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마시고 있던 한센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은 제 2기사단에서 부단장을 맡고 있다고 했던가?
9년 전부터의 인연으로 나랑은 드물게 친한 관계인 기사였다.
저 아저씨,내 덕에 몰매 좀 맞았지?
"아가씨!이,이럴 수가......정말 살아계셨군요.크흑!"
[어라,저 기사 저번에 미스릴 흡수했던 녀석이죠?그리고 나중에는 가보라는 검까지 부숴......]
[그 얘기 또 하면 맞는다.]
한차례 나를 훑어본 한센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게 다가왔다.
이야,내가 그렇게 반가웠어?
"제가 원래 좀,흐엣치,끈질기잖아요.근데 경은......아,잠시만요.위로 올라가죠.여기서 얘기하기에는 좀 그러네요.재채기도 나오고."
순식간에 나와 한센에게 모여든 여관 사람들의 시선에 나는 몸을 사렸다.
찬바람 덕에 코도 간지러웠다.
한센 아저씨를 이끌고 내가 묵는 방으로 올라왔다.
마침 방안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방 안은 따뜻했기에 재채기도 조금은 사그라졌다.
"거기 앉으세요.근데 여긴 어떻게 오신 거에요?"
"아,위에서 임무가 내려왔습니다.국왕 전하의 직속 전언이었는데 특별히 워프 사용을 허가하니 아가씨가 정말 무사한지 그 안위를 확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아가씨의 얼굴을 확실히 안다는 이유로 제가 오게 되었죠.흐흑,어디 다치신 데도 없어 보이시고......어쩜 이렇게 평소와 똑같으신지......정말 다행입니다,아가씨!"
평소와 똑같아?
땀범벅이라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데다가 머리느느 산발인데?
내가 평소에 그렇게 폐인이었나?
"아하하,전하께서 직접 신경써주시다니 영광이네요.그렇지 않아도 다시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미루고 있었어요."
"아,그렇지.전하께서 직접 아가씨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내일 두 시에 왕궁으로 통신을 거시면 국왕 전하꼐서 친히 받으신다고......"
"에,정말요?다행이네요!그렇지 않아도 전하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 생겼는데."
드미트리에서는 마법사가 매우 귀해서 왕궁 안에 마탑이 있다.
고로 워프진 사용도 왕궁의 허가가 필요한 것이다.
오는 것은 물론이고 가는 것도.
보통 본국의 왕족이나 귀족이 사신으로 떠날 때나 외국에서 귀빈이 올 때 주로 사용되는 만큼 한센이 워프를 이용해 이곳에 온 것도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워프를 이용해 에이니를 본국으로 보내야 했고,그러기 위해서는 왕의 허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다면 내일 말씀 올리면 되겠군요.전하께서는 아가씨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매우 많다고 하셨습니다.그 외에도 학장님과 아가씨의 친부모......아참!아가씨,이것을......"
한센이 문득 자신의 품에서 편지 두 장을 내밀었다.
"편지?누가 보낸 거죠?"
"아가씨의 본가에서 보내 온 전보와 학장님이 직접 주신 편지입니다.아가씨 본인임을 확인하면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전보는 이곳에서 사용하는 우편체계중 하나였다.
도로망이 발달하지 못해 일반 편지는 배송시간이 매우 길다.
그에 반해 전보는 통신마법을 이용해 짧게 용건을 남기는 것인데 본인을 직접 통신마법으로 만날 수 없을 때나 파티 초대,혹은 전시 같을 때에 사용된다.
지금은 나를 직접 통신마법으로 볼 수 없으니 전보를 남긴 것 같았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그냥 통신으로 만나면 될 텐데.
나는 우선 본가에서 보내온 전보를 열어보았다.
┏
크로웰 본가 후작위 상승.주소 바뀜.통신망 불안정.연락 어려움.
제라스,데니카 지니 찾아 가출.한 달 보름 이상.지니 무사 귀환
축.집 한 번 귀환 필필필 요망.
┛
두 가지 소식 모두 나를 놀라게 했지만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제라스 오라버니와 남동생 데니카의 가출소식이었다.
젠장,어쩐지 그 다크엘프 제라스를 만났을 때 불안하더라니,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그나저나 왜 갑자기 후작위로 승급한 거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통신 마법을 사용할 때도 그런 얘기를 듣기는 했다.
"제 본가가......후작위로 승급 됐어요?"
"예,아가씨.아가씨가 엘란에서 황제 폐하와 국왕 전하를 구하고 그 외 다수의 왕족과 귀족 분들을 구하고 희생됐다며 그 공으로 제국공신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후작위로 승급되었습니다.그런데......어떻게 드래곤의 손에서 무사하셨습니까?"
"아아,드래곤이랑......친구 먹었거든요.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죠,후훗."
"끄억!저,정말이요?드래곤이랑 치,친분,아니......친우가 되셨다고요?"
그렇다니까.
난 놀란 토끼 눈의 한센 아저씨에게 한 번 씨익 웃어 보이고는 학장의 편지를 펼쳐들었다.
┏
지니 크로웰 양에게.
나는 현재 드미트리의 왕립 아카데미 드리케 아카데미의 학장으로 있는 라일 데르트 후작이네.
그리고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자네는 정말 지니 크로웰 양이 살아 있다면 그녀 본인일 테지.
한 줄 먼저 쓰자면 나는 아직도 자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네.
정말 자네가 살아 있다면,드래곤의 손아귀에서 살아나 왕국으로 돌아오고 있다면,그건 기적이네.
신이 존재하심을 감사해야 하며 그리고 그분이 자네를 총애함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거네.
(이 때 지니는 '흐흥,잊고 있었네.학장은 독실한 신자였지.'라며 입을 삐죽였다.)
자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지금 대륙 전체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네.
황제와 왕을 구하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드래곤의 손에 잡혀갔으니 그야말로 희생의 여신 아나이스의 사자라고 말일세.
몇몇 이들은 자네가 희생의 여신 아나이스의 환생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네.
자네의 이름으로 교단을 설립하자고 할 정도로 지지자가 생겼고 자네의 이름 다섯 글자는 지금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력이 있다네.
그만큼 자네의 희생은 대단한 것이었고 후세에도 이어줄 만한 것이지.
┛
어이쿠,그 정도야?내가 전생에 여신이었다니......
그거 영광이네.
사실은 평범한 고딩이었는데 말이야.
기억나는게 유감이군.
┏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발휘되었네.
헌데 그런 자네가 살아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네.
자네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앙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네가 대륙에서 강력한 입김을 자랑할 수 있게 될 거라는 걸세.
지금 이 대륙에는 내 이름을 모르는 자는 있어도 자네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으니 말이네.
자네가 그렇게나 이름을 알리게 된 이유는 최근 몇 십년간 대륙이 너무도 조용했기에 모처럼 생겨난 이야깃거리를 너무나도 반겼기 때문이지.
귀족들의 입에서 입으로 자네의 숭고함이 알려졌으며 평민들의 입을 통해 자네는 동화와 노래의 주인공이 되었지.
지금 자네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칭송의 대상이네.
자네가 살아 있는 것이 알려지고 자네의 도와달라는 입김 한 번이면 적어도 수 만의 사람이 몰려들게 분명하네.
┛
그,그 정도야?
슬쩍 편지 너머 한센의 눈을 보니 확실히 전과 달리 부담스러울 정도의 반짝임이 가미되어있었다.
이런......
┏
그런 자네에게 꼭 해두고 싶은 말은,왕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본인의 정체를 함구하라는 것일세.
자네는 워프를 사용할 수 없으니 보나마나 육로를 이용할 테지?
그 과정에서 자네의 희생 소식이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네.
전과는 달리 자네의 존재를 탐내는 이들이 많아졌으니 말일세.
외국에서는 자네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회유하기 위해,혹은 친분을 만들기 위해,어떤 이는 자네의 존재를 못마땅히 여기고 자네를 살해하려 들지도 모르지.
그 만큼 지금 자네가 대륙에,정확히는 각국의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네.
외국의 왕족들은 그것을 탐낼 테고 말일세.
엘란에서는 자네가 제국에서 사라졌으니 제국민이라고 우기기까지 했네.
드래곤의 손에 희생된 용감한 이를 자기네 나라의 백성으로 꾸미고 싶었던 게지.
자네를 굳이 '제국공신'이라고 칭한 이유도 거기에 있네.
후세들이 보면 자네가 드미트리인이 아닌 엘란인인 줄 알걸세.
통탄할 일이지만 자네는 분명히 할고 있으리라 믿네.
자네는 자랑스러운 드미트리의 백성이라는 것을 말이야.
더 해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자세한 사항은 자네를 마주보고 전하겠네.
그럼 이만 편지는 줄이지.
그리고 이 편지는 다 읽는 대로 소거해주기 바라네.
┛
그,그,그 정도란 말이야?
'끄악!'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작 나는 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나야 드미트리를 배신할 생각은 없지만 내 존재가 일반 백성들에게 그 정도의 영향을 끼친다면 학장으로서는 불안할 만도 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싫어해야 하나?
왠지 귀찮아질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일단 내가 내 정체를 명확히 밝힌 적이 있나 되짚어보았다.
다행이도 '지니'라고는 했어도 '지니 크로웰'이란 풀 네임을 밝힌 적은 없었다.
딱히 학장이 말하는 거창한 이유를 짐작해서는 아니었고,다만 귀족이라고 유세부리는 것 같아 적당히 얼버무린 것이었는데,역시 잘한 일인 듯 했다.
편지를 접으려다가 문득 한 장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뭐지?
┏
추신:아참,브라이트 군이 마탑에 장기휴가를 내고는 자네를 찾겠다며 떠났다고 하네.
그리고 현재 휴가알이 열흘 넘게 지났는데도 돌아오고 있지 않다네.
그러니 혹시라도 길에서 만나거든 일단 한대 패주게나.
┛
라져!
편지를 접은 나는 일단 편지를 북북 찢었다.
소거하라고 했으니 소거해줘야지.
아마도 엘란에 대한 험담 비슷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뒷장은 안 읽었어도 좋았을걸.
브라이트까지 나를 찾아 나섰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라스 오라버니와 데니카에 브라이트까지!
이것들이 드래곤을 뭐로 보고 집을 나와 집을?
내가 지금 집, 아니 아카데미에서 잘못 나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겨우 산을 빠져나와 쉬나 했더니 중요한 칼을 도둑맞지를 않나 에이니가 납치당하질 않나.
그 과정에서 에쉬를 만나고 그라크까지 만나고,얼결에 노예단 청소까지!
그야말로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노예단 녀석들을 처리한 것은 나름 보람 있는 일이었다.
"아참!한센 경,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요."
"제게 말입니까?"
"네!경은 궁으로 돌아가실 때 워프를 이용하시겠죠?그 때 그 아이를 함께 데려가주셨으면 해요.국왕 전하께는 제가 꼭 허락 받을 테니까요."
한센 아저씨가 왕궁으로 복귀할 때 에이니를 같이 보내버리면 나는 안심이었다.
편하기도 하고.
국왕 전하의 허락을 받아낼 자신은 있었다.
".....아이라면 1층에 있던 은발머리의 여자아이 말씀이십니까?"
"네!바로 그 아이에요.저는 육로를 이용해서 따로 아카데미로 가야 하거든요.아시죠?제가 지독한 워프 울렁증인 걸요.그러니 아이 먼저 보내고 싶어서요.아무래도 같이 여행하기에는 이래저래 부담이 되니까요."
[무엇보다 귀찮아요,마스터.]
내 지독한 워프 울렁증을 익히 알고 있는 한센 아저씨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연중에 내 워프 울렁증을 동정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이다.
"아아,헌데 아가씨.그 아이가 대체 뭐기에 궁으로 데려가라는 겁니까?"
".....사실 이건 극비인데요,경만 알고 계세요."
"그,극비요?"
[뭐,뭔데요,마스터?저도 모르는 건가요?]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난 탓인지 잠들어 있던 장난기가 슬그머니 도졌다.
덤으로 라이도 걸려들었다.
슬쩍 운을 뗀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제 딸이에요!"
[잉?]
푸히히힛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한센 아저씨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매우 진지한 사람이라 남의 빤한 거짓말에 잘 속은 편이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하더니 이내 눈을 크게 뜨고 인중을 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말 했다.
"아하!역시 아이 아빠는 드래곤입니까?"
[이잉?]
......뭐야?어떻게 하면 그런 답이 나오는 거야!
오히려 화들짝 놀란 나는 다급히 말을 고쳤다.
"다,당연히 농담이죠!제가 몇 살인데 8살짜리 딸이 있겠어요?게다가 왜 하필 애 아빠는 드래곤이죠?"
"아아,역시 그렇죠?저는 갑자기 망아지만한 딸이 있다고 하셔서......그렇지 않아도 세간에는 아가씨가 드래곤의 연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거든요.그래서 저는 드래곤의 아이라면 그새 저 정도로 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에이,저도 깜빡 속을 뻔했잖아요,마스터.]
계속 옆에 있었던 놈이 속으면 바보지!
나는 일단 한센 아저씨의 말을 부정했다.
"드래곤의 연인?아니,아니에요.절대 아니라고요!말도 안 돼!"
대체 누구야!
그런 돼지 머리털 튀겨 먹는 소리르 지껄인 게!
안센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늘 들은 그 어떤 소식보다 나를 질겁하게 했다.
아무리 드래곤이 상대라고 해도 한 달 만에 애까지 낳고 심지어는 그 애가 8살이나 되는 게 말이 돼?
으이구,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하핫,역시 그렇죠?그럼 드래곤의 손에 키메라가 되었다는 소문은......"
"차라리 운디네가 물에 빠져 뒈졌다고 해욧!"
어떻게 하면 저런 해괴한 소문이 도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정말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별 해괴망측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전혀 반갑지는 않지만.
전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덕인지 다음날에는 무사히 감기를 떼어냈다.
라이에게 에이니를 지키라고 지시한 뒤 마탑을 찾았다.
마탑에 도착한 나는 우선 시계를 찾아 로비를 훑었다.
마침 프런트 한 편에 놓여 있는 시계는 1시 50분쯤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채우고 있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곳의 시계는 내 전생처럼 바늘이 달리거나 숫자가 떠오르는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가운데가 잘록한 8자의 모양의 유리그릇 안에 모래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는 모래시계라고했지 아마?
한쪽이 12시간을 담당하며 하루는 양쪽을 합해 24시간이다.
크고 작은 선들이 그어져 있어서 모래가 어느 선에 가까운지를 보고 시간을 판단한다.
이 모래시계라는 것은 위쪽의 모래가 다 떨어졌음에도 재깍 뒤집어주지 않으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각 도시나 마을의 치안대가 정각이 되면 시간의 수만큼 종을 울려주는 일을 도맡고 있다.
물론 그들이 사용하는 모래시계는 약간의 마법이 걸려 있어서 시간이 되면 알아서 뒤집히고,동시에 알람이 울린다고 한다.
일명 자동 알람 모래시계.
그 외에도 부유한 집안이나 국가소속 기관이라거나 마법과 관련된 기관은 따로 전용 자동알람모래시계를 가지고 있다.
이곳 마탑도 마찬가지였다.
"어머,안녕하세요.언제 오셨어요?"
프런트에 있던 여직원이 그제야 나를 발견한 듯 아는 체를 했다.
오늘도 그녀가 풀고 있는 것은 2클래스 정도의 마법수식.
저 정도로 보면 외워지지 않을까 싶다.
"아까요.그런데......거기 틀렸어요."
"네?어디요?"
"지금 건드리고 있는 부분이요.회전속도는 더하기가 아니라 제곱이에요."
"아,맞다.감사합니다!수학을 잘하시나 봐요?"
이크,너무 답답한 나머지 떠들어 버렸네.
마기에게 마법이론을 가르치던 버릇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교사거든요.수학교사."
"그렇군요!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이봐,그런 말은 작게 혼자 하는 거라고!
"그보다 통신마법을 쓰고 싶은데......이게 코드 번호에요.장소는 드미트리의 수도 샤란이고요.돈은 여기,1골드 20실버 맞죠?"
"아,바로 연결해드릴게요.1번방으로 들어가세요."
방이래 봤자 두 개 뿐인데 번호를 붙일 것까지 있나 싶었지만 이곳에서 통신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기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방 안은 온통 어두웠고 통신구슬 하나와 의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방 안이 어두운 이유는 통신구슬 속 상대의 영상이 보다 선명해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상대에게 내 모습을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의자에 앉자 구슬에 신호가 왔다.
먼저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확인이 있겠습니다.룬력 922년 5월 10일 오후 2시,통신예약 되신 분이시다면 암호를 알려주세요.]
"황금 검음 결코 녹슬지 않으며 영원히 빛날지니,나의 조국에 영광을."
[협조 감사합니다.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역시 국왕 쯤 되니 약속이 되어 있어도 통신이 쉽지 않았다.
바로 왕에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검열기관을 통해 왕에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신 내용을 엿듣는 것이 어려워짐과 동시에 녹화가 되지 않기에 은밀히 조심스러운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한다.
구슬 속에 이내 국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깊에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지니 크로웰,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오오,이렇게 감격스러울 때가 또 있을까?그대,고개를 들라.]
"예,전하."
[과연 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구나.자리에 앉으라.그대에게 묻고싶은 것이 참으로 많다.]
자리에 앉아 국왕의 눈을 슬쩍 보니 국왕의 눈에서도 한센의 것과 같은 반짝임이 포착되었다.
이거,이거,드래곤 한 번 잘 만났더니 인생이 편해지겠군.
"뭐든지 물으소서.무엇이든 진실로 답하겠습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묻지.어떻게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살아난 것인가?]
"전하,드래곤께서는 과연 전설처럼 인자하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그리고 그 분은 저를 귀엽게 여겨 살려주심은 물론이고 저에게 친우로 지내자 하셨습니다."
[저,정말인가?드,드래곤과 친분을 나눴는가?]
물론 개뻥이지.인자한 드래곤이 황궁을 털겠어?
"정말입니다,전하!또한 드래곤께서는 제가 정령사임을 마음에 들어하시며 10년에 한 번 자신을 찾아와 정령에 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자 하셨습니다."
이번엔 거짓말 안 했다.
약간 다듬어 각색했을 뿐.
[10년에 한 번?자네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로군.과인은 드래곤 앞에서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네.]
"저 또한 그렇습니다.하지만 어떻게 감히 드래곤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친우라고는 하나......상대가 드래곤이다 보니......"
약간 모자라는 드래곤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지.
그리고 정확히는 친구가 아니라 보모와 유아 관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어허,그럼 10년 뒤에는 다시 드래곤에게 가야 하는 겐가?]
"예,전하.그것을 조건으로 풀려난 것이니까요.제가 죽지 않는 한은 계쏙 드래곤님을 찾아 뵈야 합니다.아,그리고 드래곤님께스는 제게 친우의 증표로 이것을 주셨습니다."
인생을 더욱 빛나게 다듬기 위해 나는 준비해온 칼을 슬쩍 들어보였다.
마기가 준 검으로 진가는 검날에 있지!
[그것은......검이 아닌가?그것을 드래곤이 주었다는 겐가?]
"그렇습니다.이 검날을 보십시오,전하!"
본래 국왕의 앞에서 검을 뽑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통신 마법 중이었기에 나는 검을 슬쩍 뽑아 날을 보였다.
선명한 황금빛 검날!
캬캬캬,어때?뿅가지?
아까의 암호에도 있듯이 우리 드미트리를 상징하는 것은 황금 검이다.
더불어 황금 새도 있고 말이다.
황금 새가 황금 검을 가지고 있다면 그야말로 극상이지.
[오오!황금 검이 아닌가?드래곤이 주었다면 보통 검이 아닐 것 아닌가?]
"물론이지요!5클래스에 해당하는 방어마법과 공격마법이 걸려 있다 들었습니다.게다가 전하,이 황금빛 날은 골드 드래곤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는 증표로 우리 드미트리에 더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호오오.자네,그렇다면 그 말은......]
"그렇습니다.저는 이 검을 전하께 바치고자 합니다.그것이 더욱 이 검을 빛낼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전하!"
사실 가지고 있어도 내겐 쓸모가 없기 때문도 있다.
굳이 말하진 않겠지만.
[과인은,과인은 진정 충신을 두었구나!그 검은 그대가 과인을 두 번 살려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내 그 검을 우리 왕국의 보물로 삼아 길이길이 남기리라!]
푸하하핫!
인생 쫙쫙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몇 가지 대화가 더 오갔다.
에이니라는 재능 있는 아이를 찾았으니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아카데미에 넣어달라는 말과 워프를 이용해 미리 보내고 싶다는 부탁을 국왕은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정체를 숨기는 조건으로 육로를 이용해 돌아가겠다는 허락도 구했다.
왕도 내 워프 울렁증을 곁에서 지켜본 탓인지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그럼 석 달 후에 뵙겠습니다,전하."
사실 라이를 타고 가면 두 달이면 도착하겠지만 조금 쉬엄쉬엄 유람 삼아 갈 요량으로 나는 넉넉히 여유를 잡고 말했다.
[그래,조심해서 오......잠깐!이것을 묻는다는 걸 깜빡했군.]
"무엇입니까,전하?"
[그때......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았던 그 마법 말일세.대체 무언가?자네가 부린 것이 아닌가?]
헉,젠장.
거기까지는 생각해온 게 없는데.
왕은 내가 부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쩐다?
이럴 땐......
"전하,그것은 사실 '금기의 술'로서 아마도 그 사용법을 아는 정령사도 저 뿐일 거라 사료되옵니다."
[금기의 술?]
"네,전하.제가 어렸을 적 우연히 고서에서 본 내용으로 정령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쓰는 정령술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고?]
이럴 땐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게 최고다.
조금 폼나개 건드리면 안 될 느낌을 주기 위해 금기와 목숨을 운운하는 것이 좋지.
"그렇습니다.자신의 정령 중 가장 강력한 정령과 자신의 남은 목숨 중 일부를 희생하여 쓰는 금기의 정령술로 뭐든 단 한번,그 어떤 공격도 막아주지요.제가 그것을 썼다는 것은 부디 전하만 알고 계셔주십시오.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따라할까 겁나는 저주받은 술입니다."
[그,그런?그렇다면 자네의 목숨은 얼마나 남은 것인가?]
"그건 저도 모르지만......결코 길지는 않을 듯 합니다,전하."
짧게 한 70년만 살지 뭐.
이곳의 평균 수명이 100살이니 말이야.
정령술이라는 것이 워낙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인지 왕은 순순히 믿는 눈치였다.
속여서 미안하지만 '라이가 그랬어요.상 주실래요?' 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럴수가......자넨 어쩌자고 그런 술법을 함부로 썼단 말인가?]
"단지 전하와 황제 폐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만......하지만 제가 그 술을 쓰지 않았다면 어차피 죽읐을 목숨이니 후회는 없습니다."
[통재라!알았네.내 그 마법의 비밀은 걸코 발설하지 않겠네.그러니 자네는 그저 여생을 편히 지낼 생각만 하게나.]
"예,전하."
원래 그럴 생각이었습니다,전하.
후훗,나중에 너무 오래 산다고 수상해하면 산삼이라도 먹었다고 해야겠다.
헌데 이곳에도 산삼이 있던가?
그래도 남은 날이 얼마 없는 줄 알면 귀찮은 일은 안 시키겠지?
누구 머린지 잔머리도 참 잘 돌아간다니까.
국왕과의 통신을 끝내고 마탑을 나온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에이니에 대한 걱정을 덜어낸 탓이다.
라이가 곁에 없기 때문인지 평소와는 색다른 느낌도 들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작게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여관으로 가는 길목에는 시장이 있었는데 그곳은 여러 인종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얀 피부,갈색 피부,붉은 피부,검은 피부......응?
나는 문득 검은 피부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두건으로 질끈 동여맨 여자 하나를 발견했다.
갸냘프고 낭창낭창한 몸매나 긴 머리로 보건대 여자인 건 확실하다.
그녀는 노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유독 주위 시장 풍경에 녹아들지 못하고 홀로 튀었다.
하긴,금발은 그렇지 않아도 튀는데 거기에 한술 더 떠 검은 피부라니,눈에 띄는 것은 당연지사.
"와아,정말 이게 30실버밖에 안 해요?"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까지.
나는 그녀가 내가 아는 사람,아니 아는 엘프라는 데에 에이니를 걸겠다.
아니,사람 걸기는 좀 그러니까 라이를 걸어야겠다.
잠시 그녀가 작은 손거울 하나를 요리조리 뒤집어보더니 돈주머니를 떠내드는 것이 보였다.
잠깐,그게 30실버야?
30만원?
야!금칠했냐?
그래도 아는 엘프인데 바가지 쓰는 것을 잠자코 볼 수 없었던 나는 그녀가 있는 노점상으로 다가갔다.
봉을 만나 얼굴에 꽃이 핀 노점상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