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71)

어두운 골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골목 안에 있는 자들은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 사내와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사내였다.

"역시!이것 보게 잭,진짜 보석이야!떼다 팔기만 해도 족히 1년은 놀고 먹겠어!"

"설마 했는데......그걱 그렇고 그 여행자도 정말 바보 같지 뭐야?이런 비싼 물건을 보란 듯이 등에 메고 다니다니!"

머리가 하얀 사내가 큼직한 보석이 보기 좋게 박힌 검을 살펴보며 환희에 차 소리쳤고 잭이라 불린 사내는 모자를 벗어내며 바보 같은 여행자를 비웃었다.

그 둘은 모두 30대 초반 정도의 비슷한 연배였다.

"보아 하니 옷이랑 신발이 새것이더라고.초보 여행자......아니,그보다는 가출한 귀족 아가씨일지도 모르지."

"아가씨?여자였어?"

의외라는 듯 잭이 되묻자 하얀 머리의 사내가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목소리를 들어보니까 젊은 여자더라고!성격은 정말 더러웠지만."

"우리가 이 짓을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인분장까지 했는데 그렇게 박한 여행자는 처음이었어. 그래도 노인이 구걸을 하는데......정말이지 여차하면 패겠던걸."

"흥,고작 여자가 패봤자지!아프기나 하겠어?"

"노인에게는 아플지도 모르지!크큭."

두 사내가 한껏 히죽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의 중심에는 오늘의 전리품인 화려한 검이 있었다.

문득 머리가 하얀 사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염색까지 한 보람이 있는걸.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했는데 말이야."

"후훗,모름지기 사람이란 어린아이와 노인에게 약한 법이지.우리가 어린아이 분장을 할 수는 없으니 노인분장을 해야 하지 않겠어?특히 네 녀석 같은 노안은 더욱 노인 분장이 어울리고 말이야.그 증거로 이렇게 성공했잖아!"

잭이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에 하얀 머리의 사내 또한 덩달아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그뿐인가?내 연기력이 훌륭했던 탓도 있지!"

"그러게 말이야!네놈 다리 떠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더군.크하하.응?"

한껏 허리를 젖히며 웃어재끼던 잭이 문득 웃음을 멈추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잭?"

"아니,방금 적 하늘 위에서 뭔가 푸른 것이 떨어졌는데?"

"푸른 것?그게 뭐지?"

"글쎄,뭔가 이렇게 하늘하늘한 것이 떠 있더니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하던 잭과 잠자코 듣던 하얀 머리 사내는 문득 '타다닥!'하는 사람 발소리에 몸을 굳혔다.

잭이 황급히 숨을 죽였다.

"쉿!"

타닥

타다닥

한 사람이 아닌 듯 연이어 들려오는 발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그들이 자리한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그들은 잔뜩 긴장한얼굴로 골목 입구를 돌아보았다.

설마 벌써 꼬리가 잡혔나,하는 불안한 마음에서였다.

밝은 바깥을 등지고 입구에 서 있는 것은 여자치고 제법 키가 컸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는 젊은 금발의 여성과 커다란 덩치의 누렁이 한마리였다.

발소리 주인을 마주본 잭과 하얀 머리의 사내는 잠시나마 들었던 긴장감을 지워버렸다.

오히려 고작 젊은 여자와 개 발자국 소리에 놀란 것이 민망한 듯 너스레를 떨었다.

"뭐야?깜짝 놀랐네."

"그러게 말이야.저건 왠 똥개래?"

긴장했던 것을 티내지 않으려는 듯 하얀 머리의 사내가 큰 동작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던 중 손에 들고 있던 검이 문득 입구에서 들어온 빛줄기에 반짝 빛을 냈다.

그에 따라 입구에 서 있던 여자의 눈이 따라 빛났다.

허공에 가득 흩날리는 자신의 금발을 신경질적으로 치워내며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놔!"

"아르르르."

곁에 있던 개가 사납게 목을 울렸는데 하얀 머리 사내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여자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검 내놓으라고!"

"아르아르릉"

하얀 머리의 사내는 그제야 갑자기 나타난 저 여자가 아까의 후드 차리므이 여행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조심스레 잭에게 속삭였다.

"잭!아까 그 여자야."

"뭐?어떻게 여길......!"

잭이 놀라 소리쳤다.

자신들이 있는 곳은 외진 골목으로 검을 훔쳤던 광장에서는 빙글빙글 돌아오지 않으면 올 수 없는,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곳 미엘타에 사는 주민들도 헤멜 정도로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야 했기에 비밀장소로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당장 내 검을 내놓......"

여자가 사납게 인상을 쓰며 종용했지만 잭과 하얀머리사내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들보다 세 보이거나 치안대라도 끌고 왔다면 항복했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고작 여자 하나에 개 한 마리!

"튀어!"

잭이 짧게 소리쳤고 둘은 동시에 어두운 골목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들은 도둑답게 제법 자신들의 발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젊은 여자와 개에게 잡힐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 했다.

"잡아,라이!운디네,너도!"

잭과 하얀 머리 사내가 이 골목을 나가는 대로 서로 반대쪽으로 도망가자는 계획을 눈으로 주고 받는데 문득 하얀 머리 사내가 '철푸덕!'바닥에 쓰러졌다.

"우앗!"

누런 개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따라와 그의 바짓단을 물고 늘어진 것이지만 하얀 머리 사내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다만 꼴사납게 바닥을 기었다.

마침 눈길을 주고받고 있던 잭은 그가 왜 쓰러졌는지 알았다.

허나 발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빠르게 뜀박질을 했다.

저 누런 개가 그를 물고 있는 동안은 자신을 따라 오지 못할 테고 개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처음 나타났던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기에 그대로 도망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가 작게 동업자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전에 그 또한 무언가에 발이 잡혀 바닥에 넘어져야 했다.

"미안하다,친......쿠악!"

그는 넘어지는 동안에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발을 붙든 이 물컹물컹하고 차가운 것은 무엇일까,하고.

잭은 자신의 이마와 땅이 만나는 강렬함에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넘치는 호기심에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를 온통 감싸고 있는 투명하고 물컹거리는 것을 보고 잠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게 뭐지?

"이리 끌고 와."

그릐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연히 들린 여자의 목소리에 잭의 다리를 붙든 투명하고 물컹거리는 그것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런 개에게 잡힌 하얀 머리 사내도 마찬가지엿다.

"억! 내 코!터,억!이마,크악!"

"크억!카오!크어!럭!"

골목 바닥에 즐비한 모난 돌덩이에 턱이며 이마 콧등이 사정없이 까였지만 누런 개는 물론이고 잭을 붙잡은 정체불명의 생명체 또한 그들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자잘한 돌멩이가 박혀 흡사 터진 딸기같은 형상을 만들어 냈을 즈음 그들은 예의 그 금발 여자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등을 커다란 개가 발로 꽉 누르고 있었는데 힘이 어찌나 센지 등뼈가 빠개질 것 같았다.

"검!"

바닥에 널브러진 그들은 내려다보며 여자가 용건을 내뱉었고 하얀 머리 사내가 잭에게 '어쩌지?'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쩌긴?얼른 돌려드려!"

그에 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얀 머리 사내가 인중을 한껏 늘리며 마지못해 품 속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그 검이 모습을 다 보이기도 전에 여자의 손이 검을 채갔다.

"진작 내놓을 것이지.돌아가,운디네."

여자가 작게 읊조리자 잭의 옆에서 몰캉몰캉 움직이던 물덩이가 퐁하고 터지며 사라졌다.

그제야 잭은 사냥감을 된통 잘못 찍었구나,하필 마법사를 건드리다니,오늘 운발이 더럽게 없구나,생각하며 힐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매우 젊은......아직은 앳된 기가 조금 남은 얼굴이었는데 문득 잭과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눈치 하나로 여태껏 먹고 살아온 잭은 잽싸게 큰 절을 하며 말했다.

"아이고!죄송합니다,마법사님!저희가 감히 마법사님도 못 알아 뵙고......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앞으로......크억!"

상대는 자뻑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법사니 조금만 떠받들어주면 풀어줄 거라 생각했던 잭은 갑작스레 자신의 턱을 강타하는 고통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재차 찾아온 고통이 그의 허리를 짓눌렀다.

"누가 마법사야?누가?이게 누이 뒤통수에 달렸나......"

연달아 이어지는 여자의 발길질에 잭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보호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마법사가 아니면 뭐지?

교묘하게 아픈 데만 골라 때리며 때린 데 또 때리는 솜씨를 보니 격투가?

하지만 마법을 썼으니 그건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퍼뜩 떠오른 생각에 그는 황급히 여자의 발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잠깐!알았어요.마법사가 아니라 몽크!몽크시죠?네?몽......아니세......크악!"

"에라,이 라이 같은 놈아!"

다시 날아오기 시작한 발길질은 이제 몸을 웅크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고,무언가 못마땅한 듯한 개의 신음이 아련히 들려왔다.

"끄으응."

검을 되찾은 나는 우전 광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디네를 소환했다.

명령을 내리려는데 문득 운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저건 뭔가요,주인님?]

"응?뭐?"

[저기......구석에 쌓인 거요.]

"응?아아,아까 그 소매치기 녀석들이야."

운디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구석에 쓰러져 있는 소매치기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얼굴이 잔뜩 부어서 못 알아보는 모양이다.

[그렇구나.근데 왜 머리카락이 없어요?]

"하얗게 염색하고 노인흉내를 내기에 내가 싹 밀어줬지."

칼 솜씨가 좋지 못해서 빡빡 밀어버리지 못한 게 유감이지만.

[얼굴은 왜 저렇게 흉해요?]

"죗값을 치른 거지."

[맞아요,맞아.감히 저더러 똥개라고 하다니,죽지 않은 게 다행이죠.]

라이가 맞장구를 치면서도 똥개 소리를 들은 것이 분한지 이를 갈았다.

분명 처음에는 늑대였지만 털색이 황금색으로 바뀌면서 누렁이,그러니까 똥개가 되어버린 비운의 라이.

안 되긴 했지만 어쩌랴,그것도 제 운명인 것을.

"그보다 길을 찾아줄래,운디네?성문이 있고 분수가 있는 광장을 찾으면 돼."

[네,주인님.]

고개를 끄덕인 운디네가 쉬잉하는 잔물결 이는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고공비행은 운디네의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마나만 따라주고 운디네가 노련하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일단 운디네가 하늘로 올라가 전방을 둘러보고 기를 발견하면 나는 운디네를 따라가면 된다.

이것은 제법 괜찮은 방법으로,이 방법으로 사기꾼 녀석들도 찾아냈다.

머리를 햐얗게 염색한 녀석 때문에 손쉽게 찾아냈지 아마?

나는 검을 찾기 위해 처음에는 라이에게 소매치기 녀석들의 냄새를 맡으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 라이가 새로 변신할 수는 있어도 날지 못하는 것처럼 늑대의 겉모습만 흉내 냈지 늑대의 후각 능력 같은 것은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사실만 새삼 깨달았다.

코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찾았니?"

[으음......아,찾았어요,주인님!저쪽이에요.]

저 멀리 공중에서 운디네가 손으로 광장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지만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그 방향으로는 커다란 건물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그쪽이로 통하는 길을 찾아봐!"

[이쪽이에요.]

운디네가 뽀르르 날아 비행 방향을 바꿨고 나와 라이는 그런 운디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고 있었기에 하늘에 떠 있는 운디네의 모습은 꽤나 또렷이 보였다.

어떻게 찾아갔을까 싶을 만큼 미로 같은 골목들을 돌고 도니 조금 눈에 익은 길이 나타났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골목을 나가 오른쪽으로 가면 광장일 터였다.

"여긴 아까......"

[아까 지나갔던 길 같은데요?그렇죠,마스터?]

"응,그러네.운디네!"

[네,주인님.]

내 부름에 운디네가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런 운디네의 투명한 몸을 석양빛이 투과하고 있어서 언뜻 운디네가 붉게 보였다.

"이만 돌아가봐.수고했어,운디네."

[제가 할 일인걸요.그럼 또 뵈요,주인님.]

운디네가 싱긋 웃으며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운디네의 천진한 웃음은 내 작은 행복이었고 이제 말도 능숙하게 구사해서 더욱 만족스러웠다.

[저게 또 마스터한테 꼬리를 치네?제 나이를 생각해야지!]

그런 운디네를 항상 못마땅해 하는 라이가 곁에서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는데 아마도 내가 운디네를 유난히 귀여워하는 게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덩치가 송아지만한 라이보다야 작고 귀여운 운디네를 잘해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운디네 나이를 가지고 뭐라 하는데,제나이는 까먹은 모양이었다.

"너나 잘해."

내 질타에 라이가 가뜩이나 길쭉한 주둥이를 더욱 늘리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삐졌다는 뜻이다.

제가 삐져봤자지.

그런 라이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역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는지 골목을 지나가 예의 그 광장이 보였다.

작은 분수대와 커다란 성문,그리고 노점상들!

하지만 에이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이 기다려주리라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에이니를 맡길 때만 해도 나는 그들이 어디 있는 찾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름 밑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라이의 콧구멍,아니 후각.

늑대의 뛰어난 후각을 믿었건만 그 기대는 출발하기 무섭게 산산히 깨져버렸다.

녀석의 코는 말 그대로 폼으로 달려있었던 것이다.

라이로 하여금 냄새로 소매치기 녀석들을 찾게 하고 그 뒤에는 에이니도 찾을 생각이었는데......

내 꿈이 너무 컸던 탓일까?

라이가 도움이 안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라이도 놓고 가는 편이 나을 뻔했다.

라이야 어디 있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에이니 행방불명!

나쁜 녀석들 같지는 않았으니 어디선가 잘 데리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운디네에게 찾게 하려고 해도 건물 안에 있다면 찾을 수 없기에 소용없는 짓일 터였다.

터벅터벅 분수대로 걸어가 테두리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오늘은 무슨 마가 끼었는지 하루 종일 뭔가를 잃어버리기만 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에이니를 깜빡 잊고 숲에 놓고 온 것,두 번째는 에이니와 돈 주머니를 함께 놓고 온 것,세 번째는 검을 도둑맞았고 그리고 네번째로 순전히 내 판단 미스지만 에이니를 잃어버리고 말이다.

녀석을 어떻게 찾는다..

[마스터,그런 울보 꼬맹이 따윈 버리......]

"안 돼."

[쳇!]

나도 마음 같아서는 어디 맡겨버리고 싶지만 책임지고 데려온 것을 어쩌겠는가.

지지든 볶든 일단 데리고 다녀야 했다.

아카데미까지만 가면 그 뒤에는 이엘 스승에게 슬쩍 맡겨버리고.우후후.

"저기......"

내가 나름 무책임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12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낯선 소녀였다.

손에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꽃 파는 아이 같았다.

"꽃이라면 필요 없는데."

"아니요.그런 게 아니라......어떤 여행자 분이 누런 개와 함께 있는 금발의 여자분을 보거든 이 쪽지를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옅은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가 볼을 붉히며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 같았다.

종이를 받아든 나는 아이가 장사를 하려는 줄 알고 차갑게 말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랬구나.고마워!감사의 뜻으로 꽃을 살게."

"저,정말요?감사합니다!이쪽은 15쿠퍼구요,이쪽은 20쿠퍼에요.어느 꽃으로 드릴까요?"

꽃바구니를 가리키며 꽃을 사겠다고 하자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꽃의 가격을 이야기했다.

그런 소녀의 웃음이 왠지 운디네와 닮아,나는 나도 모르게 흐뭇해져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부."

"네에?"

"전부 달라고.바구니 채로 팔아도 좋고."

"저,전부요?"

소녀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고 곁에 있던 라이도 가뜩이나 큰 눈을 껌벅거렸다.

[마스터,먹지도 못 하는 걸 왜 그렇게 많이 사세요?]

식량지상주의,정확히는 금속지상주의인 라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뭐 어때?싸잖아.]

[겨우 그런 이유로요?]

[음 그리고......]

[그리고?]

라이가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렸다.

제법 귀여운 모양새였다.

[이 여자애가 귀여워서.후훗.]

[앗!라이벌입니까?]

[됐으니까 돈이나 뱉어.]

바구니를 포함한 꽃의 가격은 10실버 20쿠퍼.

그리고 그 꽃바구니는 라이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예상 외로 라이와 꽃바구니는 제법 잘 어울렸는데 라이 본견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계싼을 마친 나는 종이를 펴보았다.

종이에 적힌 것은 여관이름 같았는데 그 여관에 있겠다는 뜻이리라.

그보다......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어디였더라?

잠시 익숙한 여관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혹시 이 여관 어딘지 아니?"

내가 건네준 돈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소녀가 그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얘,얘,그러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다.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가 부산스레 손을 놀리며 대답했다.

"네?아,이 여관이라면 저쪽......아니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가자,라이."

분수대에서 일어난 나는 검을 잘 챙겨들었다.

중요한 소품 겸 뇌물이니 말이다.

[......이거 꼭 제가 이렇게 달고 가야 하나요,마스터?]

여전히 언덩이를 땅바닥에 붙인 라이가 물었고 나는 슬쩍 꽃바구니를 쳐다보았다.

라이의 머리보다도 큰 바구니에 빨갛고 노란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럼 내가 들으리?난 꽃바구니가 안 어울린단 말이야.]

[단지 들고 가기 귀찮으신 것 아니에요?]

이 녀석이 조금 컸다고 이제 내 속을 들여다보네?

나는 조금 뜨끔했지만 지난 9년 간 연마해온 안면굳히기를 발휘해서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다.

"으흠,그럼 가 볼까?"

"네,이쪽이에요."

소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피곤하네.노숙은 오래할 게 못 되는구나.

[마스터!마스터,바구니는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목에 꽃바구니를 매단 라이가 애처롭게 나를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제가 아쉬우면 따라올 테지.

역시나 내가 열 걸음도 채 떼지 않았을 때 라이가 슬금슬금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꼬르르륵

잊고 있었던 허기가 다시 찾아왔다.

에구,일단 푹 쉬어야 겠다.

소녀를 따라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늘은 이제 검게 물들어 미약하게 별이 빛났는데 나는 그제야 여관의 간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중급 정도의 여관이었는데 비교적 작은 건물이었지만 외관이 깨끗하고 아담한 맛이 있었다.

식당도 같이하려나?

그렇지 않으면 곤란한데.

"저 여관 식사도 나오니?"

"아,네.저렴하고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에요."

"호오......"

그거 아주 마음에 드는걸.

"저어......저는 이만 가볼게요.정말 감사했습니다."

[가버려!가!가란 말이야!에비!]

"그래,수고했어."

쓸데없이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라이를 뒤로한 채 소녀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나는 여관으로 다가갔다.

크고 선명한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미엘타에서 생긴 일'

역시 익숙한 이름이라는 생각하며 여관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갓 구운 빵 냄새가 코끝을 스쳐갔고,그 뒤를 이어 고소한 수프 냄새가 풍겨왔다.

안에는 식탁이 배열되어 있었고 드문드문 사람도 앉아있었다.

하나같이 여행자같았는데 대부분이 식사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더욱 배가 고파왔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작게 울리자 카운터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15세 정도 되어 보이는 활기찬 소년이었다.

"어서 오세요!숙박하시려고요?아니면 식사를......?"

자잘한 주근깨가 어울리는 소년은 말하는 투도 시원시원했고 웃는 모양도 보기 좋았다.

서비스직이 천직인 것 같았다.

"일단 식사요.그리고 먼저 온 사람이 있을텐데?"

"먼저 오신 손님이요?일행이신가요?"

에이니만 일행이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절차가 복잡해질 터였기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행이에요.남자 3명과 어린 여자아이 하나."

"아아,그분들이라면 이제 내려오실 거에요.식사를 주문하고 올라가셨거든요."

힐끔 카운터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도 밑에서 기다려야겠다.

"그래요?그럼 내 식사도 함께 내줘요."

"예,알겠습니다.식사는 어떻게 드릴까요?"

"고기가 든 것으로."

"고기라면 B코스로 드릴까요?스테이크를 기본으로 수프와 갓 구운 빵 두개,샐러드와 과일이 나와요."

소년의 설명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테이크,스테이크......

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냐!

말린 과일과 육포만 먹은지 보름,아니 납치된 순간부터 하면 한 달하고도 보름이었다.

마기와 있을 때도 식사가 육포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먹고 싶은 거야 많지만 우선은 고기지.

"쓰읍......곱빼기."

"네?"

"곱빼기!"

"그,그게 뭐죠?그런 음식은 없는데요."

아참,잠시 오랜만에 먹을 고기에 눈이 멀었던 모양이다.

이미지 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마스터,미쳤어요?]

"으흠......스테이크는 라지로 부탁해요.바짝 익혀서."

난 피 빨아 먹는 취미는 없었다.

이래 보여도 내가 제법 섬세했다.

"네,B코스에 스테이크는 바짝,라지로요.더 필요하신 것은?"

"아,이 개 좀 마구간에 쳐박아줄래요?"

[마,마스터,왜요?]

[미쳐서 그런다,왜?]

그러게 말을 잘할 것이지,흥!

소년의 손에 죽지 못해 끌려가는 라이를 향해 나는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화사한 미소와 함께.

라이는 꽃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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