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71)

금발의 원수

잠시 뒤 소년이 돌아왔다.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식사를 기다릴 겸 그 사내들을 기다릴 겸 계단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앉아 다시 한 번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뭐랄까,새삼 느끼는 부분이지만 이곳은 내가 과거에 알고 있던 중세의 유럽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집을 짓는 양식이라든가 왕권군주제,계급제가 그러했다.

마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만 말이다.

때마침 수프가 먼저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본래의 나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아덜레이드와의 일로 일단 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지금 내 앞에 수프를 내려준 신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소년이 테이블을 떠나기 무섭게 나무를 다듬어 만든 수푼을 부러질 듯 잡아 쥐고 허겁지겁 수프를 퍼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접시를 입에 가져다대고 후르르륵 시원하게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지난 십여 년간 쌓아온 나름의 품위가 있는지라 최소한 접시를 테이블에서 떼지는 않았다.

애초에 허겁지겁 먹는다는 것 자체가 예의에서 어긋난다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곳에는 이런 나의 행동을 지적할 선생이나 아카데미 동기도 없었다.

"거참,무식하게도 퍼먹네."

텁!

때마침 수프에 들어 있던 큼직한 감자조각을 들어 입 안에 넣은 차라 나는 우선 그대로 감자를 오물오물 씹었다.

입은 감자를 씹고 눈은 나를 지적한 녀석을 쳐다보았다.

일행으로 보이는 커다란 덩치 하나와 평범하다 못해 심심한 생김새를 한 두명의 남자.

녀석들이었다.

그래고 내 식사법을 비난한 녀석은 역시나 덩치,채드였다.

이름을 외운 순간 넌 이미 찍혔어!

"채드라고......했던가요?"

내 늘어지는 말투 속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더욱 염장을 질렀다.

"내,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당신 스토커였어?"

".....뱀 뻥 튀기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네 녀석 스토커를 하느니 차라리 미친년을 하겠다,이놈아!

나름 높임말을 쓰던 나였지만 이쯤 되니 말이 좋게 나갈 리 없었다.

채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곁에 있는 일행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헉!지금,지금 너희도 들었지?저 여자가 나한테 욕 하는 거."

"에휴......"

"휴우......"

아마도 라이 밑에 깔린 일이라든가 칼을 망가뜨린 일이라든가 나에게 사과했던 일이 꽤나 억울했던 모양이지만 채드의 일행은 그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약속이나 한 듯 채드의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있는 일인 모양이다.

나로 치면 라이 정도 되는 문제아로군.

슬쩍 그들의 사이에서 에이니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에이니는요?"

"예?아,그 아이라면 방에 잠들어있습니다.꽤나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평범한 두 명의 사내 중 안경을 낀 사내가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일단 작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래요?무리한 부탁이었는데......에이니를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같은 여행자끼리 서로 도와야지요.참,제 이름은 로크스입니다.보잘 것 없는 여행잡니다."

옆에서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채드는 보이지 않는지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신세를 진 입장이었기에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지니에요.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섣불리 크로웰이라는 성을 대지 않은 건 자칫 귀찮아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일단 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귀족이라는 증거였고 지금 같이 혼자인 경우에는 믿어줄지도 의문이지만 돈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 꼬일 지도 몰랐다.

"그러시군요.실례지만 고향이......?"

"드미트리,드미트리의 크로웰 영지에요."

"드미트리라면 채드와 같으시군요?이거 인연인데요?"

으윽,하필 저 덩치랑?

"아앙,저런 몰상식한 여자랑?"

"흥,누가 할 소릴?"

저게 계속 성질 건드리네?

같은 드미트리 출신이라고 예뻐해줄지 알아?

물기를 쪽 빼서 말린 곰포를 만들어줄까 보다!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가는데 녀석이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세등등하게 싸움이라도 걸 태세로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여자가?어디 한판 붙어......"

"그만해,채드!"

몇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라이를 부르거나 운디네를 소환하려던 나는 일행의 제지에 채드가 멈춰서자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고,저런 녀석은 한 번 제대로 밟아줘야 하는 건데.

"말리지 마,에쉬!저런 여자는 한 번 호되게 혼쭐을 내줘야 한다고!"

왠지 나랑 생각이 비슷한 걸.

같은 드미트리 출신이라 그런가?

채드가 이를 갈며 자신을 제지하는 일행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채드에게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채드를 다시 질질 끌며 뒤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름이 에쉬라고?

"진정해,진정!넌 그 다혈질이 문제야,채드."

"으윽!"

에쉬라 불린 사내는 정말이지 너무도 평범해서 길가다 백 명 쯤 봤을 법한 얼굴이었다.

나중에 다시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의 소유자.

하지만 평범하다 못해 심심한 그 얼굴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가 예민한 건가?

녀석과 이름이 같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눈을 떼려는데 문득 채드를 막아내는 그의 손등에서 작은 상처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 상처에 시선을 집중했다.

오래된 듯 붉은 기는 없었지만 피부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고,무언가에 관통된 듯한 상처였다.

그래,마치 검 같은 것에......검?

"......저 사람 이름이 에쉬에요?"

나는 손가락으로 채드를 타이르고 있는 그를 가리키며 로크스에게 물었다.

잠시 로크스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그들에게 머무는가 싶더니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왜요?관심 있으세요?"

"네,보기와 달리 근력도 세보이고 자세히 보면 근육도 잘 발달되어 있는걸요.오랫동안 무술 훈련한 사람인 것 같아서요.그것도 아주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말이에요.덩치만 큰 체드씨보단 오히려 강한 무력의 소유자인 것 같아요.게다가 평민도 아닌 것 같고.제말이 맞죠?"

"그,그걸 어떻게......?"

로크스는 내가 순순히 그에게 관심을 표하자마자 그에 대한 분석을 내린 것이 꽤나 놀라운 모양이었다.

내가 저 에쉬를 엘란의 제 2황자 에쉬가 아닐까하고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면 더 놀라겠지?"

"말씀드렸잖아요.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고 걷는 모양이나 서 있는 자세가 안정적인걸요.척 보면 알죠."

"대단하시네요.그런 쪽으로 자세히 알고 계시나봐요?"

"조금요.일단 기사의 나라라는 드미트리 출신인걸요."

"보통 출신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는 댁은 조사원 출신인가?

나는 순간 나를 꿰뚫어보려는 듯한 로크스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나와 동급의,어쩌면 나 이상의 교육을 받은 녀석 같았다.

그래,황자의 수행원으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그런 지식인이었다.

경계하는 태도와 한눈에 사람을 꿰뚫어보려는 태도만으로 나는 충분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역시 그런건가?

정말 너인 거야,에쉬?

다시 에쉬에게 눈을 돌려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보았다.

내 눈길을 느낀 것인지 문득 헤쉬가 나를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보통의 얼굴.

뭐라 표현하기도 민밍할 정도로 개성 없는 그 얼굴에서는 내가 기억하는 흑발에 금안을 가진 귀여운 소년의 자취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분명 얼굴을 바꾸고 시험의 길을 치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들어맞는다.

저 녀석이 정말 에쉬라면 이 로크스라는 녀석은 수행원일테고,저 덩치는 가디언 중 하나?

"무슨......?"

에쉬가 두 눈을 끔뻑이며 의문을 표했다.

아무래도 너무 빤히 바라본 모양이었다.

"아뇨,제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은 것 같아서요."

"아아,그런 말 많이 듣죠.아무래도 인상이 너무 흔하죠?"

"천만에요.그보다 소개가 늦었네요.제 이름은 지니에요."

나는 내가 내린 결론에 확신을 갖기 위해 우선 에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먼저 악수를 청했다.

"에쉬입니다.잘 부탁드립니다."

마침내 그와 손을 마주잡은 순간 나는 새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내가 알고 있는 에쉬라는 사실을.마주잡은 손바닥에 느껴지는 상처가 그랬고,손등까지 관통된 상처가 그러했다.

쓸데없이 선한 눈빛까지.

아는 척 해볼까,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일단은 그들의 연극에 동참하기로 했다.

대신 '정말 너구나!반가워,에쉬.9년 만이지?'하는 인사를 속으로 작게 건넸다.

겉으로는 웃음 지었을 뿐이었지만.

"손에 상처가 있으시네요?"

"예,꽤 오래된 상처죠."

"관통된 상처같은데......어쩌시다가?"

"글쎄요.날아오는 단검을 막으려다 뚫렸다고 하면......바보 같다고 하시겠죠?하핫."

에쉬는 손을 휘저어 보이며 뭔가 막는 시늉을 했는데 아무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하긴,그는 내 얼굴을 딱 한 번 봤을 뿐이니 기억나지 않을 법도 했다.

납치 당시 방 안에서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을 테고,구출된 후의 에쉬는 기절 중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로베닌 녀석이 나를 잊었을 때와 달리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게 원수와 은인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아뇨,사실이라면 대단한 일을 하신 거에요.그런데 검은 왜 잡으신 거죠?위험한데 말이에요."

"글쎄요.그땐 단지 내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그래......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요."

"뭘......?"

"은인을요."

내가 너에게는 은인인거니,에쉬?

너는 나에게 은인인데 말이야.

사실 나는 순수하게 에쉬를 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에쉬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을 때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서 울기도 했다.

나름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보기 위해 만나려고 했지만 허사였고.

토너먼트에서는 로베닌에게 졌고 천주년기념 파티에서는 에쉬가 부재중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허무하게 만나버렸으니 정말 우스웠닫.

다시 에쉬에게 말을 걸려는데 로크스가 훼방을 놓았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수상해 보였는지 나를 보는 로크스의 눈빛에는 그새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실례지만 잠시만요.나 좀 보자,에쉬."

"음?무슨......"

"어서!"

에쉬가 의아한 얼굴로 로크스의 손에 끌려 계단을 올라갔다.

뭐지? 왠지 모양새가 내 이야기가 오갈 것 같은데 말이야.

누구에게나 이런 식의 상황은 썩 기분이 좋지 못할 거다.

고로 나는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들어봐야겠다.

나는 구석에 방치된 채드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그가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원래 식사를 하던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라이!]

마구간에 넣어달라고 했으니 멀어봐야 100미터 안에 있을 터였고 그 정도면 내 목소리가 충분히 들리고도 남을테지만 라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삐졌다,이거지?

감고 있던 눈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사실 눈은 감지 않아도 되자만 보다 선명한 대화를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하는 편이 좋았다.

[라이!정말 마구간에서 자고 싶지 않다면 당장 대답하는 게 좋을걸.]

[흑흑,여기 냄새나요.마스터!불결해요,허으윽.]

정말이지 웃기는 녀석이다.

고통은 모르는 녀석이 후각은 멀쩡한 걸 보니.

하긴 시각과 청각이 멀쩡한데 후각만 없는 것도 이상하겠다.

문제는 그 후각이 정작 중요할 때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만.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뱀으로 변신해서 여관 2층으로 올라가.]

[뱀이요?왜요?]

[그럼 쥐로 하든가.가면 속닥거리고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이 있을 거야.그들의 대화를 듣고 모조리 나에게 전해줘.어서!]

[니에에에.]

라이에게 명령을 끝낸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고기 특유의 진한 냄새가 풍기나 싶더니 카운터를 보던 소년이 스테이크를 대왔다.

"식사 나왔습니다.맛있게 드세요."

"고마워요."

스테이크를 중심으로 빵과 과일 샐러드가 나왔다.

그다지 고급스러운 식당은 아닌지라 격식을 차리진 않았지만 양이 푸짐하다는 점에서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스테이크가 미리 썰어져서 나온다는 점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칼질하는 수고를 덜었군.

주저 없이 포크를 든 나는 고기부터 찍었다.

빵은 나중이었다.

나는 평범한 육식선호자였다.

[마스터!]

[음,말해.]

[안경이랑 목걸이,맞나요?]

[목걸이?안경은 맞는데.]

[한 명은 이상한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요?]

나는 에쉬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나 되짚어보았다.

감색 가죽 셔츠에......

아,문득 에쉬의 목에 돌을 칼 모양으로 깎아낸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행자들은 행운을 비는 뜻으로 칼이나 동물의 이빨 모야으로 조각한 돌을 목에 걸고 다녔는데 남자들 사이에서는 직위를 막론하고 흔한 것이었다.

물론 귀족들은 보석이나 희귀한 돌을 사용하지만.

[그래,맞아.근데 그 목걸이가 왜?]

[마법이 걸려 있어요.아마도 변화 계통의......]

변화 계통?

라이는 마법 아이템,그중에서도 돌이나 보석에 걸린 마법에 민감했다.

에쉬가 얼굴을 바꿨다면 그 수단은 마법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직접 거는 것이 아니라 마법 아이템을 이용할 거라고.

직접 마법을 걸었는데 마법을 건 마법사가 죽기라도 했다간 마법 헤제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기에 돈이 들더라도 마법 아이템 쪽이 여러모로 안전했다.

황실에 마법 아이템이야 널려 있을 테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군.그 목걸이가 변화 수단이었나?

[셀프 폴리모프 같은 마법일 거야.신경 쓰지 말고 염탐이나 잘해.]

[걱정 말고 맡겨주세요,마스터!염탐은 제 특기니까요.푸헤헤헷.]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라이?

잠시 물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라이가 할 줄 아는 게 많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도 이익이 되니까.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는데?]

[음,'저 여자 왠지 수상합니다.아무래도 첩자가 아닐까요?'라고 하는데요.]

흐음,역시 내 얘기를 하고 있잖아?

하긴 중요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걱정이 많기는 하겠다.

[그 얘기한 건 안경이지?]

[넵,그리고 목걸이는 '아이랑 함께 다니는 걸 보니 그건 아닐거다.'라는 군요.마스터 얘긴가요?]

[그래,마저 전해줘 봐.]

계속해서 나를 의심하는 로크스와 너무 과한 생각이라며 다독이는 에쉬의 대화는 조금 언짢은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배가 불러오니 금세 가셨다.

라이가 에쉬와 로크스의 대화를 전해주는 동안 나는 스테이크를 모조리 먹어치웠고 이번에는 손을 옮겨 과일을 집어 먹었다.

말린 과일만 먹다가 과즙이 넘치는 싱싱한 과일을 먹으니 절로 행복해졌다.

[마스터 얘기가 끝난 모양입니다.내려가는데요?]

[그래?일단 기다리고 있어.방을 잡으면 부를게.]

[네,마스터!잊으시면 안 돼요?]

[그래,그래.]

과일을 씹으며 계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먼저 에쉬의 발이 보였고 꼐단을 내려오는 에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뒤를 따라 내려온 로크스와도 눈이 마주쳤다.

에쉬가 내게 뭐라 말을 걸려는 듯 했지만 로크스가 에쉬의 등을 떠밀어 자신들의 식탁에 앉혔다.

혹시 나를 못 봤나,싶을 정도의 무시였는데 내 쪽으로 작게 고개를 까닥인 걸 봐선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로크스는 그 짧은 사이에 나를 경계하는 태도가 더욱 강해졌다.

뭐야,뭐?

내가 국가기밀이라도 캘까봐 그래?흥이다.

로크스의 태도에 조금 심통이 났다.

라이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타국의 첩자 아니면 1황자의 첩자가 아닐까 생각하는 모양이었는데 떠보려고 조금 찌르기는 했지만 너무 과소평가였다.

내가 겨우 첩자나 할 위인으로 보인다니 실망인걸.

이래뵈도 드래곤이랑도 친구사이......아니 보모와 유아사이 일까?

"아니,이게 뭐야?"

문득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가 싶으 슬쩍 시선을 줬는데 '우리 집은 뒷골목이요'하는 듯한 험상궂은 외모의 사내 세 명이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카운터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집은 대체 장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수프에서 벌레가 나왔잖아,벌레가!"

쿨럭

사내드르이 호통소리에 나는 깨끗이 비운 내 수프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어째 맛이 유난히 진한 것이 뭐가 들었나 했더니......

그 맛의 비밀은 벌레였나?

심난한 마음으로 말끔히 비워진 내 수프 그릇을 바라보는데 카운터에서 예의 그 소년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손님?"

잔뜩 당황한 소년의 표정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사내들은 소년이 다가가자 보란 듯이 스프가 반쯤 차 있는 그릇을 소년의 눈 앞으로 내밀었다.

두세 테이블 떨어져 있는 내 눈에도 보일 만틈 커다란 벌레가 스프 위에 동동 떠있었다.

크기로 봐선 바퀴벌레 급이었다.

"무슨 일이긴?벌레에서 수프가 나왔잖아!이것 보라고."

아,벌레 속에 수프가 들어갈 수도 있구나.

어법의 이상함을 느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점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말을 내뱉은 본인도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았고.

한심스러운 눈으로 사내의 손에 들린 수프그릇을 바라보았다.

헌데 뭔가 이상했다.

수프 위에 떠있는 벌레가 너무도 반질거렸다.

삶아서 국물이 빠지면 좀 색이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그럴리가요?저희 주방장님은 첫째도 청결,둘째도 청결을 강조하시는 분이세요.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뭐야?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하,하지만 벌레라니요?절대 그럴 리 없......히익!"

꽈광

바들바들 떨며 말을 잇던 소년이 사내가 한 손을 크게 치켜들자 지레 겁을 집어먹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여기 버젓이 벌레가 헤엄치고 있는데!아무튼 나는 식사 값 못 내니까 그런 줄 알라고!"

벌레가 수영을 해?

아하,그렇게 된 건가?

처음에는 뭔가 했지만 두고 보니 금세 상황의 전모가 보였다.

벌레가 수프 위에 떠있다.

게다가 살아서 헤엄친다.

고로 벌레는 본래 수프에 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 수프가 식탁으로 나온 뒤에 넣어졌다는 뜻이다.

헤에,정말 저런 놈들이 있구나.

음식 값 안 내려고 저런 째째한 짓을 한단 말이야?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사내들이 얕은 수를 쓰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만 몰랐나 보네.

하긴 잘난 척하고는 있어도 여행은 처음이라 말이지.

하지만 나 같으면 벌레를 챙기느니 돈을 내겠다.

"네에?다,다른 음식은 다 드셨는데요.수프만 바꿔드리면......"

"바꿔오면 뭐해!벌레 넣고 끓인 수프가 그게 그거지!나 보고 벌레 우린 수프나 먹으라는 거야,뭐야?"

그럼 난 벌레 끓인 수프 먹었니?

오늘 거참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왜 이렇게 많니?

일행인 듯한 사내들이 곁에서 맞장구를 치며 소년을 밀어붙였다.

"맞아,맞아,우릴 뭐로 보고!"

"마음 같아서는 손해배상도 청구하고 싶지만 쥐꼬리만 한 식당이라 봐주는 거라고!고마운 줄이나 알아!"

수프 한 그릇 손해배상 청구해서 뭘 떼먹겠다는 건지......

내가 조금 만 더 정의감이 투철했다면 나서서 도와줬을지도 모르지만 나느 굳이 따지자면 정의감이 없는 쪽이라서......

통성명도 안 한 사람을 위해 나설 만큼 착해 빠지지 못했다고.

"시끄러워."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구석에 자리한 사내였는데 나서지 않았다면 몰랐을 만큼 존재감이 없는 녀석이었다.

아니 기척을 숨기거 있었던 걸까?

"뭐어야?지금 우리한테 한 말이냐?"

"이게 미쳤나?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까부는 거야!"

"더럽기는......벌레만도 못한 것들이......쯧."

저 사내는 착해서라기보다는 나보다 성격이 더 못되어서 자신의 곁에서 소란 피우는 꼴이 아니꼬운 것 같았다.

검은 후드를 쓴 사내가 한껏 그들을 비꼬았고 그가 말끝에 혀까지 차자 험상궂은 사내들은 화가 났는지 검은 후드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네 녀석이 우리가 누군지 몰라 그러나 본데,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래!목숨만은 살려주마.대신 떡이 되도록 맞아야 할거다."

"그뿐인가?가진 돈도 다 내놔야 할걸.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흐음,내가 보기에는 댁들이 어서 도망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잠자코 턱을 괸 채 그들을 주시했다.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저 세 명의 사내는 이 근처에서 알아주는 깡패인 듯 싶었지만 내 는에 비친 그들은 검은 후드의 사내에 비하면 뒷골목 똥개와 별반 드를 것이 없어 보였다.

아니,벌레보다도 못하다고 했으니 그마저도 아까웠다.

그에 반해 검은 후드의 사내는 뭔가 음침한 기운이 솔솔 풀기는 녀석으로 내 흥미를 자극했다.

[마스터,아직인가요?저 심심해요.]

[음?그럼 조용히 들어와 봐.재미있는 일이 있거든.]

라이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말을 걸어왔고 나는 라이가 아직 뱀의 모습이라는 점을 떠올리곤 라이를 불러들였다.

늑대라면 안 될 말이었지만.

늑대는 덩치가 큰 만큼 탑승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대신에 휴대가 불편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한마디로 눈에 띈다 이거다.

[오오!당장 기어가겠습니다요,마스터.]

라이의 다댑이 끝나자 다시 관심을 사내들에게로 돌렸다.

내가 정령사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속성을 띤 마나나 기운에 유독 민감했다.

정령마다 각기 풍기는 기운이 다르듯 인간 또한 그랬기에 주변에 강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아카데미 안에서 그런 능력은 점점 예민해졌다.

공격 계열 검사의 검기가 붉은색을 띠듯 그 검사의 기운은 사납고 날카롭다.

반대로 방어계열의 검사는 안정적이고 절제된 기운을 가지고 있다.

보통 일정 수준 이상의 검사나 마법사는 일정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에는 보는 것만으로 대충 마법사인지 검사인지 정도는 알 수있었다.

헌데 저 검은 후드의 사내의 것 같은 검고 음침하며 무질서한 기운은 나로선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뭐하는 녀석이지?

"왜 말을 못하나?쫄은 모양이지?크하핫!그러게 어줍지 않은 정의심 같은 건 내세우질 말았......커헉!"

"겁 많은 짐승일수록 시끄럽게 짖는 법."

위험하다는 내 예상대로 점은 후드의 녀석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깡패 녀석 중 하나의 목 줄기를 잡아 쥐더니 자신의 덩치만한 사내를 가볍게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두 손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대단한 힘이었다.

검은 후드의 소매 사이로 언뜻 손목의 힘줄이 불끈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대 희한하게도 사내의 피부색은 그의 후드 색만큼이나 어두운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얼핏 실버 울프족의 피부색이 떠올랐다.

전원이 하나같이 갈색 피부.

에이니를 제외한 모든 일족이 그렇다고 했다.

저자도 코란의 원주민 중 하나인 것일까?

짙은 회색빛 사내의 손목이 움찔거릴수록 그의 손에 잡인 깡패 녀석은 더욱 발버둥을 치며 눈을 뒤집었다.

곁에 있던 다른 일행은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할 뿐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대항할 생각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바보 같긴......

"커거걱.끄아악!"

그나저나 허공에 든 채로 사람 목을 조르는 게 가능하구나.

나한테는 무리였다.

근력도 달리고 키도 작으니 말이다.

"자,선택해라.꺼질테냐?"

"끄흐으윽."

"아니면 죽을 테냐?"

검은 후드의 사내는 매우 신경질적이었는데 그런 그의 물음에 깡패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을 졸리고 있으니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문득 과거 레오와의 결투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말을 못하는 레오에게 대신 건틀릿을 벗으라고 했다.

당시 건틀릿을 벗던 레오의 분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후훗,그러게 사람을 봐가면서 덤벼야지.

하지만 나는 그때 살의는 없엇다고,지금 저 녀석은 정말 살의가 있어보이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