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걸음 걷나 싶더니 내 엉덩이를 후려차는 왠 녀석의 발길질에 나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져야 했다.
손이 묶여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틀며 넘어졌다.
어깨부터 넘어진 나는 아릿한 감각에 표정을 구길 대로 구겼다.
절로 이가 갈렸다.
어떤 놈이 감히 숙녀의 엉덩이를?
"이익!"
에잇!
감옥에 같힐 줄 알았으면 그냥 한 마리씩 잡는 건데.
아니 지금이라고 해서 못할 건 없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우아한 에이니 찾기는 그만두고 무식한 방법으로 한 마리씩 족치기 위해 라이를 불러 손목부터 풀게 할 참이었다.
꼭 웬 놈에게 엉덩이를 걷어 차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하튼,라이를 부르려는데 철창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들려 온 녀석들의 대화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찰크덩
찰칵
"내가 가서 대장을 데려올게."
"그래?그럼 나는 보초나 서볼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날뛰고 싶었지만 그라크 녀석이 온다는 소리에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은 겨우 삭였다.
[라이,내 엉덩이 걷어찬 녀석 얼굴 똑똑히 기억해놔!]
[네,마스터.걱정 마세요!마스터가 엉덩이 걷어차인 것도 잘 새겨 놓겠습니다.]
[그건 잊는 게 신상에 좋을 걸!]
[니에......]
꼭 쓸데 없는 것만 기억하려 든다니까?
하지만 내가 잊으란다고 잊을 녀석이 아니었다.
기억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니 말이다.
9년 전 일을 '얼마 전'이라고 표현하는 녀석이니 오죽 할까마는.
그때 문득 드는 아쉬움이 있었으니 바로 라이의 후각이었다.
라이의 후각이 에이니의 냄새를 맡고 찾아갈 정도만 되면 당장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편할텐데.
기껏 늑대를 잡아다 줬는데 그 후각의 10분의 1도 활용하지 못하니 아쉬울 수밖에.
그 끝내주는 기억력의 반만 후각에 투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음?마스터,보초 서겠다던 녀석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요?]
라이의 후각은 꽤나 둔하다.
그리고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뛰어난 청각을 자랑한다.
그 탓에 지금처럼 기척을 잡는 데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나도 제법 기척에 예민하다고 자부하지만,현재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감옥 안에 사람이라고는 나뿐인 것 정도였다.
[그래?그럼 얼른 가서 이층을 돌아보고 와.어떤 구조인지,탈출구는 있는지 말이야.]
[네,마스터.맡겨주세요.]
어깨 위에 있던 라이가 팔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그거야 제 전문 아니겠습니까?푸헤헤헷!]
방정맞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내 라이의 기척이 사라졌다.
나는 앞으로의 대책을 떠올렸다.
우선 이대로 그라크 녀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녀석이 나타나면 녀석을 잡아 에이니가 잇을 곳을 불게 하는 게 우선일까?
혹여 녀석이 에이니를 데리고 나타난다면 일은 더욱 편해질 테고 말이다.
하지만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중요한 협상카드를 초장부터 들고 나오진 않을 터였다.
녀석이 나를 굳이 자신의 본거지로 불러들이고 에이니를 납치한 이유는 나를 확실히 사로잡기 위한 수단일 테니 에이니는 어딘가에 숨겨놓고 올 확률이 높았다.
"요......거......"
한창 머리를 굴리는데 문득 작은 소리가 들렸다.
눈이 가려지고 손이 묶여 있었기에 유난히 예민해진 내 귀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응?"
누군가의 목소리 같았는데 라이의 것은 아니었다.
라이의 목소리는 애초에 목소리라고 하기도 모호한 것이니 말이다.
들려오는 방식부터가 달랐다.
나는 의문의 목소리를 향해 귀를 집중했다.
"이요......거......요......"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상대가 너무 멀리 있는 탓일까?
하지만 그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은 분명했기에 주저 않아 있던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양손이 뒤로 묶여 있었기에 일어나는 것이 여의치 않아 힘겹게 몸을 일으켜야 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몇 걸음 가니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벽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였을까?
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아,다,당신 누구세요?"
정확하진 않지만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옆방,아니 옆 감옥인가?
"그러는 댁은 누구죠?"
내 목소리가 조금 퉁명스럽긴 했지만 그건 상대의 물음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은 '거기 누구 있어요?'라고 묻는 것이 정상 아닌가?
하지만 상대의 물음은 마치 내가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듯 했다.
"저,저는 다리아라고 해요."
"아아,그래요?난 지니라고 해요.근데......날 부른 이유가 뭐죠?"
"네?부른......이유요?"
갸냘프다 못해 듣는 내가 다 연약해질 것 같은 여린 음성.
저쪽 또한 여자인 듯 했다.
"그래요.당신이 말을 걸었잖아요.뭔가 부른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설마 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끼리 통성명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테죠?"
내 퉁명스럽다 못해 다소 비아냥거리기까지 한 물음에 자신을 다리아라고 소개한 여성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해요.혹시 제가 아는 분인가 해서......"
"뭐,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헌데 감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건 그야말로 최악 아닌가요?"
"아뇨,제가 잡혀올 때 오라버니께서 반드시 저를 구하러 오겠다고 하셨거든요.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씨구,이쪽도 납치인가?
그라크 녀석,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납치한 거야?
이런 미키마우스 뻐드렁니만도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헤에,그래요?납치 당한 지는 얼마나 됐는데요?"
"그건 모르겠어요.이곳에는 창문도 없고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거든요.물어보려고 해도 대답해주지 않고요."
"하아!이봐요,다리아 양!대체 어떤 착한 납치범이 그런 걸 순순히 대답해주겠어요."
"예?아니에요.저는 납치범이 아니라 정령들에게 물어봤는걸요."
정령?정령이라고?
혹시 이 다리아라는 여자 정령사인 건가?
문득 같은 정령사를 만났다는 사실 때문인지 때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이 설레었다.
이엘 스승 외에 정령사는 처음이니 말이다.
이런 곳에서 동지를 만날 줄이야!
"정령?당신도 정령사에요?"
"예?예에.혹시 그쪽도?"
"네!나도 정령사에요!이거 굉장한 우연인데요?엘란 연합국에 백 명도 안 된다는 정령사를 이런 데서 만날 줄이야.당신은 무슨 정령사죠?물?바람?땅?불?"
만약 마주보고 있다면 무슨 속성의 정령사인지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은 되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눈이 가려져 있었으며 그녀와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상대의 실력이나 속성을 알 수 없었다.
"저는 땅의 정령을 조금......"
"땅의 정령?급은요?하급?중급?상급?"
땅의 정령이라......정령사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은 속성이었기에 꽤나 희귀한 케이스였다.
아무래도 땅의 정령은 방어 쪽으로는 막강하지만 상급이 되기 전에는 공격력이 너무 떨어지다 보니 기피하는 듯 했다.
그래도 일단 상급이 되면 다른 정령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전투력을 자랑한다.
뭐,상급정령을 소환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거의 없는 샘치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중급이에요.아직 두마리밖에 못 부르지만......"
"중급 땅의 정령을 두마리나?그럼 하급은요?"
"하급은 넷까지 계약했어요.아직 미숙......"
"넷?셋도 아니고 넷?대단하네요!당신 대체 어느 나라 소속이죠?그리고 그 정도 실력이면 탈출도 해볼 만할 텐데요?"
중급을 둘이나?하급은 넷?
나는 절로 벌어지는 입을 막지 못했다.
하급이 셋도 아니고 넷이란다.
일반적으로 정령사들이 하급 정령 둘과 계약하면 중급 정령과의 계약을 준비한다는 점을 볼때 넷은 놀라운 숫자인 것이다.
하급 정령 셋과 계약했다면 거의 중급정령사와 동급으로 봐줄 수도 있었다.
넷과 계약하고 있다는 것은 하급정령 넷을 동시에 조종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나 같은 경우에도 정령 셋을 동시에 부리는 것이 한계인데 말이다.
물론 내 정령들이 4대 원소 외의 정령들이라 유난히 조종하기는 힘들기는 하지만.
"저,저는 소속된 국가 같은 것은 없어요.인간이 아닌걸요."
"아하!인간이 아니......뭐요?"
"그,그게......저는 인간이 아니라고요.그리고 여기서는 정령들을 부를 수가 없어요.모르셨어요?"
"정령을 부를 수 없다고요?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정령을 부를 수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녀의 말에 놀란 나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의문을 잠시 뒤로 밀어야 했다.
"모르셨나요?이곳에는 안티 마나진이 그려져 있어요."
"안티 마나진이라면......마나를 완전히 차단시킨다는 그 마법진 말인가요?"
"예,그래요.정령을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법을 써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하더군요.제 몸의 마나를 유동시킬 수는 있지만 주변에 마나가 없으니 마법을 발현시킬 수도 없었어요."
정령에 마법까지 쓴단 말이야?
정말 인간이 아닌가?
아니,그보다 정령을 부를 수 없다면 조금 곤란한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디네를 불러보았다.
"운디네!"
[......]
묵묵부답.
정령이 소환되기 위해서는 내 몸 안의 마나뿐 아니라 주변의 마나도 필요하다.
내 마나 홀의 마나에 반응해줄 주변의 마나가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것이다.
핸드폰을 이용해 전화를 하려고 한다 치자.
우선 핸드폰의 배터리가 내 몸속의 마나가 될 테고,핸드폰 본체가 내 몸이다.
그리고 전화를 받을 상대가 운디네.
하지만 핸드폰 본체와 배터리,수신자만 가지고는 전화를 할 수 없다.
중간에서 발신자와 수신자를 이어줄 통신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 통신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외부의 마나다.
나 혼자 내 몸 속의 마나로 북치고 장구 친다고 운디네가 소환되는 것이 아니다.
통신사 역할을 해줄,내 마나의 부름에 반응해 소환되려는 운디네에게 내 마나와 호응해 중간계와 정령계를 연결시켜줄 외부의 마나가 필요한 것이다.
"어,어때요?"
"물의 정이여,내 눈앞에 솟아올라라.약속된 이름으로 부르려니 답하리라.운다인!"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문까지 외워가며 운다인을 불러봤지만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소환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쳇,이런 느낌이군.
내 마나에 반응해줄 외부의 마나가 없다는 건!
"역시......대답이 없나요?"
"그래요.안티 마나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정령이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니......끔찍한 기분이에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직접 느껴본 안티 마나진은 정령사에게 그야말로 천적이었다.
물론 마법사에게도 마찬가지 겠지만.
정령도 소환이 안 되는 마당에 마법을 쓸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정령마법보다는 일반 마법이 외부의 마나를 더욱 많이 필요로 하니.
그나저나 대체 누가 안티 마나진 따위를 만든 거야?
아니,그보다 이런 진을 그려놓은 그라크 녀석의 치밀함이 괘씸했다.
하긴,이종족도 잡아들인다니 이런 감옥이 필요하기도 할테지만.
마나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데,감히 안티 마나진 따위를 생각해내다니.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마.
괜스레 씨근덕거리고 있는데 내가 말이 없자 벽 너머의 다리아가 살며시 말을 걸어왔다.
"저어......기운 내세요.제 오라버니가 반드시 우리를 구해주실 거에요."
"댁의 오빠가 우릴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과연 생판 처음 보는 나까지 구해줄까요?"
뭐,나야 비상용 정령 라이가 있으니 구해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은 없다.
라이는 정령계에서 따로 불러내지 않아도 되고 내 마나가 없어도 얼마든지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 안티 마나진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
"물론이에요!오라버니는 굉장히 다정하고 정의롭거든요!"
"헤에,하지만 이곳은 마법도 못쓰고 정령도 못쓰는데 무슨 수로?"
"오라버니는 뛰어난 궁수에요.마을에서도 제일 민첩하고 정확한 명사수죠!"
이 다리아라는 여자 어째 자기 오라비 얘기가 나오자 들뜬 것 같았다.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건가?
나야 자의로 잡혀왔지만 댁은 경우가 다르......
"아참!아까 당신 인간이 아니라고 했죠?"
"예?아,그래요.저는 인간이 아니에요.늦었지만 정식으로 인사 드릴게요.저는 '지켜보는 자'천리안의 클라우드님께서 잠들어계시는 우리......다크엘프의 마을 '초목의 평안'의 스물 한 번째 딸 다리아라고 해요."
나는 뜬금없는 그녀의 낯선 인사 방식에 당황했다.
지켜보는 천리안의 클라가 뭐 어쨌다고?
눈을 찡그리며 그녀의 말을 다시금 되새긴 나는 이내 그녀가 다크엘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크엘프.
빛이 들지 않는 숲속 깊은 곳에 살아가며 겉모습과 능력은 엘프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사상과 성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검은 엘프들.
엘프가 성신의 사자라면 다크엘프는 마신의 사자라고 전해진다.
"다크엘프?엘프보다도 훨씬 개체수가 적다는 다크엘프가......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죠?"
"그야 납치당했으니까요."
이거......뭐?
눈이 가려졌다는 것과 손이 가려진 사실을 빼더라도 나는 지금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다크엘프라면 굉장한 무력을 지녔다는데?
인간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깊은 숲속에서만 살아간다며?
굉장히 사나운 심성은 지녔다며!
"하핫."
"호홋."
저 천하 대평한 게 다크엘프라고?
나는 어째 감옥에 있을 때마다 남들은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존재들을 만나는 것 같다.
감옥이랑 무슨 인연이 있나?
에쉬 때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다리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처음 보는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다크엘프에요?"
"물론이죠.그럼 레드 엘프겠어요?아,레드 엘프도 있나요?"
왜 내가 질문을 받아야 하지?
마음 같아서는 괴력을 발휘해 손을 묶은 줄을 뜯어내고 안대를 벗은 다음 이 벽을 단숨에 부쉬버리고 그 검다는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지만 일단 괴력이 없으니 참는다.
"......레드 엘프는 없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죠?"
네가 알지 내가 알겠냐!
나는 엘프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상대가 내 얼굴을 못 본다는 점을 백분 활용해서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별 해괴한 괴용에 이어 괴 엘프까지 만나야 해?
내 인생에 제대로 된 사람,아니 거기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이종족은 없는 건가?
이봐요 신!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겁니까?
없어도 되는 것
당연하겠지만 시간은 소리 없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아와 나눈 몇 가지 대화에 의하면 그녀는 라이는 물론이고 이루제에 버금가는 괴짜가 틀림없었다.
나에게 오크의 변과 오우거의 변을 구별하는 심도 깊은 설명을 해줬으니 분명하다.
그녀가 내게 '오크의 변과 오우거의 변의 결정적인 차이가 뭔지 아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냄새요."
그리고 그에 돌아온 답은 나를 괴롭게 했다.
"아뇨,맛이에요."
내가 맛이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던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똥 맛의 차이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설마 모든 다크엘프가 저러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결단코 바란다.
그녀가 괴짜 다크엘프이기를.
그렇지 않으면 내가 품어온 다크엘프의 환상이 너무도 아까웠다.
[마스터,제가 왔습니다.제가 좋은 걸 알아왔어요!]
[응?왔구나,라이!좋은 게 뭔데?]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라이가 느껴졌다.
이내 머리 위로 올라갔는데 아마도 평소처럼 내 머리 위에서 자신의 꼬리에 머리를 괴고 때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을 터였다.
[푸히힛,기대하셔도 좋아요,마스터.]
기대하라고?좋은 거?
혹시 에이니가 있는 장소라도 알아 온 걸까?
그럼 일이 수월해질 텐데 밀이다.
옆 감옥의 해괴한 엘프에게 질려 있던 나는 라이의 기대해도 좋을 소식에 가려진 눈을 빛내며 귀를 세웠다.
[뭔데?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글쎄요.이 옆 감옥에......]
"다크엘프가 있다고?"
[헛!그,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뭐 좋은 소식이라고.
조금 전까지 그 기대해도 좋은 다크엘프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눈 참이란다,라이.
아!쓸만한 것이 딱 하나 있긴 했다.
안티 마나진에 대한 이야기.
그 외의 이야기는 제발 내 기억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예?저 부르셨나요?"
"아뇨."
[엥?그세 친해지신 건가요,마스터?]
[전혀.]
어째 라이가 둘이 된 것 같은 이 불쾌감.
라이는 도움이라도 되지만 이 옆방의 다크엘프 양은 어쩐다?
명사수 오빤지 뭔지 구하러 올 리가 없으니 전혀 내키지 않았다.
일단 말을 텄으니 예의상 책임져야 할 듯했다.
모른 척하자니 그랬다가는 '블러드 윙'의 납치범 녀석들과 같은 악당이 될 뿐이다.
아,중급정령사라고 했지?
그렇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라크를 데려온다던 녀석은 대체 왜 안오는 거야?그라크를 만들어 오나......
"응?무슨 소리 들리지 않으세요?"
"소리요?"
다리아의 물음에 귀를 기울여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따.
"에,뭔가 챙챙 하는......칼부림 같아요.싸움소리 같은데요?"
[저도 그런 소리가 들리는데요,마스터.]
다시 귀를 기울이며 한껏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역시나 내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라이야 원래 청력이 좋았고 다리아 또한 다크엘프니 뛰어난 청력을 자랑할 터.내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안 들리는데......어느 쪽에서 나는 소리죠?이 건물 근처인가요?"
"아마도요.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지만 싸움이 분명해요.바로 이 건물 근처같아요."
싸움이 일어났다고?내부 분란일까?
그렇다면 그라크의 등장이 늦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일 터였다.
하필이면 내가 있을 때 싸움이 벌어질 게 뭐람?
이렇게 시간을 끌면 에이니만 힘들텐데.
슬그머니 에이니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인질로 잡아갔으니 함부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하게시리 하필 애를 잡아간담?
[앗,마스터.사람이 올라와요.]
[숨어,라이!]
머리 위에 있던 라이가 다시 내 어깨 위로 내려왔다.
자신의 껍질 색과 꼭 닮은 내 머리카락 속에 숨어 있으면 크게 움직이지 않는 한 남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이내 누군가 내가 있는 층으로 들어선 것이 느껴졌다.
소리와 기척으로 보건대 조금 지친 듯 했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를 들어 봐서는 그렇게 크지 않은 덩치의 사내 같았다.
분명 나를 가두고 간 사내는 아니었다.
조급한 듯 주위를 부산스레 돌아다니던 사내의 발길이 내가 있는 감옥 앞에서 멈췄다.
뭐지?
그라크가 날 대려오라고 시키기라도 한 걸까?
보이지 않으니 답답함이 더 했다.
"야!거기,너.금발!"
"날 부르는 건가......요?"
반말을 할까 하다가 지금으로선 상대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높였지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너!너 혹시 제라스라는 자식 알아?"
제라스?제라스 오라버니?
마지막으로 봤던 제라스의 엣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첫번째 동생이어서인지 나를 유난히 채겨주던,꼬박꼬박 편지를 보내오던 정 많은 오라비 제라스.
헌데 왜 여기서 제라스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내 오라비인데,왜 그러는 거죠?"
"오냐!바로 너로군.지금 네 덕에 밖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나 때문에 밖에서 난리가 났다니.
나는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깜옥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나를 일으키려는 듯 팔을 잡아끌었고 얼결에 엉거주춤 일어선 나는 일단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시 주저않았다.
"자,잠깐!나 때문에 난리가 났다니?제라스 오라버니 얘긴 또 뭐죠?설명해 봐요!"
"시끄러!네년 오빠가 와서 지 동생 내놓으라고 발칵 뒤집어놨단 말이야!그러니 잔말 말고 따라와!"
"저,저기요,이봐요......"
얼핏 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사내의 손이 버티는 내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당겼다ㅏ.
뭐,이런 놈이 다있어?
어디 잡을 데가 없어서 여자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아얏!이,이거 안 놔!"
빠악
"놓긴 뭘 놔!맞기 전에 순순히 따라오라고!"
[헉!마,마스터?]
뭐야 이게?
얼결에 사내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이가 없었다ㅏ.
벌써 때렸으면서 뭐가 맞기 전에 순순히 따라와야?
그런 건 때리기 전에 말해야지!
9년 전 그라크는 내 뺨을 때렸던가?
잊히지 않은 아픔 중 하나였다.
정말이지 '블러드 윙'인지 뭔지 닭 날개같은 것들이 하나같이 손버릇이 오징어 똥만도 못했다.
[일단......기다려,라이.나가서 보자고!]
이를 박박 갈면서도 나는 차마 곧바로 반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제라스 오라비의 이름이 나왔다는 점이 가장 컸다.
내가 드래곤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출이라도 했다가,마침 내가 미엘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건가?
여러 우연이 겹쳐야겠지만 말이 안 되지는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제라스의 불같은 성미는 나를 찾겠다고 가출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사내에게 이끌려 계단을 구르듯 내려간 나는 곧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주변 가득 활개 치는 마나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나를 반겼다.
기껏 붙잡혀줬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밖으로 끌려올 줄이야!
원래는 감옥 안에서 그라크 녀석을 잡아 에이니를 찾을 생각이었는데,계획이 단단히 틀어져버렸다.
쉬킹!
피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