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71)

"킁,엣취!"

나는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들어 있는 조미료 세트와 기본적인 조리도구 몇 가지를 샀다.

그리고 무슨 색 통에 어떤 조미료가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미료 통의 입구에 코를 대 보았다.

그 결과 첫 번째 통의 정체는 후추였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소박한 짓거리엿다.

[후추내요,그쵸?]

"아후,못하겠다.라이 네가 해라."

[네잉?]

나는 조미료 세트를 라이에게 건넸다.

그리곤 덜그럭 덜그럭 요리 도구들을 정리했고 짐꾼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시 늑대로 변신한 라이의 등에 그것들을 동여맸다.

이미 반대쪽에는 각종 육포와 과일이 매달려 있었다.

물론 사탕도 한가득 구입했다.

"좋아!이제 필요한 물건은 대충 산 건가?"

[저......마스터,정말 냄새 맡아야 되나요?]

"농담이야 농담.됐으니까 이제 여관으로 돌아가자."

[그런데......이건 정말 제가 다 메고 가야 하는 건가요,마스터?]

쓸데없이 외관 따지길 좋아하는 라이가 역시나 당연한 질문을 해왔다.

"그럼 내가 들리?"

[흐흑,너무해요,마스터!저는 정령이지 짐꾼이 아니란 말이에요.흑흑,설마 저를 짐꾼으로 부리려고 계약하신 건 아니......]

"응?몰랐어?"

[띠리링.]

직접 효과음까지 내가면서 충격 받았다는 뜻을 내보이는 라이.

뭐 그게 다는 아니지만 부려먹으려고 계약한 건 사실이었다.

라이가 빤한 앙탈을 부리는 건 늘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런 라이를 외면했고,새로 구입한 옷 꾸러미는 직접 들었다.

점원의 추천을 받아 가죽으로 만들어진 여행복을 구입했다.

에이니가 항상 비슷비슷한 옷을 입는다는 것을 떠올리곤 에이니에게 줄 만한 옷도 몇 벌 샀다.

그래도 명색에 제잔데 거지꼴로 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은인의 따님이신데 받들어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함꼐 다녀야 하는데 미워하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나저나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혹시 빠뜨린 짐이 없나 확인한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상처받은 표정을 구사하는 라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만 놀고,가자 라이."

[네에~마스터.]

여관에 도착하는 것은 금세였다.

멀지 않은 거리였고 몇 번 왔다갔다 한 탓인지 이제 길이 그럭저럭 눈에 익었다.

문틈으로 1층 한가운데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는 로크스가 보였다.

왜 저러지?변 마려운가?

딸랑

문이 열리는 종소리에 로크스가 기다렸다는 듯 막 여관에 들어서는 나를 향해 다급히 다가왔다.

뭐야,뭐?

난 화장실이 어딘지 몰라!

"지니 씨!"

"왜요?"

볼일이 화장실은 아닌 듯 했지만 나는 로크스가 이리도 다급하게 나를 찾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제만 해도 그렇게 경계하더니 왜 이러지?

"아,아이가......!"

"아이?"

뭔 아이?나는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뭔데 이렇게 심각한 거지?

아이라면......에이니?

"에이니요,그 여자아이."

"에이니가 왜요?"

[꼬맹이?]

그의 입에서 에이니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가 나올 것을 직감한 나는 본능적으로 1층을 훑었다.

에이니가 없었따.

에쉬도,채드도!

"없어졌어요!아니,아니 웬 사내들이 몰아 닥쳐서는 아이만 데리고 도망갔어요!"

"뭐에요?그게 무슨 소리에요!왜 에이니를?"

[나,난 모르는 일이에요,마스터!]

로크스의 입에서 나온 소식은 최악이었다.

왠 납치?

납치는 나로도 충분한데!

"모르겠어요.단지......복수,복수를 하겠다고 했어요."

"복수?누가?나에게요?어떤 개자식이......"

나는 황급히 나에게 복수 운운할 만한 인간들을 떠올렸다.

있다면 그나마 레오 정도일까?

이제 겨우 사람 사는 도시에 들어왔건만,대체 무슨 원한이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있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지니지!

지니 크로웰이 아니란 말이다.

아카데미에 소식을 전한 것도 겨우 한 시간 전인데 그새 누가 지니 크로웰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쫓아온단 말인가?

"험악한 얼굴을 한 건장한 사내였어요.지금 채드랑 전하가 따라는 갔지만......!"

로크스는 많이 당황했는지 전하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따.

"특징은?그 남자 특장 같은 건 없어요?확실히 나에게 원한이 있대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남자......코가 없었어요!그리고......아,모자를 눌러 쓰기는 했지만 귀가 없는 것 같았어요!"

[앗,그라크!]

남자의 말에 라이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라크?뭔가 불쾌한 이름인 건 분명했다.

그보다 코가 없고 귀가 없는 사내라면?

"그 노예상 남매?"

[빙고!그거에요,마스터.]

젠장!그날 그 녀석들을 죽이지 못한 게 실수였다.

9년 전 그 날의 은인과 악당을 함께 만나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그보다......맙소사,에이니!

그의 이름은 그라크,노예출신으로 과거 자신의 주인을 때려 죽이고 노예문서를 불태워 스스로 평민이 된 남자.

물론 그런 그의 악행을 뒤에서 조종한 누이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도 그는 그 누이와 함께 온갖 나쁜 일은 일삼았다.

그들은 주인을 때려죽이고 자신들 외의 어린 노예들을 고드겨 노예상인에게 되팔았을 정도로 악랄했다.

그런 그들의 잔악함을 마음에 들어 한 노예상인은 그들을 자신의 밑으로 받아 들여 일을 주었다.

그 후 그들은 어린 나이에 어쩌면 천직이라 할 수 있는 노예상인이 되었다.

그라크의 누이는 빠른 눈치와 좋은 머리를 이용해 금세 노예상단의 간부자리에 올랐고,그라크는 그런 누이의 힘을 배경으로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대낮에 길에서 어린아이들을 납치하는 것은 일도 아닐 정도였다.

그에게 납치는 주어진 사명 같은 것이었고 공갈 협박 절도는 옵션에 불과했다.

"형님!저 여관입니다.안을 살펴보고 옵죠."

또한 어디서 쥐어터지고 돌아오는 바보 같은 조직원들의 뒤를 봐주는 취미도 있었다.

순전히 주먹질을 할 구실이 필요할 뿐이기도 했지만.

"그래,그 녀석은 지금 안에 있냐?"

조직원 둘이 뛰어가 여관 안을 들여다보고 돌아왔고 주먹과 발이 근질근질한 그라크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게......잘 모르겠습니다요.어제 그놈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거든요."

"뭐야?바보같긴!보복을 하려면 상대를 제대로 알아왔어야 할 것 아니야!"

퍽!

그라크는 신경질적으로 부하 조직원의 배를 정확히 발로 가격했다.

물론 그의 발길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복부를 맞고 쓰러진 조직원의 등이며 머리 허리를 짓밟았다.

그중에서도 귀를 밟아 짓이기는 것을 즐겼다.

물론 얼마 전까지는 코를 으깨는 취미도 있었지만 코는 한 번 으깨지면 낫기가 쉽지 않아 도려내기 십상이었고 그 덕에 코가 남아나는 조직원이 없었다.

결국 누이에게 한소리 듣고 말았다.

"크억!자,잘못......억!"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내가 손봐주기를 바라면 얼굴을 제대로 알아오란 말이야,얼굴을!네놈 귓구멍은 폼이냐?내가 아예 없애줄까?앙?"

그가 유난히 귀와 코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그라크는 양쪽 귀가 모두 없었고 코를 도려낸 그 얼굴은 흉하기가 견줄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코와 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멀쩡했던 귀는 뜯겨저나간 것이고 코는 으깨졌던 것이 낫지 않고 덧나는 바람에 도려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그런 귀와 코에 강한 콤플렉스를 느꼈다.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만든 상대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9년 전의 일이건만 그 상대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그는 매일 밤 그 원한을 되새겼다.

다시 만나면 기필코 죽이겠다는 원한을 독하게 새기고 있는 것이다.

"혀,형님!그 녀석은 안 보이지만 여관 안에 젊은 금발의 여자가 있습니다.얼굴도 기똥차던데요?"

한창 맞고 있는 조직원과 함께 여관 안을 들여다보고 온 다른 조직원의 말에 그라크는 귀가 솔깃한지 발길질을 멈췄다.

"금발?"

그라크는 유독 금발 여자아이를 보면 가만있지를 못했다.

금발의 소녀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납치해서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팔아야 성이 찼다.

금발이라면 굳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조직원이 그의 폭력을 막아볼 심산으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기도 했다.

"예,형님!게다가 눈도 파랗고요."

"금발에 푸른 눈깔?좋아,어디 가보지."

그라크는 밟고 있던 조직원을 골목 구석으로 차버리더니 성큼성큼 여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여관의 커다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쪽 카운터 바로 옆입니다,형님."

조직원의 말에 시선을 돌린 그라크의 눈에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보였다.

왠 덩치에게 안긴 은발의 여자아이와 이야기 하는 듯했는데 그 여자의 금발과 푸른 눈이 9년 전의 그 아이와 꼭 닮은 색이어서 그라크의 의욕을 더욱 부채질했다.

게다가 그가 기억하는 그 아이 특유의 뾰족한 눈매까지 꼭 닮아있었다.

"닮았어."

"예?그 원수와요?"

"그래,저 건방진 태도까지 똑같아!"

9년 전 그라크가 네이칼의 수도에서 노예상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마침 상품이 부족해서 거리를 배회하던 그라크는 특이하게도 흑발을 가진 남자아이를 발견했고 잘 됐다 싶어 냉큼 납치해왔다.

그리고 연이어 부하 조직원이 여자아이 둘을 납치해 와서 상품 량을 모두 채웠다.

별 고생도 하지 않고 세 명이나 잡아 들였으니 그날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유독 성깔 있어 보이던 금발 여자아이의 뺨을 때리기 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직후 갑자기 나타난 뱀 한마리가 그런 그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아마도 그 금발 여자아이의 뱀 같았는데 여자아이의 말 한마디에 날아든 뱀은 그의 코를 으깨놓았고 그의 목까지 분지를 기세였다.

누이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양쪽귀가 뜯기는 정도에서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그 여자아이들이 보통 아이들이 아니었는지 기사단이 들이닥치는 통에 누이는 가게를 잃고 간부의 자리까지 위협받아야 했다.

다행히 자리는 지켰지만 그는 누이와 함께 가장 힘들고 위험수위가 높은 코란의 지사로 이동했다.

엘란의 화려함과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던 그라크에게 이 촌구석 코란은 고문 그 자체였다.

"호,혹시 그때 그 원수 아닐까요?9년 전에 어린아이였으니 지금쯤이면 저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저건?"

여자를 주시하던 그라크의 시야에 여자의 금발을 뚫고 살짝 고개를 내미는 생명체가 보였다.

조금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번쩍이는 황금빛 비늘을 가진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뱀이었다.

"뱀 아닙니까,형님?왠 여자가 뱀을 두르고 다니......"

"그년......그년이야!저것도 그때 내 귀를 뗀 그 뱀이 분명해!"

색은 바뀌었지만 그 때 그 뱀이 분명했다.

왠지 코가 시큰해지는 듯 했고 귀가 뜯겨나간 자리가 욱신거려왔다.

보면 볼수록 여자의 얼굴은 과거 그 어린 소녀와 닮아있었다.

확신이 들자 그라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원수를 찾은 것에 대한 환희일까?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서 나오는 오열일까?

"그,그럼 어쩌죠?저 여자를 납치할까요,형님?"

"그래,당장 납......아니지,아니야!그것만으로는 안 돼."

당장에 여관 안으로 뛰어 들어갈 것 같던 그라크가 고개를 내저였다.

"예?그럼 어쩌시려고요,형님?얼른 잡지 않으면 놓치......앗!여자가 나옵......"

"쉿!"

그라크 또한 여자가 여관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그에 냉큼 조직원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 사이로 숨었다.

그리고 여자가 멀찍이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조용히 노려보아싿.

"혀,형님?"

"저 여자를 잡는 건 나중이다."

"예에?눈치 채고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시려고요?"

"미련하긴!그러니까 인질을 잡아야지!"

그라크는 다시금 9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자신이 어린 소녀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치욕스러운 사건을 말이다.

"인질이라면?"

"뻔하지.저 안에서 우리한테 가장 만만한 게 누구겠냐?"

"그야 은발의 어린아이......아!꿩 먹고 알 먹고입니까,형님?"

"옳거니,바로 그거야."

그라크가 딱딱하게 굳다 못해 뭉친 자신의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마침 일행 같으니 저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원수를 본거지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조직원들을 모아 제압한다.

그 후에는 잔인하게 복수!

그라크는 그런 자신의 계획을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약 한시간 뒤 여관에는 십여 명의 괴한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여관에 들이닥치기 무섭게 소란을 피웠다.

그 소란을 틈타 손쉽게 여자아이를 납치했다.

물론 그 괴한들은 그라크의 부하 조직원이었다.

그라크는 굳이 많은 인원을 들여 소녀를 납치하고 그 원수를 상대하기 위해 남은 조직원들을 모두 모아놓았다.

그라크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그의 복수심 밑바닥에 깔린 금발의 원수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4권에서 계속...

                                                 

                                                 

                                                 

                                                 

                                                 

  금발의 정령사 4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로크스가 놀라 되물었다.

"노,노예상이요?"

"그래요,노예상!나와는 악연으로 똘똘 뭉친 녀석들이죠.그보다 당신이 본 걸 모두 말해봐요.그 코 없는 녀석이 나에게 남긴 말 같은 건 없어요?"

나는 너석의 인상착의를 듣는 순간 확신했다.

에이니를 납치해간 너석은 그때의 그 녀석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보나마나 나한테 앙심을 품고 있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하고는 옳다구나 하고 만만한 에이니를 납치해간 것이 분명했다.

"있어요!그러니까......십여 명의 사내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소란을 피웠고,잠시 혼란스러워진 틈에 아이가 사라졌어요!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 해기 무섭게 사내들이 밖으로 도망쳤고 그 중 한명이 아리르 옆구리에 들쳐 업고 있는 걸 발견하곤 쫓으려는데 그 코 없는사내가 우릴 저지했어요!채드씨가 밀쳐내려는데 그,그가 '나를 건드리면 아이는 무사하지 못할 거다'라고......"

"그리고?"

"그리고......'금발계집에게 전해라.아이를 무사히 되찾고 싶다면 혼자 찾아와라.또한 그 날의 복수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내 코와 귀는 아직도 시큰거린다'라고......그 사내가 여관을 나선 뒤 전하와 채드 씨가 바로 쫓아나갔지만 아직 소식이 없어요.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너무 당황해서......"

[그 때 그 녀석이 분명해요.마스터!제가 놈의 귀를 뜯어냈잖아요.]

이미 생각을 굳힌 상태였지만 '코와 귀'를 운운한 시점에서 나는 녀석의 정체를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건 녀석을 찾아가 족치는 일이었다.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고요?어디로 찾아오라고 했죠?"

"에?"

"어디로 찾아오라고 했나고요?빨리 가야 될 것 아니에요!"

"그,그게 그러니까......"

로크스가 대답을 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내가 녀석의 말대로 혼자 찾아가려 하는 게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빤한 함정이었으니 말이다.

가서 된통 당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걱정일랑 말고 어서 말해 봐요!어디로 오라 그랬죠?"

"으음......"

[말 안해도 되는데.]

[닥쳐!]

에이니의 납치 소식을 은근히 즐기는 라이에게 으름장을 놓은 나는 답답하게 입을 열지 않는 로크스를 재촉했다.

나는 매우 조급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말해요!안 그러면 댁의 목 부터 분질러줄......"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사내는 장소를 말해주지 않았어요.아마도 그는 말하는 것을 잊은 모양이에요.그도 아니면 일부로 말해주지 않았거나."

"......하아?"

로크스의 대답에 나는 맥이 빠졌다.

보나마나 뻔하지!

말하는 걸 까먹은 것이 분명했다.

혼자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장소는 말해주지 않다니.

이것은 아이를 납치해놓고 전화해서 몸값을 주지 않으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몸값의 액수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는 얼간이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라리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협상이 편해질 테지만 녀석은 나에게 꽤나 원한이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돈으로 해결될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 녀석 같은 악당이 내가 간다고 순순히 에이니를 풀어줄리도 만무했다.

보나마나 나도 잡고 에이니도 잡겠다는 도둑놈심보일 터였다.

그 검은 속내야 빤한 것 아니겠는가?

"어,어쩌죠?이대로 그 사내를 찾이 못하면 아이는......"

"아뇨,찾을 수 있어요.흔적이 많으니까요."

"흔적이요?제가 보기에는 전혀......"

나는 분명 물건들은 정리가 되어 있지만 아직 부산스럽고 혼란스러운 공기를 미쳐 풀어내지 못한 여관 안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카운터 뒤에 숨어 떨고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서빙을 하던 그 소년이었다.

"이봐요!"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몸을 크게 움찔,떨었고 이내 고기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두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지간이 뒤집고 갔던 모양이다.

하긴 십여 명의 사내들이 들이닥쳐 소란을 피웠다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그 점이 오히려 좋은 단서게 되어주었지만.

"저,저말이세요?"

"그래요.당신.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죠?여관을 헤집고 에이니를 잡아간 녀석들의 정체를요."

십여 명이나 되는 사내로 구성된 무리를 끌고 나타났다는 점을 볼 때 녀석은 분명 이곳에서 왠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꽤나 폭력적이며 불법적인 세력을 말이다.

아마도 전과 같은 노예상단 정도일 터였다.

그리고 그런 유의악성 조직이라면 기피대상 1호일 테니 여관의 종업원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아니 모,몰라요!저는 그런 사람들 몰라요!"

대답할 것 같던 소년이 이내 겁에 질린 얼굴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그렇게나 언급하기도 꺼림칙한 존재인 걸까?

인상을 찡그린 채 주저앉은 소년을 내려다보는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했다.

녀석이 나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

에이니가 나와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을 알고 잡아간 것을 볼 때 분명 여관 내에서였다.

내가 성에 들어와 여관 밖에서 에이니와 마주한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나마 여관 안에서도 남들의 눈이있는 곳에서 나와 에이니가 마주한 것은 오늘 아침에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때 나를 발견했다는 건데......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결론은 아침나절에 에이니와 마주한 그 짧은 시간에 녀석이 나를 목격했을 거라는 것 정도였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이면 그 짧은 찰나에 나를 발견할 건 뭐람?

차라리 채드를 잡아갔다면 이렇게 걱정되진 않을텐데 말이야.

"정말 몰라요?늦으면 에이니가......내 제자가 죽을지도 몰라요.당신의 망설임으로 인해서요."

"아,아니 저,저는......"

"대답하세요.그들의 정체는?본거지는?"

소년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나는 잽싸게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그들은 악마에요.이 도시에서 제일 질이 나쁜 악당들이라고요!치안대도 피해가는 무시무시한......손님도 무사하지 못할 거에요!그리니 그 애는......포기하세요.이미 늦었어요!구할 수 없을 거라고요!"

"구하고 못 구하고는 내가 결정해요."

이상하게도 나는 분명 마음은 조급한데 머릿속은 비교적 차분했다.

훈련의 효과일까?

도통 입을 열지 못하는 소년을 닦달하는데 카운터 뒤쪽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콧등 위로 깊은 흉터가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채격이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그가 꺼낸 말은 내가 소년을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정말 지독한 악당들이요.그래도 가겠소?"

"물론이죠.에이니는 내 소중한 은인의 딸.이대로 그런 쓰레기의 손에 맡겨둘 순 없어요."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중년사내는 자신의 오른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의 가장 동쪽에 그들의 본거지가 있소.높은 천장이 감옥을 이루고 있는 곳이요."

"고마워요."

중년사내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여관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중년 사내의 경고가 잠시 내 발걸음을 잡았다.

"내 충고를 들어주시요!그들 무리의 수는 백여 명이 넘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잔악하고 흉포하오.그들 조직의 이름은 블러드윙,대륙에 악명 높은 인간사냥꾼들이오.아니,이곳 지부에서는 정글의 이종족들도 잡아들이니 더한 녀석들이라 할 수 있소.이종족을 상대하는 만큼 하나같이 실력이 굉장하고 적을 상대하는 데 노련한 자들이오.나 또한 그들의 손에 내 동생을 잃었고,이 아니는 아버지를 잃었소."

"삼촌......위험해요!저분을 말려주세요!저분도 아버지처럼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그런 건......그런 건 너무 슬프잖아요!흐윽......"

소년이 중년사내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울먹였다.

어제도 그렇고 조금 과하다 싶게 걱정한다 했더니 녀석들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모양이었다.

응?어제도?

나느 문득 '블러드 윙'이라는 단어에서 어제 있었던 소란을 상기해 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내에게 호되게 당하고 도망갔던 세 명의 사내!

어제 소년은 분명 그들을 '블러드 윙'이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왜 이런 유치한 복수극의 중심에 서 있어야하는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의 그 세 녀석이 복수를 한답시고 지원군을 불러왔을테고 그 지원군이 아마도 그 녀석......

[라이,그 녀석 이름이 뭐랬지?]

[그라크요?]

그래,그라크였던 모양이다.

정말이지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생각이 그쯤 이르니 그 검은 피부의 사내에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에이니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나는 서둘러 여관을 나섰다.

거리 주변으로 꽉 들어찬 건물들이 보였다.

이 복잡하고 미로 같은 도시에서 길을 따라 곧게 동쪽 끝을 찾아가리른 무리였다.

잠시 주변을 살핀 나는 인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라이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라이,뱀으로 돌아가.그리고 운다인!"

라이는 눈 깜짝할 새에 작고 가느다란 뱀으로 화했다.

그런 리이를 한 손에 말아쥐는 순간,소환된 운다인이 유려한 몸짓으로 내 앞을 흘러 지나갔다.

[부르셨나요,주인님?]

운다인에게 인사할 여유가 없었던 나는 우선 운다인의 등에 서둘러 올라탔다.

나름 중요한 전력인 라이를 꼭 쥐고 말이다.

"운다인,높이 날아서 나를 이 도시의 동쪽으로 데려다 줘."

[예,주인님.]

운다인이 막 2층 높이쯤 떠올랐을까?

여관에서 로크스가 다급히 뛰어나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휘날리는 금발을 적당히 모아 쥐던 나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불렀다.

"지,지니 씨!"

"에이니를 찾아올게요!짐을 부탁해요!"

늑대의 모습으로 짐을 짊어지고 있던 라이가 뱀으로 변신하면서 메고 있던 물건들이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졌고,나는 그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걸까?

로크스는 의문과 놀람,경악이 뒤범벅된 표정으로 마치 운다인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운다인은 높이 떠올라 있었고 마을의 동쪽으로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한 참이었다.

"네?이봐요!지니씨이!"

로크스의 목소리는 금세 아련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