그 공격을 정령을 이용해 막았다고 해요.그리고는 스스로 드래곤에게 '드래곤이시여,부디 저를 잡아가시고 화를 푸소서'라고 했다고 해요.그녀는 굉장히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기에 드래곤이 그녀의 미모에 혹해 그녀를 잡아갔다고 하더군요."

뭣이?내가 현장에 있었는데 대사가 전혀 다른 걸.

내가 언제 '드래곤이시여,부디 저를 잡아가시고 화를 푸소서'라고 했다는 거야?

나는 그런 희생정신 따위는 없어!

그리고 황제도 그런 말 안 했어!

보석을 다 주면 적대국과 전쟁 나면 진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부탁하더만.

역시 소문이라는 건 과대 포장되기 마련이군.

[정확히는 저한테 반했잖아요,마스터.]

[시꾸라.]

[에이,마스터.질투하시는군요?]

아니거든.물론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감동한 척한다.

"......정말요?정말 그래요?지니 아가씨가 그랬단 말이에요?"

"네,그녀는 황제 폐하와 많은 왕족들을 지키고......그만.크흑!"

"아아,그렇게 감동적일 수가.아가씨이......"

"흐윽,우리는 그녀의 넘치는 희생정신을 찬양해야 합니다!그녀를 본받아야 한다고요.저는 다른 누구보다 그녀의 숭고함을 찬양할 것입니다."

로크스가 스스로 말해놓고도 감격스러운지 눈물을 비쳤고,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우는 시늉을 했다.

그 김에 눈에 침도 바르고 말이다.

"흐,흐흐......끄흐흐흐.흐흐흐.끄흐......"

물론 얼굴은 웃고 있다.

아이고~웃겨 죽겠네.

로크스,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소문에 홀딱 속아서!

댁이 찬양한다는 지니 크로웰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웃음을 참아내자니 배꼽이 빠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 거짓말이 통했는지 에쉬 일행은 나에 대한 미심쩍은 마음은 지워낸 듯 했다.

겨우 웃음을 참고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참느라 흘린 눈물이 내가 정말 슬퍼한다고 보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어,얼굴이......!"

"지니 양,그렇게......슬픕니까?"

"얼굴 참 가관인걸."

응?내 얼굴이 뭐?

슬쩍 라이를 돌아보았다.

내 얼굴 어떠냐는 뜻이었다.

[빨갛기도 하구나.코도 반짝,눈도 반짝,입도 반짝,다 반짝반짝~]

어디서 들어본 듯한 라이의 노래에 불길함을 느낀 나는 서둘러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눈물은 물론이고 콧물까지 범벅이 된 얼굴.

어쩐지 침 바르는데 짜더라.

얼굴도 화끈거리는 게 불그스름할 것이 틀림없었다.

웃긴 걸 너무 참았나?

[푸히히힛!아이고,배야.아나이스님의 사자가......끄흐흐흐.]

"풉......"

"푸흐흡."

역시나 라이가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그 뒤를 이어 채드와 로크스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괜찮아,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그러니까......

"......이리 와봐,라이.가볍게 맞자."

[크,크앙?]

마음 같아서는 채드와 로크스도 때려주고 싶지만 일단 친한 사람,아니 정령부터 맞자.

나랑 친한 것도 죄라니까.

은근슬쩍 에쉬 일행 사이에 끼어들어 여행한지 3일 째.

이제는 채드도 나를 일행으로 인정한 모양인지 더 이상 타박을 주지는 않았다.

아니 포기한 걸지도 모른다.

에쉬와 로크스도 나에 대한 경계를 많이 풀었기에 나는 완전히 그들 일행 사이에 녹아 들어 있었다.

그들은 나를 '가끔 화가 나면 개를 괴롭히는'뭔가 수상한 부잣집 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라?마스터,저 앞에 인간들이 숨어 있는데요.]

한창 말을 달리는데 문득 라이가 달리는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숨어 있다는 걸 보니 산적 쯤 되는 것 같았다.

"에쉬!로크스!"

내가 라이를 세우며 둘을 부르자 둘은 힐끔 나를 보더니 말의 속도를 늦췄다.

다만 내게 호명되지 못한 채드만이 계속 말을 달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지니 양?"

그들은 여전히 내게 말을 놓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대화가 편해지지 않았나 싶다.

나는 손가락으로 홀로 달리는 채드를 가리켰고,마침 숲에서 튀어나온 산적들이 채드를 덮쳤다.

아니,덮치기 바로 직전 채드는 말의 고삐를 돌려 산적들을 피했다.

오오,저 녀석도 제법이라니까.

푸히히힝

거친 채드의 손길에 말이 놀라 울었고 채드는 그대로 말을 달려 우리 쪽으로 되돌아왔다.

"괜찮아,채드?"

"멀쩡해.말이 조금 놀란 것 같기는 한데......에쉬 너는 어떻게 알고 피해 있었어?"

"나는 지니 씨가 알려줘서......"

에쉬와 채드,로크스의 눈이 내게 향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타고 있던 라이를 가리켰다.

"나는 라이가......"

[접니다.푸히힛.]

내 대답에 일행은 크게 의심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행에게 라이가 쥐약을 잘못 먹고 죽어가기에 닥치는 대로 약을 섞어 먹였더니 그날부터 피부가 단단해지면서 영악해졌다고 설명했다.

일명 '기연효과'라고 말이다.

그들은 믿는다기보다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내가 워낙 수상한 인물이니 말이다.

"그보다 어쩐다?저들은 웬만큼 만족스럽지 않으면 덤벼들 텐데 말이야."

다가오는 산적들의 모습에 에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이봐,너 부자라며?네가 기부 좀 하지?"

"미쳤냐?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기부거든?"

[마스터,제가 한 입 물어줄까요?]

[나중에.]

턱도 없는 채드의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아무리 컨셉이 부잣집 딸이지만 안 될 일이 있는 거라고!

"로크스,우리 여윳돈이 얼마나 있지?"

"그러니까......70실버 정도?"

"후우,어쩔 수 없지.그거라도 꺼내봐.괜히 피를 볼 순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에쉬!그걸 다 준다고 녀석들이 우릴 놔줄까?"

로크스가 유일하게 반말을 하는 상대,바로 에쉬다.

나는 물론이고 채드에게도 존댓말을 쓰면서 말이다.

하긴,이 둘은 설정상 소꿉친구라던데 소꿉친구 사이에 존댓말을 쓰면 어색하다 못해 썰렁하지.

"일단 줘봐.싸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로크스가 돈 주머니를 꺼내는 동안 산적들은 코앞에 와 있었다.

어디보자,12명?

이 정도면 적당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랬다가는 평화주의자 에쉬가 또 삐질 테니 가만히 있으련다.

"흐흐,무사히 산을 내려가고 싶거든 가진 걸 다 내놔라.그렇지 않으면 이 산에서 눈을 감아야 될 거다."

"여기,이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우린 싸움을 원하지 않아요.보내주십시오."

에쉬가 돈주머니를 건네자 그중 간부 정도로 보이는 이가 나와 돈주머니를 받아갔다.

그에게 돈 주머니를 전해 받은 사내가 대장인 것 같았다.

삐쩍 마른 산적들 사이에서 그래도 살집이 있는 자였다.

그는 돈 주머니를 열어보고 무게를 가늠하나 싶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성의는 있는 자들이로군."

"다행이군요.그럼 우리는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돈은 됐으니 몇 가지 물건만 놓고 가면 되겠군."

70만원을 날로 먹어놓고 뭘 더 달래?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좋을 수가 없었다.

삐쩍 마른 몸매에 근육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어 보였고 무기라고 치켜들고 있는 것은 여기저기 날이 나간 검이나 도끼였다.

내가 상상했던 산적의 모습은 우락부락한 근육에 수염이 난 그런 호걸이었는데 이 산적들은 호걸은 커녁 패잔병 같은 모습들이다.

믿을 건 숫자뿐이겠군.

"물건이라면......무엇을?"

"우선은 타고 잇는 말을 내놔라.세 마리 모두."

"말을요?좋습니다.말만 드리면 되는 겁니까?"

"자,잠깐 에쉬!"

말도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나야 라이가 있으니 상관 없지만 에쉬들은 말이 없으면 힘들 텐데.

아직 다음 도시까지는 반나절은 더 꼬박 달려야 했으니.

말을 주겠다는 에쉬의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로크스였다.

아마도 체력이 나만큼이나 바닥을 기기 때문이리라.

"그래,남자들은 말만 주면 되고......저쪽 여자는 누렁이까지 포함해서 전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여자는 두고 가라는 소리다."

나와 산적 두목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저게 어디서 감히 수작이야?

그러면 나도 물건에 속하는 거냐?

[누가 누렁이야?]

"그건 안 됩니다.부디 그 돈과 이 말들로 참아주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

인상을 팍 구기고는 흥분한 라이를 진정시키는데 채드가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왔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봐,네가 돈을 주든지 저놈들 따라가든지 하는 게 어때?"

"......미쳤냐?둘 다 싫거든?"

"그럼 어떻게?에쉬는 죽어도 싸우지는 않으려고 들 텐데 말이야."

"너나 가!"

이 녀석은 대체 날 뭐로 보고 있는 거야?

산적과의 협상 목록에 오른 순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나느 채드까지 합세하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되지.몽땅 죽기 싫다면 순순히 여자와 개를 내놓고 가는 게 좋을걸.흐흐,마침 날도 더운데 잘 됐지 뭐야.몸보신에는 개고기가 최고지."

"안 됩니다.그럴 수 없어요.돈을 더 드릴 테니 보내주십시오."

"그래?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몽땅 죽이고 여자를 데려가야겠다."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놈 참 답답하네.

저런 놈들은 매가 약이라고!

왜 그걸 몰라?

나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에쉬를 노려보았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방어 위주였긴 하였지만 채드와 함께 30명을 막아내지 않았던가.

힘이 있는데 쓰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바보 같은 일이었다.

나는 에쉬의 성격은 개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엘타에서도 그렇고,에쉬의 저 평화주의적인 성격은 자칫 손해 보기 쉬웠다.

은혜 갚는 셈치고 내가 좀 손봐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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