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얘기를 하나 싶어 잠자코 듣던 나는 기어코 몸을 일으켜 녀석의 얼굴을 있는 힘껏 발로 차버렸다.
듣자듣자 하니까 이 자식이 나를 뭐로 보고!
"나를 가지고 게임을 하려 했다고?이제 떼어낼 코랑 귀가 없다고 간덩이도 내어놓은 모양이지?"
[그게 무슨 게임이에요,마스터?재미 없겠는데.]
[나도 재미없어.]
다시 산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산맥에 붙어 있는 산답게 높고 넓은 산.
저기 어딘가에 에이니가 있단 말이야?
멀어야 한 시간 범위 내에 에이니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찾기 쉽지는 않을 터였다.
이 자식!또 나를 방해하고 있어!
그때도 이 녀석만 아니었으면,내상만 입지 않았으면......
로베닌을 이겼을지도 모르는데!
케케묵은 원한이 새삼 떠올랐다.
"끄흐흐.아직 상황파악이 안되는 모양인데,지금이라도 발가벗고 엎드려서 용서를 빌면 계집애가 있는 장소 정도는 말해주지.어때?"
"호오,그거 좋은 방법인데?"
"크하하핫!그래,어서 벗......무,무슨 짓이야?"
"라이,싹 벗겨버려."
왜 내가 벗니,네가 벗어야지.
라이는 능숙하게(?)그라크의 젖은 옷가지를 북북 찢어냈다.
옷이라는 게 저렇게 쉽게 찢어지던가,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알몸이 된 그라크는 다시 라이의 발아래 깔렸다.
"뭐,뭡니까?뭐하는 거에요,지니 씨?"
"이 여자,역시 변태였어."
몇 걸음 떨어져서 불안한 눈으로 나와 그라크를 바라보던 에쉬와 채드가 놀라 다가왔다.
채드......지금은 바쁘니까 넘어간다.
"씨이익.씨익!그 계집애가 죽어도 상관 없다는 거냐?그 계집애가 있는 곳은 나 밖에 모른다고!알고 있던 다른 놈들은 모두 네년이 죽여 버렸으니까!크하하하!"
"한 명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지.죽기 싫으면 어서 에이니가 있는 곳을 말해!"
"흐히히히.말했잖아.저 산에 있다고!"
"에쉬 씨,채드 씨!잠깐 도와줄래요?"
보아 하니 그라크 녀석은 에이니가 있는 곳을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우리가요?대체 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산 어딘가에 에이니가 묶여 있대요.그것도 절벽 위에요.염치 없는 줄은 알지만 아이 찾는 것 도와줬으면 해요.이 작자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요."
"저 산에요?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당연히 도와야죠."
"뭣이?에이니가 저 산에 있다고?"
일단 에쉬와 채드를 치워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행히도 에쉬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고 채드도 에이니와 사이가 좋았으니 거부하진 않을 터였다.
"나는 이자를 조금 더 취조해볼 테니 먼저 산에 가서 아이를 찾아봐주세요.부탁할게요."
"그러죠!"
"빨리 오라고!"
에쉬와 채드가 건물을 지나 뛰어가는 것을 지켜본 나는 다시 그라크를 내려다보았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내가 안달하면서 에이니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빌기를 바라는 모양이엇다.
흥,어림 반 푼어치도 없지.
일단 나는 근처에 있는 작은 창고로 들어갔다.
그라크는 라이에게 물려 끌려왔다.
물을 옷깃이 없이니 머리채를 물고.
"으흐흐.창고에 와서 어쩔 셈이지?무슨 취조를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다고.크히히히."
"말 더럽게 많네.누가 너 따위에게 묻는데?라이!이 녀석,머리를 뽑아버려."
"히익!"
[네,마스터.]
그라크는 이미 코와 귀가 없었다.
그러니 뽑아낼 거라고는 당연히 하나 뿐이다.
트드드득
깔끔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보지는 않았지만 소리로도 충분히 불쾌했다.
목이 뽑히는 소리 같은 건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데.
내가 창고로 들어온 이유는 에이니를 찾기 위해 정령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다.
혹시 남아 있는지 모르는 잔당의 눈을 피해서.
"타잔!"
식물의 정령 타잔.
자그마한 초록빛 입자가 모이더니 이내 나뭇잎 날개를 파닥이며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 나타났다.
이 녀석이라면 분명 에이니를 찾아줄 터였다.
[어머!무슨 일이세요,주인님?]
"타잔,조금 무리일지도 모르는데......이리와 봐.저 산 보이지?저 산에서 사람을 찾고 싶어.가능해?"
파닥파닥
나뭇잎 날개를 이용해 날아온 타잔은 내가 가리키는 산을 바라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큰 산이네요.어머니 산의 꼬리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가능하냐니까?식물들에게 물어서 말이야."
[가능하기야 하지만 막대한 마나가 손실될 거에요.자칫 주인님이 다칠지도 몰라요.]
"마나라면 걱정 마.지금 바로 시작하자!찾을 대상은 은발의 8살짜리 여자애야.아마 절벽 끝에 있는 나무에 매달려 있을 거고,찾으면 바로 구해야 해."
마나야 걱정 없지만 문제는 내 정신력이지.
저런 광범위를 흩어야 하는데다가 라이의 마나를 끌어오는 것 또한 정신력 소모가 있으니.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봐야 했다.
지금은 일 분 일 추가 급했다.
[네,그럼 시작합니다.]
"그래,이리 와,라이!"
초반부터 마나가 물씬 빠져나갔다.
당장에 라이의 목을 끌어 안고 마나를 끌어왔지만 나가는 마나를 채우기에도 급급했다.
라이의 마나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내 눈 앞으로 크고 작은 식물들의 잔상이 휙휙 지나갔다.
흡사 숲 속을 매우 빠른 속도로 뛰어가는 듯 했다.
이게 뭐지?
타잔의 정신이 링크된 걸까?
분명하지는 않지만 힐끔 쳐다본 타잔의 두 눈동자는 초록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더불어 경직된 채 허공에서 가만히 떠 있는 타잔의 몸.
많은 수의 식물들이 내 앞을 순식간에 지나갔고 문득 몇 개의 식물이 멈춰 섰다.
마치 자기가 안다고 말하는 듯 가지를 흔드는 나무부터 잎을 팔랑이는 작은 꽃까지.
그리고 그 식물들의 몸짓에 따라 숲을 훝던 의식이 한데 모여 급히 방향을 바꿨다.
이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고 라이를 끌어안고 있는 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조금만 더......
[마스터,괜찮으세요?]
라이의 물음에 대답할 여력 같은 것은 없었다.
눈 앞에 떠오르는 잔상들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에 젖어 있던 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내 눈앞으로 지나가던 식물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미약한 빛과 함께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절벽!어디 있는 거야,에이니?
절벽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았지만 에이니는 보이지 않았다.
식물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인지 절벽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절벽의 건너편 숲도 살펴봤지만 그곳에도 에이니는 없었다.
다시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벽을 따라 빠르게 위로 향했다.
그래,절벽을 따라가다 보면 에이니가 있을 거야!아......?
"뜨거!"
[마,마스터어?]
라이와 접촉한 팔이 마치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처음 겪는 현상이었는데 너무 많은 마나를 끌어왔기 때문일까?
하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더불어 경보라도 울리듯 머리 구석구석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절로 나오는 신음을 삼키는데 문득 무언가가 시야에 걸렸다.
겨우겨우 뿌리 하나를 땅에 걸치고 있는 나무 하나.
그리고 그 끝에 칭칭 묶여 있는 것은 분명 에이니였다.
기절한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 덕에 발버둥을 치지 않아 무사했다.
순식간에 시야는 에이니가 묶여 있는 나무로 옮겨갔다.
"찾았다!타잔,에이니를 구해.땅 위로 들어 올려!"
[네,주인님.]
당장이라도 절벽에서 떨어질 듯 보이던 나무의 뿌리가 두 갈래,세 갈래로 늘어나더니 절벽 쪽으로 기울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늘어난 뿌리는 성큼성큼 걸어 절벽에서 완전히 빠져 나와 숲으로 들어갔다.
뭐야?나무가 저래도 되는 거야?
"수고했어,타잔.이제 돌아가."
[네,주인님.다음에 또 뵈요.]
타잔을 돌려보낸 나는 곧바로 라이에게서 떨어졌다.
황급히 팔을 살펴봤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화상은 커녕 붉은 기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굉장히 뜨거웠는데?
하지만 내가 느꼈던 열기는 이제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다만 두통만이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라이,내가 너에게서 가져온 마나가 전체의 얼마나 돼?"
[음,한......30분의 1정도요?]
적어도 10분의 1은 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것밖에 안 된다니.
보통은 넘는 크기의 산 반절을 훑었는데.
놀라울 뿐이었다.
과연 드래곤의 마나량이라고나 할까?
"후우,라이.이제 산으로 가자.에이니가 있는 장소는 대충 봐뒀으니까."
[네,마스터!]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상당히 지쳐버렸다.
당장에 쓰러지고 싶을 만큼.
에이니를 찾아다닌 시간은 길어봤자 반나절도 안 되었는데 족히 그 열배는 일한 듯 피곤했다.
아마도 지나친 정신력 소모 때문일 테지만 아직은 쓰러질 수 없었다.
우선 에이니를 찾아 드미트리로,드리케 아카데미로 보내야 했다.
나 하나도 벅찬 마당에 에이니까지 데리고 여행을 하자니 골치가 아팠다.
벌써 이런 일이 생겼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걱정이 되었다.
워프를 이용하면 에이니 하나야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을 터!
어차피 에이니에 대한 교육은 이엘 스승님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니 미리 보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스승님은 보나마나 '지니 야아아앙!'하고 소리칠 것이 뻔했지만.
기초는 튼튼하게!
에이니를 찾은 것까지는 좋았다.
두 시간 넘게 빗속에서 꽁꽁 묶여 있었는데도 에이니는 쌩쌩했다.
그 소심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지만 정글 출신이라 체력 하나는 훌륭했던 것이다.
혹여 감기라도 걸렸을까 걱정했던 내가 바보 같을 정도로 에이니는 재채기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내가 아니라 채드에게 달려간 것은 괘씸할 정도였다.
"흐엣치!"
문제는 정작 내가 감기에 호되게 걸렸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비벼먹을......
[마스터,그 꼬맹이 보내버린다면서요?언제 보내요?]
"쿨쩍,감기 나으면."
아아,에이니를 본국으로 보내야 마음 편히 쉬어도 쉴 텐데 이놈의 감기는 쉽게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차라리 골절이라거나 외상이라면 운다인을 불러 치료할 텐데 감기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물의 정령의 치료마법으로는 외상과 내상이 한계였다.
신관의 신성마법으로는 감기도 낫는다던데,무슨 차이지?
[쳇,그거 언제 낫는데요?]
"나도 몰라!다른 애완동물들은 주인이 아프면 같이 아프다는데 넌 뭐야?"
[전 애완동물이 아닌걸요.]
"그거야 그렇지만.으끙......"
라이와 입씨름을 할라 치자 더욱 열이 올랐다.
감기 덕에 목도 잠겨 있었고 몸살기도 있었다.
진정하자 진정.
빨리 나아야 에이니를 빨리 보내고 나도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아닌가.
감기에는 역시 숙면이 최고지!
침대 깊숙히 몸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마스터,꼬맹이가 들어올 것 같은데요?]
"걘 왜 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냥 자는 줄 알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 녀석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뭐 나에 대한 원한이 사건의 시작이었으니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겠다.
끼이이
"저어......스,스승님?"
엉?방금 스승님이라고?
왠일이래?
그렇게 스승님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르더니.
고맙긴 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 '당신 싫어!'로 일관하던 녀석이 말이다.
"왜에?"
"어떤 아저씨가 스승님을 꼭 좀 만나고 싶대요."
나를 찾아올 만한 아저씨가 있던가?
혹시 닭 날개단의 잔당?
그렇다면 밑에 있는 에쉬나 채드가 에이니를 올려 보낼 리가 없었다.
전혀 집히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데?"
"음,아저씨가 자기 이름은 한센이라고 했어요.그렇게 말하면 언니......아니,스승님은 누군지 알 거라고 했어요."
"한센?혹시 붉은 머리에......엣취!약간 마르고 얼빵한 기사?"
"붉은 머리 맞아요!스승님 이름을 물어봐서 '지니'라고 했더니 자기가 찾던 아가씨가 분명하다고 했어요."
한센 아저씨가 여길 어떻게?
아,통신을 걸었을 때 위치를 알고 쫓아온 걸까?
근데 왜 하필 한센 아저씨가?
일단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아아,머리가 산발이야!
적당히 질끈 묶어 넘기고 땀에 전 옷을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라이를 집어 어깨에 걸치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이니를 끌며 여관 복도로 나왔다.
나는 여전히 '미엘타에서 생긴 일'에 묵고 있었는데 1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도달했을 때 여관 손님들의 것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니까!'블러드 윙'녀석들의 반절이 그냥 죽어 있더래!"
"에잉,이 사람!그냥 죽을 리가 있나?누가 죽였겠지.그놈들이 평소에 워낙 원한 살 일을 많이 했잖아."
"어허!누가 죽였는지 모르니까 그냥 죽은 거 아니겠어?그 녀석들 본거지에 아침부터 치안대가 바글바글 끓더라고.이 참에 씨를 말려버린다나?누가 신고했다던데......하긴 지금 아니면 그 험한 녀석들을 언제 치우겠어?"
흥,그 신고 내가 했수다.
일 제대로 안 하면 재미없을 줄 알라고 협박도 조금 했지.
물론 얼굴을 맞댈 순 없으니 익명의 편지로 말이다.
친절하게 마지막 줄에 '똑같은 꼴 당하기 싫으면 후딱 치워라잉'이라고 귀띔 해주었지!
"그나저나 대체 누구여?듣자 하니 50명 가까이 죽어 있었다던데.마침 비가 와서 시체가 다 불어터져 사인도 분명치 않다나 봐."
"뭐 사인이야 결국 찌르고 배고 째는 것 아니겄어?죽이는 방법이야 똑같지."
"그것도 그건데 무기도 뭔지 모른데.아마 마법일 거라고만 하더라고.아까 치안대 녀석들이 여기 들러서 한잔하고 있을때 들었지."
"이 촌구석에 왠 마법?여긴 말이 수도지 마탑 하나 빼면 마법에 '마'자도 안 보이는 곳인데."
"흐흠,이건 내 짐작인데 말이야.그놈들이 너무 산에 가서 이종족들을 잡아들이고 산을 마구잡이로 헤집어놓으니까 드래곤이 노하신 게 아닐까?"
"호오,그거 그럴 듯 한데?사실 난 말이야,드래곤 같은 건 동화에나 나오는 줄 알았거든?그런데 이번에 그 일 덕분에 40년 만에 다시 믿기 시작했잖아."
흐음,조용히 지나갈 거란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여관 안은 온통 어제의 사건으로 가득했다.
그나저나 여관 주인이랑 에쉬 네가 입을 다물어줘서 다행이었다.
말해봤자 본인들에게도 이로울 게 하나 없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저어......스승님.안 가세요?"
"흐,흐엣치!가야지."
잠시 계단 뒤에서 다른 손님들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한센 아저씨가 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계단을 내려선 나는 오늘 따라 북적거리는 식당 안에서 손쉽게 한센 아저씨를 찾아냈다.
뒤통수이긴 하지만 저 튀는 빨간 머리가 어디 가겠어?
뭐,로베닌 녀석의 것보다는 옅지만 충분히 튀는 색이었다.
절로 고개를 드는 반가움에 나는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한센 아저씨를 불렀다.
"한센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