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지니가 사라진 동쪽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크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갔소?"
예의 그 중년사내였다.
여관 입구에 선 그의 담담한 물음에 잔뜩 화가 난 로크스가 그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맙소사!지금 당신이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었어요!그런 위험한 곳이라면 알려주지 말았어야죠!"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모양이군."
중년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그에 로크스가 얼굴을 한층 더 붉히며 항변하듯 말을 이었다.
그 또한 나름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는 지니가 그렇게 대단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저도 그녀가,지니 씨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 특이한 개만 해도 그렇고,지금도 뭔가 특이한 방법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가더군요.하지만 그뿐입니다!어떻게 여자 혼자서 백여 명이나 되는 악당들을 상대합니까?불가능한 일이에요!"
"아니,잘은 모르겠지만 나느 불가능하다고만은 생각지 않소.왜냐면 그 악독하기로 유명한 그라크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그라크?"
오크스가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들이 아이를 납치해 갔을 때 마지막에 전언을 남긴 사내 말이요.그는 '블러드 윙' 미엘타 지부의 대장으로서 소문에 의하면 친누이가 간부로 있다고 하더군.게다가 본인의 성격이 지독히 악랄한 데다가 끝이 지저분해서 누구나 꺼리는 놈이지."
"지부의 대장?간부는 친누이인 작자라고요?당신......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는 겁니까?"
중년사내의 말을 잠자코 듣던 로크스가 수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래도 일개 마을 주민이알고 있는 사실치고는 너무 자세했던 것이다.
로크스의 물음에 중년사내가 잠시 눈을 감더니 나직이 대답했다.
"......나 또한 '블러드 윙'의 단원이었기 때문이오."
중년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 꽤나 놀라웠는지 로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갑자기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은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안면이 있는 아이가 하필이면 그가 수행하고 있던 에쉬,그러니까 제 2황태자 에피로스의 눈 앞에서 납치되었고 그것을 잠자코 볼 위인이 아닌 황태자는 당연히 그 뒤를 쫓았다.
체드와 함께 말이다.
수행원의 몸으로서 그런 위험한 일은 당연히 말려야 하겠지만 그가 말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에쉬와 채드는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학자인 그가 뛰어난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그 둘의 뒤를 쫓는다는 건 오크가 드래곤에게 이빨 자랑을 하는 것만큼이나 미련한 짓이었다.
그는 다만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로크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지금은 아니라는 겁니까?"
"그렇소."
"그런 악당들이 쉽게 단원을 놔줄 리가......"
로크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중년사내는 자신의 한쪽 바짓단을 들어 올렸다.
그곳엔 사람의 다리가 아닌 굵은 나무막대가 들어있었다.
흡사 식탁이나 의자다리 같은 것이 사람의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을 나오는 조건으로 나는 다리를 잃었소.그리고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에 살겠다는 조건하에 목숨은 지킬 수 있었지.그들의 손에 동생을 잃었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단을 나오는 것이 전부였소."
이어지는 중년사내의 말에 로크스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문득 자신이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죄송합니다.제가 너무 주제넘었던 것 같군요."
"괜찮소.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의 근거지를 알려준 것이니 말이오.단지......그라크가,그 작자가 그녀를 두려워했다는 사실에 의지해서 말이오."
로크스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코가 잘려 나가 있어 더욱 험악해 보였던 얼굴.
여관에 들이닥쳤던 다른 사내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그가 단지 예쁘장한 여자 한 명을 두려워 한다고?
단순히 한 명 한 명을 두고 봐도 그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왜 그가 지니씨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만약 아니라면......지니 씨는 죽을지도 몰라요!"
"생각해보시오.10명이나 되는 단원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데다가 그녀가 묵는 여관을 알면서도 굳이 수고스럽게 그녀가 없는 틈을 타 아이만을 납치해서 서둘러 사라지지 않았소?나는 그렇게 조급해하는 그라크를 처음 봤고 그는 분명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소.그래서 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납치하고 자신의 본거지로 그녀를 끌어들인 것이오."
중년사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라크는 로크스가 생각하기에도 뭔가 초조해 보였던 것이다.
그게 그녀를 두려워해서였다니......
로크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지니가 사라진 동쪽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일단 치안대에 알리죠.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대로는 위험해요."
"치안대?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거요."
"그래도 이대로 잠자코 있을 수는......앗!전......에쉬!채드 씨!"
아무래도 가만 있기에는 불안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던 로크스는 문득 에쉬와 채드를 발견했다.
그리고 '전하'라고 부르려다가 다급히 말을 고쳤다.
꽤나 주변을 뛰어다녔는지 땀에 범벅이 되어 돌아온 에쉬와 채드는 로크스의 앞에 와서야 겨우 숨을 진정시켰다.
"하아!후!지니 씨는?돌아왔나?"
"지니씨는......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사실을 말하면 에쉬가 그녀의 뒤를 쫓을 것을 염려한 로크스가 거짓말을 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지 에쉬의 눈길을 슬쩍 피하면서.
"그래?이를 어쩐다.겨우 녀석을 발견하긴 했지만......녀석은 오히려 뒤를 쫓는 우리를 따돌리고는 도망가버렸어.도시가 얼마나 복잡한지 마로 같더군!녀석은 그 미로를 모두 꿰고 있고 말이야."
분하다는 듯 말을 마친 에쉬는 주먹으로 허공을 내질렀다.
"젠장!이봐 로크스,똑똑한 네 녀석이 뭔가 꾀를 내봐!에이니를 찾아야 될 것 아냐?아니면 하다못해 녀석들의 본거지라도......윽!이게 뭐야?"
아직도 진정이 덜 됐는지 숨을 헐떡이며 어깨를 들썩이던 채드가 로크스에게 다가서며 그를 닦달했는데 문득 무엇을 밟았는지 뒷걸음치며 자신의 신발 밑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과일이었는데 제대로 뭉개져서 그 정체가 모호할 정도였다.
왜 과일이 이런 곳에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채드는 자신이 밟은 것 외에도 주변에 몇 개의 과일이 더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에쉬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과일 이외에 로크스 뒤에 왠 짐 꾸러미가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지니가 로크스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했던 것들이었다.
"저 짐 꾸러미는 뭐지?"
"아,그건 지니 양의......헙!"
에쉬의 질문에 자연스레 대답하던 로크스가 순간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로크스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다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지니'라는 이름을 들은 에쉬와 채드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로크스를 노려보았다.
"뭐야?설마 지니 씨가 벌써 다녀간 거야?"
"로크스!네놈,우릴 속인 거냐?"
쏟아지는 그들의 비난 섞인 목소리에 로크스가 한껏 고개를 숙였다.
"그게,그러니까......"
"로크스!대체 어떻게 된 거지?사실대로 말해!"
잔뜩 화가 난 에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는 지극히 강압적이었다.
이렇게 화가 난 에쉬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당황한 로크스가 친구를 가장해 반말을 쓰는 것도 잊고 말을 높였다.
"그,그녀는......그녀는 그들의 본거지르 갔어요.제가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았......흐익!"
"도데채가!그런 일을 숨기면 어쩌자는 거야?내가 도착한 즉시 말했어야지!"
"설마 그 여자 혼자 간 거야?그걸 내버려뒀어?"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로 불같이 화를 내는 에쉬와 채드의 모습에 로크스가 한껏 몸을 움츠렸다.
"죄송.....아니,미안하지만 쫓아간다고 할까봐 그런 거야.거긴 위험하다고!"
로크스가 울상을 지은 채로 변명을 했지만 평소 거짓말을 지독히 싫어하는데다가 쓸데없이 남 돕기를 좋아하는 에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위험?그럼 더더욱 내게 사실을 말했어야지.내가 네게 처음 한 말을 잊은 거냐,로크스?내게 거짓을 고하지 말 것,그리고 내게 편안함과 안전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어!"
실망했다는 기운이 역력한 에쉬의 태도에 로크스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에쉬의 분노가 마치 보이지 않는 생물처럼 그를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로크스는 단지 에쉬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길 바랬을 뿐이지 화나게 할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로크스의 바람은 오히려 에쉬를 화나게 해버렸다.
에쉬는 편안함과 안락함이야말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미안해.하지만 결코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다 너를 걱정해서......"
로크스가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변명하려 했지만 에쉬는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본거지는 어디지?"
로크스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대답하는 순간 에쉬가 그 위험천만한 곳으로 달려갈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크스는 문득 지니에게 녀석들의 본거지를 알려주지 않던 소년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마,말 못해!겨우 통성명이나 한 아이 하나 때문에 너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어,에쉬!"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납치당한 아이가 얼마나 두렵고 공포에 몸을 떠는지 잘 알고 있어.그 공포는......감히 어린아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야!그러니 어서 대답해!이건 명령이다,로크스!"
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들은 로크스는 그곳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로크스는 대답해야만 했다.
수행원으로서 그는 명령을 이행할 의무가 있었으니 말이다.
"도시의 가장 동쪽......"
"동쪽?그게 어디지?"
포기한 듯 눈을 질끈 감은 로크스가 떨리는 손을 들어 지니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우르릉
콰광
그 순간 어둑했던 하늘에서 기다렸다는 듯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불안의 징조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누구에게? 바로 물의 정령사 지니 크로웰에게.
공중에서 내려다본 미엘타의 도로는 정말이지 복잡하고 난해해서 흡사 미로풀이를 하는 듯했다.
길을 헤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것 같았다.
내가 운다인을 타고 공중으로 이동하는 건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득 도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성냥개비 정도의 크기,마치 장난감 같기도 했......이런!"
"더 위로 올라가자 운다인."
아직 날이 밝기 때문에 도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나는 조금 더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사람들의 모습이 깨알같아 보일 때쯤에서야 안심이 되었다.
[앗!저기 같은데요,마스터.]
라이의 꼬리가 가리키는 곳에는 분명 도시의 다른 건물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건물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건물과는 꽤나 동떨어져 있는 그곳은 크고 작은 건물 여러 개가 모여 있었고 그 주위를 검은 성벽......아니,거대한 철조망이 감싸고 있어서 감옥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마치 감옥 같아."
저런 곳에 에이니가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더욱 언짢아졌다.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감히 에이니를 건드려?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그라크 네놈이 나에게 복수심을 불태운 것처럼 나 또한 노예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이를 간다고!
아드득,하고 절로 이가 갈리는 듯한데 문득 라이가 물어왔다.
[마스터,마스터.감옥이라면 잘못한 녀석들이 손들고 있는 곳 말씀하시는 거죠?]
"......손을 왜 들어?"
[아닌가?그럼 엎드려뻗쳐?]
"......그러니까!대체 왜 감옥 안에서 죄수들이 엎드려뻗쳐를 해야 하냐고?"
내 되물음에 라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나는 순간 식겁해야 했다.
왜냐면 그런 라이의 모습이 조금,아주 조금이지만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재가 정녕 미쳤구나.
뱀을 오래 봐서 그런가?
뭐 이런 부작용이 다 있지?
[잘못했으니까 벌서는 것 아니에요?전 그렇게 들었는데?]
"대체 어디서 그런 귀신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들은 거야?"
아차,김밥이었나?
잠시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거의 20년 전의 기억이다 보니 많이 흐릿해진 모양이었지만 라이는 내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길가다가요.아니에요?]
"아냐!"
[전 그런 건 줄 알았는데요.]
왠지 라이 덕에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도대체가 이 녀석이랑 있으면 긴장감이 생기질 않는다니까.
그 특유의 뻔뻔함과 엉뚱한 구석 때문이 아닐까 싶다.
뭐,너무 긴장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말이다.
다시 시선을 '블러드 윙'의 본거지로 돌렸다.
녀석들의 본거지는 다가갈수록 더욱 넓어보였는데 웬만한 마을의 크기는 되지 싶었다.
게다가 족히 20미터는 넘어 보이는 무식한 높이를 자랑하는 철조망.
저 정도면 사람이든 이종족이든 가두는 데는 안성맞춤일 터였다.
"운다인,저 철조망 안쪽에 내려줘.저 맨 끝에 있는 건물 보이지?그쪽에."
[네,주인님.]
철조망 안쪽으로는 '블러드 윙'의 단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순찰을 도는 듯 규칙적으로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경계가 약해 보이는 건물을 짚어 그 쪽으로 날아갔다.
물론 순찰을 도는 경비조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말이다.
"수고했어,운다인.이만 돌아가렴."
[네,주인님.]
무사히 건물의 뒤쪽에 내려선 나는 운다인을 돌려보냈다.
될 수 있는 한 마나를 아껴야 했다.
(불쌍한 운다인...대사가 네,주인님 밖에 없어...)
물론 라이에게 잠재된 만가 넘치도록 있지만 그 마나를 내가 사용하기 위해서는 라이와 접촉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서 라이의 마나를 내게 끄집어 와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집중도는 명상할 때와 버금간다.
정신력도 마찬가지.
결국 급박한 상황에서는 쉽게 사용할 수 없는 마나였다.
게다가 라이에게서 끌어온 마나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 내 몸에 머물다가 금방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끌어온 즉시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라이에게 잠재된 마나를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은 라이가 그 마나를 쓰는 것이었다.
변신을 하든 힘을 쓰든.
"라이,내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네,마스터.이렇게 꼭 붙어 있을게요.]
말을 마친 라이가 몸을 더욱 꽉 말았다.
어디서? 내 갸냘픈 목에서.
"케엑!그,그마안......"
[아참,인간의 목은 급소였죠?]
"흐억!허억!너,너 지금 일부러 그랬지?"
잠시,아주 잠시 저 세상의 끝자락을 구경한 나는 목에 감겨 있던 라이를 황급히 풀어냈다.
소리를 지를 수는 없으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화를 내는 대신 라이의 목을 정말 잇는 힘을 다해 꽈아악 쥐었지만 녀석은 전혀 데미지를 받지 않는 듯 했다.
[에이,설마요.마스터가 죽으면 제 손해인걸요.]
자신의 꼬리를 살짝 꼬아 저우며 흡사 사람이 손사래 치는 듯한 포즈까지 취하는 여유도 보여주었다.
젠장,이 녀석 괴롭혀봤자 나만 손해라니까?
"됐다,됐어!내가 너랑 말을 말지."
[앗!사람이 와요,마스터!]
라이의 말에 나는 건물 옆에 쌓여 있던 상자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숨을 죽이고 있자니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겹치지 않은 걸로 예상하건대 상대는 한 명인 듯 했다.
나는 고민했다.
이대로 숨어 있을 것인지,아니면 일단 하나라도 더 상대를 제압해둘 것인지,그것도 아니면 보이는 족족 죽여 버릴까?
살인!순간 반짝 떠오른 생각.
에이니를 납치해가고 과거 나를 납치했던 그라크에 대한 원한이 잠시 나를 잔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뿐이었고 금세 지워졌다.
나는 인정이 많은 사람은 못 되었지만 썩 잔인한 인간도 못되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냥 숨어 있으려는데 이대로 숨어 있어봤자 에이니 찾기만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공에서 봤듯이 '블러드 윙'의 본거지는 매우 넓었으며 건물 또한 한두 체가 아니었다.
돌아다니느 경비대의 수도 적지 않았고.
그렇다면.....
뚜둑
[마,마스터?]
나는 마침 손에 잡히는 나무상자의 삐져나온 부분을 살짝 잡아 뜯었다.
제법 큰 소리가 났고 이 정도면 들었겠지 싶어서 기척을 살폈지만 상대는 듣지 못했는지 계속 걸어갔다.
뭐 저렇게 둔한 놈이 다 있어?
작게 혀를 찬 나는 나무 조각을 마저 잡아 뜯었다.
빠지직
나무 조각이 반쯤 뜯겨저 덜렁거렸다.
상대는 그제야 소리를 들은 듯 놀라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좋았어!
흡사 3류 연극 같은 상대의 반응에 난 만족스레 미소지었다.
나는 본래 도박을 즐기는 성경이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금의 모험심은 필요할 것 같았다.
[마스터,왜 그런 짓을?]
라이가 의아한 듯 물어왔고 나는 일단 미소를 지운 뒤두 손을 들고 상자더미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항복한다는 뜻으로 양손을 살며시 흔들었다.
무기는 없어요,라는 뜻이었다.
[가만히 있어야 해,라이.]
나를 발견한 녀석은 역시나 예상대로 바로 잡기보다는 내 인상착의를 확인하듯 한차례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보물찾기의 승자가 된 표정으로 다가와 내 팔목을 움켜쥐며 기쁜 듯 소리쳤다.
"찾았다!"
대사는 '잡았다!'가 아니라 '찾았다!' 였다.
그렇다는 건 역시 생각대로 그라크는 단원들에게 내가 침입할 것을 예고해놓은 게 분명했다.
역시나 제까짓 게 머리를 굴려봤자 내 손바닥 안이었다.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고,후훗.
우르릉
콰쾅
추적추적
번개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나는 이내 다시 미소 지었다.
비 오는 날이야말로 물의 정령을 부리기에 더없이 완벽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굵은 빗방울이 웃음 짓는 내 입매를 상대에게서 가려주었다.
검은 천에 의해 눈이 가려진 나는 뒤에서 떠미는 대로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외에도 손이 뒤로 묶이긴 했지만 그 이상의 제재는 없었다.
일부러 길을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라이가 주변 지형을 일러주고 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라이가 또 새로운 정보를 알려왔다.
[제일 큰 건물로 들어가는데요,마스터.]
곱슬곱슬한 풍성한 금발과 그 속에 숨어 있는 금색 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라이는 완벽하게 내 머리카락 속에 녹아들었다.
물론 녹아 있다는 건 아니다.
단지 적의 눈에 띄지 않을 뿐이었다.
건물 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듯 발소리가 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발끝에 무언가가 맞닿았다.
넘어가려고 발을 들었는데 다시 발 끝이 막혔다.
아마도 계단인 듯 했다.
[위로 올라가고 있지?몇 층인지 잘 봐둬.]
[네,마스터.]
꽤나 경사가 높은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는 건 라이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슬슬 안대도 익숙해진다고 생각할 쯤,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저기......정말로 저 여자 잡은 사람한테 대장이 포상금을 준대?"
"그래,그뿐이 아니야.포상휴가도 준다던걸."
저들끼린 속삭인답시고 하는 말 같은데 건물 안인 데다가 눈을 가렸기 때문인지 조금 집중하자 그들의 대화가 또렷이 들렸다.
게다가 나한테 안들린다고 해도 내게는 귀 좋은 라이가 있으니 마음 먹으면 못 들을 대화는 없었다.
"정말?이렇게 쉬운 일 때문에?혹시 잘못 잡은 것 아냐?나는 금발 여자라고만 들었단 말이야."
"아냐,저 여자가 맞아.금발에 푸른 눈.나는 오늘 아침에 직접 봤는걸!확실해."
역시 나를 발견한 것은 아침나절이었나보다.
그 순간 말고는 에이니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할 만한 시간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나를 잡으면 포상금에 포상휴가?
후우,그 녀석도 부하들 굴려 먹이느라 고생 좀 하는 모양이었다.
"호,그래?그렇다면 다행이지만.나는 잡으면서도 설마 했다니까.위에서는 조심하라고 했는데 막상 잡으니 별것 아니더라고."
"그래?나도 대장의 원수라기에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아,인질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그런가?그보다 내가 어제 술집에서 외상값 때문에 망신당한 얘기 해줬던가?"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 뒤로는 시답잖은 이야기가 이어졌고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관심을 거두고 계단을 오르는 데 집중했다.
[마스터!]
[응?]
[아까......왜 일부러 잡히신 거에요?]
잠자코 있던 라이가 끝내 궁금했는지 이유를 물어왔다.
사실 이유야 간단했다.
이 넓고 낯선 적지에서 혼자 에이니 찾아 삼만 리를 찍자니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에이니를 찾으려고.잡히면 녀석들이 알아서 에이니 앞으로 대려다줄 것 아냐.]
[엥?안 데려다주면요?]
물론 에이니에게 데려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라크의 앞으로는 데려다줄 터였고,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여딘가에 갇히는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결국 그라크는 반드시 내 앞에 나타날 터였다.
나에 대한 복수를 활활 불태우고 있는 녀석이니 말이다.
[안 데려다주면......그냥 그 자리에서 이 녀석들을 기절시켜버리고 다른 녀석한테 잡혀도 되고,여차하면 잠자코 기다려도 되고.]
[에이,그런 건 피가 안 튀잖아요.차라리 아까 잡히지 마시고 그 인간을 잡아서 꼬마 녀석이 어디 있는지 불으라고 고문하지 그러셨어요!]
[고문?너......고문해보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잇힝~마스터도 참......어쩜 그렇게 제 속을 잘 아세요?]
이 녀석도 참 웃기는 짬뽕이라니까.
그나저나 고문이라......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기도?
잠시 지금이라도 이 녀석들을 때려 눕히고 에이니의 행방을 물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몇 가지 단점이 떠올랐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고문한 녀석이 에이니가 어디 있는지 꼭 알라는 법도 없고.차라리 순순히 잡혀서 그라크의 앞으로 데려다주길 기다리는 게 나은걸.괜스레 녀석들을 자극하면 손해 보는 건 에이니일 테니 말이야.나도 괜히 힘 뺄 필요 없고.]
[그런 건가요?저는 고 꼬맹이 따위 어찌 되든 상관 없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한 달 넘게 같이 있었는데......이제 슬슬 정들 때도 되지 않았어?]
[전혀요.아!이상한 곳이 나왔는데요,마스터.]
라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계단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 같은 것이 미묘하게 내 신경을 건드렸다.
이게 뭐지?
[이상한 곳이라고?]
[네,층 전체가 감옥으로 나뉘어 있어요.그뿐 아니라 사방에 온통 이상한 그림,아니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데 무슨 마법진인지는 모르겠군요.흐음,한 가지 확실한 건 마법진이라는 것뿐입니다.그것도......꽤나 기분 나쁜 마법진이에요.]
이 이질감의 원인이 그 이상한 마법지 때문일까?
나는 가려진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나저나 감옥이 있는 곳으로 왔다는 건 바로 에이니나 그라크를 바로 만나게 해줄 생각이 없다는 건데......
아니,아직 감옥에 갇히는 게 확실한 것은 아니니 조금 더 두고 볼......
"자!들어가!"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