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흠뻑 맞으며 사내에게 끌려가는데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린 마치 뭔가가 바람을 가르듯......
그래,언젠가 들어봤던 바람의 정령이 쓰는 기술 중 하나와 흡사했다.
바람을 이용해 허공을 가르는 공격마법,윈드 커터.
그것은 이엘 선생이 처음 보여준 정령마법이었다.
소리와 감각에만 의존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을때쯤 라이가 말했다.
[마스터,저 위에 녀석도 그거에요.]
[위에?그거?그게 뭐......]
언제나 그렇듯 뜬금없는 라이의 말에 반문을 하던 나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공격적인 기척에 황급히 몸을 틀었다.
나를 끌고 온 사내의 것 같았는데 이번에도 맞을쏘냐?
"어쭈,피했어?건방지게!"
다시금 날아온 사내의 손이 이번에는 뒤로 묶인 손목을 잡아끌었따.
그 덕에 뒷걸음질로 끌려가야 했는데 눈이 가려진 채 뒷걸음질로 끌려간다는 것은 마치 내가 도축 직전의 짐승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두 번 다시는 체험하고 싶지 않은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라이,이 녀석 얼굴도 기억해둬!요주의 인물이다.]
[네,마스터!]
비는 지독히도 많이 내려 입고 있는 옷은 물론이고 안대며 손을 옥죄고 있는 끈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안대는 몰라도 손을 묶은 끈이 꽉 조이는데다가 왠 녀석이 질질 끌고 가니 손목의 살갗이 쓸려 여간 쓰린 것이 아니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에이니만 찾아봐라,닭 날개같은 네놈들 뼈를 모조리 발라줄 테다!
"데려왔습니다.이 계집 맞습죠?금발이고 제라스가 자기 오빠랍니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걸까?그라크일까?
나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없었으니 침묵하고 유추해 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여차하면 라이를 '그것'으로 변신시켜서......
철퍼덕
"우풋!"
돌연 등을 밀린 나는 빗물 가득한 질척이는 진흙땅 위를 굴러야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진흙 땅 위를 데굴데굴 굴렀고 그 덕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흙 맛을 봐야 했다.
정말이지 씁쓸하고 텁텁하고 비리고!
게다가 등을 민 것은 손이 아니라 발이고!
오늘 겪은 불쾌한 일들을 모조리 모으면 책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출판은 안 되겠지만 말이다.
"자!네놈 동생이 여기있다.어서 나와!"
엎어져 있는 내 등을 또 다른 사내가 밟으며 소리쳤다.
그라크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사내는 내 등을 밟는데 그치지 않고 뒷목에 칼을 가져다댔다.
서늘한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거 위험한데?
[라이,칼을 무디게 만들어 놔.]
[그냥 먹죠?]
[그건 조금 있다가.그리고 이 녀석 얼굴도 기억......아니다.아예 모조리 죽여 버리자꾸나,라이.]
[와아,정말요?좋아요,마스터!재미있겠네요,푸힛.]
까짓 노예상 백여 명쯤 죽인다고 문제 있겠어?
마침 비도 오는데 단체로 익사시켜주겠어.
"이 자식!어디로 숨은 건지는 모르지만 허튼 수작 부리면 네놈 동생을 죽여 버......흐억!"
피싱
작은 파공음과 함께 내 등을 밟고 있던 사내의 몸이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헉!부대장님이......"
얼굴을 구기는데 여실이 느껴지는 피비린내.
이렇게나 진한 걸 보니 적은 양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라이?]
[별일 아니에요,마스터.마스터의 등을 밟고 있던 인간이 화살을 맞았을 뿐인걸요.]
그게 별일 아니냐?
도대체가 라이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겨먹은 거지?
쇠가 들은 거야 뻔하지만......
[화살?죽었어?]
[화살이 목을 관통했는데,인간이라면 죽지 않나요?즉사일걸요.]
활?제라스가 활을 쏠 줄 알았던가?
모르겠다.
못 만난 시간이 너무 길다 보니 말이다.
검을 쓰는 건 확실하지만 이런 빗속에서 단숨에 사람 목을 꿰뚫을 만큼 정확하고 파괴력 있는 활을 쏠 것 같지는 않은데......
"물러서지 않으면 쏜다!"
위쪽에서 들려온 위협적인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음성 같기는 했지만 제라스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지 10년 가까이 지났으니 목소리가 변한 걸까?
정말 제라스 오라버니가 날 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일지도......
확실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소리에 사람들이 황급히 물러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마스터,위에 있던 녀석이 마스터에게 다가오는데요?]
[위에?]
[예,아까부터 공중에 떠 있던 녀석인데......마스터,아는 녀석이세요?]
공중에 떠 있었다고?
혹시 플라이 마법?
그렇다면 브라이트가......
아니지,브라이트는 내 오라비도 아니고 활도 쏠 줄 모른다.
날 구한답시고 노예상으로 뛰어들 용기도 없을 테고.
제라스 오라비쯤 되는 무대포 성격이 아니고서야 그건 힘든 일이었다.
몸을 겨우 일으키는데 얼핏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다ㅏ.
빗줄기에 가려 확실하진 않지만 이건......바람?
"오,나의 누이.무사했구나!"
정령의 기운을 자세히 느껴보려는데 누군가 나를 살며시 잡아 일으켰다.
누구지?
일단 안대 좀 벗겨주면 예뻐해주지.
"......안대 좀 벗겨줄래요?"
"그래,그래.어째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저들이 굶기지는 않은 모양......응?"
스륵
안대가 벗겨지고 나를 누이라 부르는 인물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든 나는 기겁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에엣!댁은......!"
"뭐,뭐야,이게!네놈들,나를 속인 거냐?"
어제 여관에서 봤던 검은 피부의 사내였다.
후드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안대를 푸는 검은 손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경악애는 관심도 없는지 그는 안대를 벗기기 무섭게 나를 거칠게 밀쳐내며 활을 치켜들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아니,그걸 따지기 전에......
"잠깐!야!손은 풀어줘야지!"
"내 누이를 당장 데려오지 않으면 다시 1분에 한 명씩 쏴서 죽일 테다!"
내 말은 고이 씹는군.
다시 만난 검은 피부의 사내는 여전히 까칠했고,나는 일단 겨우 자유로워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등을 밟고 칼을 들이댔던 부대장으로 추측되는 인간과 그 외에도 여기저기 네 명쯤 되는 사내들이 하나같이 화살에 목이 꿰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아직 멀쩡한 사내들이 스무 명 정도 되어보였지만 혹여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올까 봐 몸을 사렸다.
[라이,이게 어찌 된 일이니?]
[글쎄요?]
[......아마도 내가 저 녀석 동생인 줄 알고 잘못 데려온 것 같지?그렇다는 건 녀석 이름도 제라스라는 건데......내 오라비와 동명이인?]
[그건 아닐걸요,마스터.]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저 검은 피부의 사내는 자신의 동생을 내놓으라고 소동을 부리고 있었고 나는 내 오빠가 나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고 들었으니,결국 나를 저 사내의 동생인 줄 알고 데려온 것 아니겠는가.
[아냐?왜?저 녀석의 동생은 금발이고,나는 저 녀석 이름이 내 오빠랑 같은 제라스라서 헷갈린 것 같은데.]
[그건 맞는 것 같은데 동명이인은 아닐걸요.그건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라는 뜻인데,저건 사람이 아니잖아요?]
[누가 사람이 아니야?]
[저기 활 들고 있는 녀석이요.]
동생을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내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후드로 전신을 가리고 있지만 시위를 당기는 손만은 검은빛을 띠고 있는 사내.
그리고 보통이 넘는 힘과 궁술을 지니고 있었다.
라이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녀석.
자세히 보니까 바람의 하급정령을 다루고 있었는데,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아까의 그 소리와 기운은 저 사내의 정령이었던 모양이다.
어째 오늘 괜찮은 정령사들을 많이 만나는......엑?
[설마......저 녀석도 다크엘프야?]
[네,아까 말씀드렸잖아요.저 위에 있는 녀석도 그거라고요.]
내가 감옥에서 끌려나올 때 말을 걸던 다리야가 떠올랐다.
궁수에 다크엘프,동생을 찾고 있다는 점까지 딱 맞아떨어졌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다리아의 오빠겠군.
정말 구하러 왔네.
헷갈리게 이름은 같아 가지고......
내 오빤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쳇,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 듣냐?내가 누누이 말했지.말에서 주어를 빼놓지 말라고!]
[말했는데?'위에'라고요.]
이 녀석이랑 말을 말아야지!
'위에'가 어떻게 주어냐?
정작 주체인 다크엘프라는 말은 쏙 빼놓고서는......
나는 우선 지금의 상황을 대충 정리해야 했다.
그러니까 저 검은 피부의 사내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 다크엘프고,동생을 찾고 있는데 그 동생은 아마도 아까 대화를 나눈 다리아,그 다리아가 금발인지는 모르지만 다크엘프인 것은 확실했으니 틀림없을......
[응?저 다크엘프 어디가 모자라나?딱 날 보면 인간인 거 모르겠니?피부가 하얗잖아.]
[하지만 지금 마스터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걸요.진흙으로 범벅......죄송해용.]
망발을 지껄이더 라이가 이제는 눈치가 늘어 알아서 말을 끊었다.
감히 주인님 얼굴 보고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니,어디서 그런 무엄한 소리를!
피핑
또다시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람 하나가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저 속도와 파괴력은 바람의 정령이 내주는 것이려나?
흐음,활과 바람의 정령이라.
제법 괜찮은 궁합이지,싶었다.
"내 누이 어디 있어?다 죽어 볼 테냐!이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우리를 뭐로 보고 감히......!"
다크엘프 사내가 분에 못 이긴 듯 거칠게 씨근덕거렸다.
이봐,솔직히 그 녀석들은 데려오긴 했어.
잘못 데려왔을뿐이지.
내가 제라스라는 이름에 냉큼 반응한 이유도 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댁이 그렇게 후드를 쓰고 있으니까 저놈들도 헷갈린 거지.
"이봐요.당신 동생이라면 내가 어디있는지 알아요.가르쳐줄게요."
딱히 '블러드 윙' 녀석들을 도와줄 생각은 아니지만 다리아의 행방을 가르쳐줄 셈으로 말을 건넸는데 다크엘프 제라스는 오히려 활시위를 내게 돌렸다.
뭐야?남의 호의 그렇게 반응하다니.
그건 다크엘프 식이니?
"그 말을 어떻게 믿지?너도 저 녀석들과 한 패인지 어떻게 아나?"
"흥,저런 닭 날개들과 한 패로 보다니 기분 나쁜걸요."
"나를 속이고 내 누이인 척 했잖아!"
"댁이 헷갈린 거죠!나도 내 오빠가 온 줄 알았다고요!내 오라버니의 이름도 제라스니까!"
에잇!기분 나빠.
가르쳐주지 말까보다.
내가 제라스에게 다리아의 행방을 가르쳐주려는 건 순전히 그가 다리아를 구하면 나는 온전히 에이니를 구하는데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얼굴이 진흙으로 가려져 있었다지만 제 동생 얼굴도 못 알아보면서 큰 소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통하리라 생각하나?"
"내 말은 진실이에요.나보다 열 살 많은 내 오라버니의 이름이 제라스죠.댁보다 훨씬 착하고 정이 많다고요."
끼리익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제라스가 활시위를 당겼다.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탓인지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 했다.
"다음 목표는 너다!다른 말은 필요 없으니 당장 내 누이를!내 눈앞에!데려와!"
"다리아 양은 자신의 오라비가 매우 다정하고 정의롭다고 했는데 당신은 전혀 그렇지 않네요.그녀가 거짓말을 한 건가요?"
"......누이를......다리아를 만난 건가?정말?"
"물론이죠.당신의 활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나는 힘쓸 데가 따로 있거든요.그러니 순순히 믿어줬으면 좋겠네요."
내 말이 먹혔는지 제라스가 활을 살짝 내렸다.
"다리아는 어디 있지?왜 다리아가 아니라 네가 온 거냐?"
"그녀는 저 건물 안에 있어요.제 옆 감옥에 있었는데 우린 잠시 대화를 나눴죠.그리고 저는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에요.다만 보시다시피 제가 금발이라 저들이 나와 다리아 양을 헷갈렸을 뿐이죠.물론 당신 이름이 내 오라버니와 같다는 것도 한 몫 했지만요."
"그 말......정말 믿어도 되나?클라우드님을 걸고 맹세할 수 있나?"
아,그 인간,아니 다크엘프 의심도 더럽게 많네!
나는 에이니 찾기 계획을 급수정해야 해서 바쁜 사람이라고.
적당히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뭐라고 해야 그가 내 말을 믿을까 생각하던 나는 다리아의 다크엘프 식 인사를 떠올렸다.
"아아,'지켜보는 자'라고 했던가요?천리안의 클라우드,다크엘프의 우상쯤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게 누군지 몰라요.그래도 상관 없다면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아니면 '초록의 평안'마을의 스물 한 번째 딸 다리아 양을 걸죠."
"......'초목의 평안'이다.뭐 믿어주지.자세히 말해봐라 내 누이가 어디 있다고?"
쳇,초록이나 초목이나 한끝 차이고만 까칠하기는.
그래도 믿어주니 다행이었다.
이것에도 믿지 않았으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변의 차이'에 대한 것을 설명해야 했을 테니.
혹시 자기 동생이 그러고 다니는 걸 모를지도......
[라이,아까 거기 몇 층이었어?]
[5층입니다,마스터.]
"저 건물의 5층이에요.주의할 건 그 층에 안티 마나진이 새겨져 있어서 정령이나 마법을 일절 쓸 수 없다는 거죠."
고개를 끄덕인 제라스는 당기고 있던 활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나와 노예상 일당을 가볍게 뛰어 넘어 예의 그 건물로 날아갔다.
난 분명 안티 마나진의 존재를 알려줬으니 뒷일은 제라스의 몫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바람의 정령이라 그런지 나는 방식부터가 안정적이었고 속도 또한 빨랐다.
캬!내가 여유만 있었으면 바람의 정령이랑도 계약을......
이런,내가 지금 한가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게 남은 뒷일도 있었던 것이다.
제라스가 사라지자 부대장과 동료를 잃은 닭 날개 단원들의 분노가 내게로 향했다.
"넌 뭐야?얘들아,잡아!다시 감옥에 쳐넣어!"
서서히 내게 모여드는 20명 남짓의 험상궂은 사내들.
몇몇이 무리에서 일탈해 뒤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제라스를 잡으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소식을 전하러?
둘 다 곤란한데,제라스를 쫓는거라면 그 녀석이 또 '역시 한 패!'라면서 덤빌테고,내 이야기가 그라크의 귀에 들어가면 에이니 찾기가 힘들어질 테고.
[마스터,어쩔까요?]
"글쎄.이왕 이렇게 된 것......일단 저 녀석들 입부터 막아야겠지?"
누누이 강조하지만 나는 원래 조용히 잡혀 있다가 그라크를 잡아 에이니부터 빼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신의 농간인지 하늘은 내가 일을 얌전히 처리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기껏 감옥에 들어갔더니 얼결에 끌려나오고 이어 스무 명의 적을 마주하게 해주다니.
'모든 것은 신이 바라시는 대로'라는 말이 있다.
사실 내 희망사항은 '모든 것은 신이 예상치 못한 대로'이지만 오늘은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신이 바라는 대로'해줘야겠다.
정말 신이 이걸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히익!마,마스터!왜 또 그렇게 웃으세요?]
"후훗,페인!실전이다."
페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몸속의 마나를 유동시켰다.
마나를 유동시키는 방법은 직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령을 소환하는데는 마나를 팽창시켜 주는 것이 최고였다.
팽창된 마나가 마나 홀의 내부를 휩쓸며 요동칠 때 그중 일부를 몸 밖으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에 호응해 주변의마나가 일렁거리며 두 마나의 틈새를 이용해 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흘러낸 마나를 빠르게 흡수하며 완전한 모습을 갖추는 페인.
아무렴 그래야지.
나는 정령이 소황되는 이 순간의 감각이 정말 좋았다.
안티 마나진 따위 닭에게나 주라지!
파스스슷
일순 주변이 환해지더니 그 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 주위로 새햐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이쿠!왜 저기에만 눈이 내리지?"
"이봐,저것 봐!저 여자 주위에만 눈이 내려!"
다가오던 사내들이 웅성이며 걸음을 멈췄다.
바보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말이다.
뭔가 싶어 위를 올려다보니 페인의 주변으로 내리던 빗방울들이 파직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얼어 눈이 되었다.
비 오는 날 밖에서 페인을 소환하기는 이버이 처음이라 이런 현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도 조금은 감탄했다.
"와우,한 여름에 눈이라니.멋진 걸!페인도 제법 운치가......"
[마스터,마스터!저도 저런 것 할 수 있는데요.해볼까요?]
[네가?어떻게?]
남 칭찬받는 꼴을 못 보는 라이가 내 눈길을 받아볼 셈인지 끼어들었다.
금속이랑 눈이라니......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데.
[그야 다이아나 수정을 마구잡이로 뿌리면......]
[......했단 봐라.]
[왜요,마스터?비슷할 것 같은데......]
[라이,너 비오는 날 먼지나게 맞아볼래?]
이 자식이 배가 불렀나.
누구 좋으라고 다이아로 눈을 뿌린다는 거얏!
평소 같으면 라이를 끄집어내 몇 바퀴 쥐불놀이를 시켜줘야겠지만 지금은 그새 정신을 차리고 나를 잡으려드는 닭날개 단원들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것도 이왕이면 확실하게.
[이봐,지니.난 뭘 하면 되나?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소망이......]
"아차!미안해,페인!별건 없고 일단 저쪽에 도망가는 녀석들 보이지?그 녀석들에게 콜드 볼트!"
내 명령에 페인은 새하얀 번개 같은 것을 순식간에 저 멀리 뛰어가던 사내들에게 정통으로 쏘아냈다.
콜드 볼트!
차가운 벼락.
이름만 봐선 언뜻 전기 속성 마법 같기도 하지만 상대를 튀기는 것이 아니라 꽁꽁 얼린다는 것을 볼 때 엄연히 다른 마법이었다.
전기와 비슷한 것이라고는 엄청난 공격 속도 정도일까?
쏜살같이 날아간 콜드 볼트는 멀어지던 사내들을 순식간에 멈추게 했다.
뭘 하러 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처리했으니 안심이었다.
사실 운디네를 불러도 되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제압이 아니라 사살이었으니 페인이 나았다.
마침 페인에게 실전 경험을 시켜줄 때도 되었고 말이다.
[다 됐네.이제 가도 되나?]
이 녀석,뭘 했다고 벌써 간대?
그래도 페인의 마법은 더 없이 완벽했다.
명중된 세 명의 사내들은 가던 모습 그대로 얼어 있었다.
순식간에 뼛속까지 얼어버린 만큼 저들은 자신이 얼었다는 사실도 모를 터였고 더불어 자기들이 죽은 줄은 꿈에도 모를 터였다.
하긴,뼛속까지 어는 마당이 심장이 남아날까마는 고통없이 죽여줬으니 댁들,감사하라고!
"자,잡아라!마법사다!"
"젠장!무식한 궁수에 이어 이번에는 마법사냐?"
이봐!난 정령사라고.
그리고 페인은 비밀병기,아니 비밀정령이고.
그러니 페인의 모습을 본 이상 모두들 입 다물어줘야겠는걸.
평생 말이야.
내가 멋대로 소환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페인,프로즌 웨이브."
내 발 앞에서 시작된 얼으므이 파도는 빗줄기에 힙입어 순식간에 새하얗고 날카로운 순백의 모습으로 일순간에 모든 적들을 찍어 누르듯 덮쳐버렸다.
사내들이 얼음 파도의 끝자락에 꿰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파바바박
콰라라락
"끄허억!"
"크아아악!"
진짜 파도와 달리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날카롭다는 게 특징이자 장점이다.
진짜 파도만큼 빠르고 넓은 범위를 자랑하기 때문에 멀리서 얼핏 보면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얼음의 파도 프로즌 웨이브가 한 번 덮친 자리에는 물거품 대신 얼음 조각과 핏물이 가득했다.
운 좋게 파도를 피한 사내가 허겁지겁 도망가고 있었다.
이봐!이봐!딱 한번 공격했을 뿐인데 그렇게 무서워해주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제가 잡아올까요,마스터?]
"아니,라이.너눈 일단 쉬고 있어.페인,아이스 스피어......아니,아이스 티스!"
아이스 스피어는 날려야 하지만 얼음 이빨 아이스 티스는 그렇지 않았다.
땅속에서 솟아난 이빨이 상대의 발부터 씹어내기 때무에 마침 땅바닥이 빗물로 흥건한 오늘 같은 날에 쓰기에 더없이 좋았다.
"흐악!사,살려줘어.아니,살려주세요!"
채 몇 걸음 도망가지 못하고 아이스 티스에 발을 물린 사내가 빗물에 파래진 입술로 외쳤다.
저럴 정신이 있는 걸 보니 그렇게 아프지 않은가 봐.
얼음이 너무 차가워서 그런 걸까.
[앗,아까 마스터 엉덩이 걷어찬 녀석이에요.]
"오호라.그게 당신이었구나?"
"제,제발......제발 자비를!"
어차피 모두 없애버릴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이상 얘기가 달려졌다.
댁은 특별히 아프게 죽여주지!
그에게 다가간 나는 우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라크는 어디 있지?"
"대,대답하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아니,전혀 그럴 생각 없는데.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대답하지 않겠지.
나는 선심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