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71)

"......라이?"

[네?왜요,마스터?]

라이가 여전히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아,어떤지 뒤가 찝찝하다 했더니......

"뭔가 허전하지 않니?"

[아,아뇨.저,전혀요!]

나는 내 뒤에 있어야 할 은발 소녀가 없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라이 녀석 서두르더라니......

"라이이이!"

잔머리하고는!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크헝!그,그럼 싫은 걸 어떡해요?]

"그래도 그렇지!애를 놓고 와버리면 어떡해?"

라이의 등에서 내린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라이의 귀를 잡아 뽑을 기세로 당기며 화를 냈다.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해도 될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는 것 아닌가!

비록 정령이라지만 너무 계념이 없잖아!

[마스터도 깜빡하셨으면서!그리고 혼내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그랬어?네가 멋대로 와버린 거잖아.아아악!"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라이의 머리에 일명 '주먹 돌리기'를 시전했다.

꽤나 간편하게 고통을 줄 수 있는것으로 라이 외에 페로나 이로에게도 징벌용으로 쓰였었다.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각기 양 주먹의 손가락이 접힌 뾰족한 부분을 양쪽 귀와 이마의 사이에 놓고 강하게 누르며 돌리면 되는 것이다.

크게 돌리는 것보다 한곳에 집중하여 작은 원으로 돌리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고통을 줄 수 있었다.

[끄아아악.끄에엑!마스터!끄엑!]

"내가 잔머리 쓰지 말랬지?"

이어서 양손의 손톱을 바짝 세워서 라이의 머리를 사정없이 찌르며 힘을 가했다.

얼핏 두피마사지와 비슷하지만 손톱을 세우고 사정없이 무차별적으로 개념없이 찌른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것이다.

게다가 두피마사지와 달리 긍정적 효과 같은 건 없다.

[끄에에에.아,마스터 거기......아이잉!]

물론 간혹 라이와 같이 긍정적 효과를 보이는 녀석도 있긴 하다.

라이는 희한하게도 최는 들어 고통 이외에 감각에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그것 또한 계약하진 내 능력의 상승에 따라 상승되는 라이의 능력 중 하나였다.

바로 감각을 조정하는 것!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감각만을 열 수 있다고 하니 부러운 능력이다.

전에는 무감각이었지만 지금은 감각을 조종하는 것이니 분명 그 경지가 달랐다.

모든 감각을 지배하게 되면 나중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겅지까지도 도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경지는 매우 고도의 경지이리라.

"에잇!관둔다!관둬!"

[아흐응.마스터,요기.요기 한 번만 더 눌러주시면 안 되나요?]

라이가 큼지막한 손에서 손톱을 길게 빼 정수리를 가리켰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배알이 잔뜩 꼴렸기 때문이다.

"안 해!"

[마스터,그러지 마시고 딱 한 번만요.]

"좋아,고통도 함꼐 연다면 생각해보지."

라이가 유일하게 열지 않은 감각,고통!

세상 그 누구도 감각을 조절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닫는 감각은 바로 고통일 것이다.

나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에 라이가 평소 고통이라는 감각을 닫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아까처럼 갑작스레 칼을 맞는 상황에서 유익하기 때문이다.

일일이 고통을 느낀다면 라이 같은 엄살쟁이를 전투용으로는 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그것만은......]

"으이그!됐으니까 당장 가서 에이나나 찾아와!"

만약 라이가 내 잦은 구타에 아픈 시늉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열게 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기껏 감정을 담아 열심히 때려주는데 상대가 아파하지 않으면 열 받지 않겠는가?

[쳇,마스터.설마 저보다 그 꼬맹이를 더 좋아하시는 겁니까?]

"무슨 드래곤 풀 뜯어먹는 소리야?당연히 에이나보다 라이 네가 좋지!"

각종 자동화기기 역할을 하는 라이를 앵앵거리며 울기가 특기인 에이니에 비할 수 있을까?

내 말에 라이가 그 커다란 입을 길게 찢으며 한껏 웃었다.

늑대 얼굴이라서 그런지 조금 음흉해 보였다.

[여,역시 그렇죠?]

"그리고 너보다는 블론디가 좋고,블론디보다는 운디네가 좋지.아,요즘은 페인도 쓸 만하더라."

[커헉!저,저는 몇번째에요,마스터?]

몇 번째?정령 중에서 말하는 건가?음......

"어떤 순서?예버하는 순서?아니면 쓸모 있는 순서?"

[음,둘 다요!]

어디 보자.

예뻐하는 거라면 운디네가 첫번째고 두번째는 운다인,세번째는......엔다이론은 예뻐하지는 않지.쓸모 있기는 해도.그렇다면 세번째는......타잔?치타?녀석들은 아직 익숙하진 않고,그렇다면 세번째인가?

"음,예뻐하는 순서는 라이 네가 세번째."

[고작 세번째입니까?그럼,그럼 찌리 고 녀석은요?]

찌리?아돌을 말하는 거니까,아돌이라......으음,나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아돌과 라이,아돌과 라이......아!

"아돌은 네 번째!페인도 네 번째,타잔과 치타도 네 번째."

[쿨럭!그렇다면 저는 뒤에서 두 번째에요?]

그렇게 되나?라이 녀석도 참!

이왕이면 좋게 생각할 것이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까지야.

좋게 생각해서 앞에서 세번째.그 정도면 중간은 가는데......

슬쩍 라이를 내려다 보니 녀석은 침울해져 있었다.

그래도 첫번째로 계약한 정령인데,너무했나 싶었다.

"음,그렇게 도나?그래도 쓸모 있기로는 첫번째나 두번째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정말요?]

"그럼,라이.네가 제일 쓸모있어!"

[푸히힛,푸헤헤헷.그럼 그렇지.제가 첫 번째이고 말고요!푸히히힛]

아무리 봐도 늑대 모습으로는 통쾌하게 웃든 어떻게 웃든 음흉하게 보였다.

본건,아니 본령은 모르는 것 같지만.

"바보같이 웃지 말고 칭찬해줬으니까 이제 가서 에이니 찾아와."

[......꼭 찾아와야 해요?]

라이의 되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맞고 갈래?"

[흑흑흑.마스터 미워잉!]

라이는 괜스레 훌쩍이는 시늉을 하며 바람과 함꼐 사라졌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어차피 알아서 찾아올 테니 마법사의 탑을 찾아 통신을 하고자 성문으로 들어섰다.

머릿속으로는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짜내면서.

미엘타 입성

마법사의 탑은 이곳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층으로 되어 있다.

그렇기에 도시에서 제일 높게 솟아 있는 건물이 마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자잘한 건물이 아기자기한 도시 미엘타 속에서 유난히 뾰족하게 솟은 마탑을 금세 찾아냈다.

그리고 길치답게 잠시 해매다가 결국 운디네를 불러 마탑에 도착했다.

"수고했어,운디네."

[당연한 일이걸요,주인님.]

9년이 지났음에도 언제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자랑하는 운디네는 여전히 내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 점에서는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라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외무지상주의에 피폐해진 피해자라서 말이다.

"그래,돌아가 봐."

[네!또 뵈요,주인님.]

운디네가 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는 사라졌다.

따라서 손을 흔들어준 나는 이내 마탑의 상징인 육망성이 그려진 원이 커다랗게 새겨진 건물에 다가셨다.

마탑의 문은 활짝 열려있어서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밖에서 보기보다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내관,물론 드미트리의 왕궁 안에 위치한 드미트리 소속 마탑보다야 못하지만 말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프런트로 다가서자 한창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떤 여직원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의 상징으로도 꼽히는 안경을 쓴 다갈색 머리의 여직원이었는데 본인도 마법사인 듯 마탑의 상징이 새겨진 로브 차림이었다.

그녀가 끄적이고 있던 것은 2클래스 정도의 마법수식이었다.

"통신마법을 사용하고 싶은데요."

"통신마법 말씀이시죠?지금 바로 사용이 가능하답니다만......수정구슬의 코드번호를 알로 계셔야 하고요,지역의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라집니다."

머릿속으로 드리케 아카데미와 크로웰 령에 있는 통신용 수정구슬의 코드번호를 떠올렸다.

어느 나라든 각각의 도시에는 수정구슬이 존재하고 있어서 나라에서 급하게 내려지는 지령부터 사적으로 전하는 전언 등을 쌍방향 수신할 수 있다.

일종의 화사아전화랄까?

물론 수정구슬을 가동시킬 수 있는 마법사가 있어야 사용 가능하지만 수정구슬을 가동시키는 정도의 마법은 2클래스만 되도 가능하니 어려운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는 값 비싼 통신수단이 아닐 수 없다.

"코드번호는 알고 있어요.그리고 지역은 드리케 아카데미가 위치한 드미트리의 수도 샤란과 드미트리의 지방도시인 크로웰 령인데요."

"드미트리라면 기본 요금이 1골드 20실버입니다. 수도인 샤란은 통신망이 잘 되어 있어서 연결이 쉽기 때문에 기본 요금만 내시면 되구요.크로웰 령이라면......음,자작령인가요?아니면 백장령?"

1골드 20실버?돈을 주고 통신을 이용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비싼지 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반 평민들의 한달 평균 수입이 1골드니까 비싼 거겠지?

"아,크로웰 백작령이에요."

"어디 보자.크,크,크......음?크렐 백작령은 있어도 크로웰 백작령은 없는데요?"

"네?그럴리가요.분명 있을텐데?"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만......크로웰이 맞습니까?백작령은 확실하구요?"

틀릴 리가 없는데.

순간 이 여직원이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초면인 나에게 그녀가 거짓말을 해서 이득을 볼 것은 없었기에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대신 나는 다른 가설을 세웠다.

"아,전에는 남작가였는데......혹시 크로웰 남작령을 되어 있지는 않나요?"

"음,남작령은 굉장히 많아서요.잠시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여직원이 프린트 안 쪽에 만들어진 서랍들을 뒤적였다.

어차피 코드번호는 알고 있으니 연락하는 데 문제는 없겠지만 거리에 따라 요금이 틀려지기에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하는 모양이었다.

흠,이렇게 보니 마탑도 일종의 장사로군.

"어이!뭘 찾는 거야?"

서랍장 뒤에서 남성 직원이 걸어나왔다.

서랍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드미트리의 남작령을 찾고 있어요.크로웰 남작가라고......혹시 아세요?"

남성 직원이 조금 더 경력이 있는지 여직원이 물었다.

"크로웰?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저도 들어본 것 같긴 한데요."

여자는 손을 멈추지 않고 연신 서랍을 뒤적였고 남자는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문득 뭔가 생각 난 듯 손뼉을 쳤다.

"아!얼마 전에 수정했잖아!원래는 백작령인데 이번에 후작령으로 승급된......!"

"아아,맞다!후작령으로 바뀌었죠?"

......응?

난데 없이 왠 후작령?

나 없는 사이에 로또 맞았나?

아니지 로또가 있을 리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후작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후작령이요?"

"네!바로 일주일 전쯤에 승급되었는데......모르셨어요?"

대략 한달하고도 이십 일 쯤 전에 납치되어서 말입니다요.

갑자기 후작령이 될 이유가 없는데?

늙은 아버지는 귀족회의도 안 나가는 사람이니 아니고,제라스 오라버니가 뭐 공이라도 세웠나?

아니지.왠만한 공으로는 단번에 후작령이 되진 않을 텐데?

역시 뭔가 자료가 잘못된 건가?

"몰랐는데요.그 자료 잘못된 것 아닌가요?"

"네?아니에요.저희는 신속정확을 추구하는 정부 소속 마탑인걸요.전 공무원이라고요!"

여직원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게 치면 나도 왕궁소속 정령사니까 공무원에 속하나?

"뭐,일단 연락해보면 알겠죠.그래서 총 금액은 얼마죠?"

"아,크로웰 후작령이 여기니까......드리케 아카데미 통신 요금이 1골드 20실버,크로웰 후작령 통신요금이 기본요금 1골드 20실버에 추가요금 38실버 되겠습니다.그냥 40실버 주셔도 되요."

잠시 자와 캠퍼스 같은 것으로 지도 위로 거리를 가늠한 여직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얼굴을 구겼다.

"잠깐,깎아주는 건 봤어도 더 받는게 어디있어요?"

"아이참,손님도......농담이에요.총 2골드 78실버 되겠습니다."

웃기시내.

이봐,돈 너무 밝히면 대머리 된다고!

"진심이 느껴지던데......줬다면 받았겠죠?"

"주신다면 팁으로 알고 감사히 받죠."

"공무원이라면서요?팁 받는 공무원도 있나요?"

"에이,공무원은 사람 아닌가요?"

아아,급격히 피곤해지려고 한다.

이런 뻔뻔한 유는 왠지 이루제를 떠올리게 해서 불편하단 말이지.

나는 얼른 계산하고 통신을 할 요량으로 돈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찾아 허리께를 더듬었다.

분명 여기쯤......으음?

"앗!"

으악!

주머니는 보석과 함께 에이니에게 있지,참!

정령석을 갖고 있겠다면서 넣을 데가 없다길래 주머니째 줘놓고는 잊고 있었다.

어차피 옆에 붙어 있을 녀석이라 줬었는데,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젠장,라이도 없는데.

돈 나올 구멍은 제로라고!

"저어......손님?"

여직원이 실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한 쪽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의 끝을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였다.

돈을 뜻하는 제스처.

그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오호호홋.잠시 실례......"

도망치듯 마탑을 뛰쳐나온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멍청이!바보천치!

스스로에게 한껏 비난을 던져봤지만 더욱 민망할 뿐이었다.

에이니에게 돈주머니를 맡겨놓고 새까맣게 잊다니.

돈쓸 일이 없었기에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항상 곁에서 걸어 다니는 전용 은행 라이가 있었기에 전혀 위기감을 못 느낀 탓도 있었다.

일단 나는 성문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돈,아니 라이와 에이니를 기다릴 요량으로.

길치이기는 하지만 나름 훈련해온 머리가 있는지라 더듬더듬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니 이윽고 저 멀리 커다란 미엘타의 성문이 보였다.

중간에 작은 분수대가 있어서 광장 용도로도 쓰이는 모양이었고 제법 노점상이 즐비했다.

대부분 각종 부족들의 토산물이나 희한한 먹거리들이었다.

꼬르르륵

으윽.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배에 힘을 주며 최대한 굶주림을 가려 보려 했지만 소리가 워낙 커서 말이지.

힐끔,주변 행인들이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써야 했다.

천하의 지니 크로웰이 돈이 없어 굶주리고 있어야 하다니......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내가 배고픔에 몸부림치고 있는데 내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여행자님,부디 1쿠퍼만 적선해주십쇼."

내가 채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

늙고 힘없는 노인의 것이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등이 심하게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노인이 몸을 떨며 죽어가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부터 동정심 넘치는 인간이 못되었다.

손발이 멀쩡한데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욕이 튀어나왔고 어딘가 불편한 양 장애를 가장하며 구걸하는 이를 보면 발길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노인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먹고 죽으려도 없답니다."

내 직감으로는 이 노인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굽은 등이나 죽어가는 눈에 비해 피부가 지나치게 좋았다.

검버섯은 커녕 주름도 없었다.

그리고 몸을 심하게 떨고 있지만 두 다리는 땅 위를 굳건하게 버티고 섰고 손톱이 깨끗한 걸 보니 솜씨 좋은 사기꾼이었다.

내가 조금만 눈썰미가 없었어도 속았을지도 몰랐다.

"그러지 마시고......제발,제발 1쿠퍼만이라도......!"

내 대답에 노인이 다시 애걸을 하나 싶더니 슬쩍 내 쪽으로 쓰러졌다.

자신이 아프다는 걸 과시하려는 듯 휘청이며.

당연히 그런 노인을 받아줄 내가 아니었고 슬쩍 피하려는데 노인은 그 짦ㅂ은 찰나 몸을 움직여 내 다리에 매달렸다.

그 순발력으로 보건대 절대 겉보기만큼 노인은 아닌 것 같았다.

동정심을 높이려고 노인 분장까지 하다니......

요즘 거지들도 먹고 실기 힘든 모양이다.

"없다니까요!"

"아이고!아가씨,제발!"

다리에 달라붙는 노인을 털어내려 했지만 노인은 더욱 매달려 떨어질 기세가 아니었다.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내 목소리를 듣고 여자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더욱 진득하니 달라붙었다.

"......당장 안 떨어져?죽을래?"

이쯤 되니 나도 성격이 나왔다.

그래도 겉모습이 노인이라 적당히 주위를 신경써서 말을 가렸건만,감히 숙녀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내가 눈을 한껏 치켜뜨며 이를 갈자 거지노인이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순발력을 보나 내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힘을 보나 실상은 젊은 사내 같았으니 그 사실을 모르는 행인들은 노인을 박대하는 내 태도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무슨 젊은이가 저리 박하데요?겨우 1쿠퍼 가지고......"

"그러게.요즘 세상 참 무서워!겨우 1쿠퍼에 사람 잡겠네."

"거 사람 낳고 돈 낳지 돈 낳고 사람 낳나?젊은 여행자가 너무하는군,그래!1쿠퍼가 뭐 그래 대수라고."

수군대는 주위 사람들에게 힘을 얻었는재 노인분장을 한 사내가 다시 내개 다가왔다.

"1쿠......"

"맞고 갈래 그냥 갈래?"

내 주먹이 아플리야 없겠지만 내가 주먹을 들어 보이며 협박하자 그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고작 구걸 좀 하겠다고 노인분장하고 다니는 게 용하긴 하지만 나는 구걸을 질색하기도 할 뿐더러 지금의 나는 정말로 먹고 죽으려도 땡전 한 푼 없었다.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가짜노인은 어느 순간 황급히 뒤돌아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갔는데 그 노인답지 않은 빠르기에 행인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런 행인들의 모습에 나는 한껏 콧방귀를 뀌었다.

것 봐,내가 사기꾼이랬지?

근데 뭔가 허전한 건 왜일까?

[마스터!]

"응?"

때마침 저 멀리서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문 쪽을 바라보니 커다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뛰어오는 라이와 그 뒤로 예의 세 명의 사내들 사이에 낀 에이니가 보였다.

내가 깜빡 잊고 버리고 온 에이니를 그들이 챙긴 모양이었다.

이거 고마워해야 하나?

그나저나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라이의 모습은 여지없는 누렁이의 것이었다.

덩치 큰 누렁이.

[마스터,마스터어~]

"늦었네?에이니는 왜 같이 안 와?"

한달음에 내 앞에 선 라이가 며칠만에 만난 것 처럼 반가워했지만 나는 다만 턱짓으로 에이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등에 태워오면 될 것을 왜 따로 오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 등에 타기 싫다고 저 인간들과 같이 온다기에 맞춰주다 보니 늦었어요,마스터.]

"그래?"

에이니라면 그러고도 남지.

저 멀리 보이는 에이니는 라이와 맞붙었던 덩치의 사내에게 꼭 붙어 있었는데 꽤나 사이가 좋아 보였다.

고작 몇 십분 사이에 말이다.

[근데 마스터......]

"응?"

[칼 어디 갔어요?]

"칼?"

라이의 물음에 나는 내 어깨를 슥 짚었다.

검을 등에 메둔 끈이 만져지리라 예상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깨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양손을 뒤로 빼 등을 더듬었지만 분명 끈으로 묶어 등에 메고 있던 검이 만져지지 않았다.

이,이게 어디로 갔지?

[제가 먹고 싶다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시더니!마스터 혼자 드신 거에요?저는 빼놓고?]

"내가 너냐?"

이상하다?

분명 마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등에 있었는데?

마기가 준 검!

신검은 아니어도 보검 급이라던 마법 검!

그렇게 챙기고 챙겼건만......

이게 대체 어딜 간 거야?

애꿏은 후드를 벗어서 털어도 봤지만 검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길에 흘렸나?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데 후드를 벗으면서 산발 된 머리카락이 눈 앞에 흩날렸다.

[엥?그럼요?그 칼 어디 요긴하게 쓸데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

국왕에게 드래곤이 친구의 증표로 준 것이라고 하면서 진상해서 점수 좀 딸 생각이었단 말이다!

뭐,틀린 말도 아니고.

분명 그 검은 마기가 나에게 준 것이었고 마기는 드래곤이니 그 검은 드래곤이 준 선물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왕에게 진상해서 나는 드래곤과 친구사이라는 것을 공표함과 동시에 왕에게 점수를 듬뿍 밭을 계획이었는데에에!

"아악!이게 어디......아아앗!"

참다 못해 악을 쓰는데 문득 방금 전 스쳤던 가짜 거지 노인이 떠올랐다.

그래,그놈!

갑자기 접근해서 왜 그렇게 들러붙나 했더니만......?

[마스터!]

"이 자식!이 사기......아니,도둑놈 자식!이익!당장 잡아서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테다!"

꼬리가 잡히자 연이어 노인분장을 했던 사내의 수상함이 떠올랐다.

갑자기 냅다 도망간 것도 이상했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들러 붙는 것도 다 검을 노려서 그랬던 것이었다.

어쩐지 노인분장까지 하고 다니는 게 구걸하는 데 들이는 공치고는 과하다 했더니만?

[누구요?누구 목이요?저도 갈래요,마스터!]

라이가 곁에서 신이 나는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고,나는 에이니와 함께 있는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에?"

갑작스러운 내 접근에 그들은 당황한 듯 했지만 나는 용건부터 쏟아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데,이 꼬맹이 좀 부탁할게요!"

"에에?"

"에?"

"에에엑?"

세 명이 약속이나 한 듯 단어 없는 괴성을 흘렸다.

나는 다짜고짜 그 가짜 노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서둘러 몸을 날렸다.

"가자,라이!"

물론 라이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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