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71)

[마스터,마스터.]

어느새 어깨에까지 기어 올라온 라이가 보였다.

역시 라이는 뱀이 가장 잘 어울렷다.

전과 달리 드래곤 하트의 연향을 받아 황금색을 띠고는 있니만 마음만 먹으면 색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딱히 바꿀 이유가 없으니 보류하고는 있지만.

[응?왔네.]

[넵,근데 재미있다는 게 저건가요?뭐하는 거에요?영역다툼?]

영역다툼과는 다르지만 서로 기세 싸움을 한다는 점에서는 조금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음,글쎄.비슷하지 않을까?]

[호오,저도 영역다툼이라면 일가견이 있는데 말이에요.싸우는 뱀마다 골로 보내는 게 특기거든요.푸헤헤헷!드리케 아카데미 주변 땅은 모두 제 영역이라고요,마스터!장하지 않습니까?]

[전혀......]

진짜 뱀도 아닌 주제에 뱀이랑 영역싸움을 했단 말이야?

너도 참 할 일 더럽게 없구나,라이.

[흐잉?벼,별로입니까?그럼 좀 더 땅을 넓혀서 뒷산까지 접수할까요?네?마스터?]

[닥쳐!]

아,그 녀석 시끄럽기는......

잠시 라이와 투닥거리는 사이에 깡패 녀석은 반쯤 숨이 넘어가 있었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데,아무도 안 말리나?

말리긴 말려야겠는데 직접 나서기는 싫었던 나는 주변을 훑었고,마침 일어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에쉬의 모습이 보였다.

보아 하니 곁에 있는 로크스가 에쉬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지하는 모양이었다.

흐음,저렇게 잡혀 살면 안 되는데.

뭐,나 같아도 말리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사내가 깡패를 내던지는 것이 보였다.

2미터 정도 날아가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는 눈이 뒤집히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정말 더도 말고 5초 정도만 더 목을 졸랐으면 죽었을지도 모를 상태였다.

"괘,괜찮나?정신 차려!"

"이봐,콜깝?"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깡패일행이 정신을 잃은 동료를 흔들었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께가 들쑥날쑥하는 걸 보니 멀쩡하게 살아 있는 듯 했다.

그나저나 이름 참 뭣 같네.

콜깝이 뭐니 콜깝이......꼴깝도 아니고.

"꺼져!"

검은 후드의 사내가 장승처럼 서서 말했는데 그 모습이 제법 소름끼쳤다.

저 특이한 기운은......

대체 뭐지?

검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정령사는 더더욱 아닌데?

어떤 훈련을 하면 저런 기운이 나오는 걸까?

오랜 아카데미 생활이 나로 하여금 호기심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이것도 병이군,병이야.

"두,두고 보자!"

무질서하지만 저 사내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리 없는 기운.

그가 나서기 전까지 사내의 존새를 몰랐다는 점과 저 넘치는 살의는......암살자?

나는 문득 떠올린 생각에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암살자가 왜 저기에 있겠어?

그것도 스스로 드러낼 리는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암살자가 저렇게나 무질서한 기운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다듬어진 기운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정말 암살자라면 저렇게 쉽게 상대를 살려 보낼 리도 없겠지.

검은 후드의 사내는 깡패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반쯤 얼이 빠져 있던 소년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소,손님!도망가세요!"

"......"

"저자들은 이 일대를 주름잡는 '블러드 윙'의 단원이라구요! 악명 높은 자들이에요!"

소년은 그를 매우 걱정하는 듯했는데 검은 후드의 사내는 오히려 귀찮다는 듯 소년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하긴,저런 타입은 겁이 없지.

"......상관 마라."

"손님......!"

소년은 애가 탄 듯 울먹였고 후드의 사내는 깡패들이 도망치듯 빠져나간 여관의 문을 잠시 바라보더니 마치 그들을 쫓듯 여관을 나섰다.

아니,정말 쫓아간 건가?

잠시 뜸을 드리고 나갔다는 것을 볼 때 몰래 쫓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꺼지라고 해놓고 쫓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검은 피부를 가진 사내의 행동.

사는 사내가 앉아 있던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탁 위를 채운 것은 크고 작은 과일 뿐.

하는 짓과 달리 채식 주의자인가?

잠시 사내가 있던 자리를 주시한 나는 이내 그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정체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알게 될 일 같으면 언젠가 알게 될 터였다.

오늘 에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근데 마스터,꼬맹이는요?]

[걔?위에서 잔대.]

[호오!아예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마스터.]

얌마,그건 죽는 거잖아.

정말이지 라이는 에이니를 싫어해도 너무 싫어한다.

라이를 마주보던 나는 문득 없어진 물건 하나를 떠올렸다.

[꽃바구니는?]

[꺼억!]

너는 꽃도 금속으로 쳐주니?

[맞는다.]

[제,제 잘못 아니에요,뭐.마구간에 있던 말들이 멋대로 먹어치웠단 말이에요!]

라이가 한껏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내 머릿속에는 누렁이의 모습을 한 라이가 억지로 말의 입을 벌려 꽃을 쑤셔 넣는 요상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쪽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리라.

말이 한 일주일 굶지 않고서야 꽃을 먹을 리는 없지 않은가?

중간에 명상을 위해 일어난 것을 제외하면 오랜만에,정말로 오랜만에 단잠을 잔 나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 쯤 눈을 떴다.

솔직히 말하면 더 잘 수도 있었지만 배가 고파서 그런지 눈이 떠지고 말았다.

산발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어젯밤 옆 침대로 옮겨놓은 에이니를 찾아 눈을 돌렸는데 침대 위에 에이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아침에 명상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빈 에이니의 침대 위에는 다만 누렁이로 변신한 라이가 허연 배를 뒤집은 채 보기 흉하게 누워 있었다.

흡사 삻은 개구리 같은 모양새였다.

잠도 안 자는 녀석이 침대 위에서 뭐하는 거야?

"너 뭐하니?"

[마스터 흉내요.]

"......흐흠,근데 에이니는?"

[아침에 나가던데요.]

이 계집애가 말도 없이 나갔단 말이야?

괘씸하긴!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나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우선 에이니한테 돈 주머니를 압수해야겠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라이에게 밷게 하는 건 번거롭기도 하고 주변 시선이 신경쓰이기도 하니 말이다.

에이니에게는 정령석을 넣을 주머니를 따로 사주면 될 테고.

그래,주머니를 사는 김에 여행하는 데 필요한 옷가지와 물건들도 사야겠다.

지도랑 나침반,그리고 식료품도 말이다.

야예먹을 건 마차 째로 사는 게 어떨까?

굶주림이 달갑지 않은 나로서는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물론 물건을 구입하기 전에 마탑으로 가서 통신부터 해야겠지.

자친 '혹시 유령이세요?'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니.

"이리 와,라이."

머릿속을 정리하는동안 나는 적당히 머리를 땋아 뒤로 넘겼다.

슬데없이 긴 이 번개 맞은 곱슬머리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미아와 이루제를 포함해서 선생들까지 기를 쓰고 말려서 손을 못 대고 있지만 말이다.

물론 제일 시끄러운 것은 브라이트였다.

어라?그러고 보니 지금은 말릴 사람도 없는데......

쓰읍,이참에 잘라버릴까?

[마스터?]

"응?"

[오라면서요?어디가시게요?]

"아아,마탑에 좀."

외출하는데 굳이 라이 녀석을 데려갈 필요야 없었지만 녀석은 혼자 두면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정령이니 일단 챙겨야 했다.

모처럼 함께 가자는 내 말에 라이가 한껏 꼬리를 흔들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데려가주시는건가요,마스터?그,그럼 무늬는 어떻게 하죠?표범 무늬로 할까요?]

"왠 표범?"

[모처럼 마스터랑 외출하는데 멋을 내야죠!]

잠시,아주 잠시 이렇게나 들떠 하는 라이의 태도에 내가 그동안 라이에게 박하긴 박했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이 바보가 진정 내 정령인가,하는 나에 대한 안쓰러움이 겹쳤다.

왠지 마기를 자식으로 둔 아덜레이드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능력은 쓸 만한데 하는 짓이 멍청하다는 점에서 마기와 라이는 닮았던 것이다.

"도롱뇽이 뿔 단다고 드래곤 되는 줄 알아?그냥 뱀으로 변신이나 해."

[니에에에.]

1층으로 내려오니 채드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에이니가 보였다.

발그레한 얼굴로 방긋 웃고 있는 모양이 영 낯설기만 했다.

나랑은 눈도 안 마주치는 주제에 채드 녀석한테는 방실방실 웃어 보인단 말이야.

"에이니!"

그런 에이니가 괘씸하고 섭섭했기 때문일까.

에이니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상당히 뾰족했다.

내 스스로가 다 민망할 정도로.

그런 나의 부름에 에이니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바짝 긴장한 표정!뭐야,그 차이는?

"왜,왜요?"

에이니가 더듬더듬 입을 말했는데 누가 봐도 내가 불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제 처음 본 채드랑은 무릎 위에 앉아 수다를 떨 정도고,보름을 가까이 지낸 나는 말을 더듬거릴 정도로 불편하다 이거야?

"......아침 명상은?"

"......"

"안 한거야?너 나한테 배울 마음은 있는 거니?"

왜 에이니는 좀 더,좀 더 정령술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 걸까.

왜 나보다 채드 녀석에게 더 친하게 구는 걸까.

도통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이제 하려고 했어요."

"이제?해가 중쳔인데?누구는 바보라서 자다 말고 새벽에 일어나 명상 하는 줄 아니?"

아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나는 에이니에게 새벽보다는 아침에 명상할 것을 권했다.

어린 탓인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하기도 했고,아직 마나를 잘 다루지 못했기에 명상 타임은 그다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이왕이면 아침에 명상하는 버릇을 들여놓으려 했건만,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아침에 칼질은 하던데요,마스터.]

[고자질하는 네가 더 나빠.]

에이니는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라이는 화를 한 층 더 돋우었다.

체드에게 다가간 나는 에이니를 끌어내리려 했다.

"이리 와,에이......응?"

하지만 그런 내 손길을 채드가 제지했다.

가까이서 봤기 때문일까,그의 외모는 더욱 켄타와 닮아 보였다.

에이니가 이 녀석을 따르는 이유는 혹시 그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봐,애를 너무 혹사시키는 것 아냐?이 나이 때의 애들은 모름지기 한창 놀아야 한다고!"

"그건 평범한 애들이나 그런 거죠.에이니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에요.놀리기에는 아까운 아이라구요!그리고 내가 언제 이 녀석을 혹사시켰다는 거죠?댁이 봤어요?"

부글부글 속이 끓다 못해 증발해버릴 것 같았다.

누가 보면 내가 엄청 괴롭히는 줄 알겠네!

나는 에이니와 같은 8살 때 이미 고대어 책을 읽기 시작했고 매일같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복잡한 이론 수업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점을 떠올린다면 지금 내가 가르치는 건 교육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보진 못했지만 아이에게 힘든 것은 분명하지.뭘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조금 더 나이가 든 다음에 배워도 되잖아."

"그런 거?지금 나랑 장난하니?그리고,너 나 알아?왜 반말이야?"

내가 표정을 굳히며 싸늘하게 말했지만 녀석은 뇌 속까지 근육이 들어찬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심드렁한 얼굴로 내 말을 받아쳤다.

"사소한 데에는 신경 끄자고."

"그러는 댁이나 남의 일에 신경 끄시지?"

"흐잉,싸우지 마요.왜 아저씨 괴롭혀?"

나와 채드의 가운데에 껴 있던 에이니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야!그리고 말은 바로해!내가 언제 괴롭혔어?

으윽,이 골치 아픈 꼬맹이 같으니라고......

"어이쿠!울지 마,울지 마.뚝!여기 이 사탕 먹을래?"

채드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사탕 하나를 에이니의 소넹 쥐어 주며 달랬다.

생긴 거랑 안어울리게 애는 잘 보는 모양이었다.

끝없이 눈물을 쏟아낼 것 같던 에이니도 채드가 쥐어주는 사탕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참아냈다.

장보기 목록에 사탕을 추가해야겠군.

"일단 가자.에이니,따라와."

[에엑!단 둘이 가는 것 아니었어요,마스터?흐윽,실망이야!]

라이가 시끄럽게 종알댔고 한 손에는 사탕을 꼭 쥐고 한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에이니는 그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으......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왜?"

"채드 아저씨랑 있을래요.아,명사옫 하고 있을게요."

그다지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굳이 에이니를 데려가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선선히 허락했다.

"좋아,대신 명상은 꼭 해야 해.그리고 채드 씨,에이니를 부탁해도 될까?"

이미 채드에 대한 존댓말을 저 멀리 집어던진 나였고,채드 또한 내 말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든지......애 보기는 좋아하니까."

"흠,근데......다른 일행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는 채드에게 나는 슬쩍 에쉬의 행방을 물었다.

1층 어디를 둘러봐도 에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모르는 척하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에쉬에게 정체를 밝히고 한껏 반가움을 표하고 싶었다.

"누구?에쉬와 로크스 말이야?녀석들이라면 무기상점에 간다는 것 같던데."

"흐흥,근데 그쪽은 댁을 표함해서 일행이 세 명뿐이야?"

나는 에쉬에게 수행원을 제외하면 가디언으로 보이는 건 채드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시험의 길에 오른 지 얼마나 됐느지는 몰라도 겨우 한 명 모은 건가?

가니언은 다섯 명 이상 모아야 하는데 말이야.

"아아,아니 두 명이 더 있는데 녀석을은 다음 도시에서 합류할 거야."

"그래?그럼 다행......아니,아무튼 에이니 잘 부탁할게."

"아아,걱정 말라고."

근육이 똘똘 뭉친 자신의 가슴팍을 치며 채드가 맡겨두라는 듯 말했는데 나는 왠지 그런 채드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얼른 가요,마스터!]

얼핏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라이의 재촉도 있었기에 나는 단순히 채드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여관을 나섰다.

별일이야 있겠어?

사바에 빼곡히 책이 들어차 있는 이곳은 드리케 아카데미의 학장실.

당연히 그 중심에서 한 뼘 가까이 쌓인 서류를 처리하느라 부산스러운 이는 드레카 아카데미의 학장 라일 후작이었다.

때는 나른한 오후였고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펜을 굴리는 소리만 들리는 학장실의 문을 누군가 조심스레 두드렸다.

"들어와요."

마침 들려온 노크소리에 학장을 잘 되었다는 듯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센 머리와 눈가의 자잘한 주름이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을 열고 학장실에 들어선 조교는 오늘따라 평소의 침착함을 발휘하지 못했고 왠지 부산스러워 보였다.

"하,학장님!큰일......아니지,아니 그,그게 그러니까 그......!"

"아니,자네 왜 그러나?"

"그래!일단 통신방으로 가시지요.통신이 들어왔습니다."

"통신?누구에게?"

말을 잇지 못하던 조교가 겨우겨우 꺼낸 말은 통신이 들어왔다는 것이었고,종잡을 수 없는 조교의 행동에 학장이 의아한 듯 되물었따.

"그러니까,크......크로웰 양에게......"

"크로웰?그게 누......뭐,뭣이?크로웰?지니 크로웰 말인가?"

쿠당탕

조용하던 학장실에 요란스레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학장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팔락팔락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몇 장이 그 바람에 흩어졌다.

하지만 학장도 조교도 그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학장은 조교의 말에 어찌나 놀랐는지 눈을 너무 크게 뜨는 바람에 외알 안경이 눈에서 떨어졌다.

학장의 눈에서 떨어진 외알 안경이 가슴께에 연결된 고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따로 놀았다.

"네,네!그 지니 크로웰 양입니다."

"정말 그......?"

학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 조교가 울상을 짓더니 울먹이듯 말했다.

"저,저도 사실여부는 모르겠습니다.하지만 금발에 푸른 눈이고 본인을 지니 크로웰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허어,이게 무슨......?아니,이럴 때가 아니지!일단 가세!일단 가!"

학장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책상과 넘어진 의자 사이를 나오면서 의자가 발에 걸리자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걷어 차버리는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산스레 방을 나서는 학작의 뒤로 결제해둔 서류와 미결제 서류들이 뒤섞이며 학장실 안 가득 흩날렸지만 학장에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이와 지켜온 품위에 맞지 않게 바삐 뛰어야 했다.

학장은 숨이 턱에 차오를 때쯤 통신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쾅!

학장이 거친 손길로 통신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통신구슬을 연결시키고 있던 학생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헉!하,학장님?"

"지니!지니 크로웰은?"

학장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통신구슬부터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통신구슬에서는 아무런 모습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방금 전까지 통신을 했다는 표시인 양 약간의 열기를 뿜고 있을 뿐이었다.

"저......그게,방금 전에 막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씀을 남기시고는 통신을 끊으셨는데요."

학생의 말에 바삐 달려온 학장이나 조교나 멍한 얼굴로 이미 끊긴 통신구슬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둘의 모습이 당황스러운 듯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학생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작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그리고 그 전에는 '아직 장례식은 안 치렀겠죠?건강히 살아 있으니 걱정 말라.그리고 집에 통신이 안 되는데 대신 연락 좀 해달라'는 말씀도......"

학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학장과 조교가 부족해도 단단히 부족하다는 듯 강렬하게 갈구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저,저한테 이러셔도......"

"녹화는?"

"네?"

얼빠진 학생의 되물음에 학장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조를 듯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녹화는 안 했나?"

"죄송합니다.갑자기 통신이 온 터라......아참,통신이 온 곳이 미엘타이긴 한데요."

"미엘타라면 코란의......?"

"예,이게 코드번호입니다."

학장은 그가 내미는 종이쪽지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물었다.

"정말 지니 크로웰이 확실했나?"

"일단 금발이긴 했는데요.그리고 푸른 눈.아!특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깨 뒤로 뱀 같은 것이 고개를 들어 보이긴 했......"

"그거다!바로 그거야!햄프!당장 전하에게 알현을 신청해주게!그리고 자네!자네는 크로웰 양의 본가에 연락을 취해보도록!"

햄프는 조교의 이름이었다.

햄프는 학장의 지시에 당장에 통신방을 뛰쳐나갔다.

학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래곤에게 잡혀갔던 지니 크로웰의 희생소식!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어떻게 살아있느냐는 차치하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현재 대륙에서 그 넘치는 희생정신으로 희생의 여신 이나이스의 사자가 아니냐는 칭송의 대상이 바로 그녀다.

황제를 지키고,국왕을지키고,드래곤의 손에 잡혀간 그녀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대륙 전체에 그녀를 주제로 한 노래며 시,이야기가 난무하고 있었고 만약 그런 그녀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녀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신앙거리가 될 지도 몰랐다.

드미트리에 대륙에 강한 입김을 작용하게 될 지도 모를존재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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