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지 뭐.대답해 봐,그라크는 어디 있지?혹시 에이니가 있는 곳도 알아?"
"대,대장은 지금 반대쪽 싸움이 일어난 곳에 갔어요.인질은 몰라요.저,정말입니다!저는 다만 금발의 여자가 침입하거든 잡아서 특수감옥에 가두라는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정말이에요.모,모든 건 대장이 시킨 겁니다!"
특수감옥?
안티 마나진이 그려져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
그럼 보통 감옥도 있다는 소리로군.
당연한 건가?
그나저나 그라크 녀석이 대장이란 말이지?
꼭 나쁜 일에만 앞장서기는......
"반대쪽?이곳 말고도 싸움이 일어났어?"
"네,네에!저 특수 감옥이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침입자가 발견되는 바람에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비까지 오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원하신다면 제가 탈출구를 알려드리겠습니다.사,살려만 주십시요,마법사님!"
"아하,그래서 겨우 20명이 그 다크엘프를 상대하고 있었던 거구나?어쩐지 적다 했지.단원이 백 명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음,죽어 있던 녀석들까지 하면 이 곳에는 25명 정도인가?
그 외에 여기저기 흩어진 녀석들이 있을 테고.
다른 쪽 침입자를 막는 녀석은 몇 명이지?
이쪽과 비슷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쪽만 처리하면 반절은 처리할 수 있다는 건데......
이참에 그쪽으로 가서 싹 밀어버려야 겠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겠어?
나는 이미 발을 담갔으니 빠져드는 것 정도야 감수할 수 있었다.
"저어......마법사님?"
"응?아차,이거 알아둬.나는 말이야 마법사가 아니라 정령사라고.그리,내 정령을 보여줄까?"
"아,아뇨!"
그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도망가고 싶은지 바닥을 짚은 손등의 힘줄이 불거졌지만 발이 묶였으니 도망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남에게 고통을 준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에 나는 순식간에 끝내주자고 마음먹었다.
"사양할 것 없어.페인,아으스 스피어."
피피핑
세 개의 얼음 창이 연이어 사내의 머리며 목으로 쏟아져 내렸다.
소리 없이 사내의 손이 사그라졌다.
바이바이.
이런,그러고 보니 페인의 모습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겠군.
"다음 생에는 부디 인간으로 태어나지 말기를."
뒤를 돌아보니 단원들을 덮쳤던 프로즌 웨이브는 이제 얼음조각 하나 남지 않고 녹아 있었다.
남은 것은 온전히 닭 날개 단원들의 시체 뿐.
내가 이래서 페인을 좋아한다니까.
순식간에 끝내주는 데다가 흔적이 안 남잖아.후훗.
"라이,가서 살아있는 인간이 있나 확인해봐.있으면 처리하고.저기 얼려뒀던 세 명도 녹기 전에 부숴버리고 와."
[라저!]
꼬리를 들어 이마에 가져다대는 라이는 훌륭한 뒤처리 담당이었다.
라이가 또 다른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하루에 두 팀,아니 나까지 세 팀이나 침입하다니 역시 원한덩어리 노예상이 아닌가?
[근데 괜찮으세요,마스터?]
"응?뭐가?"
[인간들을 죽인 것 말이에요.전에는 싫어하셨잖아요.]
"지금도 좋아하진 않아.원한이 있으니까 좀 쉬웠을 뿐이지."
9년 전 얼떨결에 사람을 죽이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가 회복한 내게 라이가 한 말이 있다.
나처럼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충격을 받아도 빠르게 회복한단다.
하지만 나는 내가 썩 뛰어난 정신력을 지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남들이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고 그 사실이 나를 '죽음'이라는 민감한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주었다.
정확히는 죽음도 초월한 정신력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한 정신력이 아닐까 싶다.
그 둘의 차이가 뭔지는 모호하지만.
라이가 나를 정신력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환생'에 대한 '신의 제재'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드래곤의 정신읽기 마저도 막아준 그 무언가와.
[에이,마지막에는 마스터도 조금 즐기시는 것 같던데요?]
"아아,너무 살려달라고 비니까 왠지 우습더라고."
그래도 나는 최소한의 자비는 베풀었다.
자기가 죽는 것을 못 느끼도록 순식간에 고통 없이 죽여줬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지만요.아!저쪽이에요,마스터.]
라이가 꼬리로 가리키는 곳은 내가 있던 건물의 바로 옆 건물이었다.
위에서 봤을 때 저쪽이면 출입문 쪽이었던 것 같은데?
대체 누가 출입문으로 당당히 침입한 걸까?
건물 쪽으로 다가가자니 빗소리를 뚫고 챙챙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아,아까 다리아가 들었던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의 소리였던 모양이다.
챙챙하는 칼부림 소리라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건물 벽이 몸을 찰싹 붙이고 살며시 싸움이 일어나는 쪽을 훔쳐보았다.
내가 있던 곳보다는 사람이 많은 듯 했다.
한 30명 쯤 되어 보였는데 그 중심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로 등을 맞대고 한창 닭 날개 단원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30대 2인가?
방어 위주로 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둘 다 제법인걸.
두 명 쪽이 침입자 같았는데 단원들의 몸에 가려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건 저들이 매우 지쳐 있다는......
"저,저것들은 왜 또 여기 있는 거야?"
[왜요,마스터?]
등을 맞대고 싸우는 두 명의 사내는 나도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바로 에쉬와 채드!
저 바보들은 대체 왜 따라온 거야?
대체 누구야,나 여기 있다고 소문낸 게!
"으윽!에쉬가 와있을 줄이야.아직도 그 오지랖 넓은 건 변하지 않았군."
[잉?녀석들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마스터?]
그 넘치는 오지랖이야 내 대신 칼을 막았을 때부터 알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줄이야.
이렇게 되면 닭 날개 녀석들을 엎어버릴 수가 없잖아.
이전의 부대장 녀석들은 어차피 모두 죽일 셈이었기에 부담 없이 페인을 불렀지만 이쪽에는 에쉬가 있어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리 에쉬라고 해도 페인의 존재를 알릴 순 없는데,보인 이상 죽여야 된다고!
나는 대외적으로 평범한(?)물의 중급 정령사니 말이다.
"로크스의 말을 듣고 우릴 쫓아온 것 같아.이를 어쩐다?"
[뭐 어때요?제가 있잖아요,마스터.]
"......그래,라이.네가 도와줘야겠다.일단 늑대로 변신해!뱀보다는 그쪽이 전투력이 높지?"
[물론이죠!]
라이가 내 어깨에서 휙 몸을 날렸다.
그리곤 허공에서 몇 바퀴 몸을 빙글 돌리더니 땅에 착지했을 때는 네 발 달린 늑대가 되어 있었다.
짜식,어디서 본 건 많아 가지고.
다시 싸움터 쪽으로 눈을 돌리니 에쉬와 채드는 매우 지쳐 있어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운다인과 라이를 가지고 저 녀석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을까?
물의 정령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익사를 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1분이 걸리기 때문에 죽이려면 상대의 원한이며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마주봐야 한다.
페인은 순식간에 죽여주니 그런 걱정이 없지만.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고!
"일단 출동이다,라이!넌 가서 그라크를 책임지고 잡아."
[네,마스터!]
라이가 빠르게 튀어나가더니 닭 날개 무리 사이에 숨어있던 그라크를 단숨에 찾아 달려들었다.
여어!그라크,귀 없는 건 여전한 걸.
내가 뗀 거지만 말이야.
그라크가 라이에게 제압당하는 것을 지켜본 나는 운다인을 불렀다.
순식간에 적만 골라 처치할 만한 기술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운다인."
[네,주인님.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기 당하고 있는 두 명을 제외하고 워터 스트라이크,광범위로 부탁해!될수 있는 한 높게 말이야.할 수 있겠어?"
워터 스트라이크.
물의 기둥을 소환해 상대를 공격한다.
적의 발 밑에서 일으켜 상대를 공중에 띄워도 좋고 물기둥을 움직여 상대를 후려쳐도 좋다.
내가 쓰려는 방식은 전자인데 사실 지금처럼 다수를 상대로 사용하기에는 후자가 알맞지만 에쉬와 채드를 피해 주변만 공격하려면 전자가 나았고 마침 비까지 내려주고 있으니 해볼 만했다.
[예!가능합니다,주인님.]
콰르르륵
우선 한창 대치 중이던 그들의 발 밑으로 물이 자르르 끓었다.
놀란 이들이 싸움을 멈추고 땅을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콰아앙
폭발하듯 땅에서부터 물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물론 가운데 있던 에쉬와 채드를 제외한 대략 서른 명의 닭 날개 단원과 함께 말이다.
아마 위에서 보면 도넛 모양이 아닐까 싶다.
응?저기 공중에 날아가는 누런 개는......
[끄아아아.마스터어어어~]
스트라이크!
물기둥이 지나간 자리에는 에쉬와 채드만이 남아 있었다.
물기둥은 높이 솟을수록 수직으로 솟지 않고 약간 휘기 마련인데 거의 10미터 가까이 솟구쳤던 물기둥은 꽤나 휘어졌다.
그 덕에 에쉬와 채드의 뒤쪽으로 사내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 높이에서 단숨에 낙하했으니 다 죽었겠지?
현장은 끔찍할테지만 단번에 골로 보냈으니 만족스러웠다.
거리가 멀어 뼈가 쪼개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도 다행이고 말이다.
이래뵈도 나는 비위가 약하다.
"쿨럭!"
"콜록콜록!"
그래도 헛기침하는 소리는 용케 들렸다.
에쉬와 채드가 하나같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을 게워내고 있었는데 그건 내가 물기둥을 소환한 탓이 아니라 비가 오기 때문이다.
으흠!나는 일단 건물에 숨기고 있던 몸을 빼내 그쪽으로 다가갔다.
"에쉬 씨!채드 씨!"
"취히!지니 씨?"
"으헷취히."
재채기를 하던 둘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불어 내 곁을 따라오는 운다인을 보고 놀란 듯 물었다.
"그,그건?"
"왠 물고기?"
채드가 자신의 코를 부여잡고는 말했다.
물고기?
슬쩍 운다인을 돌아보았다.
운다인은 돌고래도 아니지만 물고기는 더더욱 아니라고!
"바보 같긴,이건 내 정령이에요."
"물의 정령?그렇다면 방금 물 기둥은......지니 씨가?"
"맞아요.내가 그랬어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던 에쉬가 이내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내들을 발견했다.
거의 대부분은 이미 시체였다.
미약하게 몸을 떠는 에쉬.
"맙소사,대체 왜 이런 짓을?"
에쉬의 물음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기껏 구해줬더니 뭐라고?
사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바라고 있었기에 에쉬의 질책이 달갑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그런 짓이라니?나는 당신들을 구해주려고......"
"그래도 그렇지......이건 너무 심한 처사에요!"
뒤펀으로 널브러진 사내들을 가리키며 원망하듯 말하는 에쉬.
얼핏 라이가 그라크의 옷깃을 물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아참,그라크는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마스터!마스터!그거 꽤 재미있던데요?]
두 번 재미있다가는 다 죽겠다.
슬쩍 보니 그라크의 상태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그 녀석,살아있어?]
[네,마스터.제가 공중에서 캐치 했습죠.아직 죽으면 안 되잖아요.]
라이가 이제야 눈치가 좀 생긴 모양이다.
문제는 왠지 화가 난 것 같은 에쉬랄까?
"이봐요,지니 씨!제 말 듣고 있는 겁니까?"
"듣고 있어요.내 처사가 심하다고 했나요?남의 제자를 납치 해간 건 괜찮고요?"
"그게 잘 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들 모두가 잘못한 건 아니잖습니까!"
"모두 잘못했어요.이 녀석들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죠.모르는 것 같은데......이들은 노예상인이에요.'블러드 윙'이라는 악명 높은 노예상!"
역시나 이들이 노예상이라는 것은 몰랐는지 에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곁에 있던 채드도 마찬가지.
"노예상이라고요?저들 모두가?"
"그래요.보아 하니 로크스 씨에게 듣고 쫓아온 것 같은데,거기까진 못 들었나 보죠?"
"위험한 곳이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노예상일 줄은......"
에쉬 역시 노예상과 악연이 있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힐끔,낙하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몇몇이 아직 살아있는지 고통을 호소했는데 보기 좋지는 않았다.
"이제 알았으니 됐네요.그보다 저 사람들 좀 처리해줄래요?"
"처리라면......어떤?"
"당연히 이거죠."
나는 엄지를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다시 일그러지는 에쉬의 얼굴.
아아,이 녀석.
쓸데 없이 착하게 자랐네?
너무 착해도 인생 피곤할 텐데.
"맙소사.나라면 치료해주겠어요!저 정도면 저들도 반성......"
"치료요?치료는 사람에게나 해주는 거에요.저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죠."
"그 말은 저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까?"
"사람이긴 하죠.짐승만도 못해서 그렇지.저 자들은 인간 이하에요.사람이긴 하지만 사람 취급해줄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나에게 있어 세상에 없어도 될 것 한 가지를 고르라면 그것은 단연코 노예상이다.
살인에는 나름의 인간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노예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람이 사람을 매매한다.
남의 소중한 가족이나 연인을 말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돈벌이 수단이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팔 바에야 차라리 굶어죽으라지!
"나는,나는 어렸을 때 노예상에게 납치를 당한 적이 있어요.하지만 그렇다고 당신 같은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납치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죠.그리고 나도 경험자로서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 노예상이란 것들은 모조리 말살시켜야 해요.저자들을 이대로 살려두면 또 누군가를 납치하고 팔아치울 테니까!"
다분히 공격적인 내 태도에 에쉬는 혼란스러운 듯 했다.
"이 세상에 가치 없는 인간은 없어요!저들도 누군가에겐 가족이고 연인일 겁니다!그런 생각은 안하는 겁니까?"
"해요.그렇더라도 저들은 없는 편이 세상에 이로워요.그리고 에수 씨,내게 댁의 사상을 이입시키려 하지 말아요!나는 내 나름대로 합당한 벌을 내린 거니까요."
오히려 깔끔하게 죽여주는 걸 감사해야 된다니까.
문득 빗줄기가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비가 완전히 그치기 전에 에이니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 겠다.
몇 십명을 죽였다는 게 밝혀지는 건 상관 없지만 걸리면 골치 아픈 취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빗줄기가 흔적을 가려줄 때 떠나야 했다.
"벌은......국가에서 내리는 겁니다.지니 씨 당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 쯤은 나도 알아요.하지만 내게 저지를 죗값은 내게 직접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그리고 어차피 나라에서도 골치를 썩던 놈들이니 내가 처리해준 걸 감사하게 생각할 거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
"그만!그쪽이랑 사상 싸움할 시간 없거든요?처리해 줄 생각이 없다면 하지 말아요.내가 직접 할 테니까.운다인,가서 살아있는 인간들 처리해.저지하는 자가 있다면......죽여도 좋아."
마지막 말은 순전히 에쉬를 향한 경고였다.
더 이상 내게 태클을 걸지 말라는.
이미 상당한 부상과 출혈로 인해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도 가망이 없었기에 에쉬도 더 이상 제지하지는 않았다.
에쉬,그 쓸데 없이 착한 성격,분명 고쳐야 할 거야.
왕,아니 황제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마스터,이 녀석 계속 도망가려고 하는데 다리를 분질러 버릴까요?]
라이의 목소리에 그 쪽을 돌아보니 그라크가 라이의 발밑에 깔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흐흥,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 같은데 그 다크엘프랑 에쉬와 채드 때문에 망쳐버렸군.
그러게 평소에 착하게 살았어야지.
나는 그라크에게 다가섰다.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약간의 조롱 섞인 인사도 건넸다.
"안녕,그라크 씨?요즘 먹고 살만한가 봐?헛 지랄하는 걸 보니 말이야."
"크윽,젠장!"
바닥에 엎어진 그라크와 눈높이를 조금이라도 맞춰볼 셈으로 그라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야,얼굴이 더 험악해졌네?
"이거,이거,코가 아예 없어졌네?난 으깨기만 했는데 말이야."
"젠장 맞을 년 같으니라고!에잇,퉤!"
그라크는 내 얼굴에 침을 밷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전에 내 손바닥에 막혀버렸다.
그 정도 순발력은 있거든?
그리고 네놈이 할 짓이야 뻔하지,뭐.
[이!이놈이?]
"크흐으......"
라이가 그라크를 밟은 발에 조금 더 힘을 줬는지 녀석의 표정이 한층 일그러졌다.
비록 침이 얼굴에는 안 튀었지만......
"이게 뭐야?응?더럽잖아."
손바닥이라고는 하지만 남의 침이 묻었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나는 손바닥에 묻은 침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입을 벌리고 넣어줄 수는 없으니 그냥 그라크의 얼굴의에 문댄 것이다.
그리고는 겉의 흙탕물에 적당히 손을 헹궈냈다.
네놈 침보다는 이쪽이 더 깨끗하겠다.
"흥,그 꼬맹이를 찾고 싶으면 나를 좀 더 정중히 대해야 할 걸?"
"정중히?이봐,너 정중의 뜻은 알고 쓰는 거야?"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정중한 것 아냐?
진흙탕 위에서 멍멍이에게 눌리고 있는데 그 정도면 됐지 뭘 더 원해!
"흐흐흐.나를 무시하는데......네년 동생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 꼬맹이는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어쩌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지.크흐흐."
"웃기시네.에이니는 네놈 최후의 보루인데 그 아일 죽이면 너도 죽은 목숨이라고!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겠어?"
"아아,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달랐거든.어차피 네년도 죽이고 그년도 죽일 거라 한 가지 게임을 준비해놨거든.지금이라도 참가해보겠어?"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전신에 퍼졌다.
이 녀석,상식이 인 통하는 녀석이었어!
나는 당연히 에이니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잘 맡아뒀을 거라고만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다.
"게임?무슨 개수작이야?그래서 에이니는 어디 있는데?"
"크흐흐.해보겠어?간단해.저 산 보이지?"
그라크가 턱짓으로 검은 철장 너머의 산을 가리켰다.
공중에서 봤을 때의 모습으로 보건대 아마도 드래고니아 산맥과 연결 되어 있으리라.
"산?산이 어쨌다는 거야?빨리 말해!"
"저 산 어딘가에 그 계집애를 매달아 놓았다.물론 그냥 매달아 놓은 건 아니지.밑으로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거든.그것도 반쯤 뿌리가 뽑힌 나무를 골라 그 끝에 매달았지.원래는 네년을 발가벗겨 산에서 그 계집애를 찾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것 못하겠군.단원들이 볼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했었는데 말이야.크흐흐.이 정도로 비가 오고 있으니 그 계집애 지금쯤 나무째로 절벽으로 추락하지 않았을까?흐흐,내가 이래뵈도 머리는 좋......크악!"
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